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직지심체요절)는 고려우왕 때인 1377년 청주목 교외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서를 말한다. 그러나 1377년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1443년과 60여년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이는 이 시기들어 지식보급에 대한 필요성이 대중적으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는 뜻글자인 한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훈민정음은 소리글자를 매개로 했기 때문에 IT 최강국 한국의 밑걸음이 됐다. 청주 흥덕사라는 사찰에서 직지를 간행했다는 점은 한번쯤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왜 다른 곳도 아닌 사찰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을까. '불경은 사찰에서 필요한 것이니까'라고 답을 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만점은 아니다. 고려 전기에는 관청수공업이 발달했다. 반면 후기에는 사원(절) 수공업이 성했다. 이와 관련해 고려 후기가 되면 사찰이 전국토의 17%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사원경제가 급팽창한다. 고려 사찰은 토지를 대규모로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면세 혜택을 받았다. 여기에 왕실과 귀족들이 앞다퉈 토지 기탁을 하면서 고려의 사원경제는 날로 비대해졌다. 고려 사찰은 이같은 시대흐름 하에서 장인들을 대거 고용, 국가
조선시대 벼슬 중에 '사또'(혹은 원님)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사또는 정식 벼슬이름이 아닌 '수령'(守令)을 달리 불렀던 표현이다. 수령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을 준말이다. 이중 군수가 다소 높아 종4품, 현령은 종6품의 품관을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을 원님 중 가장 낮은 품계는 현감으로, 보통 종6품의 벼슬을 지녔다. 조선시대 원님은 지금의 시장, 군수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수령은 왕이 임명하고, 사법·군사·행정권을 행사했다. 이에 비해 지금의 시장과 군수는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행정권만 행사하는 점이 다르다. 고을 원님들의 임기는 보통 2년으로, 관찰사 1년보다는 다소 길었다. 이때 고을 원님 가족이나 부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혼자서 임지에 부임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원님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기생 이야기가 뒤따른다. 우리가 춘향전에서 읽었듯이 남원 사또 변학도가 부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른바 기생 점고였다. '점고'(點考)는 명부에다 일일히 점을 찍어가면서 사람의 수효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관기는 관에 속한 관물(官物)로 여겨졌다. 춘향전으로 널리 알려진 '열녀춘향수절가'는 점고 끝에 수
조선시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애주가로 단연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있다. 그의 애주가적인 진면목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일컬어지는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잘 드러난다.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 꽃꺽어 산(算)놓고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덮어 줄이어 매여가나 /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울며 예나 /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 우거진 숲에 가기 곧 가면 /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자할꼬 /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편의상 고한글체를 현대문으로 고쳐 실었다. 인용문중 '산(算)놓고'는 술잔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유소보장(流蘇寶帳)'는 화려한 상여를 일컫고 있다. 애주가 정철의 진면목은 유물로도 어느정도 입증되고 있다. 선조 임금은 정철이 술을 너무 좋아하자 '하루 석잔만 마시라'는 권고의 의미로 은배(銀盃)를 하사했다. 그 은배가 지금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의 송강정사에 전시돼 있다. 손잡이가 달린 이 은배는 복숭아 모양으로 잔받침도 갖추고 있다. 선조 때는 사림이 동인과
