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가뭄 등 천재지변이 찾아오면 임금의 부덕함으로 하늘이 노한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그 노여움을 풀기위해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 조정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제를 지내는 것 외에 산에 올라가 장작불을 놓고 기우제를 지냈다. 흰 연기가 하늘에 닿으라는 의미에서 였다. '종묘·사직·원단과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비를 빌었다. 임금이 오랫동안 가뭄으로 인하여 대전(大殿)에 나아가 정사를 듣지 아니하고, 날마다 더욱 두려워하여 수성(修省) 하였다.'- 태종대는 가뭄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러자 저자에는 '태종이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보위에 올랐기 때문'(1차 왕자의 난 지칭)이라는 쑥덕공론이 나돌았다.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임금이 내관을 시켜 불러서, 역마(驛馬)를 타고 함께 이르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들으니 네가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고 하니, 나를 위하여 한번 비를 빌라." 하였다. 이에 가학이 재계(齋戒)하고 사흘이면 반드시 비를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인용문 중에 '가학'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성이 문(文) 씨인 그는 경상도 진주 사람으로 목화로 유명한 문익점의 조카이다. 그의 기도가 신통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태
주역은 계절에도 음양이 있는 것으로 봤다. 우리 선조들은 음력 1-6월은 양, 그 이후는 음의 기운이 강하다고 믿었다. 전반기 명절인 1월 1일 설날,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등은 모두 양수(陽數)의 결합을 하고 있다. 반면 음의 기운이 강해지는 7월 이후부터는 저녁이나 달(月)과 관련된 절기문화가 전면에 등장한다. 7월 칠석에 '저녁 夕' 자가 들어가 있고, 8월 15일은 한가위 대보름이다. 금년은 오는 24일이 단오이다. 우리 선조들은 단오날 창포로 빚은 창포주(菖蒲酒)를 즐겨 마셨다. 실록에도 임금이 직접 창포주 제조를 하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참의 황자후(黃子厚)에게 명하여 창포주(菖浦酒)를 만들게 하였다.'- 이처럼 선조들이 창포주를 즐긴 것은 취흥보다는 질병 퇴치에 목적이 있었다. 허준은 창포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창포주방(菖蒲酒方) 뿌리를 교즙하여 찹쌀의 양과 상반(相半)되게 한 다음, 상법대로 양조하여 구복(久服)하면 연년익수(延年益壽)하고 신명(神明)을 통한다."- 단오가 양기의 절정을 이루는 때이기는 하나 하지(夏至) 뒤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날 이후로는 음의 기운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하는 등 기(氣)의 환절기에…
조선 영조-순조 연간의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 있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할 처지였으나, 신분상승 운동의 일종인 서얼통청에 힘입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것이 있다. '윤구연의 점괘는 삼남에 죽을 것(死於三南)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가 삼남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남병사(南兵使)로 부임하여 남태회의 상소에 의해서 남대문(南大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실록에도 충청도 병마절도사 출신인 윤구연이 당시 대사언이던 남태회(南泰會·1706∼1770)의 상소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난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남태회가 아뢰기를, "남병사 윤구연은 자신이 수신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윤구연이 즉시 체포돼 한양으로 이송됐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했다'는 증거를 찾기위한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윤구연의 근무처에서 '술냄새 나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임자 당신 날 싫다고 울치고 담치고 배추김치 소금치고 열무김치 초치고 / 칼로 물벤 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목가고서 왜 또 날 찾아 왔나.' '당신이 날마다 울치고 담치고 열무김치 소금치고 오이김치 초치고 / 칼로 물친 듯이 뚝 떠나 가더니 평창 팔십리 다 못 가고서 오니 되돌아 왔나.' 두 민요 가사는 같은 듯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 전자는 '서울제' 정선아리랑이고 후자는 '지방제' 정선아리랑이다. 아리장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변하는 특징이 있다. 중국만주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이 좋은 예가 된다. 