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비 중 청주한씨 외에 우리고장을 관향(貫鄕)으로 한 가문이 또 있다. 청풍김씨로 현종비 명성왕후와 정조비 효의왕후 등을 배출했다. 명성왕후와 명성황후는 다른 인물이다. 명성왕후의 한자는 明聖, 명성황후는 明成이다. 흔히 민비로 불리는 인물이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이다. 청풍김씨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을 지낸 인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진 후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淸風)에 세거했다. 청풍김씨가 문벌을 활짝 꽃피운 시기는 대동법 확장으로 유명한 명신 김육(金堉·1580∼1658) 때이다. 선조~효종 연간을 산 김육은 이때 이미 세거지 청풍을 떠나 한성에 터를 잡았다. 이처럼 시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누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을 경화벌열이라고 한다. 명성왕후와 효의왕후도 경화벌열의 여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제 태어난 곳은 청풍이 아닌 서울이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김육이 사망한지 얼마 안 돼 왕비가 됐다. 바로 김육은 명성왕후의 친조부가 된다. 친아버지는 한때 복상(服喪) 문제로 송시열과 불화를 겪었던 김우명(金佑明)이다. 그녀는 한양 장
조선의 역대 임금은 추존된 경우를 포함해 총 32명이 배출됐다. 왕비는 이보다 다소 많은 48명이 배출됐다. 이는 병사 등으로 인해 왕비를 다시 얻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조선의 왕비는 국왕의 정실 부인으로서 중궁(中宮)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말한다. 사극을 보면 흔히 중전(中殿)으로 표현되나, 이는 '중궁전'의 준말이다. 이밖에 왕비는 국모(國母), 내전(內殿), 곤전(坤殿), 성녀(聖女) 등의 이칭도 지니고 있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었다. 간택 절차를 거쳐 세자빈에 책봉되면 훗날 세자인 남편이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도 왕비가 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세자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왕비로 책봉된 사례도 적지 않았고, 원래의 왕비가 쫓겨나거나 사망하여 후궁이 왕비에 책봉된 예도 있다. 신분상으로는 숙종의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양반가의 출신이다. 왕비의 존칭은 왕과 동등하게 '전하'(殿下)이며, 품계는 없다. 1894년 갑오경장 때 왕비와 대비를 각각 왕후와 왕태후로 격상하면서 그 존칭이 '폐하'(陛下)로 바뀌기도 했다. 침전은 경복궁의 경우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은 대조전
조선전기 호불군주(好佛君主)로는 세종과 세조가 있다. 세조는 속리산 복천암과 정이품송 전설에서 보듯 초지일관 불교를 사랑했다. 세종은 다소 달랐다. 처음에는 불교에 대해 강압적이고 비판적이었다. 조선전기 여러 종파가 난립하자 선종과 교종 등 두 종단만 남기고 정리한 군주가 바로 세종이었다. '그러므로 조계·천태·총남 3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 4종을 합쳐서 교종으로 하며, 서울과 지방에 중들이 우거할 만한 곳을 가려서 36개소의 절만을 두어, 양종에 분속시킬 것입니다.'- 당시 예조가 건의한 내용으로, 세종은 이를 모두 수용했다. 그 결과, 지금의 충북에는 보은 속리사와 충주 노은면의 보련사만 남고 모두 산문을 닫아야 했다. 대신 살아 남은 사찰에는 재정지원 규모가 확대됐다. '충청도 보은 속리사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1백 40결을 더 주고, 거승은 1백명이며, 충주 보련사는 원속전이 80결인데, 이번에 70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입니다.'- 세종은 말년에 가족사에 비운이 잇따르자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궁궐 안의 호불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임금이 바뀌자 대신들의 상소가 경향을 가리지 않고 빗발쳤다. 다음은 충청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라 혜공왕 때(776년) 진표율사가 처음 조성한 것으로 돼 있으나 직접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법주사 미륵대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처음 등장한다.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이 중수했는데, 석조와 석교·석옹(石翁) 등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인용문 중 '산호전에는 금신장육상이 있으며'라는 문장을 다시 한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당시 미륵대불이 장육상이기는 하나 산호전이라는 실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금신'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32길상(吉相)의 하나인 황금옷을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조선후기의 옛문헌에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험스런 면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국시가 유교였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이
