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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추억 - 내 생전(生前)의 의용군

  • 웹출고시간2015.07.23 13:44:23
  • 최종수정2015.07.23 13:44:23
할머님 기일이 음력 5월 초열흘인데, 올해는 마침 양력으로 6월 25일이다.

6·25 사변은 우리 가족에게 뼈아픈 슬픔을 안겨준 난리였다. 6·25 난리의 회오리가 우리 동네에도 불어 닥쳤다. 인민군은 국군을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서 지나가는 동네에서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말만 의용군이었지, 사실은 강제 징집이었다.

인민군이 면소재지까지 왔고, 거기에 아버지의 친구였던 수비기(박수복)가 협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둑어둑한 새벽녘, 소리 없는 밀물처럼 수비기와 인민군 몇이 동네에 들이닥쳤다.

머슴이 있는 부잣집이고, 큰 아버지가 서울에서 순경을 했던 우리 집을 가장 먼저 수색하러 온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건조실에서 담배 불을 때고 있었다. 담배 농사에서 불 때는 일은 엽연초의 등급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깐 놈 수비기가 날 뭘 어짼단말여" 하시면서 아버지는 태연히 불을 때고 있었다. 박수비기는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의 똘만이였다. 사실 아버지에게는 두 채나 되는 건조실 담배 불은 도망가거나 숨는 일만큼 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인민군은 아버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때리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손발이 묶인 채로 동구 밖으로 끌리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할머니의 명(命)으로 삼춘(삼촌)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의용군으로 끌리어갔던 것이다. 얼마쯤 뒤에 삼춘의 옷가지가 집으로 부쳐왔고, 또 한참 뒤에는 대구 팔공산인가, 경상도 어디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삼춘 얘기만 나오면 한참을 우셨다. 늘 속병에 시달리며 소다를 달고 사셨다. 의용군 간 삼춘과 무관치 않으셨다.

국민학교 다닐 때, 집 넘어 산 밑에 있는 논에서 가끔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할 때가 있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마장(馬場) 언덕배기로 가시는 걸 종종 보았다. 거기는 길도 아니고, 일부러가 아니면 갈 일이 없는 후미진 곳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나는 그곳이 아버지에게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십여 년 전 늦은 봄 어느 날, 나는 아버지의 명(命)으로 하루 연가를 내어 아버지와 함께 고향을 찾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막걸리 한통과 북어 한 마리를 준비시키셨다.

그 옛날, 나의 젊은 아버지가 쓸쓸히 담배를 피우시던 마장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막걸리를 한잔을 땅에 부으신다. 그리고는 둔덕의 땅을 파기 시작하신다. 한 삼태기도 되지 않는 작은 봉분이다. 몇 번의 삽질에 단박에 봉분은 없어지고 또 몇 번의 삽질로 절구통만큼의 땅이 파헤쳐졌다. 거무스레한 흙이 나올 뿐, 아무 것도 없다. 아버지는 옆에 있던 새 흙을 파서 구덩이를 메우셨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무신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허전하고 쓸쓸해보였다. "여기에다가 니 삼춘 옷을 파묻었었는데…. 할머니는 모르시지." 그 이듬해 마장은 개발이 되면서 공장이 들어섰고, 또 몇 해 더 지나고 나서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 언덕배기가 삼춘의 옷을 파묻은 곳이라고 한 번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왜 그래하셨을까.

지금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아니 상관이 있는 65년 전의 그날로 돌아가 본다. 할머니의 다급한 목청이 집안을 감돈다.

"장십아 얼른 나오너라. 니형이 의용군에 끌려간다. 니형은 애가 아직 어리고, 형수가 있잖으냐. 니가 형 대신 의용군에 갔다가 오너라." 항아리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삼춘이 뚜껑을 열면서 대답한다. "예, 어머님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 이듬해 겨울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삼춘 얘기가 나오면 할머니는 마른 울음을 우셨다. 그때 넋두리로 하시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에미가 가란다고 가는 놈이 어디 있어, 지 죽을 지도 모르고… 아들 다섯 중에서는 장십이가 제일 착했는데…." 내가 본 적이 없는 삼춘의 이름은 장섭(章燮)이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의용군에 끌려간 삼춘의 억울한 죽음로 돌덩이 같은 짐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던 거 같다.

내 생전의 잊지 못할 의용군으로 끌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한 장섭이 삼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최재우 작가 약력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푸른솔문학신인상(수필등단)

-전국문화원연합회 주관, 향토사 논문대회 대상(1991)

-제1회 충대수필문학상 대상(2014)

-중고등학교 교장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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