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관련, 당시 충청도 순찰사인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일부 사료를 윤국형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도순찰사와 도관찰사는 같은 종2품으로 품계는 같다. 다만 도순찰사는 임시로 파견되는 직책으로 전시에는 군권(軍權)을 가지게 된다. 도순찰사는 성종 때부터 처음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료들이 조헌 등 의병 지도자들이 모병 활동을 할 때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던 윤국형이 방해내지 훼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같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로 '청양현감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라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
한자 '表'(표)는 그것이 명사로 사용되면 '겉', '바깥' 등의 뜻을 지닌다. 반면 동사로 사용되면 '밝히다', '드러내다'로 쓰인다. 따라서 사당 '表忠祠'(표충사)에는 '충성심을 밝힌다'라는 뜻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의병장 조헌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조헌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는 충남 금산군 복수면에도 위치하고 있다. 두 사당은 명칭은 같으나 다른 점이 있다. 옥천 안남의 표충사에는 조헌 뿐만 아니라 아들 완기(完基·1570∼1592)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조헌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다. 지금은 정실과 소실 관계가 거의 성립하지 않고 또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완기만이 정실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3남2녀는 측실이다. 적자 완기는 22살에 사망했기 때문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나머지 3남2녀는 대부분 장성했다. '조완도는 강음현감이고, 조완제는 전옥서 봉사이며, 다음은 조완배이다. 맏딸은 김노에게, 다음은 김성룡에게 시집갔다. 조완기는 자식이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완기는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 조헌을 따라 종군하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8월 1일, 금산전투는 이보다 18일 늦은 8월 18일에 있었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두 전투에 모두 참가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크게 달랐다. 청주성 전투에는 대략 1천7백명, 금산전투에는 7백명이 참가했다. 불과 18일만에 의병의 수가 1천명 가량 줄었다. 관군은 전공이 의병에게 돌아가는 것을 무척 꺼렸다. 때문에 국가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활동을 방해하고 훼방을 놓았다. 심지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일월록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처음에 조헌이 글을 보내어 순찰사를 책망하였기 때문에 순찰사가 감정을 가지고 각 고을로 하여금 조헌의 휘하에 응모하여 간 의병의 부모ㆍ처자를 모두 잡아 가두게 하고, 또 관군으로 하여금 응원해 주지 못하게 하여서…' 인용문은 계속 해서 '이때에는 조헌의 군사는 모두 흩어지고 7백 명의 의사(義士)가 남아 있어서 죽거나 살거나 끝까지 따르기를 원하였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등장한 순찰사는 당시 충청도순찰사인 윤국형을 말한다. 음력 8월 18일의 충남 금산전투에서 7백여명의 의병은 대부분 몰살당했다. 이들의 시신을 거둔 사람은 약간의 이설도 있으나 대체로 조헌
조헌이 우리고장 옥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그렇지는 않다. 조헌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라는 곳에서 조응지(趙應祉)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어머니 잃고 계모를 맞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주경야독을 한 끝에 그의 나이 23살 때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왔다. 조헌은 보은현감도 역임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헌은 계모에게도 친모못지 않은 효도를 했다. 그는 혼자된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 자청해서 보은현감이 됐다. 바로 계모의 친정이 보은이었다. 계모는 의붓아들 조헌이 금산전투에서 사망하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찌 이런 인물을 다시 보랴. 다만 다른 어미의 몸을 빌어 태어났을 뿐이지. 이 애야 말로 진실한 내 아들이다.' 조헌은 효자이면서 동시에 시조짓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에 실려 있는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내용 중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조헌은 왜군이 임진년에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하고 1년전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더라.'