국제저널 '무형유산' 편집위원들이 최근 속리산 법주사를 방문, 문화재를 둘러보고 예불의식도 참관했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33m의 엄청난 높이로 주변 산세까지 압도하고 있다. 법주사 미륵대불은 재료상 콘크리트-청동-금동불 순으로 변화했다. 콘크리트가 청동불로 바뀌는데는 안정상의 이유, 청동이 금동불로 바뀌는데는 외관의 모습이 크게 작용했다. 전자의 경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부 콘크리트 철근이 부식됐을 가능성이 우려됐고, 후자는 청동인 까닭에 용접선이 그대는 드러나는 등 외관상 보기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더라도 법주사 미륵대불이 황금색의 띄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는 단순히 '보기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는 교리적인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 32길상은 중아함경과 방광대장엄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른바 부처님 외모에 관한 규정이다. 이중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접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유육계(頂有肉髮), 나발우선 기색감청(螺髮右旋 其色紺靑), 액광평정(額廣平正) 등이 있다. 순서대로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이마가 넓고 평평하며 바르다'
지난 1997년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속에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한글 필사본 소설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킨 바 있다. 저자는 우리고장 음성 태생인 채수(蔡壽)라는 인물이다. 작품은 일종의 저승 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적인 내용으로, 주인공 설공찬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구조로 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부분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채수는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울러 소설에는 여성도 글을 할 줄 알면 관직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 사회체제를 통박한 것이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 등이 소설이 아닌 모두 불경의 번역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줘왔다. 설공찬전은 조선 최초의 금서였다. 그러나 각계각층의 독
'안순이 말하기를,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것이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극형에 두는 것은 의(義)에 있어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그 죄를 밝히십시오' 하니…'- 인용문에 안순(安純·1371∼1440)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안순은 중세 봉건시대인 조선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인권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지닌 인물있다. 특히 그는 사형 집행의 신중함을 역설했다. 사고가 유연했던 그는 흐르는 물의 운동 에너지를 이용하는 수차(水車)에도 관심을 보였다. 수차의 역사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서아시아로 거슬로 올라간다. 당시 서아시아 사람들은 하사(下射), 즉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수차에 이용해 밀을 빻았다. 중국에서는 후한 초기에 수대(水石+焦), 삼국·육조 때는 수애(水석+豈), 당·송 때는 통차(筒車)가 발달했다. 수대는 물방아, 수애는 맷돌류, 통차는 관개용 수차를 각각 의미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때 수차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권경(勸耕)한…