서울제 정선아리랑도 정선아리장이 남한강을 타고 내려와 서울에서 변한 것이다. 변화를 이끈 주체는 역시 뗏목꾼이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우리고장 충주 등 북부지역과 경기도 여주 주변에도 정선아리랑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뗏목꾼은 물품거래 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문화의 전파자 역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건·사고에 얽힌 얘기까지 등장한다. 성종 3년(1472) 우리고장 제천의 정병(正兵) 김중선 등 여섯명이 한강 하류에 이르러 3명은 익사하고 3명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땅길이 아닌 뗏목을 이
조선시대에는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 등 이른바 삼금(三禁)정책이 자주 반포됐다. 우금은 농우(農牛) 도살을 금지하는 것, 송금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금년같이 큰 가뭄이 찾아올 경우 삼금정책의 하나인 금주령이 선포됐다. 실록을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한 결과, 조선시대 경우 총 175건의 금주령이 포고됐다. 역대 왕별로는 성종(31건), 영조(29건), 세종(17건), 중종(14건) 순으로 많았다. 금주령은 △근신 절제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 절약의 목적을 지녔다. 금주령은 가뭄이 심한 봄ㆍ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됐다. 또 보통은 중앙 조정의 결정으로 직접 반포됐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도 반포됐다. 그러나 금주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ㆍ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됐다. 금주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같은 내용의 국가법령이…
조선시대에는 수년마다 기근이 찾아왔고 수십년에 한번씩은 이른바 대기근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사는 기상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조선 조정은 그때마다 진휼정책을 실시했다. 그 기본은 인접한 도(道)의 진휼미를 기근이 발생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가령 강원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경우 충주 경원창의 비축미를 육로를 통해 이동시켰다. 실록은 우리고장 충청도에도 대기근이 심심찮게 찾아왔던 것으로 기록했다. '전라도의 쌀 5만 석을 충청도에 옮겼다. 이보다 먼저 본도 감사가 아뢰기를, "기민(飢民)의 전후 수효의 총계가 70만 1천 2백 89인인데 (…) 비록 전라도의 쌀 9만 석을 조운(漕運)하더라도 진휼하여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인용문은 세종대에 발생한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수치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기민의 숫자가 70만1천여명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들은 구휼하려면 쌀 9만석이 필요하나 전라도에서 방출되는 것은 고작 5만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기상재해에 따른 대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군자감의 묵은 쌀·콩…
청주 신항서원이 창건 당시에 제향한 인물은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였다. 임진왜란 10년 후에는 김정, 그리고 조금의 시차를 두고 한충, 송준길, 송상현, 이득윤, 이이, 이색 등의 위패를 차례로 추향하게 된다. 이와 관련, 김수항이 지은 신항서원 이건(移建) 상량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같은 당에 각기 따로 신위를 배설한 것은 도덕의 고하의 차이를 나타냄이라. 한 중간에 가장 높이는 신위(위패)를 남면하여 배설하고…'- 인용문은 '도덕의 고하에 따라' 신위를 새롭게 배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중앙에 자리잡은 위패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였다. 서원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앙 자리가 위계가 가장 높고 중요시됐다. 신항서원은 이후 화양서원이 건립되기 전까지 청주목을 대표하게 된다. 봉안된 위패 중에 김정(金淨·1486∼1521), 한충(韓忠·1486-1521)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생몰 연대뿐만 아니라 사림파라는 점이 같다. 김정은 우리고장 보은, 한충은 청주가 고향이다. 1519년(중종14) 조광조 등 사림파가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동지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중죄