- 인용문에 등장하는 지당은 연못, 양류는 버드나무, 내는 안개를 의미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연못에는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물안개가 끼었는데 뱃사공은 간데 없고 물가에 빈 배만 떠 있다. 그런 석양에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고 있다. 사공과 빈 배, 그리고 나와 갈매기가 짝을 이루면서 작가의 외로운 심정을 잘 드러나 있다. 다음 소개하는 또 한 편의 시조도 비슷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을 찾으리라.'- 창랑은 푸른 물결, 조대는 낚시터, 낙조청강은 석양의 푸른 강, 유지는 버드나무 가지, 옥린은 물고기 비늘, 행화촌은 살구꽃이 핀 마을을 말한다. 시조 해설을 하면 초장은 맑은 강물에 낚시를 넣고 낚시터에 앉았다는 상황 설정이다. 중장은 저물녘의 맑은 강을 시각적으로 그렸다. 종장은 버들가지에 고기를 꿰어 들고 살구꽃 핀 마을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오고…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의 시작에 대해서는 음력 8월 1일과 2일로 약간은 엇갈린다. 그러나 1일 시작됐다는 내용이 보다 많다. 이날의 의병 공격은 3개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조헌과 영규대사의 연합 의병은 서문을 공격했다. 반면 청주 부모산에 진을 치고 있었던 박춘무 의병군은 남문을 공격했다. 그리고 연기 쪽으로 퇴각해 있었던 방어사 이옥의 관군은 미호천을 건너와 청주읍성 북문을 공격했다. 이날 전투가 치열했는지 여부는 사료마다 표현이 다소 엇갈린다. 선조실록은 "이날 밤 적이 화톳불을 피우고 기(旗)를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진영을 비우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반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은 연려실기술에서 "이날 밤에 적이 저희들의 시체를 불태웠는데, 3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적은 북문(北門)으로 빠져 도망쳐 달아났다"라고 서술했다. 임란 발발 직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 문소만록에서 "이리하여 8월 1일에 크게 싸워서 비록 적의 머리를 베는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적도들이 화살과 총탄에 많이 맞아 그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적은 무리들을 다 이끌고 도망했다"라고 표현했다. 전과가…
왜군이 1592년 5월 2일 보은, 회인을 거쳐 청주에 들이닥쳤다. 5월 2일이면 임진왜란이 발생한지 19일 밖에 안 되고, 또 우리고장 황간, 청산이 화염에 휩싸인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관련 사료를 보면 왜군은 보은, 회인, 청주를 단 하루만에 주파했다. 이는 당시 청주성에서는 관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왜군 북상로 주변의 관군은 모두가 달아났다. 왜군은 사실상 청주성에도 무혈입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신익이라는 인물로, 청주읍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실록에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패전한 장수들 중에는 신익(申翌)보다 더한 자가 없습니다. 당초 한 도의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에 머무르면서 왜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먼저 달아나서 허다한 군량과 병기를 모두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고 용인(龍仁)에 이르러서도 또다시 앞서 달아나 수만 명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으니..."- 청주성은 이후 3개월 가량 왜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이때 관군은 미호천 서쪽으로 퇴각해 왜군과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윤국형이 쓴 '문소만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조선을 협박했다. 일본 승려사신 겐소(玄蘇·?~1612) 임란전 조선을 자주 찾았고, 강화회담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종의 직업 외교관으로 볼 수 있다. 겐쇼는 임란 1년 전 일본통신사 경험이 있는 김성일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일본을 거절하여 조공을 바치러 가지 못하였습니다. 평수길(平秀吉·도요토미)이 이 때문에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쌓여 전쟁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먼저 주문하여 조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면 조선은 반드시 무사할 것이고 일본 백성들도 전쟁의 노고를 덜게 될 것입니다."- 겐쇼는 이어 "옛날 고려가 원(元)나라 병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에 원한을 갚고자 하니, 이는 사세상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노골적인 협박을 했다. 외교적인 언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왜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많이 거주했던 부산에서는 임란 발발 1년전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실록이 적었다.