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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우석대 교수

일요일에 귀한 모습을 봤다. 겨울을 앞두고 떠들썩하게 펼쳐진 처가의 김장 풍경이다. 금요일에 첫눈이 내렸고, 토요일에는 수은주가 뚝 떨어져 있었다. 그 추위에도 수백 포기의 배추를 네 등분으로 쪼갠다, 간수를 한다, 부산했다. 배추를 건져 나란히 옆으로 쌓는데 등 뒤에서 이런 말이 들렸다.

"물이 잘 빠지게 차곡차곡 포개서 쌓아."

배추를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누르는 배추의 무게를 이용해 간수를 빼낸다는 발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세상일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걱정이 많았는데, 날씨가 그새 풀려 다행이야."

여든을 코앞에 둔 처이모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널찍한 평상을 마당에 놓고, 그 위에는 깨끗한 비닐을 깔아두었다. 물기가 빠진 배추를 나르고, 평상 가운데 간을 맞춘 양념을 퍼다 놓았다.

"양념 아끼지 말고 속속들이 버무려야 김치가 맛있는 법이야."

둘러앉은 이들의 평균 나이가 일흔쯤 될까·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둘러앉은 사람은 처이모가 셋, 처외숙모 한 분과 이웃 아주머니 두 분, 그리고 처사촌 등 일곱이다. 양념을 바르는 손놀림이 빨라지고, 집집에서 가져온 김치통마다 차곡차곡 김치가 담긴다. 그러는 사이 마당 귀퉁이 아궁이에는 돼지고기를 삶느라 마른 콩대가 타닥타닥 타들어 간다.

"싱거운지 짠지 한번 먹어봐."

처이모가 양념 바른 노란 배춧속을 돌돌 말아 입에 넣어준다. 맵지도 짜지도 않고 알맞게 맛있다. 이내 뜨거운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가 나오고, 막걸리 상이 차려진다. 그러는 중에도 먼 데로 부칠 김치는 비닐봉지에 담아 택배 상자에 담는다. 상자는 저울에 올려 무게를 단다. 20㎏이 넘는 무게는 택배 배송이 어렵다고 한다. 저울 눈금을 보고 김치 포기를 넣기도 하고 덜기도 한다.

전화를 걸자 한 시간도 안 되어 택배차가 온다. 김장철이면 시골에는 일요일에도 택배차가 다닌다. 면 단위에서 택배 기사는 누구네 아들인 경우가 흔하다. 게다가 택배 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처가에 온 택배 기사는 막걸리 배송을 겸한다.

서울에 사는 두 분의 처 작은아버지 집 주소를 붙인 김치 상자가 떠나자 집집마다 김치통을 꺼낸다. 처이모네가 세 통씩, 처외삼촌네가 두 통을 담는다. 작은 김치통은 지난주에 콩을 떨어준 옆집에 나눌 몫이다.

"아들네들하고 사위들도 빨리 챙겨. 이런 자리에서 얌전빼다가는 김치 한 포기 못 얻어먹는 법이야."

어느새 양념이 바닥을 보인다. 배추 더미도 그새 홀쭉해져 있다. 서둘러 김치통을 채우고는 부리나케 차 트렁크에 실어놓는다. 언제 묻었는지 옷소매에는 빨간 양념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양념이 부족해서 남은 배추는 백김치로 담그고 나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갈 길이 먼 사람들부터 김치통을 싣고 떠난다. 그 꽁무니를 기나긴 겨울이 졸졸졸 따라가는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장을 마쳤으니 올겨울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다.

해가 설핏해서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장모와 세 분의 처이모가 나란하게 서 있다. 오늘 밤을 더하면 사흘째 늙은 자매들끼리 함께 잠을 잔다고 한다. 참 다정한 모습이다. 둘레둘레 김장하는 풍경도, 늙어가는 자매들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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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날 특집 인터뷰 - 윤희근 경찰청장

[충북일보] 충북 청주 출신 윤희근 23대 경찰청장은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윤석열 정부 이전만 해도 여러 간부 경찰 중 한명에 불과했다. 서울경찰청 정보1과장(총경)실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불과 5년 전 일이다. 이제는 내년 4월 총선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취임 1년을 맞았다. 더욱이 21일이 경찰의 날이다. 소회는. "경찰청장으로서 두 번째 맞는 경찰의 날인데, 작년과 달리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기에 감회가 남다르다. 그간 국민체감약속 1·2호로 '악성사기', '마약범죄' 척결을 천명하여 국민을 근심케 했던 범죄를 신속히 해결하고,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건설현장 불법행위' 같은 관행적 불법행위에 원칙에 따른 엄정한 대응으로 법질서를 확립하는 등 각 분야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만들어졌다. 내부적으로는 △공안직 수준 기본급 △복수직급제 등 숙원과제를 해결하며 여느 선진국과 같이 경찰 업무의 특수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전환점을 만들었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다만 이태원 참사, 흉기난동 등 국민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들도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맞게 된 일흔여덟 번째 경찰의 날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