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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1.09.12 14:55:27
  • 최종수정2021.09.12 14:55:27

김희숙

수필가, 주성초등학교병설유 교사

밤새 비가 내렸다. 빗줄기를 타고 여름이 가고 있다. 소란했던 매미 울음소리도 들끓던 대지의 열기도 차분히 식혀주는 빗소리, 소란하던 머릿속도 가지런히 빗겨주며 잠시 쉬게 한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여름을 생각했다. 여름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의식하며 맞는 여름은 몇 번째 여름일까. 앞으로 몇 번을 더 여름을 맞을 수 있을까. 여름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가. 내가 여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번 여름은 오롯이 혼자만의 여름을 살기로 했었다. 노트북 하나 책 몇 권을 들고 일상을 떠나 여름 속으로 들어갔다. 홀로 된 여름 속에서 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굴러다니는 단어들을 그러모아 활자로 옮기기로 했다. 나를 들여다볼 수록 아무것도 꺼낼 것 없는 빈 깡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세상은 소리 없이 움직인다고 늘 만하면서도 정작 나는 덜그럭거리며 살았다. 더 많이 채워야 소리가 안 나리라. 한 달을 뒤적였지만 손에 쥔 것은 많지 않았다. 겨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를 꺼내 출판사로 넘겼을 뿐.

밤새 여름을 씻기던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다. 나를 텅 비우고 나니 바람이 보고 싶어진다. 바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을 검색한다. 태백, 그곳에 가면 바람을 오래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벽으로 막힌 방 안에서 보이지 않는 나만 뒤적이다 보니 제대로 된 바람을 맞아 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거린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만으로 가슴이 펑 뚫리는 것 같다. 바람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바람은 내게 어떤 말을 전해 줄까. 바람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새벽 여섯 시 청주를 출발해 제천역에 도작했다. 언제 단장을 한 걸까. 역은 완전 새 옷을 갈아입었다. 기억 속에 작고 정겨운 역은 어디에도 없었다. 약초를 팔던 자리도 국화꽃을 말려서 차로 팔던 가게도 사라졌다. 반짝이는 역을 걸으며 쾌적해서 좋긴 했지만, 왠지 소중한 기억이 지워진 것 같아 서운했다. 제천에서 머물던 삼 년 동안의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떠다녔다. 추억은 그날보다 아름답다 했던가. 아득했던 그 날들이 포근함으로 나를 감싼다. 제천에서 태백까지 가는 기차에 몸을 담는다. 여름이 창밖으로 휙휙 스친다.

매봉산 입구에서 바람의 언덕까지 걷는다. 굽이굽이 깔린 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데 양옆이 온통 배추밭이다. 차마 고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배추 고도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배춧속을 걸어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풍차들이 여기저기 서서 바람을 휘감고 있다. 손을 뻗어 바람을 만져본다. 한참을 언덕에 서서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없는 듯 있는, 있는 듯 없는 바람. 그렇게 사는 것은 얼마나 담대한 삶일까. 여름을 몇 번 더 나야 바람처럼 초연할 수 있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전의 말씀을 되뇌어 본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사는 건 어떤 것일까. 아직도 누군가의 말에 파르르 하고 누군가의 행동에 상처를 받으며 삐걱거리는 나를 본다. 뾰족하게 선 손톱은 그물을 상하게 하리니. 날 선 손톱을 갈아내고 둥글게 살아가라고. 있어도 없는 척,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처럼 사는 일이라고 내게 조곤조곤 말해 본다. 바람이 좋다. 바람의 언덕에 올라 형체도 없이 부는 바람 속에서 지는 여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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