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우리고장 영동 출신의 김훈이라는 인물은 아내 여흥이씨와 사이에 김수성(金守省), 김수경(金守經), 김수온(金守溫), 김수화(金守和) 그리고 딸 1명 등 4남 1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김수성이 출가해 속리산 복천암 주지를 지낸 신미(信眉) 대사이고, 김수온은 식우집(拭·集)을 남기는 등 조선전기의 대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신미대사의 첫째 동생인 수경도 벼슬이 낮지 않았다. 먼저 우리고장 보은현감을 역임했다. '신미가, 임금이 부처를 받들어 믿는 것을 의지하여 자주 짧은 편지로써 임금에게 통해 아뢰어, 아우·조카가 벼슬에 제수되어 뜻과 같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김수경이 보은현감으로서 벼슬에 초배(超拜)되니, 인망(人望)에 맞지 아니하여 물의가 자자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충청도 수부읍의 하나인 청주목사를 지내기도 했다. 때가 영농철에 접어들었는지 성종은 김수경에게 민폐끼치는 행정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청주목사 김수경·영해 부사 김효급·예안현감 김귀지가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이제 바야흐로 농사가 시작되어 백성이 노고할 것이니, 폐해가 되는 일을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김수
세조의 1464년 충청도 순행은 신미(信眉·1403-1479) 대사가 주지로 있는 속리산 복천암이 'U턴', 즉 반환점이 됐다. 그러나 당시 실록은 충청도 순행의 본래 목적이 온양행궁 거둥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금이 온양(溫陽)에 행행(行幸)하고자 하여, 봉원부원군 정창손·예조 판서 박원형 (…) 공조 참판 강희맹을 수상(守相)으로 삼고…'- 그러나 세조는 곧바로 온양행궁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가 속리산 복천암을 방문했다. 그렇다면 세조의 어가는 한양도성을 나서기 직전, 거둥 코스를 긴급히 바꿨거나 아니면 경호문제 등으로 인해 '연막'을 피운 것이 된다. 세조가 원래의 목적지를 한참 벗어나 복천암 신미대사를 만난 것은 둘 사이의 인간적인 친밀함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와 승려를 탄압했다, 심지어 도첩제라는 것을 실시, 승려의 도성 출입도 금지했다. 이런 환경에서 왕과 승려가 '서로 꼭 봐야 할 사이'가 됐다면 그 전에 뭔가 특수한 인연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 특수한 인연의 중간매체로 훈민정음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골수 중화주의자인 대신들의 반대가 뻔
청주향교는 5성과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은 초정약수에 행차를 할 때 청주향교에 여러 권의 서적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청주향교에 하사된 책은 통감절요, 통감훈의, 집성소학, 근사록, 통감강목, 성리군서, 사륜집 등 9권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5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때…
세조 어가는 1464년 2월 26일 청주를 출발하여 피반령(皮盤嶺·360m)을 넘어 회인에서 1박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를 남북으로 잇는 피반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역사성이 오래 됐다. 세조 어가는 27일 보은 동평을 지나 병풍송에서 1박했다. 이때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가 영접나와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 어가는 그 다음날(28일) 충청도 순행의 맨 남쪽 꼭지점인 속리산 중턱의 복천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속리사(俗離寺)를 경유하기도 했다. '임금이 속리사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 30구, 전지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로, 이날 복천암이 세조로부터 받은 전토는 60만평이나 됐다. 위 인용문은 눈여겨 볼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3일 청주에 도착해 이틀간 머물렀다. 이때 세조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실록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유생, 창기의 노래 환영이 있었고, 104살의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시를 바친 것으로 나타난다. 세조는 그 노인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했다. '노인에게 주육을 하사하였다.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나이 1백 4세이나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므로 임금이 그 노인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포와 술 및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당시 세조의 어가를 호종, 경호군사를 총괄 지휘한 인물은 병조판서 윤자운(尹子雲)이었다. 그는 경호군사들의 군기와 관련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청주도착 이틀째 되는 날 갑자기 인원 점검을 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왕의 순행과 관련해 가장 풍기문란적인 내용이 적발됐다. '이어 종친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발하게 하였더니, 의정부 사인 성윤문이 민가에 투숙하였고, 사대장 김처의가 군을 버리고 마을에 들어갔으며, 예조좌랑 이수남·이길보는 기녀를 데리고 민가에 투숙하였고, 또 충찬위 이세정은 술에 취하여 길가에 누워 있었다.'- 경호원들의 행동을 유형별로 요약하면 △민가 투숙 △기녀와 동침