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오던 왜선이 다시 오지 않았고,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가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전쟁 원인으로는 도요토미가 조선 도자기를 탐을 내서 등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것은 영토 획득설이다. 도요토미는 전쟁을 해서 획득한 영토를 다이묘(大名·지방영주)와 무사들에게 나눠주고 이들은 그 같은 은전 때문에 주군인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해왔다. 그러나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되자 이같은 메카니즘이 작동되지 않게 됐다. 그래서 영토를 외국, 즉 조선에서 획득하려고 했다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직전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번역된 일본 논문에 쓰여 있다. "일(조선침략 지칭)이 순조롭게 달성되면 새로운 정복에 의해 회득된 諸國, 봉록, 유리한 영지를 줄 것이며 너희는 많은 즐거움 속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실제 도요토미는 명나라와 화친회담을 갖게 되자 7가지 요구를 하게 되고 그 안에 조선 4도 할양론도 들어 있다. 이때의 4도는 대체로 한강 이남을 의미한다. 실록에도 "급기야는 땅을 할양(割讓)하고 쌀을 바치는 일로 제도(諸道)의 백성들에게 공갈하고 있으니"라는 표현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있다. 이밖에 일본천황 후궁으로 명나라 황녀를 보낼 것, 조
충주 달천의 어원에 대해서는 전회에 수달이나 단물 관련설을 언급한 바 있다. 전자는 과거 달천에는 수달이 많이 살아서 '달강'이라 했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후자는 과거 달천은 물맛이 좋아 '단냇물'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달천'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달천동 주변에는 '달다'가 변한 말일 수도 있는 '단' 자가 들어간 지명이 유난히 많다. '단월동', '단호사'(丹湖寺), '물개달래'(달천리 서쪽 물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달천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달천 혹은 덕천(德川)이라고 한다.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속리산 꼭대기에서 나와서 물이 세 갈래로 나뉘었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이행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였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인용문 중에 이행(李荇·1478∼1534)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러나 이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서술했던 지명인 충주 달천 주변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응교로 있으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의 복위를 반대했다. 희대의 폭군인 연산군이 이를 가
조선시대에는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돼 군량을 충당하던 토지를 둔전( 屯田)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시간이 흐르면서 경비 보충을 위해 관청에서도 설치했다. 전자는 국둔전, 후자를 관둔전이라고 불렀다. 둔전은 당초 취지와 달리 민전(民田)의 침탈, 농민 노동력의 강제 동원 등 민폐를 많이 끼쳤다. 이런 둔정이 긍·부정을 떠나 크게 황폐화됐던 적이 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이다. 왜군이 물러가고 나라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자 둔전을 재설치하는 문제가 급부상했다. 이때 이른바 '둔전 전문가'로 등장한 인물이 윤조원(尹調元·1572∼1637)이다. 그는 익산군수로 부임하여 전주지역 옥야(沃野)의 수로를 개통시킨 일로 가자(加資)된 적이 있다. 가자는 특별 진급의 일종으로, 정3품 이상의 품계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다. "전주(全州)의 옥야(沃野)가 40여 리인데 5일 안에 그 쌓인 찌꺼기를 파내어 수로를 개통시키는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더욱 큽니다. 도감 낭청 심곤(沈·)과 차사원 익산 군수 윤조원(尹調元)을 강인(姜絪)의 예에 따라 논상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윤조원은 1616년(광해군 8) 황해감사로 재직할 때 이이첨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이 최근에 개관돼 관람객을 맞고 있다. 충주고구려비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5~6세기 무렵에 고구려에 의해 세워진 역사적 실체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시골 마을의 '입석'(立石) 정도로 방치됐기 때문에 '역사' 위에 '설화'가 덧입혀져 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이효장 설화'다. '이효장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순직했다. 시신을 서울로 운구를 하던 중 중앙탑 부근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하구암리에 산소를 잡자 비로소 운구되었다. 조정에서는 이효장의 공로를 인정, 이곳 일대의 땅을 하사했고 그 표적으로 2개의 비석을 세워 경계로 정하니 그중 하나가 충주고구려비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와 유사한 면이 있다. 온달은 전투 중 '흐르는 화살'(流示)에 맞아 죽었고, 이효장은 근무 중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했다. 이효장(李孝長·?∼1463)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의(全義)다. 부친은 한성부윤을 지낸 이사관(李士寬)이고, 모친은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딸이다. 실록에 그가 어떤 정책을 수행했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호조참의로 있을 때 해청(海靑)을
