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시·수필과 함께하는 봄의 향연 - 타오르는 책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9.03.21 16:33:05
  • 최종수정2019.03.21 16:33:05
[충북일보] 남진우의 시는 검은 나르시시즘의 세계, 몽상과 신성의 시학을 지향한다. 그는 불행한 시대, 타락한 도시, 타락한 인간의 세상에서 사라진 신성(神聖)을 회복하려 한다. 에덴은 시인이 가 닿으려는 꿈의 세계이자 완전한 아름다움이 담보된 상징적 공간인데, 인간은 그곳으로부터 추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래서 시인은 몽상을 통해 꿈과 현실, 주체와 사물,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신성의 세계에 도달하려 한다. 즉 시인의 신성 회복 열망이 물의 몽상, 불의 상상력을 낳는다. 끝없이 나락으로 추락함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의 말은 비상(飛翔)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에게 말은 꿈을 현실화하는 최적의 수단이자 신성을 향한 시적 몽상을 구체화하는 최적의 매질인 셈이다.

신성을 향한 열망이 몽상을 촉발하고, 몽상은 독특하고 낯선 이미지들을 창안해내고, 이 이미지들이 독자들을 굴레와 속박의 현실에서 이탈시켜 현실 바깥으로 이끈다. 이 내밀한 꿈의 탈주는 지상과 천상, 세속과 천국의 연결을 통해 추구된다. 흥미로운 건 시인의 신성 추구가 종교적 관념으로 진술되지 않고 사물들의 이야기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불과 타오르는 책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고 모자나 우물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시선(視線)이다. 남진우의 시에서 시인은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이는 자, 즉 이중의 눈을 지닌 존재다. 거울, 달, 물, 불, 가시, 피, 안개, 구름, 연꽃, 사자 등이 시인의 눈에 자주 포착되는 소재들인데 불은 주로 몽상의 상승과정에서, 물은 하강과정에서, 연꽃은 그 중간과정에 사용된다. 불새, 장미, 나무 등은 상승을 지향하는 불의 변주 이미지들이고 안개, 구름, 비 등은 하강을 지향하는 물의 변주 이미지들이다.

시 「타오르는 책」은 그의 세 번째 시집 『타오르는 책』(2000)의 표제작이다. 시인에게 책 읽기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존재와 무의 불꽃놀이다. 책 속의 불길에 의해 책 밖의 존재인 나의 부재를 목격하는 신성한 행위이므로 책은 곧 죽음의 거울, 자아의 실상이 한 줌의 재이자 무(無)임을 확인시키는 두려운 거울이다. 내가 이 시에 매혹되는 건 책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미지, 광기와 야수의 상상력, 실의와 자탄에 빠진 시인의 뼈아픈 자기고백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활활 타오르던 열정이 식은 후 시인에게 찾아들었을 냉기와 열패감을 떠올려보면 마음이 아프다. 시인 곁엔 이제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고,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다. 식어버린 냉기의 공간, 죽은 말들로 가득 찬 언어감옥에 갇힌 채 잃어버린 불을 꿈꾸는 시인의 모습이 처연하다.

타오르는 책 - 남진우(南眞祐 1960∼ )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이 시에서처럼 남진우의 시에서 소재들은 자아의 부재를 확인케 하는 거울, 자기 안의 죽음과 무를 확인하는 처소 또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는 그의 시가 검은 나르시시즘의 세계를지향하며 그 욕구가 이 시의 경우 책으로 전경화 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 물기 없는 나르시시즘의 책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물모의 육체, 헐벗은 시간을 투시해내고 그것이 세계의 실체임을 환기시키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그로테스크한 몽상의 시들은 인간과 세계의 은폐된 치부를 사실적으로 들추어내려는 실존적 진찰이자 뼈아픈 집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책 속의 죽음으로 포장된 세계는 책 읽는 자에 의해 끝없이 재생산되는 책 밖의 현실과 긴밀히 연결된 순환 뫼비우스 띠인 셈이다. 세계는 죽은 말들로 가득한 차디찬 감옥이고, 시인은 오늘도 그곳에서 잃어버린 불과 생명을 꿈꾼다.

/ 함기석 시인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