세종대왕 때 청주목 초수리 행궁을 건립한 사람은 김흔지(金人+完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세종의 어가보다 한달 먼저 초수리에 내려와 행궁 건립을 시작했다. 이때가 1444년(세종 26) 1월 27일이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 윤(內贍寺尹)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行宮)을 세우게 하고….'- 그의 이름은 같은 해 2차 초정약수 거둥 때(음력 7월 22일)도 등장한다. 이때는 행궁 건립이 아닌 기존 행궁의 수선이었다. '내섬시윤 김흔지를 청주에 보내어 초수 행궁(椒水行宮)을 수선하였다.'- 김흔지는 내섬시윤으로 출발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정2품)에 오를 정도로 행정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단종은 그가 졸하자 손수 관까지 내리기도 했다. '한성부윤 김혼지가 졸하니, 관곽(棺槨)과 부의로 종이 1백 권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수리 행궁은 그로부터 4년후인 1448년 3월 실화로 화염에 휩싸였고 범인은 하옥됐다. 세종은 이런 범인을 "지금 농삿달을 당하여 여러 날 옥에 가두어 두는 것은 심히 불가하니'(세종실록 30년 5월 21일자)라며 석방토록 했다. 이후 초수리 행궁은 세종대왕…
1464년 2월 22일 초수리(초정약수)를 떠난 세조의 어가는 다음날인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초정약수~청주는 한나절 거리로 그렇게 먼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걸린 것은 세조가 중도에 사냥놀이를 하고 천변에서 신하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면령(免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서를 세자와 신숙주·홍윤성 등에게 내려서 이르기를, "내가 종훈 ·여러 장수와 더불어 적은 것을 베어서 나누어 마시는 것은…"'- 세조가 청주에 도착하자 사장이 쌀을 바치고, 창기들은 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사장'은 조선조 때 사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일컫는다.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사장(社長) 40여 인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으며, 한 중이 목탁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노인·유생(儒生)·창기(娼妓)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 조선전기 청주목을 경유한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 모두 3명이다. 이 부분에서도 세 임금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 때
세조의 어가가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초정약수)에 당도한 것은 1464년 2월 21일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이날 진천~초수리 구간을 단 하룻만에 이동했다. 따라서 세조의 어가가 초수리에 도착한 시간을 늦은 오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의 어가를 맞은 당시 청주목사는 고태필(高台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1465년 청주목사가 되어 정사를 엄정히 집행, 아전들은 그를 두려워 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글로써 아뢰기를, "청주 목사 고태필·온양 군사 이신효·임천 군사 박휘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상세하고 공명하여,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하니, 승직(陞職)할 만하고…"'- 초수리에 도착한 세조가 다음날 한 일은 사냥과 천변에서 가진 작은 술자리였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토령(吐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川邊)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민족의 기록문화 꽃으로, 국보 제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이런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에 의해 한글로 완역돼 있어, 일반인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부분은 번역상 적지 않은…
세종과 세조는 20년 시차를 두고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속도는 달랐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 어가는 한양도성~초정약수 구간을 닷새에 주파한데 비해, 세조의 어가는 하루 이른 사흘 걸렸던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세조는 '오고'(五鼓)에 일어나 하루 거둥을 시작했다. '5고(鼓)에 어가(御駕)가 거둥하였는데, 어가 앞의 횃불이 혹은 꺼졌다가 혹은 밝아졌다가 하였으므로 횃불을 없애도록 명령하고…'-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종각의 북을 쳐서 통금의 시작과 해제를 알렸다. 이를 '파루(罷漏)라고 불렀고, 이를 어긴 자는 경수소(警守所) 곳에 구금하였다가 그 다음날 위반한 시간에 따라 곤장을 차등있게 때렸다. 이밖에 조선시대는 저녁 무렵부터 새벽까지를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다섯 마디의 시간을 각각 일고(一鼓)~오고(五鼓)라고 부르고, 그 숫자만큼 북을 쳤다. 다섯 단계의 맨 마지막인 '오고'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를 뜻했다. 한여름에 새벽 5시면 날이 훤하게 새나, 겨울철은 그렇지 않다. 음력 2월말도 많이 어두운 편이나, 세조의 어가는 그 시간에 거둥을 시작
