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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숙

동광초등학교 교장

오랜만에 보석함을 열었다. 낡은 쌍가락지 한 쌍이 다정하다. 시어머니의 유품이다. 시부모님과 11년을 같이 살았고 89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내게 든든한 지원군이셨다. 딸 둘 출산 후 5주간이나 며느리 손에 물 한 방울 닿지 않게 살뜰히 보살펴 주셨고,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뜨면 어느새 어머니가 젖병을 흔들고 계셨다. 감사한 마음에 목걸이 하나 해드렸더니 내가 무슨 목걸이가 필요하냐고 하시며 끝내 며느리 것으로 바꿔오신 오로지 주시기만 하신 분이었다.

어머니가 지닌 유일한 귀금속이 어머니의 주름진 손처럼 닳고 닳아 실금이 가고 가늘어진 금가락지 한 쌍이었다. 어머니가 반지를 끝까지 끼고 계셨다면 내 것이 되지는 못했을 거다. 동서들도 있고 손위 시누도 셋이니 막내며느리인 내 차지가 될 리 만무했다. 그 쌍가락지가 내 손에 들어온 건 순전히 안전상의 이유였다. 연세가 들수록 살이 빠지시더니 여든 살이 되셨을 즈음에는 헐렁거린다고 가락지 두 개를 무명실로 두껍게 동여매어 끼고 계셨다. 손에 물 마를 날 없으셨던 어머니의 가락지에 감긴 무명실은 늘 얼룩지고 더러워져 있어서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어머니가 쌍가락지를 나에게 건네셨다. "며늘아가, 고생했다. 이것 하나는 꼭 너에게 주고 싶구나!" 뭐 이런 말이라도 하셨다면 훨씬 그럴 듯하겠지만 울어머니는 그럴 분이 아니셨다. 부끄러움이 많으셨던 어머니, 육남매 낳아 기르셨고 아들 둘을 교사로 키워내셨지만, 집에 손님이라도 오면 어느새 방으로 숨으셨다. 불평을 늘어놓는 법도 없으셨지만, 입에 발린 칭찬 한마디도 없으신 담백한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가늘어진 손에서 반지가 쑥 빠져버려서 잃어버릴 뻔하자,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우니 네가 가지고 있으라며 맡기신 것이다. 반지를 다시 돌려드리지 못했다. 사그라드는 꽃처럼 점점 왜소해지던 어머니의 손가락엔 아무리 무명실을 감아도 더는 반지를 낄 수가 없었다.

우리 며느리 예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셨어도 넘치는 사랑을 다 느낄 수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가면 깜깜한 거실에서 TV를 보시다가 "이제 오니? 밥은?"이라고 물어보시고는 무심하게 방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걱정과 염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의사결정을 존중해주셨고 시아버님 말이라면 토 다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모든 일상은 오로지 가족에게만 향해 있었다. 손녀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세상에 저렇게도 예쁠까 싶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딸아이가 "할머니, 물!"이라고 하면 코를 골며 주무시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가셨다. "할머니 주무시는데 엄마한테 달라고 해야지."라고 했더니 "나 안 잤다."라며 말이다.

어머니의 쌍가락지는 어머니와의 추억을 소환하는 스위치다. 요즘처럼 추웠던 날, 퇴근하는 며느리에게 "춥다. 아랫목에 누워라." 하시며 이불을 당기시고 베개를 쓱 밀어주시던 그 날로 데려다 준다. 아직은 어머니의 손가락에 쌍가락지가 끼워져 있던 그 시절이 무척 그리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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