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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광섭

그날 새벽 호텔 로비는 분주했다. 며칠간의 고단한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으려는 사람들은 잠을 설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올 때 보다 더 많은 짐들이 부담스럽고 세관 검역이 걱정된다며 여기저기 옮기거나 가방 부피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짐을 꾸리고 챙기는 풍경을 바라보며 삶의 향기야말로 거저 만들어지지 않음을 느낀다. 여행도 치열한 삶의 하나이며, 치열성의 결과가 각자의 향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했다.

짐들이 정리되고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는 떠나야할 시간, 인원체크를 해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젓가락문화협회 우라타니 효우고 회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호텔 한 구석에서 무릎 위에 편지지를 올려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차에 타자고 해도 '잠깐만'이라는 짧은 외마디 비명만 지르고 간절한 표정으로, 몰입의 힘으로 꾹꾹 눌러쓰고 있었다.

여행길에 누군가를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순간의 아름다움과 추억과 영광을 몇 줄의 시로 써서 누군가에게 보내려는 것이다. 저렇게 손편지를 써본 것이 언제였나 생각하니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호모 스마트쿠스라고 했던가. 디지털시대의 신인류가 탄생했다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되고 모든 정보와 편지 역시 스마트폰이나 이메일로 주고받는 시대를 살다보니 원고지의 시대, 편지의 시대가 저물었던 것이다.

우라타니 회장은 꾹꾹 눌러 쓴 편지를 접어서 내게 건넸다. '당신께 주는 편지'라며 차에 올라탔다. 곁에 있는 줄 뻔히 알면서 말로 하면 되지 편지를 써서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를 받자마자 시큰둥했는데 그곳에는 첫 만남에서부터 청주에서 겪은 많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위대한 역사를 하나 쓰게 돼 행복했다며 우리의 만남과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고 했다.

그가 건네 편지는 그 어떤 포옹이나 키스보다도 진하고 뜨거웠다. 그 어떤 말보다도 글이 훨씬 값지고 영혼을 울린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언어의 시대에 언어로는 다 말 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인데, 편지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간절함까지 담게 하고 그 순간의 심정을 영원히 이어갈 수 있으니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어렸을 적에는 방학이 되면 담임선생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먼 친척이나 가족들에게도 틈만 나면 편지를 썼다, 중학교때부터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연예편지를 쓰는 일을 밥 먹듯 했다. 그토록 많은 편지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날의 편지쓰기가 나의 글쓰기였고, 수련이었으며, 꿈꾸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일을 접게 되었다. 타자기로 편지를 쓰다가 컴퓨터 시대가 오면서 사색 대신 검색을 즐기며 이메일로 편지를 쓰고 있다.

동아시아문화도시 1년의 시간 중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슴 떨리던 순간은 이어령 명예위원장을 만나는 시간이다. 2주에 한 번꼴로 만났던 것 같은데 그 때마다 시공을 뛰어넘는 창조의 가치, 수많은 말의 성찬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항상 종이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디지털의 시대에 아날로그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스쳐 지나간다. 단풍도 끝물이다. 차가운 바람 타고 온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나의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본다. 아무것도 꿈꾸고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하지 않을 때가 가장 불행했던 것 같다. 꿈꾸고 싶을 때, 사랑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싶을 때 편지를 써야겠다. 손으로 쓴 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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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