한양도성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는 사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세조 어가를 맞이했다.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이 어가를 맞이하고, 절제사 권언이 군사를 거느리고 결진(結陣)하였는데,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하였다. 임금이 우상대장 김질에게 명하여 용천산(湧川山)에서 몰이하게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세조실록은 신영손이 도계 어느 곳에서 세조의 어가를 영접했는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천 광혜원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광혜원에는 충청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인장을 주고 받는 교구정(交龜亭)이 존재했다. 당시 관찰사 인장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 장소를 '교구정'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교구정은 한양애서 봤을 때 그 초입에 해당하는 문경새재 동쪽 사면에 위치했고, 지금도 현존한다. 세조의 어가가 좀더 남행(南行)을 해 진천 광석(廣石)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진천 광석이 어느 곳인지는 지명 추적이 잘 안 되고
세종대왕은 눈병 치료를 목적으로 1444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우리고장 초정약수를 찾았다. 조선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아들인 세조도 그로부터 20년후 초정약수를 찾았다. 세조가 초정약수를 찾은 것 역시 치료 목적이었으나 병명은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가려운 증상의 피부병을 '아양'이라고 불렀다. 세조는 이 '아양' 치료를 위해 충청도 순행에 나섰다. 세조는 권력 찬탈 과정에서 조카 단종과 동복동생 안평·수양대군을 죽인 까닭에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가지가 저절로 올라갔다'는 정이품송 전설도 정통성 시비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각종 야사도 세조가 얻은 피부병을 그의 정통성 시비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세조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자신을 꾸짖었다. "네가 내 자식을 죽이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라며 세조의 얼굴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이후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이 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비명했고, 세조는 피부병을 얻었다.' 피부병 치료를 위한 세조의 충청도 순행은 1464년 1월 하순부터 시작됐다. 당시 조정은 이와 관련한 '특별 경계령'을 충청병영에 내렸다. '충청도
조선시대 호조(戶曹)는 조세, 부역, 인구 등을 담당했던 관서로, 그 수장은 지금의 경제장관에 해당하는 호조판서(정2품)다. 각종 문헌은 조선시대 최고의 호조판서로 충청도관찰사도 역임한 윤현(尹鉉·1514-1578)을 자주 기록했다. '윤현이 비용을 아끼고 보관해 두는 것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각사에 오래 묵어 썩고 깨진 물건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뒤에는 모두 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사옹원에서 깨진 사기 그릇을 거두어다가 저장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이 인용문의 악센트는 뒤에 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를 비웃었지만, 그 비아냥은 곧 탄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후에 궁성을 수리하게 되자 단청 물감을 담을 그릇이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깨진 사기 그릇을 내어다 나누어 주니 사용하기에 넉넉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나라 도간(陶侃)이 나무 톱밥을 사용하게 했던 것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의 무장인 도간은 배를 만들다 남은 나무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지만 곧 요긴하게 사용됐다. 나무 톱밥은 눈이와 진창이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門前石路半成沙)'- 이옥봉의 대표적 한시 작품인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전회에 여러번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국어학자 이종문 계명대 교수는 '몽혼'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한국한문학연구 제 47집에서 제기했다. 논문의 제목은 '이옥봉의 작품으로 알려진 한시의 작자에 대한 재검토'다. 그는 이 논문에서 조선 중기의 문신은 윤현(尹鉉·1514-1578)의 '국간집(菊磵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한시의 제목이 우리 고장 지명의 '題贈淸州人'이다. '人間離合固無齊 / 忍淚當時愴解携 / 若使夢魂行有跡 / 西原城北摠成蹊.'