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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추억 - 대설주의보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8.09.06 17:13:00
  • 최종수정2018.09.06 17:13:00
[충북일보] 최승호의 시는 현대인의 삶에 깃든 그로테스크함을 명징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도시문명의 폐허와 허위, 존재의 공성(空性)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사물, 현상, 사건의 내부를 직파하는 투시력과 응집력이 높고, 주제와 의도가 뚜렷하다. 주관성보다 객관성, 추상이미지보다 회화이미지의 비중이 높다. 부검의가 사체를 해부하여 피부와 살, 내장과 뼈를 검시하듯 그는 해부학적 상상력을 펼쳐 우리 삶에 깃든 죽음을 파헤친다.

그의 시에는 백색 이미지가 자주 나타난다. 흰 변기로 대표되는 사물화 상상력과 눈사람으로 대표되는 여백의 상상력이 공존하는데, 둘 다 인간의 죽음과 무위를 암시하는 상상력으로 불교와 미술,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 동양의 노장사상과 연관된다. 그가 태어나 자라고 생활한 강원도라는 지리적 공간의 영향도 클 것이다. 오래전 시인은 태백산맥 기슭의 강원도 정선군 사북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당시 탄광촌이었던 사북은 그의 초기 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북은 시인에게 원시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근원적 공간, 사색과 성찰을 낳는 유폐의 공간이다. 대자연의 광대한 산맥과 눈보라는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되돌아보게 하며, 탄광촌에서 살아가는 탄부들과 가족들의 모습은 삶의 폐허와 허무를 깊게 사유하도록 한다. 나아가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외적 조건들, 즉 국가나 사회가 행하는 폭압을 비판적으로 주목하게 한다. 사북에서의 이런 고통체험과 비판의식이 밀도 높게 집약된 것이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다. 「대설주의보」는 이 시집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눈보라가 거대한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흰 산들과 골짜기를 따라 숯덩이처럼 날아가는 작은 굴뚝새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긴장감 높은 시적 묘사와 소재들의 적절한 공간 배치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눈보라가 백색의 계엄령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겨울 산의 골짜기가 먹고 먹히는 살생의 공간, 학살의 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시는 대자연의 위엄과 장관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1980년 신군부의 계엄령 선포, 무자비한 무력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주검들을 연상시킨다. 굶주린 솔개의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지키

대설주의보 - 최승호(崔勝鎬 1954∼ )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르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기 위해 급히 뒷간에 몸을 숨기는 굴뚝새의 모습은 당시 군부에 쫓기던 민초들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시인은 현대인의 초상을 동물 또는 사물로 대체하여 그려내곤 한다. 식료품가게에 길게 줄 지어 진열된 통조림들, 죽어서 입을 벌리고 말라가는 북어들 또한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초상이다.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최승호의 시는 비극과 부조리의 세계로 더욱 기울어진다. 삶과 인간에 대한 허무의식이 재 이미지로 형상화되는데, 재는 인간의 육체가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 폐허의 시간, 존재의 허위 등을 대리하는 기표로 사용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어린 딸의 탄생을 계기로 그는 죽음과 허무의 늪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세계로 들어선다. 이때부터 눈사람과 여백 등 백색 이미지가 더욱 짙어진다. 눈사람은 인간의 탐욕적 욕망 반대편에 놓인 순결성, 무(無)와 공(空)에 대한 지향성을 반영하고 여백은 비움으로서 충만해지는 동양적 사색의 세계, 무욕과 무위의 생명공간을 암시한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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