조선시대 국청(鞠廳)은 모반, 대역죄 등 국가 중죄인을 심문·재판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임시로 설치되는 특별 재판정을 말한다. 이 국청은 죄질에 따라 친국(親鞫)·정국(庭鞫)·추국(推鞫)·삼성추국(三省推鞫)으로 다시 세분됐다. 친국은 국왕이 참석해 친히 심문하는 것으로 위험에 대비해 왕궁을 호위하고 진행했다. 설치 장소는 경희궁, 창덕궁, 금위영이었다. 정국은 친국과 대체로 같으나 왕명에 의해 13~ 23인의 국문관이 동석했다. 설치 장소는 보통 병조나 의금부였다. 추국은 국문관이 10인 내외로 다소 적은 편이다. 필요에 따라 친국 또는 정국을 추국으로 바꾸어 계속하였다. 삼성추국은 모반보다는 강상(윤리죄) 죄인을 심문하는 경우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의 관원 중에서 왕명으로 지명된 8인의 국문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 죄인은 형조에서 이미 심문을 마쳤기 때문에 삼성추국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내용만 조사받았다. 전회에 우리고장 인물인 권섭이 송시열의 사사 등 정치환경의 급변으로 인해 우리고장 제천의 청풍으로 낙향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아들 권진성을 정치적 사건으로 잃은 슬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경종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경종은 소론의 세를
조선시대 선비들은 정주개념 외에 별장문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석간수 흐르는 계곡에 아홉구비를 뜻하는 구곡(九曲)을 설정하고 각 구비마다 시를 지었다. 주자가 설정한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 그 기원으로, 이 영향을 받아 퇴계 이황은 도산십이곡,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구곡시는 우리고장 괴산에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구곡은 좁은 수계가 아닌, 넓은 곳에 설정되기도 한다. 제천~청풍 일대에도 구곡시가 존재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 영조 때 제천 인물인 권섭(權燮·1671∼1759)은 황강구곡가(黃江九曲歌)를 지었다. 그는 1곡부터 9곡까지 지역 순에 따라 각각 한 곡마다 시조 1수씩을 지었다. 각 곡명은 1곡 대암(對岩), 2곡 화암(花岩), 3곡 황강, 4곡 황공탄(皇恐灘), 5곡 권호(權湖), 6곡 금병(錦屛), 7곡 부용벽, 8곡 능강(綾江), 9곡 구담 등이다. 이중 황공탄은 전회에 소개한 바 있다. 지면상 제 8곡가인 능강만을 소개하면 '八曲이 어드메오 綾江洞이 맑고 깊어 / 琴書 사십년의 네어인 손이러니 / 아마도 一室雙亭의 못내들겨 하노라'라고 썼다. 혹자는 8곡에 대해 시각과 청각의 회상적 결합에 있다.…
여울은 하천 바닥이 경사를 이뤄 물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백과사전은 보다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굵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여울이 형성되는 하천은 지형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유년기(幼年期)에 속하며, 대륙의 구조평야를 흐르는 하천에서는 일반적으로 보기 드물다'라고 쓰고 있다. 조선말기 인물로 이유윤( 李裕元·1814~1888)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인물로, 대원군의 등장과 퇴진에 따라 좌천과 복권을 반복했다. 그는 고종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는 총재관 자격으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편찬을 주도했고, 대한제국기 전인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기도 했다. 그는 다재다능해 조선의 역사, 지리, 시문, 제도 등을 다룬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쓰기도 했다. 이 문집은 같은 시기 백과사전류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종종 비교된다. 그는 이 문집에서 '호서(湖西)의 네 고을'이라는 소제목으로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 수덕사(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의 말사인 개심사(開心寺)라는 고찰이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651년(의자왕 11)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라 하던 것을 1350년 개심사로 고쳤다. 그 후 1475년(조선 성종 6) 중창했고 1955년 전면 보수하였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충남문화재자료인 명부전과 심검당 등이 있다. 그러나 성종 때의 중창은 노후화가 아닌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실화범은 다름아닌 당시 충청도 절도사였던 김서형(金瑞衡·?-?)이다. 실록에는 그와 사냥에 얽힌 이야기가 이례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무신 출신이었던 그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민폐를 자주 일으켰다. '사헌부에서 행대 감찰 정찬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청도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습진(習陣)을 한 뒤에 인마(人馬)를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행하여 홍주진(洪州鎭)에 속한 여러 고을로 하여금 날마다 지공(支供)하게 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당시 조선 전기의 충청병영은 해미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미 주변의 서해안 일대를 벗어나 우리고장 청주까지 진출, 이른바 '원정 사냥'도 했다. 