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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6.10.27 17:45:05
  • 최종수정2016.10.27 17:45:05
어린 시절 내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다. 서당 훈장을 하신 고조부께서 지어주신 지금의 내 이름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출석부의 이름은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도꾸야먀 니꼬엔'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는 거였다. 어린 생각에 '왜 내 이름은 두 가지를 쓰는 것일까' 하는 의아한 생각은 더러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물어보지는 못했다. 영문을 알 수 없던 어릴 때 추억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해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서야 내 이름이 두 개였던 이유를 알 게 됐다.

아버지가 교사로 계시던 고등학교 사택에서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밤 아버지는 갑자기 짐을 싸고 가재도구를 대충 정리하더니 가족들을 데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어디론가 밤길을 가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있는 것 같았다. 사택 촌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은 일본 천황이 미국에게 항복을 알리는 방송에 일본 사람들은 동요하고 어수선하던 때였다. 일본 사람들이 만이 살던 동네에서 혹시라도 흥분한 일본 사람들과 부디칠 염려 때문에 밤중에 고향을 향해 서둘러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그들 통치를 받던 시절에 나는 태어났다. 자라서 학교를 갔을 때도 이름은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고, 교실 정면 흑판 위에 걸려있는 국기는 지금의 붉은 일장기 였다. 수 백년 넘게 이어온 조상으로부터의 성(姓) 과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꿔 놓았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조선인에게는 취학, 취업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청으로부터 각종 인허가가 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날마다 군청에서 오라 하고, 경찰서에서 오라 가라하며 헌병대에 불려다닌 끝에 사상범으로 몰려 고통을 받게하는 등 잔학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생 햇볕을 보지 못하며 죄인으로 살아야만 했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욕이 '성을 갈 놈'이라고 했다.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조선인들은 강렬하게 저항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아예 호적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 조선인은 성을 이누꼬(犬子·개새끼)라고 신고하니 읍장이 사연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 조선인은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로 불리는 데 내가 성을 바꾸었으니 개새끼가 된 것 아니냐' 고 대답 했단다. 우리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제국의 징병제도를 실시할 준비공작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 견해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 성과 이름까지 바꾸게 됐으니 민족의 운명이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실로 창씨개명 정책은 우리 민족의 족보와 이름을 영원히 없애려 했던 일제의 가장 무서운 흉계였던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지금은 우리 말과 글 뿐아니라 족보도 온전하게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창씨개명과 관련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친일(親日), 반일(反日) 논쟁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전직 대통령의 창씨개명을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씨개명을 했다고 친일파고 하지 않았다고 일제에 저항한 애국 행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민족의 대표적 저항시인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했고, 일제때 친일파 거두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사장) 한상용(중주원고문) 윤덕영(귀족원의원) 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당했을 때, 국권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겼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사람들인 80%가 일제의 강제적인 압력에 의해 창씨개명을 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앞잡이로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은 허물을 가려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대다수 국민들은 기본적인 생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창씨개명을 했다고 모두 반민족자가 아니듯,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게 무조건 애국도 아니지 않을까.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피를 흘리신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았다. 해방 71년을 맞으며 창씨개명과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창씨개명은 수치스럽고 슬픈 역사며,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다투게 하고 괴롭히는 다 낫지 않은 아픈 현대사다.

이황연

푸른솔문학 신인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성균관 典人

저서:'인생과 나의 삶', '강을 건너온 바람(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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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