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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숙

관기초등학교 교장

고향을 떠나 멀리 살다보니 가족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1년에 한두 번 방학 때가 되면 엄마를 뵈러 잠시 고향에 간다. 온가족이 모여 저녁 먹고 얘기 나누다 보면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묵혀둔 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어서 늘 아쉬움을 남긴 채로 돌아오곤 했다.

올해는 설명절이 겨울방학 기간에 있어서 울산에서 며칠 머물 수 있었다. 시끌벅적 떠들며 시간을 보내던 언니들과 조카들이 돌아가고 엄마랑 단 둘이 앉아 있었다.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방 한구석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엄마의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테두리가 너덜너덜 헤진 가방이었다. 재작년인가 우리 집에 잠시 오셨을 때 엄마의 가방이 무척이나 낡았길래 새 가방을 사드린 기억이 났다. 그런데 저 낡은 가방은 뭐람!

"엄마, 새 가방은 어쩌고 이 걸 그대로 쓰는 거예요?"

"새 거는 어디 갈 때만 쓴다 아이가!" 여든일곱의 나이에 아껴서 언제 다시 쓰겠다고 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몸에 밴 절약습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헌 가방을 버리자고 제안하니 아까워 하시면서도 동의해주셨다.

새 가방을 찾아와 이것저것 옮겨드리는데 반으로 접혀 너덜너덜해진 하얀 봉투가 있었다. 그야말로 낡은 편지봉투였는데 보자마자 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오래된 엄마의 용돈봉투였다.

어느 해 울산 가는 날이었다. 엄마께 드릴 용돈을 봉투에 넣으며 몇 자 적고 싶어졌다. 늘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평소에는 봉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드리거나 돈만 챙겨드렸다. 그 날은 하얀 편지봉투에 하트를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 라고 썼다.

장거리 고속도로 차 안에서 딸들이 지루해 하길래 봉투를 예쁘게 꾸며보라고 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두 아이들은 좋아했다. 내가 쓴 글씨 옆에 "할머니, 사랑해요"를 시작으로 봉투 전체를 볼펜으로 예쁘게 꾸몄는데 그럴 듯 했다.

"너그들이 그렸나? 와 이리 예쁘노!" 그 날 엄마는 용돈봉투를 받으시며 유난히 좋아하시더니 아직도 그걸 간직하고 계셨다.

"엄마, 이게 뭐라고 안 버리고 아직도 가지고 계세요?"

"예쁘다 아이가. 사랑한다고 적혀 있다 아이가!"

'엄마, 사랑해요.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써 있다고 못 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10년을 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하셨다. 받침 없는 글자를 겨우 읽으시는 엄마가 가방을 열 때마다 꺼내 띄엄띄엄 읽으셨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 편이 찡~ 해졌다.

멀리 사는 막내딸인 나는 되도록 자주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드린다. 직접 만나기 어려우니 용돈을 드리고 가끔 옷을 사드리는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산다 하셨다.

왜 나는 안부를 묻는 전화와 용돈을 드리는 것으로 딸이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표현한다고 생각했을까? 이왕이면 예쁜 봉투에 넣어 드리고 이왕이면 짧은 편지라도 써 드리고, 쑥스러워도 사랑한다 말해드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그리 아꼈을까?

정작 나도 딸아이들이 생일 때마다 정성껏 써준 손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면서 말이다. 가끔씩 꺼내 흐뭇한 웃음 지으며 한참이나 읽고 또 읽으면서 말이다.

엄마 나이 여든일곱이 되셨어도, 여느 어르신들처럼 머리가 하얗게 되셨어도, 무릎이 아파 걷는 것도 힘드셔도 엄마는 그저 엄마인데 말이다. 자식이 써 준 '사랑해요'라는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는 나와 똑 같은 엄마일 뿐인데 말이다.

어버이날이 가까워져 온다. 후회해도 늦기 전에 이번에는 좀 더 긴 편지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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