전회에 충청도관찰사 김육이 대동법의 전면적인 시행의 주장했으나 유림과 대신들의 주장에 막혀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이 어떤 이유와 명문으로 반대했는지 실록에 상세히 실려 있다. 현종 연간에 배기(裵紀)라는 유생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 시행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는 '호남에는 그것(대동법 지칭)을 시행할 수 없는 이유가 셋이 있고, 감당할 수 없는 다섯이 있습니다'라고 주장, 대동법 시행을 반대했다. 그는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꼽았다. '지금은 호서(湖西)는 1결(結)에 10말, 호남은 1결에 13말, 이렇게 균등하지 못하게 거리가 가까운 곳은 도리어 가볍고 먼 곳이 도리어 무거우며, 각읍의 잉여미도 경비를 제한 외에 남아 있는 것이 수만으로 계산할 정도인데도 꼭 더 많은 잉여미를 두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시행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한 마디로 도량형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운반거리가 차이가 나는데 공물(貢物·쌀)을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거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이유의 또 다른 하나를 다음과 같이 거론했다. '지금은 지극히 흔해빠진 토산물까지도 모두 서울 시장의 높은 값
1639년(인조 17)에 제천지역 유림이 김식(金湜)·김권(金權)·김육(金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존재했던 봉강서원(鳳崗書院) 이다. 봉강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중건됐고, 1672년에 '봉강(鳳崗)'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제사와 함께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배향 인물중에 김육(金堉·1580∼1658)이 보인다. 김육은 충청도의 대동법을 논할 때 생략할 수 없는 인물이다. 대동법은 하나의 세법에 불과하나 그것이 조선시대 나라 전반에 미친 영향은 이성계와 사대부 일군이 위화도 회군후 실시한 과전법에 버금갔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잡다한 공물을 백미로 통일, 단순화시킨 공물법을 말한다. 김육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우리고장에도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충청 감사 김육(金堉)이 치계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법(大同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하였으니 본도(本道)에 무슨 행하기 어려울 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굶주린 백
전회에 중종대의 충주목사 안위(安瑋·1491∼1563)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실록은 그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적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안위(安瑋)는 한쪽 눈이 멀었는데 본조(本曹)는 조정의 예모(禮貌)를 맡는 곳이고 또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보기에 민망하니 가소서." 하니…'- 중종은 이에 대해 "다른 직임이라면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 객인이 보는 곳에는 예모에 합당하지 않다. 아뢴 대로 갈라"고 이직을 하명한다. 그러나 그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구황행정을 잘 펼쳐 조선시대 특별 진급의 일종인 '가자'(加資)를 받았다. "충주목사 안위는 관직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고 일 처리가 자세하고 익숙하여 진휼하는 일이면 다 강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조치해서 때맞춰 구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내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안위는 구휼행정만 잘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수 구황음식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바로 '충주구황절요'다. 이 책은 1541년(중종 36) 안위가 충주목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기관(記官) 홍윤창(洪胤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내용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에는 양아록 주인공 숙길(淑吉) 외에 맏손녀 숙희(淑禧·1547~?)