인류 뇌물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 무렵의 이집트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도 뇌물이 골칫거리였다. 이집트 왕조는 뇌물을 '공정한 재판을 왜곡하는 선물'이라고 규정, 이를 단속했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수령이나 무관에 임명된 벼슬아치는 인사가 날 경우 해상 부서인 이조나 병조에 가서 사례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당참례(堂參禮)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당시 규정으로 불법은 아니었다. 조선전기에 이미 그 내용이 보인다. '새로 임명된 호군(護軍)은 사은숙배하고 의정부에 당참례를 행한 뒤 본방에 참알·회좌(回坐)를 행하기 전에는 (…) 각처에만 명함을 들이고, 타처에는 출입할 수 없다.'- 문제는 당참례가 아닌, 이때 은밀히 오가는 굼품인 당참채(堂參債)에 있었다. 지방관에 임명된 수령이나 무관이 인사부서인 이조나 병조를 방문했을 때 그곳 하급관리들이 노골적으로 금품을 요구했다. 이때 자문(尺文)이라는 영수증까지 발부됐다. 어떤 거래가 있을 경우 이를 증명하기 위해 교부됐던 자문은 길이가 한 자 가량되는 짧은 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지방관들이 부임지 고을에서 당참채의 재원을 마련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백성들에
신미대사를 이야기 할 때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동생 김수온(金守溫·1410∼1481)이다. 신미대사의 본명이 김수성이니까 영산(영동 지칭) 김씨의 '守' 자 돌림이다. 김수온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학사, 승문원교리 그리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한성부윤(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이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부원군은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 또는 정1품 공신에게 준 칭호로 받는 사람의 본관인 읍호(邑號)를 그 앞에 붙인다. 김수온은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세종이 그 재주를 듣고 특별히 명하여 집현전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치평요람을 수찬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글제를 내어 집현전의 여러 유신을 시켜 시문을 짓게 하면, 김수온이 여러 번 으뜸을 차지하였다.'- 형 신미대사와 마찬가지로 김수온도 세종에 이어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은 김수온의 집이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쌀 10석과 말(馬)를 내려주었다. 세조는 김수온이 우리고장 영동의 어머니에게 문안차 가려하자 한강에서 술을 내어 전송하기도 했다. '그때 김수온이 어머니를 성문하러 영동현(永同縣)에 가는
전회에 신미(信眉·?-?)대사의 법호가 이례적으로 길고 극존칭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신미대사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는 '대조계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승양 조도 체용 일여 비지 쌍운 도생 이물 원융무애 혜각 종사(大曹溪禪敎宗都總攝密傳正法承揚祖道體用一如悲智雙運度生利物圓融無·惠覺宗師)로, 무려 37자에 달한다. 그러나 이 법호는 사실은 문종이 아닌 세종이 준비했던 법호였다. 세종은 궁궐내 내원당 건립 등 신미대사의 불사에 감사를 표시하는 의미로 '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싸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 법호를 내리기 전에 승하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 문종이 대신 전하게 된다. 골수 유교분자들인 대신들이 "그 법호는 안 된다"며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들이 보인 반응 정도는 '국조 이래로 이런 승직이 없었다'(문종실록)라는 것이었다. 하위지는 "안팎이 눈을 비비며 간절히 유신(維新)의 정치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정사에서 간사한 중에게 존호를 내리시었으니, 바르지 못한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세종~예종 연간에 우리고장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인물로 신미대사((信眉·?~?)가 있다. 그의 본관은 영산(永山), 즉 지금의 영동으로 그의 집안은 본래 유학을 숭상했다. 그러나 신미는 부친 김훈(金訓)이 주지육림에 빠지자 출가했다. 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집현전 직제학 박팽년 등이 상서하기를, "(신미는) 그 아비 김훈이 죄를 입게 되자, 폐고(廢錮)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몰래 도망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 본문 중 '폐고'는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미대사와 관련해 이른바 '한글창제 주도설'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이 설은 대략 세종이 한글창제를 기획하고 작업을 주도한 인물은 신미대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미가 세종·세조 두 임금과 유난히 친밀했던 점, 한글창제후 유교가 아닌 불교경전이 집중적으로 간행된 점, 법호가 유난히 길고 극존칭으로 돼 있는 점 등을 꼽고 있다. 