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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현

청주시 농업기술센터 연구개발과 팀장

11월 11일은 숫자 '1'이 4개가 정렬돼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는 날로, 일반인들은 이 날을 농업인의 날, 가래떡데이, 초콜릿 과자 데이 등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청주시는 이 11월 11일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바로 젓가락이다.

이 젓가락을 주제로 한 세계 최초의 문화축제를 청주시가 지난 2015년 11월 개최했다.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젓가락 페스티벌'이라 불리는 이 행사에는 젓가락 문화 학술심포지엄, 젓가락질 마스터 클래스, 젓가락 경연 대회, 나만의 수저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과 공연행사가 펼쳐진다.

'젓가락 페스티벌'의 테마는 단순하게 보면 식사 도구일 수 있겠지만 그 의미는 실질적으로 더 크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에 있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모두 젓가락이란 공통의 문화를 보유하며, 우리의 일상에 가장 중요한 행위 중의 하나인 바로 식사에서 젓가락을 모두 공통적으로 사용한다.

기록에 따르면 젓가락은 중국인들에 의해 빠르게는 BC 1200경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끓는 물이나 기름의 냄비 깊숙이 넣을 수 있는 젓가락은 처음엔 거의 조리용으로만 사용됐는데, 기원 후 400년쯤 중국 전역에 걸친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늘어난 인구를 한정된 자원으로 부양하기 위해 요리하는 사람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할 수 있는 무언가의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리 연료가 덜 필요로 하게 음식을 잘게 잘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작아지게 해 젓가락을 식탁에서 사용하게 했다.

중국의 젓가락은 길고 두껍다. 중국인들이 식탁에서 음식을 서로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음식은 종종 Lazy Susan이라 불리는 회전 식탁에서 서빙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의 마지막 조각이 먼 곳에 있다면 팔이 모자란 약간의 길이를 긴 젓가락이 채워준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음식을 나눠먹지 않기에 젓가락이 짧다.

젓가락을 사용하고 난 후 혹은 입술에 젓가락이 묻으면 본인들의 영혼의 일부가 젓가락에 옮겨진다고 믿어 젓가락을 개인적으로만 사용한다. 또한 일본 젓가락은 끝이 뾰족하다.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데 뾰족한 젓가락일수록 생선의 가시를 발라내기 더 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금속 젓가락은 많이 사용한다. 이런 관습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류층 왕족과 귀족들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수저와 젓가락을 이용했는데 이후 신라시대에는 은 수저와 은 젓가락으로 전환했다. 은 젓가락은 접촉 시 비소 독극물을 감지해낼 수 있기에 지배계급은 이 은 젓가락을 일종의 신변보호 수단으로 사용했다. 나중에 결국 은 젓가락은 신분의 상징이 됐다. 요즘 금 수저, 은 수저, 흙 수저란 용어가 각각의 계층을 가리키는 뜻을 갖게 된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렇게 젓가락이 가진 다양하고 훌륭한 콘텐츠와 스토리로, 청주시가 매년 젓가락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지만, 11월 11일은 젓가락 문화도시 청주시의 날로 기억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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