이날은 청주목과 청안현 일대를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성이면 누구나 차고 다녀야 할 물건이었다. 이 호패제도는 호구(戶口)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 등을 위해 도입됐다. 호패에는 착용자의 신분, 지위,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명문으로 새겼다. 따라서 오늘날로 치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일면을 지녔다.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백성 각자가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패에 새긴 후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이 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낙인을 찍어 발급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문신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가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호패 앞면에는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인물은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 처음 도입됐다. 이의…
우리나라 최초의 의서는 1236년(고려 고종 23)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당시 고려 조정은 약재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향약구급방을 간행했다. 그러나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이후 1417년 7월 의흥현(義興縣)에서 현감 최자하(崔自河)에 의하여 중간(重刊)됐으나 이 역시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일본 궁내청서릉부(宮內廳書陵部)가 소장하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고려 중기의 의약적 지식을 고찰하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본초학, 약용식물, 고려어(高麗語), 이두(吏讀) 표기법 연구 등에 있어서도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이 또 한번 중간된 적이 있었다. 바로 조선 태종 때 인물인 황자후(黃子厚·1363~1440)에 의해서 였다. 의학에 대해서도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황자후는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향약구급방을 증간했다. 그런데 이를 인쇄한 곳이 우리고장 충청도였다. 이때는 충청감영은 충주나 청주목에 위치하고 있던 때였다. '전 판나주목사 황자후(黃子厚)가 계하기를, "향약구급방을 인쇄하여 외방(外方)에 나누어서 생명을 구제하는 길을 넓히게 하소서"하니, 드디어 충청도로 보
춘향전 진양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숲을 울며 불며 나가는디, 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씻치면서 농림숲을 당도허여…' 그 뒤에는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거"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인용문 중에 '오리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언뜻보면 어떤 정자의 이름인 듯 하나 그렇지는 않다. 이때의 오리정은 과거 각 지방 고을이 빈객을 영송하기 위하여 군아(郡衙)에서 5리(里) 정도의 거리에 세운 임시 건물을 일컫고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처음 부임해오면, 고을 수령이 관복(官服)을 입고, 오리정에 나가 땅에 엎드려 영접했다. 충청도관찰사가 쓴 순력 일기는 전회에 소개한 '충청감영일기' 외에 '금영일기'(錦營日記)라는 것이 또 하나 전해지고 있다. 표제에 보이는 '금영'은 충청도감영의 별칭으로, 공주목에 있던 영문(營門)을 의미한다. 이 일기의 저자는 영조-순조 연간에 관직생활을 한 심이지(沈臣+頁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조 때인 1780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했다. 그가 쓴 금영일기에 '오리정'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찰하던 제도를 말한다. 달리 순행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의 순력은 왕명을 대신 실행하는 것과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물론 수령이 행정을 잘 펼치는가 여부를 살피는 것도 주요 임무의 하나였다. 관찰사의 순력 행차는 위용이 대단했다. 행차는 장교·군관·나장·도사·찰방·심약·검률·반당·노자(奴子) 등 많게는 수백인이 수행했다.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다. 나장은 죄인을 다루는 하급직, 심약은 약재 검수관, 율령직, 반당은 호위병 등을 일컫고 있다. 이쯤되면 지금으로 치면 도청직원 전체가 움직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관찰사 행차가 있을 경우 각 고을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관찰사는 감사마교(監司馬轎)라고 불리는 말수레를 타고 움직였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纛·대형기의 일종), 취라치(吹螺赤)·나팔·대평소 부대를 앞세웠다. 이밖에 사모갑(紗帽匣)·인장, 유서(諭書)·절월(節鉞) 등을 휴대하고 떠났다. 사모갑은 모자, 유서는 임금이 내린 명령서, 절월은 말 그대로 절(節)과 월(鉞)을 일컫는다. '절'은 손에 드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으로 관찰사 권위를