이밖에 월인석보와 훈민정음이 불교적 상징을 지닌 108장과 33장으로 각각 구성돼 있는 점 등도 거론하고 있다.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내용은 현존하는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재료와 모양에 따라 술잔(盃)의 이름을 다양하게 불렀다. 규화배(葵花盃), 옥배(玉杯), 수정배(水晶재), 앵무배(鸚鵡盃), 나배(螺杯) 등이 있다. '규화배'는 접시꽃 모양, 앵무배는 바다의 앵무조개, 나배는 소라껍데기로 만든 것을 말한다. 사전은 앵무조개에 대해 '헤엄칠 때는 아가리를 위로, 갓을 아래로 하고 껍데기를 앞으로 하여 후퇴 방향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대다수 임금들은 잔을 중요시 여겼다. 특히 애주가형 임금일수록 잔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연산군도 애주가형 군주에 속한다. 그에 얽힌 이야기가 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전교하기를, "나배(螺杯) 3백∼4백 개를 생산되는 곳에서 채취하여 들이게 하라"하였다.'- '전교하기를, "규화배 1천, 앵무배 1백을 구워 만들라" 하였다.'- 연산군이 왜 한번에 수백내지 1천개의 술잔이 필요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여러가 정황상 '궁중 파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같은 추정은 "팔정배(八呈杯) 및 일체 주기(酒器)를 숙용(淑容)의 집 헌수연에 진배하라"는 표현에서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숙용은 임금의 후궁에게 내리던 종3품 내명부의 품계를 말한다. 조선시대 후궁들은
조선시대는 청렴결백한 관리인 청백리(淸白吏)를 제도적으로 육성·관리했다. 청백리 제도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종실록에 청백리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도입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백리의 선발은 전후기가 달랐다.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이조에서, 후기에는 비변사·이조가 왕명에 따라 2품 이상의 관료자 중 생존하거나 사망한 인물을 1차 대상으로 했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청백리 중에 이약동(李約東·1416∼1493)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세종 때 진사시와 문과에 잇따라 급제한 후 제주목사까지 승진했다. 그의 청백리에 얽힌 이야기는 이때 만들어 진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공이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냥할 때에 채찍 하나를 가졌었는데, 임기가 차서 돌아올 때 그 채찍을 벽 위에 걸어 두었었다. 후에 섬 사람들이 보배처럼 간수하여 매양 목사가 도임하면 채찍을 내어 놓았다. 세월이 오래 되자 좀이 먹어 부서지니 화공(畵工)을 시켜 그 채찍의 형상을 그려 걸어 놓았다.'- 공적(公的)으로 주어진 물건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개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인용문에는…
도굴(盜掘)의 사전적인 의미는 '법적 수속이나 관리자의 승낙을 받지 않고 고분 따위를 파거나 광물을 캐내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꼭 땅속이 아니더라도 사찰이나 고택에서 옛 유물이나 유품을 훔치는 행위도 넓은 의미의 도굴로 보고 있다. 몇년전 국내 최고 수준의 도굴꾼으로 불리는 서모씨가 "내가 직지를 훔쳤다"고 말해, 지역의 주목을 끈 바 있다. 또 얼마전에는 1백년전 청주 음식문화를 다룬 '반찬등속'이라는 고문헌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했다. 1백년전 청주 강서의 한 양반가에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반찬등속은 아쉽게도 우리 지역이 아닌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여러 정황상 강서지역에서 도난당한 것이 여러 경로를 거친 끝에 민속박물관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도굴꾼들이 활개를 쳤다. 실록에도 도굴과 관련된 내용들이 다수 등장한다. 특히 충북 불교의 공간적인 종가(宗家)가 되는 속리산도 자주 등장한다. 지금은 법주사가 도내 최고의 대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복천사(福泉寺·지금의 복천암)도 그에 못지 않았다. 복천사는 신미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 세조 임금이 방문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이때 세조는 불전 이상의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
