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을 향한 열망이 몽상을 촉발하고, 몽상은 독특하고 낯선 이미지들을 창안해내고, 이 이미지들이 독자들을 굴레와 속박의 현실에서 이탈시켜 현실 바깥으로 이끈다. 이 내밀한 꿈의 탈주는 지상과 천상, 세속과 천국의 연결을 통해 추구된다. 흥미로운 건 시인의 신성 추구가 종교적 관념으로 진술되지 않고 사물들의 이야기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불과 타오르는 책 이미지로 나타나기도 하고 모자나 우물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시선(視線)이다. 남진우의 시에서 시인은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이는 자, 즉 이중의 눈을 지닌 존재다. 거울, 달, 물, 불, 가시, 피, 안개, 구름, 연꽃, 사자 등이 시인의 눈에 자주 포착되는 소재들인데 불은 주로 몽상의 상승과정에서, 물은 하강과정에서, 연꽃은 그 중간과정에 사용된다. 불새, 장미, 나무 등은 상승을 지향하는 불의 변주 이미지들이고 안개, 구름, 비 등은 하강을 지향하는 물의 변주 이미지들이다.
시 「타오르는 책」은 그의 세 번째 시집 『타오르는 책』(2000)의 표제작이다. 시인에게 책 읽기는 놀라움으로 가득 찬 존재와 무의 불꽃놀이다. 책 속의 불길에 의해 책 밖의 존재인 나의 부재를 목격하는 신성한 행위이므로 책은 곧 죽음의 거울, 자아의 실상이 한 줌의 재이자 무(無)임을 확인시키는 두려운 거울이다. 내가 이 시에 매혹되는 건 책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미지, 광기와 야수의 상상력, 실의와 자탄에 빠진 시인의 뼈아픈 자기고백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활활 타오르던 열정이 식은 후 시인에게 찾아들었을 냉기와 열패감을 떠올려보면 마음이 아프다. 시인 곁엔 이제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고,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다. 식어버린 냉기의 공간, 죽은 말들로 가득 찬 언어감옥에 갇힌 채 잃어버린 불을 꿈꾸는 시인의 모습이 처연하다.
타오르는 책 - 남진우(南眞祐 1960∼ )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