-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이옥봉 시인의 삼척과의 인연과 작품세계를 조명하자는 문화계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옥봉(李玉峰)은 당시 충북 옥천군수인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나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詩)를 짓는 것으로 고독한 세월을 보내던 중 삼척부사를 지낸 조원(趙瑗)의 첩으로 살면서 삼척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2011년 8월 30일자 기사 내용이다.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이옥봉은 의 기사 내용대로 첩 신분으로 남편 조원을 따라, 1583~1586년 3여년 동안 삼척에 기거했다. 이옥봉은 이 기간동안 삼척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죽서루'와 '춘사'(春思)라는 한시를 남겼다. 시 '죽서루'는 매우 짧은 시이기는 하나, 하늘과 땅을 한 지점에서 조망하는 등 입체적인 풍광을 그리고 있다. '강물에 몸담근 갈매기의 꿈 드넓기 그지없고(江涵鷗夢闊) / 하늘에 든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만 하구나(天入·愁長).' '강물'과 '하늘', '갈매기'와 '기러기' '꿈'과 '시름', '드넓고'와 '길기만' 등의 시어에서 보듯 이 시는 뚜렷한 대구(對句)를 하고 있다. '죽서루'는 서애집, 청창연담, 일사유사 등에 이옥봉의 작품으로 수
실학자 이덕무는 이옥봉의 한시를 "부녀자로서 대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일이다"라고 호평했다. 그녀 또한 자부심이 대단, 정실부인 아들에게 준다는 뜻인 '증적자'(贈嫡子)라는 시를 남겼다.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妙譽皆童稚) / 동방에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東方母子名) /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라고(驚風君筆落) /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네(泣鬼我詩成).' 인용문의 '묘한 재주 어릴 적부터 자랑스러워'는 정실 아들의 글짓기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뒷문장은 '우리 모자 이름 날렸네'로 돼 있다. 옥봉 자신도 그에 못지 않게 문재(文才)가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음 구절은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옥봉은 정실 아들의 글솜씨에 대해 '네가 붓을 대면 바람이 놀란다'라고 칭찬한다. 반면 자신의 글솜씨는 '내가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운다'라고 더 자찬(自讚)했다. '읍귀'(泣鬼)는 '읍귀신' 즉 '귀신도 울린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하지장(賀知章* 659-744)이 이태백의 시를 보고 극찬한 말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시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도…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여류시인인 이옥봉(李玉峰·?-?)을 소실(첩)로 맞은 조원(趙瑗·1544-1595)은 수재형 인물이었다. 그는 명종대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선조대에는 별시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이 부분은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는 시문에도 능해 빼어난 한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지은 시중에 '별원즉사(別院卽事)'가 있다. 봄날의 서정이 잔물결이는 물가를 지켜보듯,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묘사돼 있다. '정원의 실바람에 제비 나직이 날고(庭院微風燕影低) / 배꽃 핀 방초 언덕엔 새들이 지저귀네(梨花芳··鳥啼) / 담 모퉁이에 지는 해 의당 늦은 봄이라(墻頭落日宜春晩) / 행원 서쪽에 붉은 꽃 요란히도 나부끼리(·亂飄紅杏苑西)'- 조선후기 실학작의 한 명으로 이덕무가 있고, 그는 '청정관전서'를 저술했다. 그는 이 문집에서 "이 시는 마치 만당(晩唐)의 시체(詩體)와 같다"고 평했다. 생소한 표현인 '만당'은 중국 당(唐) 나라의 말년의 시를 초당·성당·중당·만당 등 4시기로 구분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중 만당은 문종 이후 당말에 이르는 시기를 일컫는다. 조원의 시가 당나라 말기의 한시를 닮았다는 뜻이다. 조원의 시중 위와 같은 분위기를 풍
우리고장 옥천 출신의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이옥봉( 李玉峰·?-?)은 어머니가 천인이었지만 그녀의 몸에는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봉(李逢, 1526~?)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호는 자운(子雲)이다. 그녀는 이런 혈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지녔고, 그같은 심리는 한시로 나타났다. 그녀 대표작의 하나로 '영월도중'(寧越道中)이 있다. 글자 그대로 강원도 영월을 가는 도중에 지은 한시다. '닷새는 강을 끼고 사흘은 산을 넘으며(五日長干三日越) / 슬픈 노래 부르다 노릉의 구름에 끊어졌네(哀詞吟斷魯陵雲) /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妾身亦是王孫女) / 이곳의 두견새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此地鵑聲不忍聞).'- 인용한 내용 중에 '노릉'과 '이몸 또한'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노릉은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端宗)의 능을 의미하고, '이몸 또한'은 자신도 그런 핏줄이라는 점을 강한 자의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녀의 결혼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내용이 각종 자료에 공통적으로 서술돼 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시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역시 문재(文才)를 갖춘 남성를 따르고자 했다. 그 결과, 조원이라는 인물의 문재가 대단함을 알고 그의 소실
