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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1.18 14:39:06
  • 최종수정2024.01.18 14:39:06

황인술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기다림은 그리움이 된다. 많은 시간동안 기다리면서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그리움은 기다리는 얼굴을 그리게 하였다.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기다림은 알고 있는 기다림도 있고, 언제일지 모르는 기다림도 있다. 기다림은 설렘도 있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

크고 있는 자식을 기다려주고, 늙어가는 부부가 어떻게 늙어갈지 느긋하게 기다린다. 노년을 기다리고,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고,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사라져 주길 기다리고,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지길 기다리고, 오늘보다 더 좋은 내일을 기다리고, 산책하는 강아지가 주변 환경을 느끼도록 기다려주고, 우리는 이렇게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 기다리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 작용하는 기다림도 있지만, 스스로 원하는 기다림도 있다. 수동이든 능동이든 우리는 원하는 곳에 다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목적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방향 잡아 항해하는 배처럼 기다림을 조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스스로 기다리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기다림은 두려운 기다림이며, 스스로 원하는 기다림은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꾸어 준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한다. 사이에서 기다림과 그리움을 채우다보니 새벽이 열리고, 새해를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설레임으로 기다리는 2024년을 온 마음과, 정성과, 사랑과, 기쁜 마음, 맑은 눈빛, 환한 미소로 맞이하고 싶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티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기룬 것은 다 님이다

-후략-

한용운, 『님의 침묵』,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힘없는 "중생" 님은 하늘이며, 음악은 베토벤 님이며, 싸이 님은 삼류 마이너리티 싸이코시스이다. 님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며, 대상은 나를 사랑한다. 「군말」은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로 시작한다.

여기서 '기룬', '기루어서'는 '기루다'가 기본형이다. 만해가 태어난 홍성 사투리로 '기루다'는 '그리워하다. 사랑하다. 마음에 두고 키우다. 정을 두다. 애처롭고 불쌍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김재홍, 시어사전, 고려대학교 출판, 1997, 152쪽.)

'기루다'는 '그리워 하다'이며 이는 '그리다' '그리고'가 된다. '그리고'는 그림을 그려 여백을 채우는 것이다. 그리움은 살림하는 움터이자 마음이 깃든 삶터에서 돋아나는 새싹 같은 것이다.

새싹처럼 마음에 새겨진 얼굴은 기다림을 만들어 온다. 기다림은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마음에 그려진 온기에서 생겨난다. 그대를 그림은 석가의 님이 기루어 한 것과 같은 님이다. 그 그림을 그린 나는 중생이다. 중생(衆生, sattva)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중생은 인간에 대한 표현이지만 이 세상 모든 만물을 포함하는 말이다. 중생을 어리석은 사람, 무지한 사람, 욕망에 눈이 먼 사람 등을 지칭하는 말로 해석하면 안 된다.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을 마음속에 새긴 새싹의 움틈, 그 설레임을 담아 살아가는 슬픈 그리움은 온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때문에 죽음은 슬프게 내 앞에 서 있는지도. 죽어가는 존재들은 슬픔이며 그리움이다.

이러한 중생을 현장스님은 유정(有情)이라 번역했다. 유정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중생에 대해 만해는 "길을 잃고 헤매는 羊"으로 표현했다. 그대를 그려놓고 보고 있노라니 그대가 참으로 그립다. 그리움에 길 잃은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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