서원(書院)과 사우(祀宇)는 명현과 관련된 전통시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좀 다르다. 서원은 유학 발달과 관련된 충신이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을 제향한다. 반면 사우는 가문의 인물을 주로 모시고 있다. 우리고장 충주 신니면의 박팽년 사우(충북도기념물 제 27호)가 대표적인 사례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는 신항(莘巷)서원이 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3) 조강 등이 청주지역 여러 사림들과 상의하여 지금의 용정동(속칭 이정골)에 세웠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딴 '유정'(有定)서원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의 위패를 모셨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란 기간중 왜군에게 점령당한 청주도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전화를 입었다. 유정서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구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란후 농경지가 급감하고 유랑자가 많아진 상황에서 복구가 쉽지 않았다. 당시 유정서원의 원장은 서계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었다. 그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동향의 院儒가 무려 1백명에 가까운데 지금 참여하는 사람은 불과 11명에 불과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군이 올 발굴 30주년을 맞았다. 충북대 박물관팀이 지난 1982부터 2003년까지 총 6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수십여기의 고분에서 4~5세기 무렵의 한성백제기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됐다. 무기류로는 철갑옷, 화살촉, 철도끼, 철창 등이 나왔고 말과 관련된 무구류로는 말재갈, 등자(발걸이) 등이 수습됐다. 이밖에 '손잡이잔'(파배) 토기도 수습됐다. 고고학적 발굴에는 종종 비화가 뒤따른다. 신봉동고분 발굴에도 비화가 존재하고 있다.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그해 3월 대학 동기인 고고학자 심정보 씨 등과 원래는 상당산성을 산책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차용걸 교수가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자 "상당산성 대신 가까운 야산인 신봉동 일대를 산책하자"며 장소를 바꿨다. 차 교수는 이날 신봉동 일대에 도굴된 고분이 매우 많이 존재하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충북도에 긴급 발굴조사를 의뢰했다. 그로부터 두달 뒤 충북대 박물관팀에 의해 정식 발굴조사가 시작되면서 유물이 수습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도굴갱이 1천개가 넘었다. 특히 도굴범이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나무 위에 망루까지 설치해 놓고 마음껏 무덤을 파헤쳤다. 그
꿈의 사전적인 정의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시각적 심상이다. 꿈의 가장 큰 특징은 꿈꾸는 '나'는 '나'이면서도 현실의 '나'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고전인 주례(周禮)는 일찌기 점몽 편에서 꿈을 꾸게 된 원인에 따라 꿈을 정몽(正夢), 악몽, 사몽(思夢), 오몽(寤夢), 희몽(喜夢), 구몽(懼夢) 등 여섯 종류로 분류했다. 정몽은 깨어나도 기억이 생생한 꿈으로 어떤 문제에 깊이 고심하고 있을 때 주로 꾸게 된다. 악몽은 심히 놀라 꾸는 꿈, 사몽은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꿈속에서 나타난 것을 일컫는다. 잠에서 로또 당첨되는 꿈을 꿨다면 바로 '사몽'이 된다. 이밖에 오몽은 낮 동안에 있었던 일이나 평소에 말한 것을 꿈에 보는 것을, 구몽은 두려워하는 꿈을 말한다. 이밖에 꿈과 관련된 표현으로 비몽사몽(非夢似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태몽(胎夢), 호접몽(胡蝶夢) 등이 있다. 이중 호접몽은 장자(莊子·BC 369 ~ BC 289?)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깨서는, 자기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호랑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데서 나온 표현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꿈을 꾸고 난 후 그 꿈의 인상
전회에 조선시대 화폐 대명사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유통시킨 인물이 우리고장 충주시 소태면에 묘가 있는 허적(許積·1610∼1680)이라고 밝힌 바 있다. 틀린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전에 따라 상평청(常平廳) 설치를 건의한 인물이 있었다. 1633년(인조 11)의 김신국(金藎國)이라는 인물이다. 상평통보는 숙종 때 처음 발행돼 조선후기까지 같은 것이 유통된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평통보는 그 모양과 유통 형태에 따라 무배자전(인조 11년), 단자전(숙종 4년), 대형전(숙종 5년), 중형전(영조 28년), 소형전(순조 7년), 당백전(고종 3년), 당오전(고종 20년) 등 7종류로 구별되고 있다. 무배자전은 뒷면에 문자가 없어서, 단자전은 뒷면 상부에 약자로 주전소를 표시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숙종-순조 연간에 상평통보가 대·중·소형으로 구분되는 것은 크기가 작아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는 면이 있다. 왜 동전 크기가 작아졌는냐는 점이다. 원료 문제였다. 조선 조정은 상평통보 재료인 구리와 주석의 확보가 쉽지 않게 되자 갈수록 엽전 크기를 작게 만들었다. 김신국은 화폐의 필요성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인조…