고려말기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과 시녀 반야(般若)의 사생아라고 빡빡(?) 우겼다. 어떤 때는 '왕'이라는 호칭도 생략하고 그냥 '우', '창'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쿠데타 명분이 반비례적으로 강화되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에 쓴 고려사에 이어 실록에도 같은 표현이 보인다. "왕씨는, 공민왕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남으로부터 신우(辛禑)가 사이를 틈타서 왕위를 도적질했다가, 죄가 있어 사양하고 물러갔으나, 아들 창(昌)이 왕위를 물려받았으므로 국운이 다시 끊어졌습니다."- 조선 초기 조정은 반란을 우려해 왕씨들에 대한 대대적인 멸족 작업에 착수했다. 언뜻 생각하면 '과연 한 성씨를 멸망시키려 했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록을 보면 사실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매우 단문이지만 왕씨에 대한 수장 행위가 있었음을 그 행동자 이름까지 기록해 놓았다. '윤방경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에 던졌다. 손흥종 등이 왕씨를 거제 바다에 던졌다.'- 이밖에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태조실록)라는 표현으로 봐 육지에서도 멸족 행위가 진행됐음을 알
조선은 '대국을 섬긴다', 즉 사대(事大)를 외교의 한 방도로 삼았기 때문에 매년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하정사(賀正使), 동지사(冬至使), 성절사(聖節使) 등이 바로 그것으로, 이른바 삼절사라고 불렀다. 하정사는 새해 정월, 동지사는 세밑 동지 무렵, 성절사의 황제나 황후의 생일에 맞춰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이중 하정사는 매년 10월말이나 12월초에 떠나서 그 해가 가기 전에 북경에 도착, 40∼60일 동안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 중국 황제에게는 모시·명주·백면지(白綿紙)를, 황후에게는 나전소함(螺鈿梳函) 등을 바쳤다. 백면지는 고급 종이의 일종, 나전소함은 자개로 만든 화장 도구함을 일컫고 있다. 힘없는 나라 조선의 사신은 황태후와 황태자에게도 선물을 바쳐야 했다. 그 종류는 황제와 비슷하나 그 수량은 대략 절반 정도였다. 그해 하정사는 2월중에 떠나서 3월말이나 4월초에 돌아오는 것이 통례였다. 세종 즉위년(1418)의 하정사로 김여지(金汝知·1370∼1425)라는 인물이 선발됐다. 세종이 김여지에게 중국 황제의 신년맞음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휴대하게 했다. 이렇게 정초에 중국에 올리는 외교글을 '정조하표전'(正朝賀表箋)이라
중국의 용은 은나라, 그러니까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늦은 청동기 시대부터 용 문화가 관찰되고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는 국보 제 147호인 천전리 각석이 존재하고 있다. 선으로 새긴 그림들 중에는 4개의 다리와 2개의 지느러미를 가진 몸통이 긴 동물이 그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우리나라 최초의 용그림으로 보고 있다. 용 문양이나 장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아무대로 사찰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존재하고 있다. 불교 건축물에 용 문양과 장식이 적극적으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사명, 영규대사 등에서 보듯 조선의 승려들은 북인과 합세해 임진왜란 때 전공을 많이 올렸다. 임란이 끝난 후 불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완화됐다. 그러자 불교계는 이때부터 백성들을 절로 불러들이기 위해 민간에 퍼져있던 용 사상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했다. 불교 건축물의 각종 용 조각과 용 그림은 바로 백성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계산된 상징기호였다. 따라서 고려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유교건물인 향교와 서원에는 용장식이 관찰되지 않는다. 국보 55호인 팔상전은 임란후인 인조(17세기) 때 재건된 목탑이다. 이 팔상전을 잘 살펴보면 용그림
충주시 이류면의 행정명칭이 2012년 1월 1일부터 '대소원면'(大召院面)으로 공식 변경됐다. 이류면은 그 동안 한자가 '利柳'(이류)로 다름에도 불구, 어감상 '이류'(二類)를 자주 연상시켜 왔다. 따라서 충주시는 지난 2010년 10월의 실태조사, 2011년 3월의 명칭변경추진위 구성 등 그 동안 면이름을 바꾸기 위한 절차를 꾸준히 진행해 왔다. 그 결과, 시민공모를 통해 들어온 '국원', '대소원', '다인', '서충주', '중원' 중 인지도다 높은 '대소원면'으로 정하고 주민의견 조사와 시의회 조례 개정을 통해 이를 최종 확정했다. 이로서 이류면이라는 행정명칭은 97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류면이라는 명칭이 처음 생겨난 것은 경술국치(1910) 이후의 일로, 그리 오래된 편은 아니다. 일제는 지난 1914년 이안면에서 '이', 유등면에서 '유' 자를 따서 '이류면'으로 작명했다. 당시 이안면에는 대소원리, 금곡리, 마치리, 성종리, 본리, 노옥리, 흑평리, 불방리, 하검리 등 19개 리가 속해 있었다. 반면 유등면에는 팔봉리, 수주리, 하담리, 월은리, 기동, 매산리, 장승리, 수현리, 산정리, 용두원, 만적리 등 18개 리가 포함돼 있었다
