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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그 겨울의 하루

수필가 노순희

  • 웹출고시간2015.02.05 18:53:10
  • 최종수정2015.02.05 18:53:10

언제부턴지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수천억 마리 흰 나비 떼의 군무인가. 다채로운 빛깔의 꽃잎보다 현란한 하늘 바람의 춤인가.

철부지 아이 같은 마음으로 눈 쌓이는 길을 홀로 걸어본다.

사박사박 발자국 소리를 따라서 추억은 어찌 그리 붉은 동백만큼이나 선연한지.

오래전 겨울, 인연의 갈림길에서 다짐한 k와의 약속을 이행한 그날이 떠올랐다.

"잊지 마요. 어디에 살던지… 무슨 일이 있던지…. 12월 넷째 토요일 동대구역"

20년 전 약속이었다.

그 오랜 약속을 믿고 무작정 올라 탄 대구행 기차였다.

아직도 사랑이 남았는가. 다시 오지 않는 시간 속에 묻어버린 사연들이 먼 데 불빛처럼 가물거린다.

차창 밖으로 따라오는 강물에 비친 산 그림자는 다른 세상인 듯 평화롭다. 얼마 후, 기차가 멈추어 섰다.

문득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의 파장에 의해 마음 한 구석에 구겨놓은 암호 같은 말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난 감색 양복에 벽돌 색 타이. 나는 체크무늬 스커트. 꼭 기억해. 서울행 티켓 발매소 앞"

잊혀 지지가 않던 약속이었다. 아직 유효한 내용인가를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간다. 티켓 발매소 앞. 아, 저 사람. 20대 청년시절에 만나고 헤어져 불혹을 넘어선 남자.

눈이 마주쳤다. 공백의 세월이 엉킨다. 어딘지 낯설기도 하지만 어김없는 k였다.

우리는 잠깐 어색한 미소를 나누고 역을 빠져 나왔다. 거리엔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눈보라가 휘날렸다.

폭풍처럼 세찬 눈바람이었다. k와 나는 퍼붓는 눈 속을 아무런 말없이 걸었다.

머지않은 곳에 목재건물의 카페 '쏠베이지'가 보였다. 출입문을 열자 장식대 위의 마른 장미 다발이 고즈넉한 향취로 우리를 반긴다.

"어디 좀 봐요. 내가 생각한 그대로네."

어깨의 눈을 털어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k가 웃었다.

웃음 짓는 얼굴의 눈가 잔주름이 싫지 않았다. 찻잔에 손을 대지 않은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약속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믿어지지 않아요. 강산이 벌써 두 번이나 변했다는 게."

"강산은 변해도 … 지금 모습 그대로 변하지 마요"

k와 나는 잠자코, 거리로 향한 카페의 대형 유리 벽면을 통해 눈 내리는 낯선 도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은 세상의 모든 경계를 헐어버리고 못 다한 인연과 덧없는 사랑을 지우기라도 할 듯 여전히 내려 쌓이고 있다.

시간이여 조금만 천천히…. 먼 곳에서 달려온 우리에게 시간은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았다.

식어버린 커피를 그대로 두고 우리는 서둘러 쏠베이지를 빠져나와 터미널로 향했다. 이용시간대가 편리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이십 년 공백을 아쉬움 그대로 안고 k와 나는 이별 앞에 섰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k가 느닷없이 부산까지 배웅을 자청하며 되돌아선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하다.

그러나 곧 함께 하는 시간이 남아있음에 싫지 않았다.

고속버스는 뒷좌석이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몸과 마음이 무너질 듯한 피로가 전신에 감돌았다.

k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을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사르르 눈이 감긴다. 그로부터 내 의지대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의식은 차체가 심하게 덜컹거릴 때에만 순간적으로 깨어났다.

그렇게 곁을 확인하고는 또다시 잠에 빠져들어 세상을 잊었다.

저물녘. 부산에 도착한 우리에게 그림자같이 따라온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인사였다. 서울행 승차권을 손에 든 k가 그늘진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울컥 서러움이 솟구쳐 올라왔다. 잘 가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돌아서는 그의 서글픈 어깨위로 흰 나비 떼가 너울너울 소리도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눈 없는 지방에 눈이 내린다고 몇 년 만이냐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k가 눈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 가요. 기어이 뱉어내지도 못한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얼어붙은 내 발자국은 그 자리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그로부터 다시 이 십 여년이 흘렀다. 오늘같이 눈 오는 날이면 세월 속에 묻혀간 인연이 그리움 속에 떠오른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어디에선지 어쩌다 한번은 그날을 추억하겠지. 멈추어버린 시간 이었던 요요한 그 겨울처럼 함박눈이 내린다.

◇노순희 작가 약력

-푸른솔문학 작가회회원

-푸른솔문학 신인상

-정은문학상

-공저: '뜰엔 멈추지 않는 사랑이 있네' '반딧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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