서민경제의 주거래 수단은 뭐니뭐니 해도 동전, 지폐 등으로 구성되는 화폐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조선 숙중대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앞서 고려 조정도 이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고려 조정은 곡식, 면포 등 현물로 경제적인 거래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고 있었다. '숙종 7년에 비로소 관청을 설치하여 돈을 주조하고 해동통보(海東通寶)라는 글자를 표면에 새겼다. 드디어 종묘에 고하고 처음으로 돈을 썼으며 (…) 민간에 무역을 허락하여 돈의 편리함을 알게 하였다.'- 인용문 중의 숙종은 조선이 아닌 고려의 임금, 그리고 해동통보가 주조된 숙종 7년은 1102년이 된다. 그러나 해동통보는 오래 유통되지 않았다. 고려 백성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현물을 매매수단으로 선호했다. 고려사에 등장해 있는 내용을 조선후기 이긍익(1736-1806)이 연려실기술에 다시 수록했다. 연려실기술은 '이때 화폐를 쓰게 한 지가 이미 3년이나 되었으나 백성들이 쓰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이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또 폐지하였다'라고 썼다. 조선 조정도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선조-광해군 연간의 명신으로…
얼마전 '이화령 구간 복원 기공식'이 현장에서 열렸다. 금년 10월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연장 46m, 폭 14m의 생태너널이 구축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일제에 의해 끊어졌던 우리 민족의 대동맥을 이어 민족정기와 얼을 되찾게 됐다"는 요지의 축사를 한 것으로 언론이 보도했다. 민족 정기를 거론할 때 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이른바 '일제의 만행'이다. 민족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받았다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 △지명을 개명했다 등의 내용이 단골로 뒤따른다. 이화령에서의 일제 만행은 두번째 유형인 '고개를 뚫어 혈맥을 잘랐다'로 설명됐다. 일제의 만행은 상당부분 사실이고 문헌이나 행정기록 등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 정기를 끊으려는 의도에서 이화령을 신작로 형태로 개통시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화령이 한반도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가 아닌 고려시대다.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 만큼 고려시대에 작성됐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사는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대왕의명을 받아 기술했다. 고려사에 이화령(梨花嶺)의 또 다른 표
조선시대 관청에서는 과거 부임하였던 전임관, 수령 등 고을 벼슬아치의 명단을 기록했다. 이를 환적(宦蹟)이라고 불렀다. 안책(案冊), 수령안(守令案) 등도 같은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환적을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에 청주수령을 역임한 인물은 총 259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기별로 살펴보면, 15~16세기 조선 전기의 청주수령은 총65명인 가운데 이중 44%인 28명이 문과 급제자로 조사됐다. 반면 무과 출신자는 4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5세기 청주수령 중에서는 문과 출신자가 7할에 가까우나, 16세기에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4할대로 떨어졌다. 반면 16세기에는 무관 출신이 7.7%에 이르고 음관도 6명으로 11.5%에 이르는 등 15세기에 비해 문관의 비율이 급락했다. 이밖에 17~19세기의 청주 수령직은 194명중 140명이 문과 출신으로, 72.2%를 차지하였다. 이에 비해 음관 출신은 53명으로서 27.3%, 무과 출신은 1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후기들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 지면서 음관 출신자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현종 연간에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 중에 이만영(李晩榮·1604∼1672)이 있다. 그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1982년 3월 하순에 청주시 운천동 속칭 산직말 입구에서 오래된 비석 하나가 발견된다. 바로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된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碑)는 정방형의 형태로 3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 재질의 비는 높이 92㎝, 너비 91㎝, 두께 15~20㎝ 등의 제원을 지녔다. 