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대를 이을 손자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배를 드는는 등 부산을 떨었다. 맏손녀 숙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숙희의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여러 행동을 촘촘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숙길이 누나 숙희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많았다. 이문건은 1553년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아이는 약질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밝고 명랑하나 조급하고 잘 울었다. 계축년(7살) 8월 풍열을 앓는 것이 경기와 같았는데 약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랫니를 갈기 시작했다." 이문건은 성주에 두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할어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위채에서 생활했고, 이때 일기를 매일 쓰고 또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인지 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에게 "나도 글을 가르쳐달라"고 자주 졸랐다. 이문건은 묵재일기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숙희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희는 9살 때 육갑, 13
조선시대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검찰에 해당한다. 그 수장은 종2품의 대사헌이다. 그 밑으로는 종3품의 집의(執義), 정4품의 장령(掌令), 정5품의 지평(持平) 등이 이었다. 사헌부 벼슬아치는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직위에 관계없이 '대간'(臺諫)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 사헌부 집의를 지낸 인물로 안위(安瑋·1491∼1563)가 있다. 사료를 보면 그는 1539년 사헌부 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대윤 윤임(尹任·1487-1545)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 우리고장 충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를 두고 조정에는 쑥덕공론이 많았다. 당시 사관이 '이해되지 않는 인사'라고 생각됐는지 실록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전에 소세양(蘇世讓)이 윤임(尹任)을 탄핵하려고 장령 안위(安瑋)에게 부탁하여 대론(臺論)을 유발하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안위가 충주 목사로 나가고 안위의 아우 안현(安玹)이 전라 감사로 나가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했었다.'- 조선시대 도적이 창궐은 탐관오리의 횡포 외에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지역 성주이씨 문중이 얼마전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의 묘를 경북 고령에서 문중산이 있는 괴산문 문광면 대명리 송면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원피스인 철릭(帖裏), 지석의 일종인 묘지명 등 부인 안동김씨 '돈이'(敦伊·1497-1566)의 유품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명종 때 장조카 이휘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극형당할 상황에 놓였다. 이때 이문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 신주를 본인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누님이 새벽에 오셨다. 함께 울었다. 밥과 국과 술잔을 가지고 신주 앞에 차려 놓고서 통곡하였다.'- 능지처참을 당할 정도의 대역죄를 지었으면 삼촌인 이문건도 중형에 처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문건이 고향유배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언묵의 딸인 돈이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사촌간이었다. 이문건과 부인 안동김씨의 부부금슬은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한번 대판싸운 내용이 묵재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문건이 외박을 하고 들어오자 안동김씨 돈이가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청주시민들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곳을 '작천'(鵲川) 또는 '까치내'라고 부르고 있다. 언뜻 '까치내'는 조류 까치를 연상케 하나 그렇지는 않다. 현재 두 개의 어원설이 제기돼 있다. 하나는 '까치내'를 '아치내'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다. 이때의 아치'는 '작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설날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때의 '까치'도 '작다'라는 뜻의 '아치'가 변한 말이다. 또 하나는 '가지내'가 '까치내'로 변했다는 설이다. 이때의 '가지'는 '갈래' 즉 '지천'(支川)을 의미한다. 미호천이 큰 하천이라면 무심천은 갈래 하천, 즉 지천으로도 볼 수 있다. 두 어원 사이에 정설은 아직 없다. 까치내 일대에 형성된 들이 '팔결들'이다. 대략 오근장역 북쪽에 위치하는 들로 보면 된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팔결들의 한자식 표기는 '八結坪'(팔결평)이었다. 팔결들은 의외로 농경지 면적을 측정하는 방법인 '결부법'(結負法)과 관련이 있다. 결부법은 경무법(頃畝法)과는 달리 토지의 비옥도를 토지 면적에 반영한 측량법으로 조선시대 세수(稅收)의 기준이 됐다. 이 경우 '八結坪'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여덟 결(結)의 들'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 1결의 넓이는…
