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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퇴근길에 육거리 시장에서 두부 한 모를 샀다. 슈퍼에 가면 기계로 찍어낸 두부가 있고 값도 저렴하지만, 굳이 육거리 시장까지 간 것은 시골 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어 팔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붉게 익은 홍시와 미니족발 등 군것질거리도 장만했다. 우리 가족의 만찬으로 이만하면 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두부를 썰고 냉장고에 있던 묵은 김치를 꺼내 들기름에 볶았다. 굵은 멸치 몇 마리 넣고 된장찌개도 끓였다. 계란도 몇 개 부쳤다. 온 가족이 두부김치와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홍시로 달달한 추억을 만들었다. 난생처음 두부김치를 내 손으로 요리했다. 즐겨먹는 음식이지만 된장찌개를 직접 해 본 것도 처음이다. 첫 경험의 결과치곤 대만족이었다. 가족들 모두 맛있었다니 말이다.

물론 집사람은 느닷없이 왠 저녁준비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안절부절이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부엌일을 하는 남편의 행태에 묘한 행복감에 젖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앞치마 두른 남편, 따뜻한 밥 한 끼 해주는 아빠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젖었다.

이 같은 나의 행동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면서 옆구리가 허전해졌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감수성은 왜 그리 예민해지는지 스스로도 도저히 감당이 안될 것 같았다. 난처하고 이상한 일들이 속출하고, 삶은 갈수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번잡할 뿐이다. 사무실의 일은 끝이 없고, 나의 꿈은 아득하며, 현실은 녹록치 않으니 말이다. 순간, 나는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언제 했었는지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았다. 기억에도 없고 막막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달려가 가족들 품에 안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횟수가 그리 많지 않다.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하는 것이 10년도 더 되었고, 점심과 저녁은 세상 사람들과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가족들과의 오찬이나 만찬은 꿈같은 일이 되었다. 큰 맘 먹고 온 가족이 식사를 할 요량으로 일찍 귀가하면 아이들이 야자(야간 자율학습)와 학원을 오가느라 얼굴 보기도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바람같이 외롭고, 그림자처럼 쓸쓸하기 때문에 가족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과 함께 서로를 보듬고 사랑을 느끼며 삶의 활력을 찾는 것인데, 나는 그동안 저잣거리를 영혼처럼 떠돌며 방황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아침이 있는 삶을, 또 다른 누구는 저녁이 있는 삶을 외쳤다. 경쟁의 연속이고, 고단한 일상이 반복되고, 미래가 불확실하고, 수많은 상처로 얼룩진 삶이기에 달콤한 밥 한 끼가 그립기도 할 것이다. 아스라한 난간에 홀로 서 있다고 생각할 때, 햇살 쏟아지는 어느 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젖을 때, 손 내밀고 싶어도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슬픔이 밀려올 때, 신경림 시인의 <갈대>처럼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내가 서둘러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면, 육거리 시장에서 두부 한 모를 사지 않았다면 찬 바람 가득한 회색도시의 막다른 골목에서 외로움을 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피터 싱어는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프랑스 포도원에서 포도주를 시음하고 싶은 욕망은 하찮은 것일 뿐"이라며 무절제한 쾌락적 소비생활을 경계했다. 지나치게 경쟁에 몰입하다 보면 불안감이 증폭되고, 불안하기 때문에 쾌락을 좇고, 쾌락을 좇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며, 막장드라마 같은 불행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는 청춘이 어디 있겠냐만 그 아픔의 마디 마디를 이겨내야만 새 순 돋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아픔을 보듬는 둥지가 바로 가정이 아니던가. 2013년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가엾다.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을 서성거리는 행복한 남자가 되고 싶다. 아침이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이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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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