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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沙平驛에서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8.11.01 15:39:44
  • 최종수정2018.11.01 15:39:44
[충북일보] 곽재구 시의 근간은 고통을 낳는 현실, 그런 슬픈 세상에 대한 관용적 화해와 사랑이다. 그의 시에는 가난 속에서 아픈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눈물과 침묵이 있다. 폭압의 시대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있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려는 인간적 사랑이 담겨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시간을 복원시킨다. 과거의 기록으로 남은 역사의 비극적 장면들이 지나가버린 옛일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 중인 현재적 사건임을 환기시킨다. 그는 당대의 아픔과 슬픔을 성찰하여 따뜻한 서정으로 풀어내는 시인, 인간적 순수와 동심을 그리워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자연의 풍경들은 자주 의인화된다. 왜 시인은 대상을 의인화하는 걸까· 그에게 자연의 대상들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명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적 삶을 긍정하고 타인들과의 공생적 삶을 희원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들을 연민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노란 불빛을 밝히는 여염집을 등대로 보기도 하고, 먹빛 바다를 보며 술잔을 돌리는 거칠고 시끌벅적한 사내들을 인간적 순수와 온기를 간직한 대상으로 느끼기도 한다. 이런 연민과 사랑의 시선은 그의 시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첫 시집 『사평역에서』(1983)에는 시인의 눈에 비친 가난한 세상이 잘 그려져 있다. 청소부, 창녀, 용접공, 버스 안내양, 요리사, 자전거포 점원 등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남루한 일상이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沙平驛에서」는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시다. 시인이 이 시를 쓸 당시 사평역은 실재하지 않던 곳으로 시인의 쓸쓸한 내면이 투사된 이미지공간에 가깝다. 창밖엔 함박눈이 내리고 대합실 안엔 톱밥난로가 타고 있다. 막차를 기다리며 몇몇은 졸고 몇몇은 감기에 걸려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다. 모두들 가슴 깊숙이 할 말을 간직한 채 묵묵히 시린 손을 난로에 쬐고 있다.

유리창에 대한 묘사가 주목된다.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수수꽃이 문제다. 수수꽃을 수수에 핀 꽃으로 보면 앞쪽의 보라색이 잘 해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수꽃을 수수꽃다리로 보면 보라색이 쉽게 해명된다. 수수꽃다리는 봄에 흰 보라색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의미는 크게 확장된다. 함박눈 내리는 추운 겨울 대합실에서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결국 봄이고, 막치는 봄으로 가는 기차, 즉 사람들을 사랑과 자유의 시간대로 데려다줄 희망의 상징물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묘사가 아니라 시인(화자)의 시선과 행위다. 시인은 눈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한다. 회한과 상념에 젖은 채 유리창에 비친 불빛과 사람들을 바라

沙平驛에서 - 곽재구(郭在九 1954~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

자정이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보고 한 줌의 톱밥과 한 줌의 눈물을 난로 속에 던진다. 이런 시선과 행위는 과거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 사람들에 대한 쓸쓸한 연민, 미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수반한다. 사람들이 막차를 타고 다다를 고향은 결국 따뜻한 정과 사랑이 넘치는 그리움의 공간, 자유의 공간이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 사람들이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긴 여운으로 남는 아름답고 쓸쓸한 시다.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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