발견 당시 비는 윗부분은 절단되고 아래 부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마멸이 심해 비문 내용이 완벽히 판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비문 중에 '壽拱二年歲次丙戌'(수공이년세차병술)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壽拱'은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시절에 사용하던 연호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신문왕 6년(686)에 세워진 사적비로 확인됐다. 따라서 문화재 명칭도 '운천동 신라사적비'다. 비문은 완전한 문장으로 해석되는 것은 거의 없으나 불교찬양, 왕덕 칭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신라 중심의 세계관도 엿보인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설의 위치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비문 판독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멈춰서 있다. 대신 이 비가 3면 비인가, 아니면 4면 비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완전히 해소되고 있지 않다. 지난 1989년에…
송강 정철의 직손 중에 정호(鄭澔·1648∼1736)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을사환국으로 파직돼 문외 출송됐으나 말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르는 등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장암사당'이 우리고장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화영산에 위치하고 있다. 장암사당이 창동리에 자리잡는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충주지방 최초의 서원은 1582년(선조 15)에 건립된 팔봉서원으로 김세필, 이자, 이연경 등을 제향했다. 이때까지 팔봉서원은 정치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중앙정계에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은 대립은 향촌의 사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서원 건립을 통해 위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남인계 인물인 한치상(韓致相·?-?)은 팔봉서원을 자파의 서원으로 간주하고 1672년(현종 13) 사액을 상소했다. 이 과정에서 노수신이 추향됐다. 이로서 팔봉서원에 정치색이 입혀졌다. 앞서 1661년(현종 2) 충주지역의 남인계는 운곡서원을 건립, 스승인 정구(鄭逑·1543-1620)을 모셨다. 정구는 1602년(선조 35) 충주목사로 부임 후 서당을 열어 충주의 유학들을 지도한…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천안 삼거리 지나도 /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발꼬락이 또 한개 없다.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문둥병 시인 한하운(韓何雲·1920~1975)이 1949년 '신천지'에 발표한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라는 시의 일부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 마치 광야의 고행처럼 묘사돼 있다. 다음 시 '벌'은 일반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한하운의 또 다른 시다. '죄명(罪名)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 //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條項)에도 없는 /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 시 '소록도 가는 길'에서는 '붉은 황토길'과 '쑤새미 같은 해'가 공간과 시각적으로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반면 시 '벌'은 '내 죄를 변호할 갈이 없다'는 표현에서 보듯 천부인권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문둥병의 본래 이름은 발견자 한센(G.A. Hansen)의 이름을 딴 '한센씨병'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한센씨병을 '나병'(癩病) 또는 '나질'(癩疾)이라고 불렀다. 실