조선 왕조는 대략 5백년간 존속됐다. 이 기간 동안 몇 명의 충청도관찰사가 파견됐을까. 금영공안, 공주감영읍지, 공산지, 충청도선생안 등의 사료에 관찰사 명단이 존재한다. 현재 금영공안과 공주감영읍지는 장서각, 충청도 선생안은 공주향교에 보관돼 있다. 충주감영 시절의 사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정확히 582명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씨와 본관별로 구분하면 전주이씨 30명, 파평윤씨 24명, 암동김씨 19명, 안동권씨 18명, 한산이씨 15명 등의 순으로 많았다. 이중 유명 인물로는 조선 전기의 경우 하륜, 정인지, 맹사성, 남지, 박팽년, 이세좌, 채수, 반석평, 노수신 등이 있다. 조선후기 인물로는 유근, 이안눌, 유백증, 김육, 박세당, 박중양이 등이 있다.충청도관찰사는 재직 기간중 나름의 공과를 남겼다. 재해기간 중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된 안숭효(安崇孝··-1460)는 진휼사업과 함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과로로 순직했다. 그러자 세조가 이례적으로 부의를 했다.'졸(卒)한 충청도관찰사 안숭효에게 쌀·콩 아울러…
충청도관찰사는 오늘날로 치면 충북도지사에 해당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충북과 충남이 나눠져 있지 않은 만큼 관할 면적이 훨씬 넓어 54개 고을을 관리 감독했다. 충청도관찰사는 종2품의 외관직으로, 달리 감사·도백·방백·도선생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가 일을 보는 관청은 감영·영문·순영이라고 불렀고, 이들에게는 이른바 직계권이 주어졌다. 직계권은 국왕 외에 다른 부서의 통제나 명령을 받지 않고 상당히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권한을 말한다. 따라서 모든 보고는 국왕 앞으로 했고, 임금 외에 누구도 관찰사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관찰사도 임금이 보낸 암행어사에게 비리나 안일한 근무태도가 적발되면 파직 등을 당하곤 했다. 관찰사는 지방장관을 임명하는 것인 만큼 그 절차는 다소 복잡했다. 먼저 관료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조에서 후보자를 3배수 뽑아 올린다. 임금은 이중 한 명을 낙점, 통보하게 된다. 그러면 임면을 받은 인물은 궁궐에 들어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게 된다. 이를 '사조'라고 불렀다. 전현직 관찰사는 도계에 교귀소(交龜所)라는 곳에서 임무 교대식을 가졌다. 조선시대 관찰사 인장은 그 뚜껑이 공통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초록 행복 푸른 꿈'을 슬로건으로 한 옥천 이원묘목축제가 오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전국 과수묘목의 60-70%를 차지하는 옥천이원묘목은 8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략 1930년대부터 묘목을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1930년대는 일제 억압통치가 정점을 향하던 시기로, 묘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당시 이원면에는 안헌귀(1908-1970)라는 분이 생존해 있었다. 이원리 태생인 그는 한 동안 교편생활을 하다 1939년 귀향, 영농에 종사하게 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30년이 지난 1964년에 충북도에서 발간한 '흙과 땀'(청구출판사)이라는 농촌 계도지에 싣게 된다. 당시 충북도지사는 후에 농협중앙회장도 역임하는 신명순(申明淳) 씨였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랫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발굴해낸 사람이 현 옥천군 친환경농축산과장으로 있는 이재하 씨다. 그는 옥천이원묘목이 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는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고 안헌귀 선생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계도지를 찾아냈다. 이 글에 따르면 옥천 이원에서 묘목 생산을 처음으로 한 인물은 내국인이 아닌 일본인이었다. '이원의 묘목생산은 일인(日人)…
진천군의 지명변화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금물노군, 만노군이었는데 신라가 흑양군으로 고쳤고, 고려가 진주(鎭州)로 고쳤다. 1259년(고려 고종 46)에 위사공신 임연(林衍)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켰다.'- 영조 때 쓰여진 여지도서(1757)는 이후에 지명 변화에 대해 '임연이 죽자, 다시 진주현으로 하였고, 태종 때 진천현으로 고쳤다. 연산군대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초에 다시 충청도로 복원되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의 내용은 지금의 진천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 지명이 진주(鎭州에서 비롯됨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지역 사학자는 '진천의 호족이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진(鎭)'자가 유래하였다'라고 밝혔다. 이 주장의 대칭점에 위치하는 것이 청주의 '청'(淸) 자이다. 방금 전에 '왕건에 대항한 반란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때의 반란군은 분명히 청주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당시 청주는 왕건이 아닌 궁예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궁예는 '철원에 성을 쌓는데 청주사람 1천여명을 데려갔다'고 사료는 적고 있다. 일설에는 궁예가 유년시절에…