조선시대 여류문인으로는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이에 못지 않은 여류 시인으로 16세기 인물인 이옥봉( 李玉峰·?-?)이 있다. 조선의 남성 지식인들은 그의 작품을 매우 호평했다. 권응인(權應仁·1517-?)은 '송계만록에서 "옥봉의 시는 청원장려(淸圓壯麗)하여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 아닌 듯 매우 가상하다"라고 평했다. 인용문 중 '청원장려'는 맑고 모나지 않으며, 힘이 있으면서 아름답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허균(許筠·1569∼1618)도 학산초담에서 비슷하게 평가, "이옥봉은 그 시가 몹시청건( 淸健)하여, 거의 아낙네들의 연지 찍고 분 바르는 말들이 아니다"라고 했다. '청건'은 맑으면서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다양한 내용의 시를 남겼으나, 특히 임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운율로 잘 표현했다. 일반인에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고 서예대회 시제로도 자주 등장하는, '꿈속의 넋' 정도로 해석되는 '몽혼'(夢魂)이 있다. '요즈음 안부 어떠시냐고 물으신다면(近來安否問如何) / 달이 비친 사창에서 저의 恨도 많답니다.(月到紗窓妾恨多) / 만약 꿈속에 다닌 길 자취가 있다면(若使夢魂行有跡) /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
연좌제(連坐制)는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를 말한다. 연좌제에 대한 동양 삼국의 첫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쓴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역사 50인의 모략가 중 한 명으로 진(秦)나라 상앙(商革+央)이 있다. 그는 국민을 10호·5호로 조직하여, 그 중 1인이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도 처벌하도록 아이디어를 냈다. 이른바 십오지제(什伍之制)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연좌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전기부터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세종대 이효관(李孝寬)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외할아버지 죄에 연좌되어 극형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그러자 당시 의정부가 이렇게 아뢴다. '대체로 죄인의 친딸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부가(夫家)를 따라 면죄하거늘, 하물며 효관(孝寬)은 외손(外孫)으로서 연좌되었사오매, 실로 근거가 없다 하겠으니, 바라옵건대…'-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러자 고종과 민씨 일족은 즉각 연좌제를 발동, 개화파 가족에 대한 치죄에 나섰다. 이때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와 양부인 김병기는 삭탈관직
현재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묘는 일본 동경시내 아오야먀(靑山) 외국인 묘역과 진정사(眞淨寺) 경내, 그리고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3개의 무덤은 나름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중국 상해에서 암살됐다는 소식이 일본열도에 전해지자 그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1835-1901)를 중심으로 '김씨장의위원회'가 구성돼 장례가 치뤄졌다. 그러나 아오야마 묘는 김옥균 시신이나 의복이 매장되지 않은 단순 '위패묘'이다. 대신 묘비명은 존재하고 있고, 이를 지은 사람은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다. '오호,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때를 만나 비상한 공이 없이 비상한 죽음이 있었다. 시체는 고굴에 돌아갔어도 사지가 찢기는 욕을 당하였구나.'- 김옥균을 존경한 일본인 중에 카이군지(甲斐軍治)라는 사진사가 있다. 그는 1881년 김옥균을 처음 만난 이후 최후까지 정신·물질적으로 지원한 인물로, 자신이 죽을 경우 "김옥균 묘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김옥균의 묘를 동경 진정사에 조성한 인물이 바로 카이군지이다. 1927년 조선거류민단은 '청물어'(淸物語)라는 책자를…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면, 김옥균은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추구했다. 두 사상의 명칭은 다르지만, 한·중·일 삼국이 공존공영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옥균은 삼화주의에 대한 첫 번째 실천으로 당시 청나라 실력자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을 만나고자 했다. '百千의 호위가 있어도 죽을 때에는 죽는다. 인간 만사가 운명이다. 虎穴에 들어가지 않으면 虎子를 얻을 수 없다. 이홍장이 나를 속이고자 하여 겸양한 말로 맞이하며, 내가 그를 속이고자 하여 그 배를 탄다.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유배 지칭)된다면 즉각 끝이다. 5분이라도 담화의 시간을 준다면 내 것이다.'- 전집을 쓴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은 중국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인물로, 김옥균의 또 다른 일본내 후견자이기도 했다. 인용문 중에 '그쪽으로 가고 즉시 죽음을 당하거나 幽人된다면 즉각 끝이다'라는 독백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이는 김옥균 자신도 중국 상해행에 대해 내심 매우 불안해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옥균과 몸종 격의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 그리고 홍종우 등은 1894년 3월 23일 여객선 사이쿄마루(西京丸)을 타고 고베항 출발, 3일 후 중국
