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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그녀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래? 벌써 꽃이 폈어?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복수초잖아, 나도 싹이 올라왔나 봐야겠다."

전화를 받은 친구의 밝고 경쾌한 조금은 들뜬 듯한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의 감탄사에 봄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포근한 겨울 날씨가 계속 이어지자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겨울이지만 봄이라 여겨질 만큼 햇볕과 바람이 달고 부드럽다. 베란다에서 봄이면 소담스레 꽃을 피우던 선인장도 일찌감치 꽃망울을 부풀리더니 꽃잎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반가운 목소리로 화단의 복수초 싹이 궁금해진 친구가 바로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살짝 흙을 걷어낸 화단에는 복수초가 주먹처럼 움켜쥔 싹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서 추운 겨울에는 마냥 침묵하고 적당히 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봄이 되면 꽃으로 피겠지 쉽게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늘 미루다가 닥쳐서야 벼락치기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의 습관을 또 들켜버린 셈이다. 복수초가 봄을 위해 겨우내 보이지 않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끊임없이 준비해 온 것에 경의를 표하며 친구와 통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서로 봄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벌써 봄이라는 무서운 시간의 흐름에 놀라 가슴이 철렁하다는 이야기도 더했다. 그러다가 스프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봄맞이를 가기로 한 것이다.

친구가 살고 있는 음성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대문 언저리에서 고개를 내밀어 골목을 살피고 있다가 반겨주었다. 내가 도착하니 친구보다 먼저 개가 짖고 고양이가 양지쪽 뜰에 나와 뒹굴었다. 반가움에 시끌벅적한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친구는 복수초가 자라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치 잠자고 있는 아기를 보듯 봄을 준비하고 있는 새순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음성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먼저 가섭사에 오르기로 했다. 가섭산에 자리한 가섭사는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로 고려 후기 나옹이 창건한 사찰이다. 절에 오르니 음지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온화한 날씨에 양지쪽에는 이미 초록이 깃들고 있었다. 절을 둘러보며 산책을 했다. 마침 종소리가 울려 퍼져 그 소리를 들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감로정 등을 둘러보며 도란도란 걸었다. 오래된 느티나무도 한참 올려다보았다. 양지쪽 바위 밑에 놓인 장독대를 돌아 음성읍의 전망을 내려다보며 사진도 찍고 팔 벌려 바람을 안아 보기도 했다. 우리는 온몸으로 봄을 느끼며 봉학골로 향했다. 봉학골 지방 정원을 걸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벚나무 길을 따라 미리 꽃길을 걸었다. 오래된 벚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어 벚꽃이 피면 다시 오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대신 친구의 이야기로 꽃구경을 푸짐하게 했다. 중간중간 소원탑이 있어서 우리도 납작한 돌을 찾아 소원을 빌며 쌓기도 했다. 넓은 지방 정원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름표가 꽂힌 꽃밭을 보고 꽃 이름을 호명하면서 용산리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를 따라 음성 쑥부쟁이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물과 산을 보며 걷는 길도 즐거웠다. 저수지는 얼음을 품고 있었다. 양지쪽으로 얼음이 녹아 산을 담은 물결을 볼 수 있었는데, 물오리들이 헤엄을 치며 놀고 있었다. 가끔 얼음 위에 올라와 걷는 오리들의 빨간 발을 보면서 발이 시릴 것이라는 느낌의 고정된 생각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웃기도 했다. 어느새 저수지 둑에는 풀이 새싹을 돋우고 물에 잠긴 버드나무에는 연둣빛이 연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친구는 걷는 내내 추억이 얽힌 것들을 이야기했다. 봄나물을 뜯던 자리,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 등을 알려주면서…. 벚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 길에서는 팔을 벌려 마치 꽃비가 내리는 거리를 걷는 시늉을 하며 나무 위를 보면서 웃고 떠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벚꽃이 피지 않은 벚꽃길을 걸었고 쑥부쟁이가 없는 쑥부쟁이 둘레길도 걸었다. 아직 형체가 없는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꽃길도 걸었다. 우리들의 즐거운 봄맞이에 해가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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