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섬진강을 노래한다는 것은 섬진강의 풍광을 통해 그 풍광이 품고 있는 역사 속 민초들의 삶, 그들의 끈질기고 강인한 생명력,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의미를 띤다. 그의 시 전반에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나타나면서도 낭만적 정조 이면에 민중들의 비애와 굴곡진 그림자가 짙게 깔리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중층적 시선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시 저변에 지하수처럼 도도히 흐르는 낭만적 세계인식을 서구의 낭만주의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대다수 서구 낭만주의 시가 현실과 동떨어진 도피적 이상공간을 설정하는 반면에, 그의 시는 현실 속에 머물면서 사람살이의 아픔을 번민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 '섬진강'이 출간된 건 1985년이다. 1980년대에 그의 시 세계는 대체로 3단계 과정을 거치며 변화한다. 초기의 낭만적 현실인식 과정을 지나, 중기의 농촌 현실을 구체적으로 살려내는 과정을 거쳐, 후기에는 다시 초기의 관념적 대상세계로 돌아간다. 초기 시에는 부재와 결핍의 현실이 환기시키는 대리공간으로 나아가려는 시적 자아의 낭만적 지향성이 자주 나타난다. 누이, 여자, 봄, 집 같은 이미지들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주로 시적 자아의 상실감이나 그리움을 낳는 질료로 사용된다. 이후 그는 농촌의 열악한 현실과 구조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직시하여 피상적 대상인식을 극복한다. 이 변화 과정이 1시집 섬진강과 2시집 '맑은 날'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특히 섬진강 연작에는 농민들의 애환서린 삶, 산업화 속에서 농촌이 겪는 고통과 상처, 인간의 물신화 현상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이 밀도 높게 나타나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농촌의 구체적 실상을 서정성 짙게 드러내면서,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드러낸다.
그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산 사람들이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는 6.25전쟁 때 죽고, 아버지는 전쟁 때 포탄을 나르며 농군으로 살다 죽고, 어머니는 홀몸으로 억척스럽게 생활을 이어
섬진강 - 김용택(金龍澤 1948~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 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