옥천으로 피신한 김옥균의 부녀를 서울로 최종적으로 데려온 사람은 같은 개화파였던 박영효로 알려져 있다. 동학군의 기세가 충청도와 호남을 휩쓸 무렵 '이윤고'(李允曰+木)라는 사람이 옥천으로 찾아온다. 그는 김옥균이 1차로 일본을 갔을 때 통역으로 따라갔던 인물로,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던 일본군을 따라 우리고장 충북에 들어왔다가 두 모녀를 만나게 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이는 우연이 아닌 의도된 행동으로 그 뒤에는 박영효가 있었고, 박영효는 뒤에는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1835-1901)가 있었다고 관련 논문들이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의 부탁을 받은 박영효가 이윤고에게 김옥균 부녀의 근황을 알아보도록 시킨 것이 된다. 현재 일본 1만엔권 지폐에는 인물 도안이 그려져 있다.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일본 내에서는 근대화 주역의 한 명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김옥균이 차관을 얻으러 일본을 갔을 때는 물론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 양아버지이자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는 메이지 천왕의 스승이면서 현재 동경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난학숙'을 세웠다. 현재의 산케
김옥균의 부인은 기계 유씨(兪氏)로 두 사람이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김옥균이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후 일본으로 망명할 당시 슬하에 7살 난 딸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1870년대 중·후반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전투가 벌어진 창덕궁을 탈출, 인천항에서 밀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부인 기계유씨와 딸도 연좌제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시아버지 김병태(金炳台)가 살고 있는 우리고장 옥천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당시 옥천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김옥균의 정변 동지였던 정납이란 인물이 쓴 '옥주유고'(沃州遺稿)에 등장한다. 옥주를 지금의 옥천을 말한다. 정납은 이 유고에서 '김옥균의 처 유씨가 옥천 관노로 있을 때 친척들의 도움을 받았다'라고 쓴 것으로, 바둑연구가 이청 씨가 '김옥균 통신'이라는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유씨가 한때 옥천관노가 됐다는 것은 피신해 왔다가 신분이 탄로난 것을 의미한다. 주한일본공사관은 김옥균 부인의 행방이 묘연하자 정보망을 총력 가동했다. 주한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인 스기무라(杉村濬)는 1894년 6월 8일자…
고종과 민씨 일가의 수구파들은 갑신정변 때 당한 치욕을 곱씹고 있었다. 고종은 김옥균(金玉均·1851-1894) 암살을 위해 칼잡이(자객)를 거푸 일본에 밀파했다.1885년에 장은규(張殷奎·일명 장갑복 또는 장응규), 1886년에는 지운영(池雲英·1852-1935)을 몰래 보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김의 암살에 실패했다.장은규는 평민출신으로, 고종의 아들(의화군, 후에 영친왕)을 낳았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민비)에게 미움을 받아 궁중에서 쫒겨난 장상궁의 오빠다. 그는 한때 충주 노은면에 살았던 민응식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접근해 1만5천엔의 행동자금을 받고 김옥균 암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김옥균을 한번 만난 후 더 이상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거금을 물쓰듯 하며 환락에 빠졌다. 당시 일본경찰은 '요시찰 거동' 제목의 정보문건을 통해 "장은규는 나가사키의 게이샤(유녀)를 첩으로 삼아 고베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다"라고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다.본관이 충주인 지운영은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인 지석영의 친형으로, 국내 제 1호 사진사이기도 하다. 그는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간 일본에서 사진술을 익혀 훗날 고종의 초상화용 사진을…
