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까지 오장환은 한 편의 친일시도 쓰지 않고 어둡고 궁핍한 시대를 견디다가 병상에서 해방을 맞는다. 그때 그는 신장병을 앓고 있었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꿈과 열정, 부끄러운 심정 등을 오장환은 5개월에 걸쳐 매일매일 일기처럼 기록해나간다. 이 기록을 정리해 묶은 것이 그의 대표시집 '병든 서울'이다. 19편이 묶여 있는 이 시집에는 남쪽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애절하게 묻어 있다.
시 '성탄제(聖誕祭)'에는 생명을 유린하는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시선이 깔려 있다. 흰 눈과 그 위에 흘러내리는 사슴의 붉은 피가 강렬하게 대비되면서, 총에 맞은 채 사냥개에게 쫓기며 점점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는 사슴을 통해 시인은 인간의 광기와 잔혹함을 폭로한다. 죽어가는 어미사슴을 샘물과 약초로 살려내고자 안타까워하는 어린 사슴이 생명의 순수성을 나타낸다면, 사냥꾼은 생명을 유린하고 살육하는 인간의 야만적 파괴본성을 나타낸다.
참혹한 생명의 멸절을 긴장감 높게 제시하여 역설적으로 생명의 존귀함을 부각시키려는 시인의 의도가 숨어 있는 시인데, 주목되는 것은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죽은 이가 어미사슴이라면 죽는 이는 어린 새끼사슴이다. 죽은 어미처럼 곧 죽게 될 어린 새끼의 비극적 운명, 어미가 새끼를 장사지내야만 하는 반윤리적 절망감이 역설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무자비한 생명 살생에 대한 시인의 날카로운 질타가 들어 있다. 이런 역설적 관점에서 보면 성탄제에 거리거리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인간의 야만적 살생과 폭력을 용서하라는 그리스도의 뼈아픈 사랑의 울음이기도 하다.
/함기석 시인
성탄제(聖誕祭) - 오장환(吳章煥 1918~1951)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 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 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은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뜻한 핏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