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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주성초등학교 병설유 교사

오늘 난 깨진 유리잔이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내가 무기력한 존재라니, 아니 네가 이렇게 나에게 강력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네가 없는 나는 껍데기일 뿐이란 것을 새삼 느끼며 오나전(*완전이라는 뜻. 인터넷 게시판에서 자판을 빠르게 치면서 생긴 오타에서 비롯) 멘붕에 빠져버렸다.

2학기 학부모 상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네 얼굴에 팝업창이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글자들이 거슬렸다. 수화기를 든 채로 아무 생각 없이 마우스 커서를 대고 클릭했다. 네 얼굴이 파래지더니 '응용프로그램 오류'라는 메세지를 토해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메모리를 리드할 수 없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마치려면 확인을 클릭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마우스를 대고 확인을 클릭했다. 순간 네 얼굴은 백지장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리 본체를 켰다 끄기를 반복해도 네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얀 얼굴은 어떤 음도 어떤 활자도 뱉어내지 않았다. 마치 전염병에 걸려 마스크를 끼고 있는 사람처럼 입을 봉했다.

내 모든 업무 정보를 담고 묵묵부답인 너. 순간 머리칼이 쭈뼛거리며 수백 마리 사마귀가 심장을 뜯어먹는 것 같았다. 사지가 절단된 채 돼지우리에 던져진 척부인의 기분이 이랬을까. 캄캄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정보 담당자에게 연락했으나 정보업체에 연락하겠다는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제발 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길.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치어떼처럼 바글거린다. 유아 모집 관련 '처음 학교로' 사용자 교육을 온라인으로 받아야 하고 재입학 안내장 작성 및 신입 원아 모집 요강을 만들어 발송 및 시스템에 입력해야 하고, 교원평가 관련 업무 사이트를 활용해 교원평가에 관련된 우리 유치원의 정보를 입력하고 평가 안내문을 작성해서 발송해야 하고 졸업앨범 촬영 안내 및 업체와 촬영 일자 협의, 졸업사진 촬영 희망 조서 안내장 발송 및 결과 보고를 해야 하고 또 특성화 강사 급여 및 자원봉사자 급여 기안을 작성해야 하고 이번 달 유아 학비 집행 관련 품의를 해야 한다.

퇴근 후에도 네 생각에 뒤척인다. 혹여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해야 할 일은 태산이고 너 없인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교사가 수업만 하는 시스템이 절대로 아닌데. 어쩌면 수업보다 그 외의 업무가 더 많은데. 제발 네가 돌아오길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 꿈속에서도 너를 잃은 악몽이 덮쳐와 자다 깨기를 반복한다. 선잠 깬 아침이 주억거리며 머릴 들고, 오늘따라 빗방울이 바람을 타고 흩날린다. 축축하게 젖은 마음으로 빗물을 맞으며 이른 출근을 한다. 떨리는 손으로 너의 몸을 더듬어 버튼을 누른다.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있는 너. 정보 담당자에게 다시 독촉하고 정보업체에 연락했다는 대답을 들은 후 수업에 들어간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연구실에 두고 교실로 향한다. 수업하는 도중에도 마음은 연구실에 가 있다. 제발 제발.

수업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다행히 넌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하루 만에 다시 너의 얼굴을 맞는다. 그러나 너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을 뿐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라 했다. 정보업체 직원이 임시로 숨을 쉬게 해 놓았으니 모든 자료를 백업 받아 놓으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언제 컴이 맘을 바꾸어 돌아설지 알 수 없다고 했단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외장 하드를 꺼내 너의 기억의 저장소에 담겨있는 모든 내용을 백업시킨다.

네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다. 하루 동안의 너의 외출에도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니 말이다. 앞으로는 너의 작은 메시지 하나 팝업창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다독이며 살아야겠다. 혹시나 모를 너의 변심을 예상해 백업해 두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너 없는 하루는 내게 천년보다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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