조선시대에는 정식 행정지명 외에 별칭도 많이 사용했다. 경상도는 영남(嶺南), 전라도는 호남(湖南), 충청도는 호서(湖西)라고도 불렀다. 딱딱한 행정 명칭에 비해 한층 시적이고 정감있는 표현이다. 영남할 때의 '영'이 어느 고개를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존재한다. 혹자는 우리고장 단양의 죽령, 또 다른 이는 영동의 추풍령을 일컫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는 죽령설이 다소 우세한 편이다. '죽령 남쪽'이면 경상도를 모두 아우를 수 있다. 반면 추풍령은 경상도의 허리 쯤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을 모두 아우를 수 없다. 호남에 대해서는 어문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김제 벽골제로 보고 있다. 이 경우 호남은 '벽골제 남쪽 지방' 정도가 된다. 우리고장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의 '호'에 대해서는 금강, 의림지, 미호천 등 대략 3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금강의 또 다른 명칭이 호강(湖江)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호서를 금강의 서쪽으로 보면 지금의 충북지역은 호서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천 의림지 설도 약점을 지니고 있다. 충청도 모두를 아우르기에는 위도가 높고, 또 의림지 서쪽은 경기도
전회에 우리고장 영동을 소개할 때 윤상(尹祥·1373∼1455)이라는 인물의 표현을 인용한 바 있다.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윤상은 경상도 예천군의 향리인 윤선(尹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해 양반 신분이 된 인물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적어 놓은 방목(榜目)을 보면 그는 태조 때 진사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시대에는 형식상 서얼을 제외하고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 준비에는 적지 않은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또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평민(양인)이 합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려 때 향리는 한 지역의 지배계급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향리(아전)는 수령의 보좌역으로 중인에 해당했다. 윤선이 이런 환경에서 오늘날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문과에 합격했다는 것은 남다른 노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료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적지 않이 등장한다. '공은 자질이 아름답고 총명이 뛰어나게 태어났다. 향리로서 고을 일을 맡아 볼 적에 고된 사무를 보면
1413년(태종 13)은 한국 지명 변천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때 지명에 위계성을 부여하는 계수관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그 결과, 충청도 4개 대읍인 청주, 충주, 공주, 홍주 등은 '州'(주) 자를 계속 유지하게 됐다. 반면 소읍이라고 할 수 이는 괴주는 괴산, 옥주는 옥천, 제주는 제천, 진주는 진천으로 각각 지명이 변했다. 이 과정에서 괴산같이 산이 많은 고을에는 '山' 자가, 물이 비교적 풍부한 곳에는 '川' 자가 붙었다. 충북 최남단인 영동(永同)의 지명에는 이같은 사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영동은 신라 경덕왕 때 길동군에서 영동군으로 변한 후 그 지명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신라의 길동군(吉同郡)인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을미에 계주자사(稽州刺史)로 승격하였다가, 목종 8년 을사에 자사를 폐하였고, 현종 9년에 상주(尙州) 임내에 붙였으며, 명종 임진 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인용한 문장은 영동이 한 때는 계주(稽州)라는 지명을 지녔었고, 또 경상도 상주에 속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현종 9년은 대략 1018년이 된다. 따라서 영동은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경상도에…