북한 황해도 동북부에 곡산이라고는 곳이 있다. 지명사전은 곡산에 대해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통일신라 때는 영풍군(永豊郡), 고려시대에는 곡주(谷州)로 불렸다'고 적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명의 변동이 심했다. 태조 때는 현비 강씨의 고향이라고 해서 '곡산도호부'로 승격했다. 현비 강씨는 태조 이성계의 첩이었지만 본처 한씨가 일찍 죽으면서 조선 왕조의 첫번째 정비가 됐다. 1400년 이방원이 조선의 세번째 왕위(태종)에 올랐다. 그러나 그 과정은 골육상쟁으로 얼룩졌다. 방원은 현비강씨의 두 아들인 방석과 방번을 모두 죽인 뒤 보위에 올랐다.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종의 등극은 강씨의 고향에도 영향을 미쳐 곡산도호부는 '곡산군'으로 격하됐다. 곡산 출신으로 또 다른 유명 인물로는 연사종(延嗣宗·1360∼1434)이 있다. 그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행동을 함께 했다. 2차 왕자의 난 때는 방원의 편에 가담해 방간을 제압하는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됐다. 현재 연사종은 곡산연씨의 실질적인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세종대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오면서 의서(醫書)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현재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도유형문화재 제 134호로 지정돼 있다. 오랫동안 빨래판 용도 등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멸이 심한 편이다. 그럼에도 이 비에서는 '元泰'라는 사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사학자들은 "신라 귀족의 한 명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金元泰'라는 인물이 원천동 신라사적비의 '元泰'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귀족들은 태반이 '경주김씨'였기 때문에 성 표기가 종종 생략됐다. 김원태는 성덕왕의 전비(前妃)인 성정왕후(成貞王后)의 아버지로, 진골의 성분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성정왕후는 716년(성덕왕 15)에 출궁(出宮)을 당하게 된다. 이 대목을 학자들은 귀족간에 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김원태 일족이 패배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원태를 703년(성덕왕 2) 7월에서 705년 1월까지 중시(中侍·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냈던 원문(元文)과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원문은 704년에 죽었으므로 성정왕후의 출궁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원태'가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에 등장해 있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된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신라는 685년(신문왕 5) 우리고장 청주에 서
음성 황새가 밀렵꾼 총에 희생된 것은 지난 1971년 4월이었다. 그 이전까지 음성 생극에 황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특종 보도한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六·二五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황새가 다시 충북 음성군에서 서식하고 있음이 본사 천연기념물실태조사반에 의해 확인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특종은 한 독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아일보는 이 부분을 '이번 황새의 번식을 확인하게 된 것은 독자 윤용진 씨가 본보에 연재해 온 천연기념물 보호캠페인 기사를 읽고 자기의 고향에 황새가 있다고 본보에 알려와 본사 천연기념물 생태조사반이 두차례에 걸친 답사 끝에 황새를 촬영하는데 성공한 것이다'라고 썼다. 계속해서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황새 번식지로는 충북 진천군 이월면과 음성 대소면이 천연기념물 황새번식지로 지정되었으나 이미 六·二五 이후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이곳 생극·금왕 일대에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몇년후 한 언론인은 황새 특종기사를 소재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특종 순간의 희열이 잘 표현돼 있다. '학계의 도움의 받아 그것이 (천염기념물) 199호임을 확인하고 촬영에 성공해서 사진특종을 보도한 것이 P
황새의 본래말은 '한새'로 이때의 '한'은 '크다'는 뜻을 지닌다. 그렇다면 황새는 '큰 새'라는 뜻이 된다. 황소할 때의 '황'도 본래는 '한'으로, '큰 소'라는 의미다. 황새는 우리나리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였다. 때문에 그림이나 자수의 주요 소재가 됐다. 소나무 위에 앉아 있는 황새는 '송단(松檀) 황새' 또는 '관학(관은 觀의 見대신 鳥)'이라고 불렀다. 옛문헌에도 황새는 비교적 자주 등장한다. 고려 문호로 일컬어지는 이규보는 '사평강(沙平江) 가에서 우연히 읊다'라는 시에서 황새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돛 내린 강어귀에 오래도록 머뭇거리면서/ 맑은 물결 굽어보며 말없이 수염만 만진다 / 언덕에 우거진 풀 겨우 황새 숨을 만하고 / 갯가에 오는 밀물 오리를 마중하는 듯…'- 참고로 '東國은 '고려', '李相'은 '이씨 성을 가진 재상' 즉 이규보 자기 자신을 일컫는다. 세종실록에 큰 새와 뱀에 얽힌 얘기가 쓰여 있다. 이때의 큰 새는 역시 황새를 의미한다. '북방 야인 지방에 사람 천만 명을 잡아먹은 뱀이 있는데, 사람의 피가 뱀의 창자 속에서 단단히 엉키어 돌이 됩니다. '관(황새 지칭) '이라고 부르는 큰 새가 있어서, 그 뱀을 잡아먹고 그 돌을