전회에 미호천의 어원이 '미꾸지'(한자 표기는 彌串)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고 밝힌 바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꾸지'에서 물고기 '미꾸라지'를 연상하고 있다. 미호천에는 얼마 전까지 천연기념물 제 454호인 미호종개가 서식했다. 미호종개도 미꾸라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사촌격인 '미꾸리'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종 분류상은 분명히 다르다. 한지 표현으로도 미꾸라지는 '추어'(鰍魚), 미꾸리는 진흙 미꾸라지를 뜻하는 '이추'(泥鰍)로 적고 있다. 그러나 '미꾸지'는 '미꾸라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미호천에 미꾸라지가 많이 살아 '미꾸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순우리말 '곶'(串)은 해안가나 내륙하천의 툭 튀어나온 지형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경북 포항의 호미곶, 북한 황해도의 장산곶 등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과장하면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미꾸지'(彌串)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서 서쪽으로 승용차를 몰면 궁현리, 산단리, 사곡리를 거쳐 삼거리에 도달한다. 반면 부강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면 명학리, 내판리를 거쳐 역시 삼거리에 도달한다. 이곳이 전회에도 언급한
청주·청원이 통합됐다. 이와 관련, 벌써부터 미호천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호천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의외로 '문화 권력'과 관련이 있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미호'(美湖), 즉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과는 관련이 없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세종시 동면 예양리 '미꾸지'라는 지명에서 시작됐다. 한국교원대 김순배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이 '미꾸지'는 1864년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자 '두루 미, '곶 곶' 자를 쓴 '미곶(彌串)으로 표기돼 있다. 이후 1872년의 연기현지도에는 '아름다을 미', '곶 곶', '나루진' 자를 쓴 '미곶진'(美串津)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지금의 지명인 '아름다울 미', '호수 호' 자를 쓴 '미호'(美湖)로 변했다. 그러나 '미호'라는 지명은 지금은 세종시(구 충남 연기지역)보다 청원군 강내 지역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선후기 연기군 동면 예양리 일대의 유력한 재지사족은 이른바 '결성張씨' 문중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시대 양반가는 유교정신으로 무장된 계층이다. 따라서 결성장씨 가문이 '미꾸지'라는 투박한 지명보다, 일대를 '양인동'(養仁洞·仁을 키
해괴제는 전통시대 나라 안에서 지진 등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지내던 제사를 말한다. 옛사람들은 나란 안에서 괴이한 일이 일어나면 자연속의 기 흐름이 응어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해괴제는 문헌상 고려 현종 14년에 처음 등장한다. '을해일에 金州에 지진이 있었다. 이때부터 지진이 발생한 자리에 해괴제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고려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교다. 그러나 고려의 조정은 불교 만큼이나 점술을 믿고 숭상했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복주(지금의 안동)를 거쳐 우리고장 청주에 5개월 가까이 머무른다. 이를테면 청주가 한때 고려의 임시수도 역할을 한 셈이다. 홍건적이 거의 물러나가 공민왕은 점술가를 불러들여 '어느날 개경으로 환궁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점쳐보게 한다. 고려 조정에서의 주술을 그만큼 일상적인 것이었다. 해괴제도 그 범주의 하나에 속했다. 조선시대의 해괴제는 문헌상 태조 7년에 처음 등장한다. 해괴제는 자연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으로 반드시 축문을 지어 읽었다. 해괴제는 지방뿐만 아니라 궁궐 자체에서도 지냈다. 이때 가장 많은 원인 제공자는 엉뚱하게도 부엉이 울음소리였다. 당시 궁궐에서는 부엉이 울음소리를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
