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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새 해 아침에 눈발 날리는 숲속을 자박자박 걸었다. 세모에 내린 눈이 나무 위에 쌓였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가루처럼 흩날렸다. 소나무 밑동은 추위 속에서 더 붉고 진하게 빛났으며, 솔잎 무성한 곳에 쌓여있던 눈이 바람의 현을 따라 파도쳤다. 추위가 깊어지면서 참나무 숲은 여리고 슬픈 여인처럼 아슬아슬했지만 눈에 덮이는 익명성 때문에 편안해 보였다. 자연은 이처럼 엄연한데 사람의 일만 복잡하고 고단하며 어수선한 게 아닐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숲속에서 잠시 상념에 젖는다.

누가 말했던가. '텅 빈 충만'이라고. 정상에 올라 성곽을 따라 걷다보니 청주시의 전경이 거대한 화폭이 돼 내 안으로 밀려왔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면서 도시는 자줏빛의 풍광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가득 찬 것 같지만 곳곳에 여백의 미가 느껴졌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달려왔던가. 생존을 위해, 나만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닦달하고 다투며 살아왔으면서 국가와 민족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독립투사처럼 달려왔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부끄럽다.

세모에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을 2015동아시아문화도시 명예조직위원장으로 위촉했는데, 그 때 당신은 청주를 '생명도시', '생명자본도시'로 가꾸어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이곳에서 쏟아지는 도시의 풍경과 소나무 숲의 비밀과 이끼 낀 성곽의 돌무덤을 보니 비로소 당신께서 생명의 가치를 웅변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개발논리로 꽉 찬 도시, 회색빌딩과 각다분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도시가 아니라 비교적 덜 여문 도시, 여백과 여운과 운치가 있기 때문에 생명도시로 갈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다.

전쟁의 시대, 이념의 시대, 경제의 시대에 생명의 가치는 도구에 불과했다. 자신의 이익과 승리를 위해 총을 들어야 하고, 할거주의가 판을 치며, 무분별한 개발과 살생으로 도시의 생명들이 사라져야 했다. 꽃이 피고, 녹음 우거지며, 단풍으로 물들고, 눈 쌓인 숲을 거닐 수 있는 낭만은 꿈같은 일이었다. 꽃들의 색은 저절로 비롯되는 것인데 인위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강요와 협박과 정쟁으로 일관하는 곳에 무슨 생명을 엿볼 수 있겠는가. 그나마 청주는 청원군과 통합되면서 본격적인 도시개발을 앞두고 있는데,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드는 과오를 범하지 말고 맑고 향기로운 청주정신을 살려보자는 것이다.

가로수길을 시작으로 도시와 마을 할 것 없이 100여개에 달하는 보호수가 있다. 오송바이오단지가 있고, 청원 생명쌀이 있다. 청주의 젓줄인 무심천과 대청호과 옥화구곡도 그 근원이 생명이 아니던가. 상당산성과 주변의 숲에서 끼쳐오는 색과 형상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구순해진다. 백두대간 한남금북정맥을 보라. 좌구산과 구녀산과 산성고개를 이어주는 낮고 느리고 여린 숲의 비밀과 크고 작은 마을마다 신화와 전설이 오롯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러하니 청주는 맑고 향기로운 도시다. 생명의 도시다.

이미 우리는 2천 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위기의 마디와 마디마다 생명의 가치를 발휘하지 않았던가. 철기문화의 발원지이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만들었다. 청주읍성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고,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서 왜적과 맞서 싸울 때 내륙 최초의 승전보를 울린 곳이 이곳이 아니던가. 단재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문화, 그리고 근대의 아픔을 간직하면서도 사람의 가치와 생명의 가치를 알았기에 교육열이 다른 지역보다 높았던 것이다.

전통과 현대, 디자인과 산업, 문화와 문명,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생명도시를 꿈꾼다. 더 나아가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와 창의산업이 융성하는 생명자본도시로 가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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