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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주말을 좀 바쁘게 보내고 나니 요일 감각이 떨어진다. 어느새 파노라마처럼 꽃들이 피고 지고 초록이 물들기 시작했다.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았었는데 선뜻 생각이 나질 않는다. 집중이 흐려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떨어졌다. 길을 잃은 기분이랄까. 마음의 지도를 찾으려 해도 딱히 보이지 않고 공허하고 어두웠다.

가장 가깝게 있는 책을 펼쳤다. 무심코 아무 곳이나 손에 잡히는 곳을 펼쳐 중간 페이지를 열었다. 순간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가속도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호수가 펼쳐졌다. 그 호수에는 낯선 풍경들이 잠겼고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낯선 언어가 들려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호수 주변에 섰던 수양버들이 너울너울 내 마음처럼 흔들렸다. 우리는 오래전 그 공간에 함께 있었다.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래서 조촐한 자리를 마련하여 기쁨을 더했고 시간을 넘나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한 시간들이 많아서인지 글이 맛있게 읽혔다. 평소 수필집은 소설처럼 궁금증을 가지고 한꺼번에 내리읽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며 읽는 편이다. 그래서 책상 위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읽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오늘은 마침 오래전, 친구하고 러시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여행 일정 중에 들렀던 한 곳을 소개하는 글이 손에 잡힌 것이다. 수필집 중간을 펼쳤는데, 마침 함께 갔던 여행지에 관한 내용이어서 그 글을 통하여 반가운 친구를 만나듯이 추억여행을 하게 된 셈이다. 지금도 아름다운 초록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양팔을 벌려 환호하며 걸었고, 수도 없이 '좋다'는 말을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아울러 호수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손놀림에 빠져들었던 일행들의 모습도….

친구는 글에서 늙은 화가를 떠올리면서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어우러진 호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 놓쳤던 중요한 정보들을 귀하게 덧대어 유익한 작품으로 선사해주어 더 좋았다.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며 잠시 러시아 여행을 추억하면서 감사했다.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잊고 있었던 마음의 지도를 펼치니 꽃과 초록이 가득하다. 그때 함께 갔던 일행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이미 별이 된 사람도 있고, 글을 쓰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쓰며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소중한 인연들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지금 이 순간, 내 주변 혹은 우리 주변에 있는 소중한 인연을 떠올리니 가장 가까운 가족을 시작으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가는 지도가 그려진다.

모처럼 여유 있고 느긋하게 맞이한 하루가 풍성해졌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주말에 바쁘다는 핑계로 편찮으신 어머니를 뵙지 못했는데, 불현듯 오늘 잠깐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점심과 저녁에 드실 음식을 준비하여 시골 어머니 댁으로 향했다. 산에 초록이 번지고 있었고 여기저기 꽃들이 피고 지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고로쇠나무가 프로펠러 같은 열매를 달고 꿈을 펼치고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장독대 주변 울타리에 함박꽃이 꽃봉오리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을 지키는 어머니가 민들레처럼 앉아 들녘을 바라보고 계셨다. 오후에는 어머니 목욕을 시켜드리고 빨랫줄에 빨래를 널어 바지랑대를 괴고 우리는 또 서쪽으로 기우는 해를 보며 장독대에서 된장을 뜨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어느새 마음의 지도에도 곱고 따뜻한 노을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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