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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6.25 13:47:26
  • 최종수정2015.06.25 13:52:39
영대삼촌이 전사(戰死)한 유월이다. 6월은 슬프다. 1950년 가을, 삼촌이 전선에서 편지를 보내온 것이 마지막이다. 삼촌의 편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삼촌은 그렇게 전쟁터에서 사망하여 유골을 수습하지 못해 작은 산소도 마련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삼촌이 생각난 것은 아들에게서 온 한통의 편지 때문이다. 군에 입대한 아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국방부는 6.25 전사자 가족들의 유전자샘플로 아들의 머리카락을 제공받아갔다고 했다.

편지에는 '아직 강영대님의 유해를 발견하지 못해 죄송스럽고 국가가 최선을 다하여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영대삼촌은 전쟁터 어딘가에 외롭고 쓸쓸하게 묻혀 있다. 이런 슬픔을 가진 참전용사들이 어디 내 삼촌뿐이겠는가. 점점 잊혀져가는 6.25의 참상과 반공정신이 흐려져 가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내가 영대삼촌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봄날이다. 벚꽃이 환하게 피어나던 날 부모님을 따라 어느 절에 갔다. 어머니는 손에 옷가지를 싼 작은 보따리와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앞서 가시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셨다. 아버지 표정은 어둡고 굳어 있었다. 절에 도착하자 부모님은 제사준비를 하셨다.

제단에 떡과 과일이 차려지고 스님이 분주하게 움직이시더니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난 삼촌의 군복을 입은 사진 옆에다 젊은 여인의 사진이 나란히 세워졌다. 어느 집 규수와 영가결혼식(靈駕結婚式)식이 거행되었다. 하객이라고는 우리 가족과 여자 쪽 부모 그리고 스님이 전부인 쓸쓸한 결혼식이다. 영가결혼식이 끝나고 어머니가 가져온 옷을 불에 태웠다. 한 번도 입지 않은 한복이 불에 타며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절간은 고요함이 흘렀다.

영가결혼식과 천도재가 끝내고 사돈된 사람과 간단하게 목례만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향하시던 부모님 표정도 무거워 보였다. 그렇게라도 영대삼촌의 혼백을 위로하여 저승에서라도 좋은 배필과 잘 살아가길 원했으리라.

6.25 전쟁 때 고향에도 인민군이 밀려왔다. 한참 젊었던 아버지는 인민군을 피하여 산속 용굴에 숨어 지내야 했다. 어머니는 낮에는 집에서 인민군들의 눈치를 보고 밤에는 밥을 해 아버지가 계시는 용굴로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2개월 정도 지나자 인민군들이 국군에게 쫓겨 북으로 도망을 가면서 아버지도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민군들이 후퇴하자 곧 전쟁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럼 입대한 삼촌도 겨울이 지나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 믿었는데…. 사랑하는 자식을 전쟁터에서 잃어야 했던 수많은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글썽여 진다.

6.25전쟁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수많은 전사들의 유골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했다.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소중한 그들을 위로하는 마지막 길은 사후(死後)라도 편하게 잠들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2010년부터 국군유해발굴단을 가동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을 중심으로 유해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러 정확한 위치와 토사(土砂)의 이동 등으로 전사자들의 모든 유해를 발굴해 냄은 어려움이 따르리라.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한분까지 유골을 수습하는 것이 조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그분들에게 대한 도리이다.

6.25 사변이 일어난 지 65주년이 되었다. 아직도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다. 군의 첨단장비가 무용지물이 되게 만드는 비리는 개탄할 노릇이다. 국가가 존재해야 자신도 있음에 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한반도는 전쟁이 모두 끝난 상태가 아니라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무력도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철저한 준비와 방어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6.25와 같은 무력도발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2달이 지나면 아들이 제대를 한다. 전방 철책에서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비록 영대삼촌이 잠들어 있지 않은 현충원이지만 다녀와야겠다. 6.25의 참상을 생각하며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게 '이 나라를 지켜주셔서 너무 너무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싶다. 영대 삼촌에게도….

◇강대식 작가

- 푸른솔문학신인상 (등단)

- 충북사진대전 초대작가

- 청주대학교 법과대학 겸임교수 역임

- 시집 : 새로운 잉태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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