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시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특징 두 가지는 전략적 시 쓰기와 자기모멸 의식이다. 첫째,시적 전략 측면에서 그는 인물과 사건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시 전체를 구조화한다. 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총감독 또는 연출가 역할을 한다. 그의 시가 자주 무대극 형식을 띠고 펼쳐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또한 전통적 은유와 상징보다 서사 중심의 서술, 3인칭 소설 시점 전개, 메타적 시 쓰기 등을 통해 시의 카테고리 자체를 해체하고과감한 장르 혼합을 한다. 그의 시가 자기반영성, 상호 텍스트성을 수반하는 패러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이런 실험의식 때문이다. 둘째, 자기모멸 의식은 역설과 반어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학적 시선과 노출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현대인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고 모독하여 독자들을 웃게 하고, 그들이 비웃고 조롱하는 그 대상이 바로 독자 자신임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런 역전된 응시를 통해 가면 뒤에 은폐된 맨얼굴, 자본주의사회의 위악적 실체를 날카롭게 해부하려 한다. 이런 의도에서 자기모멸, 자기부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장정일의 시는 1980년대에 등장한 1990년대 시의 전조다. 그의 시는 1980년대 선배 시인들과 달리 이념적 이데올로기, 시대와의 투쟁의식, 윤리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민족과 분단의 이데올로기 측면보다 자본화된 소비사회의 일상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쾌락, 물화된 세속의 세계와 대면한다. 그의 시에 광고나 TV 매체, 연예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세계대면 태도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도시의 문화와 제도, 억압된 욕망과 은폐된 성(性)을 조롱하고 희화화 하는데, 성은 외설 또는 음란성 문제 이전에 수치와 은폐의 대상으로 보아온 전통적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엄숙주의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의 반영물이다. 즉 그는 금기의 영역에 방치되었던 민감한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하여 자본주의사회 전반에 확산된 권위주의, 돈과 섹스에 물든 물질만능세태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비누왕자 - 장정일(蔣正一, 1962∼ )
일주일에 몇 개씩 장미비누를 물에 씻어 없앤다
어쩌다 어린 조카가 누구 만나냐고 물으면
그녀는 묘하게 웃음 짓는다. 코끼리 같이 듬직하게
멋있는 그 아저씨.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하루 종일
욕탕에 담그고 비누칠하기 일쑤다.
철벅철벅 물을 끼얹으면서
그 남자 생각을 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를 매일 만난다.
매일 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그녀의 창 밖에 와 있다. 그녀가 낮은 허밍을 하며
욕조 속에서 비누거품을 날릴 때
코끼리처럼 중후한 그 남자는 미리 자동차 왼켠의
도어를 열고 거기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붉은 장미 한 다발을 한 손 가득 들고서
이 밤도 그녀는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를
장미비누로 만진다. 비누가 닳나, 내가 닳나·
분명 오늘은 와 있겠지· 그러나 비누왕자님은 오지 않았네.
씨에프 대로라야 이모가 행복할 텐데
씨에프 대로 되질 않아 매일 닳아지며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