조선전기 복지제도의 하나로 연호미법(煙戶米法)이 있다. 이는 풍년들 때 쌀을 더 거뒀다가 흉년이 들면 다시 나눠주던 제도를 말한다. 규정대로 시행됐으면 매우 이상적인 복지제도로 볼 수 있다. 고려 현종 14년(1023)에 처음 도입된 이 제도는 조선 태종 7년(1407)까지 계속 시행됐다. 그러나 연호미법은 그 직후 폐지된다. 탐관오리가 중간에서 농간을 자주 부렸다. 이들은 세미를 과다하게 설정해 놓고 그 차이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수법으로 착복을 했다. 조선전기 청주목사를 지낸 인물로 김자수(金自粹·?~?)가 있다. 그의 본관은 경주, 호는 상촌(桑村)으로, 김세필이 그의 고손이 된다. 그는 시문이 동문선에 실릴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 그가 우리고장의 사례를 들어 연호미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우선 충주·청주의 두 고을로 본다면, 청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3천 9백 80결(結)인데, 더 늘어난 것이 5천 70결이고, 충주는 원래의 전지가 1만 6천 1백 70결인데, 더 늘어난 것이 4천 5백 70결이니, (…) 이것은 탈루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이런 때를 당하여 또 연호미(煙戶米)를 거두게 되면, 백성들의 원망이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에 '가뭄'이라는 단어를 열쇠말(키워드) 방법으로 입력하면 무려 1천18건이 검색된다. 추출된 데이터를 월별로 살펴보면 4-7월에 집중돼 있고, 지역별로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순이었다. 최근의 가뭄현상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이번 가뭄은 남한과 북한 모두 한반도 서쪽 사면이 심하다. 기상청은 이에 대해 '금년 상반기는 동쪽의 오흐츠크해 고기압이 이례적으로 강한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상학상 오흐츠크해 고기압이 강하면 이른바 푄현상이 나타나면서 그 서쪽 사면에서는 가뭄과 함께 고온현상이 찾아온다. 뿐만 아니라 장마전선도 브로킹을 당하면서 북상이 느려지게 된다. 이것은 가뭄의 장기화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땅거죽이 타들어가는 극심한 가뭄현상은 17-18세기에 많이 찾아왔다. 17세기는 임진왜란의 종전 직후가 된다. 때문에 당시 이 땅의 민중들은 전쟁에 천재까지 겹치면서 도탄에 빠진 삶을 살아야 했다. 어떤 학자는 이같은 '악기후'가 조선후기의 농민반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충청도에도 가뭄현상이 심심찮게 찾아왔다. 실록에는 '강물이 끊겼다'는 표현이 더러…
[충북일보]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하기에 더없이 좋은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문화제조창을 비롯해 청주 곳곳에서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은 '꿀잼' 문화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대표이사 변광섭)에 따르면 어린이날 연휴인 4~5일에는 문화제조창 본관과 동부창고에 어린이들의 웃음 소리가 가득할 예정이다. 주말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동부창고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신나는 어린이날 행사'가 펼쳐진다. 동부창고 6동에서는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 △여유 만만 창고 피크닉 △흥미로운 예술시간 △피아노 공연 등이 열린다. '슬기로운 새활용 놀이터'는 병뚜껑 알까기, 자투리 목재 미니운동회 등 온몸으로 뛰놀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체험 활동이다. '흥미로운 예술시간'을 통해서는 17종의 예술체험 프로그램(유료)을 즐길 수 있다. 이날 동부창고 카페C는 유료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 음료를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굿즈 뽑기 이벤트'를 연다. 문화제조창 본관 청주시한국공예관에서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공예관은 5일 오전 10시,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 오송에 바이오의약품 소부장 특화단지와 첨단재생바이오 글로벌 혁신특구 유치에 성공한 충북도가 바이오 특화단지와 K-바이오 스퀘어 조성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오송을 바이오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의 클러스터로 육성하기 위해서다. 바이오 특화단지는 올해 상반기 지정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며 예타 면제는 이때까지 실현시킨다는 목표를 잡았다. 1일 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한 바이오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공모에 도전장을 던졌다. 특화단지로 지정되면 신규 산단 조성 시 국가산업단지로 신속 지정 검토, 생산시설 신·증설 때 산업단지의 용적률 최대 1.4배 상향 등을 지원 받는다. 정부 연구개발(R&D) 우선 반영, 입주 기관에 대한 국·공유 재산 사용료와 대부료 감면, 예타조사 특례 적용 등이 주어진다. 이 같은 다양한 혜택이 바이오산업 육성에 큰 도움이 되는 만큼 유치전은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충북을 비롯한 11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인천과 강원, 대전, 경북, 전북, 전남이며 경기는 수원과 성남, 시흥, 고양 등 4곳이 신청했다. 도는 지난달 30일 서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