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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우

시인, 충북대 국문과 교수

사고는 한 달 전에 일어났다고 치자. 테니스를 시작한 지 십오 년이 됐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새벽에는 한 시간씩 조깅을 하는 나에게 어울릴만한 사고는 아니지만 뇌혈관이 터져버렸다. 뇌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한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왼쪽 눈꺼풀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어린 딸이 문병을 와도 안아줄 수 없는데 이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중풍으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어머니는 내게 차분한 목소리로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아들이 슬퍼하는 것은 참기 힘들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괜찮으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해줄 수도 없는데 살아있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왼쪽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만으로 책을 쓴 사람이 있다. <잠수종과 나비 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의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가 바로 그 사람이다. 얇은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그는 눈꺼풀을 2만 번 깜박여야 했다. 로크트 인 신드롬 locked-in syndrome 환자가 된 그가 책을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의 동료가 알파벳을 순서대로 불러주면 원하는 알파벳이 나올 때 눈꺼풀을 깜박이는 식으로 한 단어를 완성하고,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내 책 한 권을 쓴 것이다.

로크트 인 신드롬 환자들은 사고가 난 뒤로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죽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인데 장 도미니크 보비는 사고 이후부터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사고가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사고를 계기로 그에게 잠재해 있던 역량이 분출되었을 것이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문학 작품을 쓰면서 보내겠다고 결심할 만큼 현명했으며, 누가 보아도 최악의 현실에 처했는데도 웃음을 잃지 않을 만큼 용기가 있었고, 글을 쓰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좋은 책을 내는 것과 관련해서는 운도 따랐던 셈이다. 물론 그런 운이라면 누구도 원하지 않을 테지만.

내가 아끼는 제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 학생의 가정환경은 최악이어서 차라리 로크트 인 신드롬 환자의 처지가 더 나아보일 정도였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손에 맡겨졌는데 초등학생 나이가 되고부터는 일 년에 열두 번도 넘는 제사를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사가 끝난 뒤 제기를 씻고 마른 행주로 닦아서 정리를 하고 나면 새벽 세시가 넘곤 했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모진 소리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집안일을 해야 해서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야자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야자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에 와도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학비를 벌기위해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잠이 부족해서 수업시간에 자꾸 눈이 감기는 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한다. 거식증 증세가 심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요즘 조금 나아졌다며 밝게 웃는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엇나가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기를 지켜봐주고 믿어주는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었단다. <잠수종과 나비>를 읽어 보라며 "우리학교 도서관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아니에요 선생님, 좋은 책은 사서 봐야지요"라고 한다.

자기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잠수종처럼 옥죄어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만드는데도 그의 영혼은 나비처럼 자유롭다. 그녀는 아직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이미 장 도미니크 보비만큼 현명하고 용기 있게 살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잠이 부족할 일도 없으며, 눈꺼풀 하나로 의사소통을 해야 할 정도로 불운을 겪지도 않았고, 소나기에 씻겨 더 푸르러진 여름 숲을 내년 이맘때 다시 볼 수 있는 확률이 내가 윔블던에 나가지 못할 확률보다도 높은 처지에 있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삶은 잠수복이 내 몸을 옥죄는 날이 올 때까지 미뤄둬야 하는 걸까? 한 생을 사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살지 않았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낡아빠진 잠수종을 입고 있었던 셈이다.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로크트 인 신드롬 환자다. 준비는 다 됐다. 이제 나비처럼 아름답게 날아오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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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