금년은 용의 해, 그것도 흑룡의 해로 일컬어지고 있다. 용은 열두띠 중 유일한 상상의 동물이다. 이와 관련, 학계에는 뱀, 공룡, 인도신화, 기상관련설 등 대략 4가지 설이 등장해 있다. 앞선 3가지는 표현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기상관련설은 용오름 현상과 관련이 있다. 극단적인 저기압이 해수면에 형성되면 깔대기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진다. 작년 가을에도 동해에서 이같은 현상이 관찰됐다. 옛사람들이 이를 목격했으면 충분히 용의 승천을 연상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다. 일부에서는 용을 '구사(九似)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용은 이른바 이미지 조합의 동물로, 여러 짐승의 특장을 두루 갖추고 있다. 뿔은 사슴, 머리는 뱀, 눈은 토끼를 닮았다. 이밖에 목덜미는 뱀,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손바닥은 호랑이, 귀는 소와 비슷하다. 바로 '구사'는 용이 아홉가지 동물을 닮았다는 뜻이다. 용은 성장하면서 이름도 달리 부르고 있다. 정치계절이 되면 자주 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이무기·잠룡·항룡 등이 있다. 이무기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상태로, 물속에서 5백년을 지내야 용이 된다고 한다. 잠룡은 용이 됐으나 아직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은 용을 말한다. 대권 잠재 주자들에게…
문서위조는 지금도 고전적인 범죄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토지문서는 물론 과거 시험장에서 문서를 위조하는 사건이 비일비재 했다. '형조에 전지하기를, "부장소(部將所)의 서원(書員) 백주(白珠)·김양선(金楊善) 등은 정병(正兵)의 재물을 받고 혹은 놓아 보내고 혹은 대신 입번(立番)하게 하였으며, 사노 유석숭(劉石崇) 등은 제포선군의 해령직 고신(告身)을 위조하였으니, 아울러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문서위조는 병역과 학력에 관한 유형들로 볼 수 있다. 전자는 뇌물을 받고 병역 대상자를 풀어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는 것이고 후자는 고신, 즉 인사 임명장을 위조한 사건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문서 위조범을 엄하게 다스렸다. 특히 임금의 뜻이 담긴 왕지를 위조했다고 적발될 경우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다. 그리고 공포감을 의도적으로 조성하기 위해 그 시신을 저잣거리에 장시간 방치했다. '사노(私奴) 최문(崔文)·오천수(吳天壽) 등이 왕지(王旨)를 위조하였으므로 모두 참형에 처하여 기시(棄市)하였다.'- 뿐만 아니라 문서 위조범의 가족에게도 연좌죄를 적용, 시골 관청의 노비로 삼기도 했다. 예종실록의 '인문(印文)을…
경차관은 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관직을 말한다. 1396년(태조 8) 8월 신유정(辛有定)이라는 인물을 전라·경상·충청 지방에 파견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 왜구 소탕이 주목적이었다. 재정·산업과 관련된 것을 살피는 것도 경차관의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이들은 이른바 곳간관리 실태와 재해발생 상황 그리고 유랑자 발생 여부 등도 자세히 관찰했다. 이밖에 수령과 향리(鄕吏)의 근무태도, 법 적용이 공정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도 경차관의 주요 업무였다. 조선전기의 명 경차관으로 박원형(朴元亨·1411∼1469)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충청도를 한번 돌고 오면 관내 수령들의 비행이 고구마 줄기를 뽑아 들 듯이 걸려나왔다. 특히 기생과 관련된 기행이 가장 많았다. 충청도 경차관 박원형이 돌아와 아뢰기를, "충주 목사 임효충과 판관 임계중 이 비석(碑石)을 끌어 나른다고 핑계하고 숙마(熟麻)를 백성들에게 중하게 거두었고, (…) 충주에 갔다가 국상(國喪)의 기년(期年) 안에 여기(女妓)와 간통하여 잤습니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숙마는 잿물에 삶아 희고 부드럽게 만든 삼 껍질을 말한다.권간이라는 인물도 거의 같은 유형의 비
