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판 한군데 눈이 꿈틀거리더니/ 새가 움터 날아오른다./ 그 자리가 뻥 뚫린다./ 또 한군데 눈이 꿈틀거리더니/ 또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그 자리가 뻥 뚫린다./ 벌판 여기저기서/ 새가 자꾸 날아올라/ 뻥/ 뻥/ 뻥/ 뚫린다. (시 '봄' 부분)'
초기의 이런 상큼발랄한 감각과 상상, 자유로운 세계대면 태도는 이후에도 일관되지만, 네 번째 시집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부터는 고통의 이미지들이 조금씩 범람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늪으로 받아들이면서 늪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시의 주제와 소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며 이전의 시들보다 시적 자의식을 강화시키는데, 그녀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중요 소재 중 하나가 고양이다.
고양이는 그녀의 초기 시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매혹의 심상이다. 그녀에게 고양이는 야생의 상징이면서도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소외와 슬픔의 대상이다. 시인 자신의 내면과 인간 본성이 투영된 상징적 대상이기에 고양이가 사라진 동네를 그녀는 인간의 영혼이 사라진 동네라고 생각한다. 고양이에 대한 시인의 집착은 생래적이고 무의식적인 호감과 동질감 때문이며, 오래전 전부터 그녀가 버려진 길고양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黃仁淑 1958∼ )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뒷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 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 하 하 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근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