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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숙

시인·주성초병설유 교사

카트에 동전을 밀어 넣는다. 덜컹거리는 카트를 밀고 식자재 코너로 향한다. 메모지를 꺼내 하나하나 체크 하면서 장을 본다. 미역을 사고 케이크를 사고 잡채 만들 재료를 사고 홍어를 사고 동태 포를 사고 고기를 산다. 꼭 필요한 것만 샀는데도 영수증 길이가 허리를 감고도 남겠다.

12월은 동아리 연말모임에 자연인들 모임에 직장 친목회 모임에 다양한 행사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행사는 단연 엄마의 생신이다. 구십이 다 된 엄마다. 어제 보고 왔는데 다음날 바로 전화해서 "언제 와?"라고 아이처럼 우는 엄마다. 그러기에 더더욱 마음을 다해 준비해야 하는 일이다. 고속도로를 탄다. 두 시간을 달리는 동안 휙휙 스치는 잎 떨군 나무들이 마른 팔을 흔들며 쳐다본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다 내려놓고 나면 왜 쓸쓸해 보이는 걸까. 톨게이트를 지나 마다리에 접어든다. 곳곳에 빈집이 눈에 들어온다. 엄마가 사는 바로 옆집 대문은 팔이 빠진 듯 기울어져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반듯한 집이었다. 아주머니가 서울 아들네로 가고 불과 6개월 정도 지났을 뿐인데 낡은 집이 되었다. 주인 잃은 텅 빈 집을 지나 친정집 입구에 들어선다. 백구가 꼬리를 흔든다. 가끔 보는데도 여전히 날 알아보는 백구,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장 본 물건들을 옮긴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들 저녁 준비를 한다. 곧이어 조카가 오고 언니가 오고 올케가 오고 동생 내외가 온다. 한 사람씩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 박꽃이 핀다. 저마다 바쁜 일을 뒤로 하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가족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옥수수 알처럼 환한 이를 드러낸다.

새삼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노을 지는 저녁, 마루에 배를 깔고 다리를 까딱이며 그림을 그리던 동생. 다니던 출판사에서 출고 전 가져다준 새소년이란 어린이 잡지를 내게 내밀던 언니.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알퐁스도테의 별을 읽어주던 스포츠머리 오빠. 오빠와 싸우고 몰래 그의 책에 구멍을 뚫어 놓으며 분풀이하던 내 모습. 며칠 뒤 범인으로 지목되어 머리를 쥐어 박히던 영상들. 오빠만 귀히 여기는 엄마에게 투덜대기도 했지만 결국 엄마를 지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오빠의 몫이다. 어느새 중년을 훌쩍 넘긴 형제들이 둘러앉아, 옛 시간을 소환하여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운다.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없지만, 사회에 폐 끼치며 산 사람도 없다. 그런 우리들을 보며 엄마는 그저 아이처럼 웃는다.

몇 시가 되었을까. 주방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나가보니 올케다. 하나뿐인 며느리다. 시어머니 생신이 신경이 쓰이긴 했나보다. 12시까지 마을 회관에 어르신들이 오신다고 한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볶으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들을 푼다. 남편 험담과 아이들 염려는 고명처럼 얹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생이 나와서 돕는다. 음식을 다 장만하고 나니 11시다. 남자들을 대동하여 쟁반에 음식을 담아 마을 회관으로 향한다. 어르신들이 모여들고 소박하지만 우리가 준비한 생신 상을 차려 낸다. 흐뭇한 미소를 방사하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틀이 쏜살처럼 지나가고 나는 차에 시동을 건다. 절뚝이며 마당에 나와 배웅하는 엄마를 안아준다. 껍질만 남은 작은 몸이 내 품 안에 들어온다. 가슴 속에 쏴 하고 찬바람이 일렁인다.

이런 생일상을 얼마나 더 차려줄 수 있을까. 진정 엄마를 위한 시간이었을까. 이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을까. 결국은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닐까.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내 차가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엄마. 언제나 그리운 나의 엄마. 그 그리움을 마당에 남겨두고 나는 길을 나선다. 내일이면 또 엄마에게 전화가 올 것이다. "언제 와?" 그 목소리마저 그리울 날이 오겠지.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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