조선시대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이이(離異)의 사유가 됐다. 이이는 '헤어져서(離) 다르게 된다(異)'는 뜻으로, 이혼의 조선시대식 표현이다. 여자의 경우 저고리 섶을 잘라 남편에게 주는 것으로 이혼의 징표를 대신하기도 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아들을 못 낳는 것(無子) △행실이 음탕한 것(淫行) △질투하는 것(嫉妬) △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 △말이 많은 것(口舌)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칠거지악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장가들 때는 가난했지만 뒤에 부귀하게 되었거나 △아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등은 삼불거(三不去)라고 해서 남편은 부인을 버리면 안 됐다. 이 경우 이른바 유처취처(有妻娶妻)에 해당돼 처벌을 받았다. 이는 정실 부인이 있으면서 또 다른 정실 부인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전기 유처취처를 했다가 처벌을 받은 인물로 고태필(高台弼)이 있다. 해외인(海外人)인 그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오늘날의 고시인 문과에 급제하고 또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는 등 관료생활 초기에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사람은 '해외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처취처 때문에 곤욕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우리고장 청주를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어가행렬에도 개인의 성격이나 당시 문화가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행정구역 경계까지 마중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 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어가행렬에서는 고려 문화가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건국 초기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인용문 중 나례(儺禮)라는 단어가 그 힌트어가 된다. '청주에 이르니 목사 진여의와 판관 민도생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 앞에 절하였다.'- 나례는 음력
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은 과거에는 현(縣)이 설치돼 있던 곳으로, 그 현은 비교적 늦은 대한제국기까지 존속됐다. 이와 관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문의현에 현감이 파견됐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문의현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됐다. 현감과 현령은 다같이 외직(지방직)의 밀단 기관장이나 품계에서 차이가 났다. 현감이 종6품인데 비해 현령을 종5품의 품계를 지녔다. 현령이 1등급 더 높은 셈이다. 조선시대 현감은 태종 임금 때 처음 도입됐다. '각도의 단부(單府)) 고을을 도호부로 고치고,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고치고…'- 현령제도가 언제 도입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령은 삼국시대에 이어 고려 때도 그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조선의 현령제도도 이를 계승한 측면이 있다. 다만 현의 규모가 중요도에 있어 현감과 차별을 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대현에 현령, 소현에 처음에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문의는 규모가 큰 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감이 아닌, 현령이 파견된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문의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인데, 신라 때
'한명회의 장소(葬所)는 충청도 청주 땅인데 3일의 노정이 되니 백관이 회장하기가 어렵습니다. 발인하는 날에 각사의 한 관원이 담복으로 먼저 도문(都門) 밖 육조·의정부에서 설전한 곳에 나아가서, 위(位)를 달리하고 서립(序立)하여 전송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한명회(韓明澮·1414~1487)의 이승 마지막 모습이다. 그는 예종, 성종 등 잇따라 두 임금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에 백관이 도문 밖에 도열하는 등 장례식도 무척 화려했다. 그의 딸은 장순왕후(예종비)와 공혜왕후(성종비)이다. 한명회의 관은 3일간 운구된 끝에 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안장됐다. 이와 관련, 문중사를 기록한 '청주한씨사감'(淸州韓氏史鑑)은 한명회가 '나의 선조 고향은 청주요, 나의 고향도 청주이니 내가 죽거든 청주 땅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천안 일대는 청주목 소속으로, 한명회의 관향과 일치한다. 그러나 한명회가 관향을 의식해 지금의 장소에 묻히길 원했는지는 분명치 않은 면이 있다. 실록에는 이와 합치되지 않는 내용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대사헌은 사헌부의 으뜸 벼슬(종2품)로, 정무적인 것을 논평하고 모든 관료를 규찰하고 풍속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