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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붕타우 시내, 담장 넘어 피어있는 연분홍 부겐빌레아를 만났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다. 그것이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 같아서 부겐빌레아는 '종이꽃'이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어로는 화자이라고 한다.

하얀 꽃은 꽃받침 안에 숨어있다. 꽃받침은 꽃처럼 진화했고 벌과 나비를 부른다. 벽돌담을 타고 내려와 붉게 피어있는 이 정열의 꽃을 보면서 이 골목이 무척 낯익다는 생각에 잠긴다. 아마 한국의 어느 담장에서인가 본 덩굴장미가 연상된 것이리라. 꽃은 다르지만, 이 골목의 정경은 그 풍경과 흡사하다. 우리의 기억은 좋았던 것을 간직하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그것을 다시 끄집어낸다. 나는 불현듯, 꽃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연분홍 잎에 손을 댄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김춘수 시인은 릴케의 시를 보고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꽃을 소재로 한 시편들을 시인 스스로 '존재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

위 시의 꽃 앞에 선 화자는 왜 위험한 짐승이 되는 걸까. 눈앞의 존재는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의해, 감동의 결에 의해 달라진다.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꽃이 눈앞에 있다. 그 아름다움 혹은 미적 가치는 바라보는 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순수한 가치는 손을 대는 순간 훼손되고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화자는 밤새워 운다. 본질에 대한 추구일 것이다. 그 추구는 자신의 <울음>이 <돌에 스미>어 <금>으로 굳어져 버리는 그러한 순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내가 볼 수 없는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일 수밖에 없다. 본질에 손이 닿는 순간, 존재의 순수는 이미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꽃은 생식기관의 일부이다. 꽃은 각양각색으로 빛깔을 발하며, 향기와 달콤한 꿀을 품어서 나비나 벌 같은 곤충을 자극하고, 그들을 통해 꽃가루를 옮기며 자신의 후대인 씨앗을 퍼뜨린다. 하지만 위 시의 꽃은 시인의 철학적인 사유물일 것이고, 미적 탐구의 대상일 것이다.

꽃에 대한 릴케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파리에 체류할 시에 어느 여성과 함께 길을 가다 여자 거지를 발견했다. 여성은 거지에게 동전을 주었지만, 릴케는 주지 않았다. 몇 번 마주쳤지만, 릴케가 자선을 베풀지 않자 여성은 왜 자선을 베풀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릴케는 '우리는 그녀의 손이 아닌 마음에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며칠 후 릴케는 흰 장미 꽃다발을 거지에게 주었고 거지는 릴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장미와 함께 사라졌다. 일주일 후에 거지가 다시 나타났을 때 릴케와 함께 있던 여성이 그동안 무엇으로 살았냐고 거지에게 물었다. 거지는 '장미'라고 답을 하였다고 한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육체가 양식이 필요하듯이 마음도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릴케는 남루한 거지일지라도 마음속에는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았고, 그것을 거지 여인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부겐빌레아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연분홍 잎새는 아주 작은 흰 꽃을 숨기고 있다. 마치 면사포를 쓴 신부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듯이 꽃은 꽃받침에 파묻혀 있다. 황홀한 색이 현란하게 곤충들을 부른다. 우리는 알까, 이 자연의 오묘함을. 가만히 종이꽃에 손을 대어본다. 바람이 꽃을 밀어낸다. 나는 위험한 짐승이 되어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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