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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주성초등학교병설유 교사

햇살이 철삿줄 같은 손가락을 마당 가득 풀어놓는 오후, 햇살의 손아귀에 놓인 잎이 흐늘하게 힘이 풀려 며칠을 비실비실했었다. 오늘은 옥죄는 손가락 따윈 무섭지 않다는 듯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짙푸른 초록을 내걸고 이제야 바람결에 펄럭이며 소곤댄다. 그동안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았었나보다.

"지금 어디세요?" 일주일 전 금요일 저녁 느닷없이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집인데요.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묻자, "지금 제가 삽질을 했거든요." 수화기 너머 그녀의 목소리가 나풀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삽질을요? 헛일을 했다는 뜻이에요? 왜요? 왜 그런 일을 했어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수국을 캤어요." 그제야 그녀의 말이 이해되어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아~ 그러셨군요.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녀가 해맑게 말을 받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어서 남편의 도움을 받았어요. 지금 가지고 가려는데 주소 좀 찍어주세요."

수국 꽃대처럼 하늘거리며 초록 향기를 나눠 주는 그녀. 나보다 늘 먼저 출근하는 그녀. 내가 차에서 내리면 그녀는 벌써 운동장에 나와 화단에 물을 주고 있다. 복도를 들어서면 그녀가 키우는 화분들이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난 걸음을 멈추고 꽃들에게 시선을 떼어주며 하루를 열었다. 겨울엔 게발선인장이 붉은 목젖을 드러내고, 봄이 되면 군자란이 주황빛 미소를 보내고 초여름엔 스파트필름이 하얗게 웃는다. 가을이 되면 바이올렛이 보라색으로 벙글거린다. 꽃기린과 칼랑코에는 수시로 발그레한 웃음을 던진다. 운 좋은 해에는 호야가 연핑크 별을 내보이며 싱긋거린다. 그녀 덕분에 나는 일 년 내내 직장에서 꽃을 보며 사는 호사를 누린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에 기르던 수국을 주고 싶다고 했다. 친정아버지가 24년 전에 갖다준 꽃이라 했다. 그녀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실내에서 어떻게 수국을 키웠냐고 묻자, 집안에서 키우다가 몸집이 커져서 아파트 화단 귀퉁이에 심었다고 했다. 아파트 화단에 심어놓으니 보는 사람도 별로 없고 또 그녀의 것인데 그녀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어정쩡한 상태라고 했다. 우리 집 마당에 심어놓으면 여러 사람이 보며 즐거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으니 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 본인이 놀러 와서 볼 수도 있으니, 화단 귀퉁이에 숨어 피는 것보다 훨씬 좋을 거라 했다.

애지중지 자식처럼 키운 것이라 했다. 나에게 주면서 잘 자란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라 했다. 가슴이 싸르르 하더라 했다. 그런 소중한 꽃을 받아 놓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꽃을 옮겨심기에 적절한 봄이 아니라 이미 여름으로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예년 같으면 장마철이라 땅이 촉촉이 젖어 있을 시기지만, 올해는 장마가 늦어져서 여차하면 말라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마당을 파고 혹여 수국이 낯설어할지 몰라서 살던 곳에서 퍼온 흙을 뿌리에 조심조심 부어줘 가며 심었다. 그리고 호스를 끌고 와 물을 듬뿍 주었다. 집을 비우는 시간을 대비해서 패트병에 물을 담아 나무 옆에 거꾸로 꼽아두기도 했다. 날씨도 날씨지만 워낙에 다 자란 나무를 입양해 온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은 나무를 데려오면 대체로 잘 적응을 하는데 다 자란 것은 오리려 적응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귀한 목숨이 혹시 내게 와서 숨을 놓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일주일 내내 조바심을 냈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나무는 싱그러운 잎을 날리며 풋풋하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이제 그녀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겠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 푹 놓으라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거라고. 우리 집에 가끔 와서 자식처럼 기른 꽃을 보고 가라고. 친정아버지가 건네주시던 그 손의 온기를 꺼내 보고 가라고. 하나의 꽃이 그녀와 그녀 아버지의 손길과 그네들의 보이지 않는 사랑까지 마당 가득 풀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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