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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01.11 16:55:27
  • 최종수정2018.01.25 16:04:19
[충북일보] 이른 저녁 집으로 오는 길에 나무들 사이로 달이 비쳤다. 저물어가는 시간, 사물들이 제 빛깔을 잃어갈 즈음 내리막길 길섶 들풀사이에 있던 달덩이 같은 누런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봄에 심은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작년에 호박이 뒹굴던 자리에서 싹이 자란모양이다. 수없이 오고가던 길에서 이제야 눈에 띈 걸보니 너른 잎새 뒤에 숨어 가만가만 늙어왔나 보다. 귀뚜라미 우는 밤이면 커져가는 달을 보며 풍만한 몸으로 닮으려 했을 터, 후덕해진 달과 펑퍼짐한 호박은 남다른 연대감으로 끈끈한 우정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호박을 끌어안고 돌아오며 흡사 달덩이이라도 안은 듯 뿌듯했다. 거실에 놓아보니 수더분한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호박을 반으로 갈랐다. 달은 사람들의 그리움과 소망을 먹고 찬다지만, 도대체 이 호박은 무엇을 먹었기에 뱃속을 이리 실하게 채웠을까. 실핏줄처럼 연결된 탯줄을 부여잡고 알알이 통통한 것들이 어깨를 모으고 있는 불그레한 동굴,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일까. 넓적한 잎사귀만큼 넉넉함으로 피어난 꽃이 어린호박에 사랑을 전하고 기꺼이 스러졌음이다. 그렇게 남겨진 호박은 달이 차고 기울기를 반복 하는 동안, 누런 껍데기 속에 붉은 마음을 감추고 이토록 야무진 꿈을 키워냈나 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둡고 내밀한 그곳에서 줄줄이 매달려 있는 하얀 씨앗들은 이미 넘치는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성급한 몇 개의 씨앗들은 호박동굴 속에서 싹을 내밀었고, 놀랍게도 몇몇은 뿌리까지 소복하게 자라있다. 어쩌자고 호박 속에서 뿌리를 키우고 있는가, 어찌하여 어미는 제 죽는 줄 모르고 뱃속에서 싹을 틔워 보듬고 있었을까. 어린 싹이 자라고, 하얀 실뿌리가 굵어지며 제 몸을 키울 때, 기꺼이 살을 내어주며 까마득한 신화를 전하려 했음인가. 순한 꽃송이로 피었을 적에 보았던 동굴 밖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려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으로 가른 호박에 손을 넣어 호박씨를 훑어냈다. 통통한 씨앗들이 탐스럽다. 싹이 나 삐죽거리는 씨앗과, 허연 실뿌리를 매단 씨앗들도 신문지 위에 주욱 펴 널었다. 호박 살점에 단단히 붙어있는 붉은 탯줄들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숟가락으로 말끔하게 긁어내려다 그만 두었다. 호박 씨앗들도 어미와 이별은 쉽지 않은가보다.

껍질을 벗기려니 미끄러져 칼은 자주 빗겨나갔다. 늙은 호박의 단단한 껍질은 치열하게 희망을 지켜낸 흔적이다. 호박잎은 서리가 내리도록 차마 낙엽이 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푸른 잎으로 남아있다. 된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마지막까지 지켜낸 늙은 호박을 보듬어 안고 그제야 꿈을 꾼다. 이대로 한 계절이 지나가면 단단했던 껍질은 부스러져 스러지고 말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호박이 문드러진 그 자리엔 씨앗이 싹을 틔워 또 덩굴을 벋어내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겠지. 그러니, 이 호박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 뿌리까지 내민 호박씨는 생명을 유지하여 번식을 위함이다. 제 어미의 희생을 양분삼아 자라는 건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이거늘….

매끈한 껍질을 벗기고 나니 주황빛 살이 두툼하다. 비릿한 단내가 풍기는 호박을 뚜걱 뚜걱 썰어 전기렌지 솥에 안쳤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솥에서는 솥뚜껑이 투레질을 하며 김을 뱉어낸다. 불을 줄여 뭉근하게 익도록 두고, 팥을 따로 삶았다. 팥 삶은 첫물을 버렸다. 안 그러면 떫은맛이 난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나서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 팥의 첫물처럼 먹기엔 맛없고, 버리기엔 아쉬운 것들을 드셨는지 모른다. 푸욱 무른 호박을 국자로 으깨고 삶아놓은 팥과 갈아놓은 찹쌀을 넣어 눋지 않게 저어가며 끓였다. 푸욱 푹, 피식 픽, 솥 바닥에서부터 허튼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사이에 불을 줄이고 뚜껑을 덮어 뜸을 들였다.

한참을 기다려 뚜껑을 여니 노을 진 주황색바다에 검은 섬이 그리움처럼 콕콕 박혀있다. 노을빛의 너른 바다가 그랬던 것처럼, 호박죽이 먹음직스럽다. 푸울푸울 달빛을 풀어놓는 보름달이 그러했던 것처럼 빛깔이 곱다. 하얀 대접에 호박죽 한 그릇 넉넉히 담아내었다. 김이 모락모락 서리어 오른다. 호박죽을 싸들고 어머니께 달려가고 싶다.

어머니가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밥상에 마주 앉아 호박죽에 무김치 한 젓가락 집어 숟가락에 얹어 드리고 싶다.

김정원

푸른솔문학 신춘문예작품공모 수필대상

푸른솔문학 신인문학상 수상

노인복지 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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