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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우석대 교수

가을은 높다. 깊다. 그리고 가볍다. 높은 건 하늘이고 깊은 건 마음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 가벼운 건 스르륵 넘어가는 책갈피.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을은 책 읽기 좋은 날이라는 것. 흔한 이야기라서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가을이면 자꾸 마음이 어딘가로 향해가는 것을. 여기가 아닌 어떤 곳으로. 나는 그곳이 바로 책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곤 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온라인 서점을 이용한다. 시대가 그렇게 변했다. 그런데 과연 시대만 변했을까? 아니다. 우리도 변했다. 가까운 곳에 서점이 있어도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책을 구매할 수 있다. 물류시스템도 탁월해서 다음날이면 책이 도착한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알아서 척척 돌아간다.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된 듯하다. 자본주의는 이처럼 소비자인 나를 중심으로 빈틈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그게 어색하고 불편하고 미안하다. 그래서 세 번에 한 번꼴로 동네 서점에 간다. 애초에 누가 그렇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동네 서점이라는 말이 좋다. 글로컬 시대에 로컬의 친연성을 드러내는 말 같다. 동네 서점은 몇 가지 이름으로 또 나뉜다. 우리가 잘 아는 일반 서점이 있고, 최근 관심받는 작은 책방이 있다. 골목 책방이나 독립서점이라는 말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대규모 자본을 등에 업은 온라인 서점에 비하면 진열된 책장은 소소한 편이다. 가격 할인율 혹은 적립포인트 같은 부가적인 서비스는 동네 서점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동네 서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탄생할 수 없는 돌연변이 같은 서점이다.

그런데 그게 또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아는 작은 서점에서는 책만 팔지 않는다. 이윤을 남기려고 고군분투하지도 않는다. 이즈음의 동네 서점은 지역 아카데미다.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자체가 훌륭한 한 권의 책이다. 만나면 즐겁고, 생각들이 부딪쳐 새로운 지혜를 낳는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책과 서점을 지혜의 숲이라고 말했던 적 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두 개의 숲으로 우리는 간다. 울긋불긋 단풍 든 자연의 숲에서 높고 푸른 가을을 만끽한다면, 다양한 사람들과 책이 있는 지혜의 숲에서는 깊고 서늘한 통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모처럼 동네 서점으로 간다. 딱히 읽고 싶은 책이 있는 건 아니다. 가을은 그 자체로 이미 두꺼운 책이니까. 무작정 걷는 것도 시대를 읽는 훌륭한 독서다.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있고, 마주쳐 오는 낯선 이의 표정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동네 서점에는 이르게 가을이 도착해 있다. 무심코 뽑아 든 책에서도 가을 이야기가 있다. 그 책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가을은 끝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가을은 짧다. 그러나 가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동네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산다. 서점 문을 열고 나오자 햇볕이 낮은 각도로 이마에 닿는다. 바람은 책의 목차처럼 간결하지만 궁금하게 불어온다. 다시 올려다본 가을 하늘이 더없이 맑다. 아무 글자도 쓰이지 않은 백지 같다. 그 가을 하늘에 쓰고 싶은 문장 하나를 문득 떠올려본다.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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