괴산군이 얼마전 지명탄생 600주년이 되는 2013년을 앞두고 '괴산군 탄생 600주년 기념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한다고 밝혔다. 군은 "괴산 지명 탕생은 괴산의 역사·정체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군민에게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이 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지명 괴산(槐山)이 처음 생겨난 시기는 군이 밝힌대로 6백년 전이 1413년(태종 13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현종 9년에 충주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조선 시대인 태종 3년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인 괴산으로 고쳐 군으로 삼았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 이전에는 잉근내군(仍斤內郡·고구려), 괴양군(槐壤郡·신라), 괴주(槐州·고려) 등으로 각각 불렸다. 고려시대에는 왜구들이 해안뿐 아니라 수계를 타고 충청도 내륙까지 침입했다. 이때 괴주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왜를 괴주(槐州)에서 쳐서 3급을 베었는데 왜적 200여 기(騎)가 괴주 장연현에 침입했으므로 왕안덕이, 도흥과 함께 이를 쳐서 3급을 베었다.'- 괴산 지명과 관련해서는 살펴볼 것이 더 있다. 먼저 왜 괴주(槐州)에서 괴산(槐山)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점이다. 조선 태종은 즉위 1
감귤이 언제부터 제주도에서 재배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일본 고문헌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본서기(日本書記)에는 신라 초기에 상세국(桑世國)으로부터 귤을 수입한 기록이 보인다. 상세국은 지금의 제주도를 일컫는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 재래 감귤이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귤은 조선시대에도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때문에 남해 해안가에 감귤나무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상림원 별감 김용(金用)을 제주로 보내어, 감귤 수백 주를 순천 등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과거시험 직전에 '황감제'(黃柑製)라는 의식을 자주 거행했다. 이는 해마다 제주도에서 진상하던 황감을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내리고 과거시험을 보던 의식을 말한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반궁(泮宮)에 황감을 하사하고 잇따라 시사하여 이유신 등 여섯 사람을 뽑았는데,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급제(及第)를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짧은 문장이지만 난해한 단어가 많이 보인다. 반궁은 성균관, 급제는 벼슬, 분수는 시험 결과의 등수를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과거의 수석 합격
대과(문과)와 구별되는 소과에는 생원과 진사시 등 두 종류의 시험이 존재했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묻는 것을,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 형태로 문예창작 능력을 테스트했다. 전자가 오늘날 독해시험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논술시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두 시험에서 급제한 사람을 우리 귀에 익은 '생원'과 '진사'라고 각각 불렀다. 문과가 3단계에 걸쳐 진행됐다면 소과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시는 한양과 각도에서, 그리고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는 한성에서 실시하였다. 소과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한양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200명 배정됐다. 그리고 각도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경기도 60명, 충청도 90명, 전라도 90명, 경상도 100명, 강원도 45명, 평안도 45명, 황해도 35명, 함경도 35명씩 모두 1천4백명이 배정됐다. 이중 복시를 통해 2백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따라서 소과의 최종 경쟁률도 대과와 비슷한 7대 1 정도가 되도록 조절됐다. 그러나 복시의 최종 선발에는 그러한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격차가 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대과에
응제시(應製詩)는 왕명에 의해 짓는 시를 말한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당했다. 공민왕은 하는 수 없이 대신을 이끌고 몽진(왕의 피난)에 나서 지금의 안동에 3개월 가량 머무르게 된다. 당시 안동은 복주로 불렸다. 이후 공민왕은 상주, 보은 원남, 회인 등을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당도, 약 5개월간 머물게 된다. 청주가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과거시험까지 보게 된다. 이때 그 유명한 망선루(당시 취경루)가 등장한다. 고려 현종도 거란 침입 때 전라도 나주로 피난갔다가 환궁하는 길에 청주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으나 이때는 그 기간이 나흘(1011년 2월 13~16일)에 불과하다. 공민왕은 청주에 체류하던 기간 중 무심천변에 세워진 공북루(拱北樓)라는 정자에 올라 이른바 배표(拜表) 의식을 거행하게 됐다. 공북루는 '북쪽(개경)을 섬긴다'는 뜻이고, 배표는 사신으로 보내는 신하를 전송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공민왕은 즉위 초기에는 배원정책을 철저히 추구했다. 그러나 홍건적 침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는 일시적이나마 배원정책을 철회하게 된다. 바로 이날 청주 공북루에서의…
