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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시인, 한천초등학교병설유 교사

다섯 시 알람이 울린다. 인천, 눈을 뜨자마자 낯선 도시를 발음해 본다.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에서 '100편의 소설 100편의 마음'이라는 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오래전 작가들의 영혼을 보러 간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인가. 청주에서 인천까지 물리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도道를 넘나들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는 멀다. 먼 길을 떠날 생각에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분주했다. 시외버스 앱으로 미리 차 시간표를 알아보고, 쉬운 길 찾기 앱으로 경로도 익혀 두었다. 그리고 일곱 시 이십 분 버스를 예매해 놓았다.

드디어 오늘, 나는 1900년대를 만나러 간다. 여섯 시 반에 현관문을 열고 나와 내 차에 시동을 건다. 터미널 근처에 차를 주차해 놓고 인천행 버스를 탈 요량이다. 터미널 근처 골목을 빙빙 돌기를 몇 번, 마침 주차했던 차가 빠지고 있다. 간신히 차를 대고 바람처럼 걷는다.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인 탓에 시간이 넉넉하다. 버스를 기다리며 훈풍을 맞는다. 사느라 바빠 계절을 마주할 겨를도 없었는데 봄이 불쑥 내 옆에 서 있다.

버스가 도착하고 자리에 앉는다. 내 좌석은 9번이다. 나는 9라는 숫자가 좋다. 9는 10보다는 작지만, 왠지 1만 더하면 가득 찰 것 같은 희망을 품게 한다. 그래서 티켓이나 좌석을 예매할 때 늘 9번을 고른다. 남들은 7을 좋아하지만 7은 내겐 너무 과분한 숫자라는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행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학창 시절 소풍에서 나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보물을 찾아본 적이 없다. 고로 나는 행운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 내 자유의지이길 바라며, 그 길이 힘겹지 않기를 기도한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이팝나무들이 길옆에 늘어서서 하얀 꽃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들판이 스륵 지나가더니 산들이 휙휙 지나간다. 초록으로 몸을 불리는 봄이 창문을 통해 나를 관람한다. 지나간 날을 떠올린다. 여러 해의 봄이 버스의 속도에 맞춰 나를 스치고 뒤로 뒤로 멀어진다. 수많은 봄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멀어지는 봄날 중 한 컷을 잡아 생각에 잠긴다.

시간을 거꾸로 더듬다 보니 어느덧 인천에 도착한다. 인천역에서 내려 차이나타운으로 발을 옮긴다. 짜장면 박물관을 관람하고 인천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하얀 짜장면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오래된 책들을 보며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황순원의 소나기가 보인다. 소나기 책 표지와 겹치며 학창 시절 추억이 아득하게 피어난다. 생각에 젖어 있는데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꽁무니를 따라나선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 '자유공원'으로 간다. 1889년 무렵, 우크라이나인 토목기사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공원으로 당시에는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명명했다가, 1957년 자유공원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공원을 둘러보고 전망대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본다.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유를 생각한다. 조선인의 의견이 배제된 채 외국인들에 의해 조성된 자유공원, 그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진정 이곳은 누구를 위한 공원이었을까. 문득 '개인의 자유가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라는 프레드릭 윌리엄 파라는 말을 떠올린다.

인천을 뒤로하고 청주행 버스를 탄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청주에 도착한다. 청주의 포근한 밤이 내 살갗을 어루만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마주친다. 지금 내 눈에 빛을 발하는 저 별은 오랜 시간을 날아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몇 년 전에 출발한 빛이 몇 광년을 날아서 드디어 오늘 내 눈 속에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마치 오래된 날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날아와 오늘 내 가슴에 내려앉는 것처럼.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자유라는 말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내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영혼은 육체의 노예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곰곰 생각에 잠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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