상소(上疎)는 대략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나 말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소로는 최만리의 한글반대가 가장 유명하다. 갑자년에 있었선 상소라고 해서 이른바 '갑자상소'라고 한다. 전회에 우리고장 괴산 인물 전유형을 설명한 바 있다. 그도 괴산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 임금께 상소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는 용기와 배포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로 들어가 우리고장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왜군 방어를 위한 책략 10여조를 선조 임금에게 상소했다. '괴산 유생(儒生) 전유형(全有亨)이 군국(軍國) 어왜(禦倭)에 대한 일 10여 조항의 방략을 상소하니, 상은 이를 깊이 받아들이고서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 상소를 보건대 학식이 해박하고 병기(兵機)까지 통달하여 근래의 다른 상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초야의 기사(奇士)가 아니겠는가'"- 실록에 상소 10여조의 내용이 자세히 실려있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다. 그러나 전란 중의 선조는 이 상소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말만을 잘한 경우가 대부분 많다. 그러나 이곳으로 불러다가 일을 맡겨 보고 그의 말을 들어 재주를 시
서양의학은 해부학에서 출발했다. 서양의학의 원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뼈, 근육, 힘줄의 구조와 기능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에비해 동양의학은 기(氣)를 중시하다 보니 해부학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살을 간단히 째는 종기 치료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서면 흐름은 달라진다. 실학을 중심으로 '우리 몸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해부학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하는 사람이 '성호사설'로 유명한 이익(李瀷·1681∼1763)이다. 그는 성호사설 제 15권의 인사문(人事門)에서 '오장도'(五臟圖)라는 글을 남겼다. 오장도는 인간의 몸에 들어 있는 5개의 장기(臟器)인 간장(肝腸), 심장(心腸), 비장(脾臟), 폐(肺), 신장(腎臟)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 남자가 생각하기를, "누이동생 하나를 죽여서 천만 명의 목숨을 살림이 옳겠다." 하고 드디어 배를 가르니 간(肝)과 격막(膈膜)이 모두 썩었는데, 앵도 씨가 엉켜 살이 돋아났다. 이에 간을 보호하는 처방은 얻었으나, 그 천만 인을 살린다는 공덕이 한 누이동생을 죽인 죄악을 속(贖)하지는 못할 것이다.'- 해부학적인 일, 즉 '사람의 배를 갈라 천만인의 목숨을 얻으면 얼마
전회에 조선이 명나라측의 잘못된 이성계 족보를 고치는데 무려 2백년 가까이 걸렸다고 밝힌 바 있다. 조선 조정은 그만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조선 중기의 중종 임금도 곧 남곤·이자 등을 명나라에 파견, "태조(이성계 지칭)의 세계(世系)가 이인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그 개정을 요구했다. 그에 앞서 중종은 대신들과 명나라에게 줄 선물을 직접 논의했다. 창업주(이성계) 족보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선물은 과거와 확연히 달랐다. 그 양이 푸짐하고 다양했다. '은보 등이 서계(書啓)하였는데, 공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面), 백세면포(白細綿布) 10필, 흰 세모시(白細苧布) 8필, 여섯 폭 유석(油席) 3장, 견면지(繭綿紙) 1백 장을, 화 사신과 설 사신에게는 큰 벼루 3면, 백세면포 5필, 흰 세모시 5필, 여섯 폭 유석 3장, 견면지 60장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무종(武宗)은 선물을 잔뜩 받았으면서도 족보 오류는 바로 잡지 않았다. 그러자 안달이 난 조선 조정은 유보, 권벌, 조사수, 김주, 이후백·윤근수, 홍성민 등 사신을 릴레이 식으로 보내 오류 수정을 거듭 요구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그때마다 "고치겠다"는 언약만 할 뿐 계속 뜸을 들
명나라는 조선건국 초기부터 무려 선조 임금대까지 정확하지 않은 이성계의 족보를 기록했다. 당연히 조선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이의 수정을 요구했다. 양국을 오랫동안 불편하게 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둘은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고해받쳤다. 그 뒤 명나라는 이들의 말을 믿고, 자국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 조정이 이성계의 족보가 명나라 사료에 잘못 기록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394년(태조 3) 4월이었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어업권 분쟁이 있었다. 이때 명나라가 항의한 문서에 '高麗陪臣李仁任之嗣成桂今名旦者云云'(고려배신 이인임지사성계 금명단자운운)라는 내용이 서술돼 있었다. 풀이하면 '고려의 신하 이인임의 후손인 성계의 지금의 이름을 단이라 하는 등' 정도가 된다. 명나라에 있어 이성계 족보는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