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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겨울연가 - 비누왕자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9.02.21 15:57:45
  • 최종수정2019.02.21 15:57:45
[충북일보] 장정일은 물질자본에 종속된 현대사회, 현대인의 위선적 가면을 풍자와 익살로 해체하고 조롱하는 시인이다. 그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혼란의 방식으로, 음란한 퇴폐의 세계를 음란의 방식으로 기술한다. 현실의 부패와 위악을 아름다운 말, 점잖은 말, 교훈의 말로 위장하여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정직한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정서적 불안감, 자기모멸감, 비애와 고립감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러한 불안과 유폐의 상황이 우리 자본주의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주목되는 것은 이런 비판의 메시지가 반어와 역설, 조롱과 야유의 서사무대로 연출된다는 점이다.

장정일 시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특징 두 가지는 전략적 시 쓰기와 자기모멸 의식이다. 첫째,시적 전략 측면에서 그는 인물과 사건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시 전체를 구조화한다. 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총감독 또는 연출가 역할을 한다. 그의 시가 자주 무대극 형식을 띠고 펼쳐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는 또한 전통적 은유와 상징보다 서사 중심의 서술, 3인칭 소설 시점 전개, 메타적 시 쓰기 등을 통해 시의 카테고리 자체를 해체하고과감한 장르 혼합을 한다. 그의 시가 자기반영성, 상호 텍스트성을 수반하는 패러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이런 실험의식 때문이다. 둘째, 자기모멸 의식은 역설과 반어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학적 시선과 노출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현대인들의 이미지로 삼으려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고 모독하여 독자들을 웃게 하고, 그들이 비웃고 조롱하는 그 대상이 바로 독자 자신임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런 역전된 응시를 통해 가면 뒤에 은폐된 맨얼굴, 자본주의사회의 위악적 실체를 날카롭게 해부하려 한다. 이런 의도에서 자기모멸, 자기부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장정일의 시는 1980년대에 등장한 1990년대 시의 전조다. 그의 시는 1980년대 선배 시인들과 달리 이념적 이데올로기, 시대와의 투쟁의식, 윤리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민족과 분단의 이데올로기 측면보다 자본화된 소비사회의 일상 속에서 개인의 욕망과 쾌락, 물화된 세속의 세계와 대면한다. 그의 시에 광고나 TV 매체, 연예인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세계대면 태도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 도시의 문화와 제도, 억압된 욕망과 은폐된 성(性)을 조롱하고 희화화 하는데, 성은 외설 또는 음란성 문제 이전에 수치와 은폐의 대상으로 보아온 전통적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엄숙주의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의 반영물이다. 즉 그는 금기의 영역에 방치되었던 민감한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하여 자본주의사회 전반에 확산된 권위주의, 돈과 섹스에 물든 물질만능세태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비누왕자 - 장정일(蔣正一, 1962∼ )

그녀는 자신의 몸에 비누칠 하는 것을 즐긴다

일주일에 몇 개씩 장미비누를 물에 씻어 없앤다

어쩌다 어린 조카가 누구 만나냐고 물으면

그녀는 묘하게 웃음 짓는다. 코끼리 같이 듬직하게

멋있는 그 아저씨.

그녀는 자신의 몸을 하루 종일

욕탕에 담그고 비누칠하기 일쑤다.

철벅철벅 물을 끼얹으면서

그 남자 생각을 한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남자

그녀는 그 남자를 매일 만난다.

매일 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그녀의 창 밖에 와 있다. 그녀가 낮은 허밍을 하며

욕조 속에서 비누거품을 날릴 때

코끼리처럼 중후한 그 남자는 미리 자동차 왼켠의

도어를 열고 거기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

붉은 장미 한 다발을 한 손 가득 들고서

이 밤도 그녀는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를

장미비누로 만진다. 비누가 닳나, 내가 닳나·

분명 오늘은 와 있겠지· 그러나 비누왕자님은 오지 않았네.

씨에프 대로라야 이모가 행복할 텐데

씨에프 대로 되질 않아 매일 닳아지며 줄어든다.
「비누왕자」는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장정일의 초기작으로 시집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1988)에 수록돼 있다. 텔레비전 CF광고 장면을 시로 끌어들여 광고 속의 인물(남자)을 통해 현실 속의 인물(이모)의 내면욕구, 결핍과 상실감을 드러낸다. 이모는 매일매일 몸에 비누칠을 하며 비누를 없애버리는 비누 소비자, 비누 중독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모가 중독된 대상은 비누 자체가 아니라 비누를 선전하는 텔레비전 광고 속의 남자, 그 남자의 튼튼한 육체 이미지와 낭만적 분위기다. 자본메커니즘이 생산하는 유혹적 상품광고 속의 연출된 환상과 아우라에 유혹된 것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멋진 남자는 현실의 성적 아이콘이자 상징물로 이모는 그 남자와의 환상적인 연애 또는 밀애를 꿈꾼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가 실감하는 건 상대적 결핍과 상실감이고 그녀의 몸은 점점 왜소해져 간다. 비누처럼 그녀의 몸과 마음은 점점 닳아 없어진다. 비누라는 상품으로 전락하여 스스로를 자학하며 소비시키는 공간,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자본주의사회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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