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2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웹출고시간2015.01.22 18:26:05
  • 최종수정2015.01.22 18:26:05

겨울 호수에 눈이 내렸다.

도요새의 서식지였던 덤불숲이 산새알처럼 솟아올랐다. 보푸라기 날리는 억새밭도 새하얀 섬으로 둥둥 떠오른다.

골골마다 설경은 그린 듯 아름답고 하얗게 뒤덮인 원시림 앞에 서 있으니 발걸음도 깃털마냥 가볍다.

눈보라가 틔워 낸 길을 따라가면서 나 또한 외로운 겨울 나그네다.

아무도 없는 신대륙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천고의 신비를 들춰 보는 이 기분! 하필이면 인적마저 드문 오후, 이제 막 태어난 눈밭에 처음 길을 여는 것 같은 착각이야말로 눈 쌓인 겨울 호수에서 맛보는 최고의 환타지였다.

갈림길을 돌아가는데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전설 같은 얘기가 들렸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무도 부르지 못한 노래고 처음 눈에 띈 별이 가장 빛나는 별이라면 저 눈 속에는 우리 듣도 보도 못한 뭔가가 잠재되었을 것이다.

내 발자국을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칙칙한 땅이 드러나겠지만 잠깐이나마 환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했다.

얼마쯤 갔을까, 길은 그 새 끝나고 조붓한 산자락으로 이어졌다.

비알을 헤쳐 가려니 엄두가 나지 않고 그렇다고 돌아서자니 온 길도 만만치 않다.

결국 나는 앞으로 가든 온 길을 돌아가든 하나를 택하겠지만 더는 길을 알 수 없을 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듯 어찌해야 될지 모르게 막연한 순간도 때로 돌파구가 된다.

나 역시 눈이 내릴 때마다 겨울 나그네를 자처해 오지 않았던가.

호수에도 나와 엇비슷한 부류는 많았다.

우선 눈에 띄는 건 따스한 곳을 찾아 날아 온 청둥오리다.

혹독하게 바람 부는 날 가 보면 떼로 모여 자맥질이다. 물속을 버르집고 허공을 박차 오르면서 겨울을 물어 뱉다가 봄이면 약속이나 한 듯 떠나가는 철새들……

그들의 거주지인 작은 섬도 겨울 한 철 찾아온 나그네다.

자맥질을 하던 새들이 어느 순간 기슭에서 쉬는 걸 보면 아지트가 분명했지만 여느 때는 볼 수 없는 섬이다.

물이 많을 때는 파묻혀 있다가 빠질 즈음에야 이루지 못한 꿈처럼 드러나는데 떠도는 철새가 떠돌이 같은 섬에 머물러 있으니 그럴 때마다 한 사람 겨울 나그네로 정착하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눈도 바람에 날려 이곳에까지 왔다. 기슭을 돌아가면 둠벙이 나오고 거기 물조차도 나그네 새 때문인지 자박자박 흐른다.

둔덕의 나무도 이들 철새를 위해 벌거벗은 채 떨고 있다.

모퉁이만 돌아가도 사철 푸른 소나무가 흔했으나 물가에는 앙상한 포플러와 자작나무뿐이다.

아무리 추워도 떨어질 잎 하나 없이 절박한 모습으로 연주하는 교향곡 또한 겨울만의 선율이다.

눈과 더불어 집시적 분위기로 바뀌는 풍경도 겨울 하모니의 백미다.

우리 나그네 삶을 동경하는 것도 가지 못한 길에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지나온 길과 가야 될 길 앞에서 헤맨 적도 있으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보다 갈 길이 많을 때가 더 행복하다.

나그네라고 하면 떠나는 게 연상되지만 봄도 겨울의 끝자락에서 손짓하듯 소망 때문에 힘든 여정을 답파할 수 있다.

가랑잎이 버석거린다. 봄내 가으내 초록과 단풍을 뽐내다가 한줌 뗏장으로 묻힌 건 착잡한 느낌이나 봄이면 다시 푸르러진다.

우리도 한번 가면 올 수 없는 삶이었기에 더 큰 의미를 남기려 했다. 눈 쌓인 세상을 들어 올리면 꿈나라가 따로 없을 것 같은 백설의 신비도 필경은 사라진다.

모든 환상도 결국 신기루이듯 우리 삶도 그렇게 마감되겠지만 길은 끝나면서 시작되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고달픈 날들에서도 내일을 꿈꿀 동안은 행복하다. 겨울호수와 찬바람에 떨고 있는 나무도 경건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지난 가을 떨어진 씨앗도 눈을 뒤집어 쓴 채 하루하루 봄을 기다린다. 답답해도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망울을 새길 수 있어 묵묵히 견딘다.

겨울하늘을 날아갈 수 있어야 진정한 새다. 겨울이 없으면 봄은 절박하지 않듯이 시련이 아니면 영광의 삶은 누리지 못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걸까. 들판은 텅 비고 산이 흰 눈에 덮여도 봄을 위해 기다리듯 내일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사람이고 싶다.

겨울나무조차 잿빛 하늘 밑에서 초록을 준비한다.

차가운 눈 속 어디선가 봄을 아로새기는 꽃씨마냥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삶을, 봄 때문에 침묵하는 계절의 간이역에서 배운다. 눈물로 노래하는 겨울 나그네처럼……

이정희 수필가는 …

2004년 『전북 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경남일보』신춘문예 수필 당선

둥그레 시 동인회원. 음성문인협회 회원

산문집 :『원피스와 투피스』『행복 엑스 와이』

시 집 :『무반주 소나타.』『함께 부를 수 없는 노래』 가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