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박용래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과 음률, 언어의 정갈한 배치, 반복과 순환의 구조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공간이 넓어 사색과 울림을 낳고 동양적 여백의 미(美)가 잘 살아난다. 이미지와 리듬이 조화를 이룬 고요한 적막의 세계, 동양적 수묵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박용래는 흔히 눈물의 시인,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불린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시 '그 봄비' 부분)' 이처럼 그에게 자연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연민과 사랑, 눈물과 서정의 대상이다. 시집 '먼 바다'의 부록인 '박용래 약전(略傳)'에서 이문구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눈 - 박용래(朴龍來 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한 그루의 다복솔, 고목의 까치둥지,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굴뚝의 청솔 타는 연기, 보리누름철의 밭종다리 울음, 삘기 배동 오르는 논두렁의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찔레덤불에 낀 진딧물까지,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위의 글에 나타나듯 박용래에게 자연은 풍경과 소리가 하나로 공존하는 식물성 공간이자 눈물의 샘인 것이다. 그는 중심부에서 밀려나 쓸모없이 버려진 것, 하찮고 비천한 것, 작은 식물이나 부러진 가재도구까지도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식구로 생각한다. 이는 시인이 주변의 하찮은 사물들조차 사람과 같은 존엄한 생명의 존재로 떠받들음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이 수평적 조화를 이루는 이러한 대승적 포용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 그의 시를 낳는 원동력이다. 그의 시가 외관상 짧고 단순하면서도 내부로 들어가 보면 넓고 복합적인 큰 세계가 펼쳐지는 것은 이런 시인의 세계수용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이미지가 다양하고 비유는 중층적이다. 대상에 대해 시인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지 않고 대상 자체를 정밀하게 관조하여 대상이 숨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는 주로 회화적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이미지들을 각각의 점으로 배치하는 회화적 점묘법을 구사한다. 그의 시의 각 행들이 독립적 장면으로도 읽히는 것은 이런 구도적 배치 때문이다. 이런 배치와 구도 분할을 통해 그는 회화적 이미지와 음악적 리듬이 결합된 공감각의 세계,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친화의 세계를 그려낸다.
시 '저녁 눈'은 시인의 회화적 묘사, 애상적 교감에서 나온 작품이다. 감정이나 주관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늦은 저녁 주막집의 눈 내리는 모습을 관조적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어둠이 서린 늦은 저녁, 어느 주막집에 도착한 한 나그네(시인), 탁주를 한 잔 걸치는 그의 눈길과 마음에 비친 아름답고 쓸쓸한 풍경이다. 시각과 청각이 뒤섞여 그려지고 있는데, 말집은 추녀가 사방으로 뺑 돌아가게 만든 집이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여물, 변두리 빈터 등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면서 근거리 풍경을 먼저 제시되고 점차 원거리 풍경으로 나아간다.
이런 공간 이동과 거리 늘이기는 매우 효과적이다. 가까운 곳의 말집과 호롱불, 조랑말 발굽과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던 눈발이 먼저 보이고 조금 먼 변두리 빈터로 시선이 옮겨지면서 이 시의 원근법이 형성되는데, 이때의 멀어짐은 눈발의 단순한 공간이동을 넘어서서 문명화에 따른 토속적 사물과 전통의 멀어짐으로도 읽힌다. 나아가 외래문물의 유입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멀어지는 우리말과 전통서정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즉 주막집 풍경은 문명화로 점차 사라져간 우리의 전통과 토속의 세계를 암시하고, 그런 풍경에 붐비는 눈발은 시인의 슬프고 안타까운 그리움이 전이된 소재로 읽힌다. 우리 옛것의 사라짐에 대한 시인의 애잔한 마음과 눈길,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찬 눈발처럼 느껴지는 시다.
/ 함기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