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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6.01.21 14:49:00
  • 최종수정2016.01.21 16:09:13
[충북일보] 오늘은 친정아버님 기일(忌日)이다. 살얼음 위 고속도로를 달린다. 부모님 모습이 차창에 어른거려 시야가 흐려온다. 어머니의 손맛을 고스란히 닮은 음식을 해두고 막내 시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 할 올케언니는 늘 넉넉한 마음으로 친정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남편에게 친정 올케는 장모며 큰 오라버니는 장인어른 격이다. 머지않아 장모가 될 나는 친정만 가면 영락없는 철부지 막내 동생이고. 뾰죡새 시누이가 된다.

칼칼한 김치에 탁 배기 반잔 마신 것이 취기가 오른다. 생전에 아버지가 기거 하셨던 사랑방에 갔다. 아직 아버지의 온기가 가득하다. 당신이 생전에 소중이 여기셨던 약장엔 몇 가지 약이 남아 있고, 쾌쾌한 냄새의 오래된 고서는 아버지의 그리움을 품어서인지 고색(古色)으로 물들어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가 와세다 대학 유학시절부터 쓰셨던 가죽가방은 무심한 세월 탓에 장식은 녹이 쓸고 가죽이 삭아 윤기가 없는 문갑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병중에 초췌하신 아버지가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속에 손바닥 만 한 수첩들이 보였다. 아버지의 젊은 날의 기록들, 병환 중에 쓰셨던 병상일지가 적힌 수첩, 서류수첩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병상기록이 적힌 수첩을 펼쳐 보았다. 젊은 날 잉크로 꼭꼭 눌러 또렷하게 당신의 삶을 적으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투병 중에는 흘림체로 변해 있었다. 가족들의 일상을 적으며 당신의 바램을 보태었고, 병세의 차도를 적어 의사에게 전했던 말씀, 라디오에서 전하는 중요한 정보를 적어 두셨다. 해가 갈수록 아버지의 필체는 흐려져 병환의 고통스러움을 말해주듯 침묵하고만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메모는 동짓달 열이틀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에 바래진 글씨는 형광 불빛 탓인지, 내 눈에 맺힌 물기 때문인지 자꾸만 흐려 보인다. 돌아가시던 날, 당신이 못 한 말씀 전하고 싶었던가. 허공에 손을 내 저으며 나를 바라보시던 순간이 내 마음의 흔들림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도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두서없이 적어 두신 것 같다.

"란아 내 딸 막내 험한 세상을 어찌 살거나, 아버지 노릇 못 다한 것이 미안 하구나 ...."

늦둥이 막내가 제일 걱정이신가 보다. 아버지는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라 하시며 자식들은 고생 없이 공부에 전념하기를 원하셨다. 경조애손(警祖愛孫)을 가훈이라 하신다. 못 다한 효도에 한이 맺히셨던 것인가. 당신의 제사상엔 좋아하시던 우동 한 그릇이면 족하다 살아생전 효를 다하라. 당부의 말씀으로 한 장을 채우셨다.

부전여전이라면 모순이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내가 써온 수첩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책장에 가득하다. 아버지 수첩과 판이하게 다르고 담긴 이야기 또한 정 반대이다. 아버지의 수첩은 가족을 염려하고 막내딸을 걱정하는 마음, 자신의 병세로 채워져 있지만, 내 수첩에는 빽빽하게 적힌 스케줄, 지인들의 전화번호, 처리할 업무들로 채워져 있다. 돌아봄의 여유도 없이 시간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삼백예순날 잠시도 내 곁을 떠나지 못했던 수첩 옆에 벌써 일 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할 새로운 수첩이 놓여 있다.

아버지의 낡은 수첩에 평생 쓰신 진솔한 삶의 흔적을 이제는 내 것으로 하여 살아보리라. 채 끝맺지도 못한 아버지의 수첩 마지막 남은 몇 장에 적어 두려던 말씀이 무엇이었던가. 이제 막내딸이 뒷장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싶다.

"아버지, 걱정거리 막내딸 지금 씩씩하게 잘 살고 있어요."라고 한 줄 적어 두었다.

세월의 나이만큼 아버지의 수첩은 바래지고 하얗게 지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기신 흔적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회한과 상처로 남아 있는 못다 한 삶. 아버지 수첩의 마지막을 자식들이 채워가며 살아가리라.

제사상 위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빙그레 웃으시는 아버지 사진 옆에 빛바랜 수첩을 올려 두었다. 아버지께서는 절을 올리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오늘도 메모를 남기실 것이다.

"너희들이 잘 살아 주어 고맙구나!" 그리고 늘 함께 하겠노라고….

강미란 수필가

-충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강

-충대수필문학상 수상

-중등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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