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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어느새 미지근해졌네!'

커피를 타서 책상 위에 놓고 앉았다. 앉자마자 우편으로 도착한 이상교 작가의 동시집을 펼쳐보면서 커피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커피가 미지근해졌다. 향기가 사라지고 온기가 빠져나간 커피가 맹물처럼 느껴졌다. 짧은 시간인 듯 했는데, 잠시 책을 훑어보고 커피를 마시려고 한 것이 그만 동시 속에 들어가 한참을 머물렀던 것 같다.

어쩌면 단순히 동시에 머물렀다기보다는 이 동시집을 선물한 선배와의 소중한 인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동시집을 보내 온 사람은 대학 선배로 참 가깝게 지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선배는 결혼을 하여 미국에 가서 살게 되었고, 서로 연락을 하는 횟수가 점점 드물어졌다. 그러다가 몇 년 뒤 다시 선배 가족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살게 되면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서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추억을 공유하는 정도였다. 이따금씩 책이나 커피 등 선물을 주고받으며 따뜻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번에 역시 선배가 보내 온 선물이 바로 동시집이다. 쑥차와 포근한 보랏빛 니트 스웨터도 함께 보내왔다. 선배의 마음까지 읽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우연일까?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마주한 동시가 '시계 가게'였다.

'시계 가게'라는 제목의 동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 동시 속에 갇혀 내가 머물렀던 시간이 얼마나 될까?

"다섯 시 오 분이 맞아!"/부엉이 시계가/눈을 커다랗게 부릅뜬다.//"아냐, 열한 시 정각이야!"/기둥 시계가/뚝딱뚝딱.//"일곱 시라니까!"/뻐꾸기 시계도 지지 않는다.//시계마다 제가 가리킨 시각이/맞는다, 맞는다 서로 우긴다.//뚝딱뚝딱, 투닥투닥/째깍째깍, 찰칵찰칵//우기는 목소리도 다 다르다.

그렇다면 나의 시계는 몇 시일까? 커피가 미지근해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코로나19로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조차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하는 요즘은 세월이 흐르는 느낌 역시 전과 같지 않다. 움츠리고, 낮추고, 늦추며 거리를 두고 모두가 집에서 주로 생활을 하다 보니 매사에 조심하게 되고 자연스레 모든 행동 또한 다소 둔해지는가 하면 미지근해질 때도 더러 있다.

얼마 전부터 '미지근하다'는 말이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러시아가 고향인 제자가 아침 수업 전에 반가워하며 질문을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미지근하다'가 뭐예요?"

"올레샤, '미지근하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책에 미지근하다는 말이 있어요."

한국어를 제법 잘 구사하고 읽기와 쓰기 등이 자유로운 편인 제자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틈틈이 교실에 비치된 학급 문고를 이용하고 도서관도 이용하는 모습에 칭찬을 해 주곤 했다. 집에서 책을 읽다가 '미지근하다'는 낯선 어휘가 나오니까 궁금해서 기다렸다가 질문을 한 것이다. 나는 차나 밥, 국 등 뜨거운 음식이 식어서 뜨겁지 않으며 조금 따뜻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이해를 돕기 위해 뜨거운 물과 미지근한 물이 담긴 종이컵을 가지고 알려 주었다. 아직 어려울 듯하여 행동을 가리키는 미지근하다의 의미는 설명하지 않았다. 올레샤는 활짝 웃으면서 알겠다는 제스처를 해 보이며 교실로 갔다. 올레샤 뒷모습으로 새로운 단어들이 나풀나풀 기분 좋게 날아오르는 듯했다.

미지근한 커피도 좋다. 미지근한 커피를 마시며 향기로운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니 한층 더 향긋해 진 것 같다. 은근한 향에 시도 있고 사람도 있고 따뜻한 정도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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