'비록 엄한 형벌로 바로잡고 위세와 노기로 사람을 제압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요행히 법률에 조촉되지 않으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될 뿐 인의 마음은 갖지 않게 됩니다.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지만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원한은 큰데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무서월 할 것은 백성뿐입니다. 물이 배를 나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습니다.' 민심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으로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문장을 쓴 인물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이자 학자인 위징(魏徵)이다. 그는 10가지 내용을 당태종에게 상소했다. 따라서 상소문의 제목도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疎)이다. 조선시대 같은 제목의 상소문을 올린 인물이 있다. 세종-성종 연간을 산 김흔(흔은 訴에서 삐침 제외·1448~1492)이라는 인물이다. 명종실록에 '신은 삼가 듣건대 성종조(成宗朝)에 직제학 김흔이 십사소(十思疏)를 올리니, 성종은 어찰(御札)로 답하고 다시 옷과 신을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당시 김흔은 위징이 상소했던 내용을 성종에게 똑같이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에 "당(唐)나라 태종(太宗)도 훌륭하고 뛰어난 임금이었으나, 나중에 가서 십점소(十漸疏)…
조선시대 문과(대과)는 1번이 아닌,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 등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이는 국가고급 관리를 뽑는 만큼 엄정·신중을 기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1단계인 초시에는 이른바 지역 쿼터제가 적용됐다. 초시에서는 성균관 유생 50명(관시), 한양출신 60명(한양시), 지방출신 140명(향시) 등 총 250명을 선발했다. 향시 140명은 경기도 10, 강원도 15, 황해도 10, 충청도 25, 경상도 30, 전라도 25, 평안도 15, 함경도 10명 등으로, 충청도는 한양을 제외하고 경상도 다음으로 많았다.2단계인 복시는 관시 ·한성시 ·향시의 입격자 250명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시험을 보게 해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았다. 250명 중 33명을 뽑았으니까 실질 경쟁률이 대략 7.6대 1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다.3단계인 전시는 2차 합격자 33명을 대상으로 당락이 아닌, 갑·을·병 순위를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임금님 앞에서 시험을 봤던 전시는 부정행위가 없는 한 탈락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고로 전시 답안은 어둡기 전에 작성·제출해야 했고, 임금에게 집적 보이는 것인 만큼 정자체인 해서로 반드시 써야 했다.문과 응시생
사부(師傅)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기를 가르쳐준 스승을 사부라고 부른다. 또 임금의 어릴적 스승도 사부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왕자 교육은 시강원(侍講院)이라는 곳에서 했다. 이 시강원의 정1품 벼슬이 사부다. 이에 비해 왕세손에 대한 교육은 강서원(講書院)이라는 곳에서 했고, 그 벼슬은 한 단계 낮은 종1품이었다. 실록에 임금과 왕자시절 사부에 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임금이 매우 즐거워하여 서로 대하기를 잠저 때같이 하였다. 민제가 임금을 선달이라 칭하니, 임금도 민제를 사부라 불렀다. 술자리가 파하자, 민제가 임금을 전송하며 대문 밖에 서 있으니, 임금이 민제에게 들어가라고 청했다.'- 태종은 이것이 인연이 돼 나중에 사부 민제의 딸(원경왕후)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인용문에도 등장하 듯이 둘은 잠저(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집) 시절에 서로를 '선달'과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인간적으로도 가까웠다. 따라서 민제의 두 아들인 민무구, 무질 형제는 그가 생존할 때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한달만에 태종은 외척 발호의 싹을 제거하는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매형뻘인 태종에 의해 민무구, 무질 두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