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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추억 -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31

  • 웹출고시간2017.05.18 10:51:46
  • 최종수정2017.05.18 17:46:45
[충북일보] 고은의 시편들은 삶의 편력만큼 굴곡이 심하고 다채롭다. 시공간이 방대하게 열려 있고 등장인물 또한 매우 다양하다. 어떤 시는 높은 바위산이고 어떤 시는 낭떠러지 계곡이다. 어떤 시는 핏물이 스민 대나무고 어떤 시는 칼바람에 유연히 몸을 휘는 갈대다. 어떤 시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이고 어떤 시는 눈보라 몰아치는 혹한의 겨울이다. 어떤 시는 잔잔한 물결이고 어떤 시는 격류다. 어떤 시에서는 뒷골목 만취한 부랑자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어떤 시에는 격랑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검푸른 파도소리가 들린다,

그에게 현실의 질곡과 시의 질곡은 하나다. 시는 역사의 산물이기에 시가 죽으면 역사의 진실이 죽는 것이다. 초기 시에는 이런 역사의식보다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시기의 허무적 비애감은 만물은 소멸한다는 죽음의식에 기초한다. 이 죽음의식이 지상의 삶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낳고 기행(奇行)과 자학적 일탈을 낳는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천착과 최초의 시간에 대한 갈망을 낳는다.

중기로 접어들면서부터 그의 시는 역사와 현실에 대해 날카롭게 눈뜨기 시작한다. 10년 동안의 승려생활을 마감하고 환속한 그는 1970년대 참여문학 대열에 합류한다.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와 정치에 눈을 돌리고, 민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중적 역사의식을 싹틔운다. 불의의 시대, 폭압의 정치권력에 맞서 격렬히 투쟁한다. 이때부터 체포와 구금이 반복되고 초기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 시적 자아는 자취를 감춘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현실과 역사를 다면적으로 응시하여 그것을 서사적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역사 속 민중들의 삶의 세목들을 반복과 중첩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다. 선(禪)적 사유와 리얼리즘 시각을 결합하여 짧은 선시도 쓰고, 필생의 작업으로 생각했던 『백두산』(전7권)과 『만인보』(전30권)를 집필해 나간다.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 고은(高銀 1933∼ )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이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는 1967년 신동문(辛東門, 1928~1993) 시인의 모친상을 주관하기 위해 충청북도 문의 마을에 갔을 때의 사색적 경험을 담은 시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문의 마을이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서정적 공간으로 그려져 있다. 죽음만큼 적막한 길, 마을의 모습이 애잔한 이미지로 떠오른다. 휘날리는 눈에게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고 묻는 시인의 마음 또한 백자 항아리처럼 차고 서늘하다.

삶의 길과 죽음의 길을 사색하면서 시인은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느낀다. 마을의 길과 들판을 덮는 눈은 주검을 덮는 흰 수의를 닮았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숙명적 소재로 사용된다. 결국 눈이 마을 전체를 하얗게 뒤덮어가는 과정은 죽음이 삶을 껴안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의식(儀式)인 셈이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하나가 되고 있다.

/함기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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