일본의 극우 세력이 준동하면서 최근의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흡사 구한말 같다는 표현이 적지 않다. 구한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자 개화운동가인 김옥균(김玉均·1851∼1894)이다.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이 단행된 지 2갑, 즉 120주년이 되지만 김옥균 서거 1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풍운아 김옥균은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을 '갑신정변'(1884년)이라는 매우 급진적인 방법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하려 했다. 고종실록은 우정국 낙성식장에서 일어난 갑신정변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김옥균 등이 생도 및 장사들을 시켜 좌영사 이조연. (…) 내시 유재현 등을 앞 대청에서 죽이게 하였다. 상께서 연거푸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고 하교하시는 말씀이 있기까지 하였으나, 명을 듣지 않았다. 이때 상의 곁에는 김옥균의 무리 십수 명만이 있었는데, 상이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게 하였고…'- 이 부분은 고종이 사실상 유폐된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민씨로 대표되는, 수구파의 도움 요청을 받은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1천5백명을 이끌고 창덕궁을
[충북일보]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 법 개정으로 지역 부흥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는 법 개정에 무게를 뒀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상당구를 상당하게' 등 공약을 크게 2개 파트로 분류했다. 첫 번째 부분인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공약에선 △판·검사 등 국가 공무원과 변호사를 분리 선발하는 시스템 마련 △검찰청의 기소청 전환 △검사의 특활비 축소 △저출생 정책 수립 추진 등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 후보는 주로 사법시스템 개혁 방점을 찍었다. 대체로 현행 법을 개정해 잘못된 국가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이 골자다. 공약 중에 또 눈에 띄는 부분은 SK하이닉스 지원 등 미래 산업 육성이다. 청주 지역경제의 한 축인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공정(M15, M17) 증설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공약이다. '상당구를 상당하게' 부문에는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교육 등의 공약이 담겼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와 상업지역 공동주차구역 관리제를 도입하는 공약과 근로자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상조휴가법' 신설 등이 눈에 띈다. 또 △아동수당으로 월 20만원을 지급 △기업 대상 청년인력 유지지원금 혜택 부여 △다함께 돌봄센터 설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경로당에서 노인을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60대가 검찰에 넘겨졌다. 청주상당경찰서는 특수협박·폭행 혐의로 A(61)씨를 구속 송치했다고 27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3일 오후 2시 30분께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한 경로당에서 노인 B(77)씨를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술을 마시고 경로당을 찾았다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왜 나는 이용을 못 하냐"며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자, 경로당 안에 있던 B씨가 "왜 욕을 하냐"며 제지했고, 이에 격분한 A씨는 주먹으로 B씨를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B씨가 폭행을 당한 뒤 112신고를 하자 흉기를 들고 "죽여버리겠다"며 난동을 부린 것으로도 파악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긴급 체포했다. / 임성민기자
[충북일보] "지역경제와 회원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태환 청주상공회의소 회장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 지역 상공인 권익 향상을 위한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담담한 어조로 밝혔다. ◇청주상공회의소가 확산시킬 신(新)기업가 정신은. "기업의 역할에 있어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 중요해졌다. 기업이 가진 혁신역량과 기술, 자본, 아이디어를 활용해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기업의 새로운 역할에 부응하겠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들을 위한 쉼터버스 제작, 위기청소년 심리상담과 일자리 제공, 저출산 극복을 위한 돌봄환경 개선사업 등 기업의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가 비즈니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겠다." ◇지역내 소비 침체가 길어지고 있다. 촉진방안에 대한 구상이 있나. "소비 촉진을 위한 다양한 우리 지역의 행사에 저희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좀 도움을 드리거나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하겠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비 촉진 챌린지에 동참했다. 이같은 방향으로 청주상의에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