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은 노동자의 생활, 노동의 참된 가치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일컫는다. 1970년대 한국경제가 고도성장 단계로 접어들면서 소수 권력층과 자본가들이 부(富)를 독점하고 노동자들은 이들의 노예적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 이런 시기에 인간답게 살고 싶은 민중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주창하는 문학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민중문학이고, 1970년대의 민중문학이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범위를 좁혀 노동자들의 삶과 아픔을 사실적으로 실체화한 것이 노동문학이다. 노동문학은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횡포와 착취, 노동자들의 고통과 피폐한 생활, 자본지배가 빚어내는 각종 병폐와 부조리 등을 날카롭게 묘파한다.
『노동의 새벽』(1984)은 당시 군사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천만 노동자를 각성시키고 젊은 대학생들은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촉발한 당대의 문제적 시집이다. 이때부터 시인은 군사독재정권의 표적이 되어 7년여를 수배자로 쫓기며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리게 된다. 시집에 수록된 시 「손무덤」은 노동자의 비극적 고통을 매우 생생하고 뼈아프게 재현해낸 작품이다. 공장에서 프레스 기계에 손목이 잘린 노동자 정형의 끔찍한 상황과 비극에 처한 가족들, 병원 응급실을 찾는 과정과 산재처리 과정에서 느끼는 화자의 극한적 슬픔과 분노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노동자 세계와 대비되는 자본가 세계의 개기름 번지르르한 실상, 미국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한국사회의 자본화 현실이 풍자와 야유의 시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가슴 저린 인간적 통증과 함께 분노를 치밀게 하는 시다.
1991년 시인은 정보기관에 체포되어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형에 처해진다. 수감 중이던 1993년 옥중에서 펴낸 2시집 『참된 시작』을 펴내는데 그는 자신이 꿈꾸던 민중해방, 노동
손무덤 - 박노해(朴勞解 1957∼ )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선진 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