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기의 왜군이 한양 도성에서 철수를 할 때 남아 있던 조선인을 대량 학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왜군에게 협력했던 친일 조선인, 즉 부왜자(附倭者)들이 대부분이어서 전쟁의 부조리함을 다시 느끼게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양국민 사이에 부왜, 가왜(假倭), 항해(降倭)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부왜는 길 안내를 맡는 등 왜군에게 비교적 적극적으로 친일·부역한 임진왜란기 조선인, 가왜는 왜군을 가장해 약탈 등을 자행한 조선인을 일컫고 있다. 항왜는 그 반대로, 왜군이면서 배고픔 등 전쟁의 고초로 조선으로 투항한 왜군을 가리키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화 '명랑'에 등장하는 '츈사'(俊沙)와 김충선으로 잘 알려진 '사야가(沙也加)' 이다. 이중 부왜는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발생했으나 이후 한양 도성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주된 이유는 탐관오리와 신분제도에 대한 불만때문 이었다. 특히 선조실록에는 충북 충주의 사례도 등장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접반사 서성의 장계를 보건대, '충주의 사기장 한막동(韓莫同)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이하곤(1677-1724)의 장인 송상기는 대제학, 대사헌, 예조·공조판서 각 1번 그리고 이조판서를 무려 5번이나 역임하는 등 숙종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특히 그 전에 충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때 선정을 베푸는 등 우리고장과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충주목사 송상기(宋相琦)가 상소하여 백성의 일의 절급(切急)한 상황을 진달하고 청하기를, "한전(旱田)에 급재(給災)하고, 적곡(·穀)을 거두는 것은 3분의 1을 율(率)로 하며, 갑술년8709) 이전의 포흠은 한결같이 모두 탕척하고, 양진창(楊津倉)의 적곡은 전미(田米)로써 대봉하며…"'- 양진창은 충주읍성 북문 부근에 존재했던 국립창고를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신임사화 때 화를 입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경종(장희빈의 아들)의 건강이 악화되자 누구를 후계자로 옹립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소론과 노론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론이 "노론이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하고 있다"고 공격, 김창집·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계 대신들이 대거 축출됐다. 이른바 신임사화로, 여기에는 이하곤의 장인 송상기도 포함돼 있었다. 이하곤은 장인 송상기가 당시 67살 노구의 몸으로 강진에 유배되
단양 보국사지(輔國寺址)를 고려사에 등장하는 '죽령대원'(竹嶺大院)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뿐만 아나리 고려 후기의 지식인들은 단양 죽령을 '수도 개성에서 한반도 동남으로 가는 두번째로 중요한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보국사지는 죽령 서쪽 사면인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2리에 위치하는 절터로, 현재도 목이 잘린 장육불상(丈六佛像) 외에 연화문대좌(蓮花紋臺座), 연화문석판(蓮花紋石版), 주초석 등이 주변에 산포해 있다. 발굴 결과 보국사지는 충주 미륵리사지와 마찬가지로 △석실(石室)을 인위적으로 축조했고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장육불상은 안치했으며 △석실 기둥은 대나무 모양의 죽절문석주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나아가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육불상은 불두(佛頭)가 있을 경우 전체 높이가 5m에 이를 정도로 초대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보국사지는 충주 하늘재(계립령) 초입의 미륵리사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주요 간선교통로에 위치한 '국립 휴게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려시대 어느 문헌에도 절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보국사의 내력과 변천을 알 수 없었다. 이와 관련 부산대 한정훈 박사가 '호서사학회'가 발간하는 '역사
이하곤의 진천 두타산 아래로의 낙향은 여느 선비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 선비들의 낙향은 일반적으로 은거, 안빈낙도 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하곤의 낙향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산수애호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유배중에 있는 장인 송상기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세상에 모든 화려한 영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연만을 바라보며 書史(서사)를 오락거리로 삼고 구름과 달을 좆으며 새와 물고기를 벗삼아 여생을 마치기만 바랄 뿐입니다.'- 문집 '두타초' 행간을 살펴보면, 이하곤은 47세(1723년·경종 3) 때 완전히 내려오기 전까지 진천으로의 낙향과 상경을 반복했다. 따라서 그의 중간 낙향은 엄밀한 의미로 '하향'(下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는 진천으로 하향하면 완위각 인근의 자가소유 누정 뿐만 아니라 지금의 괴산 청천면 낙영산을 즐겨 방문했다. 그리고 멀게는 남원 광한루와 장인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도 찾아갔다. 그는 그때마다 시와 산문을 남겼고, 그 자체가 '이하곤 개인史'가 되고 있다. 이하곤의 부친 이인엽은 주천(지금의 초평천) 가에 증조 오촌(梧村) 이대건과 조부 벽오(碧梧) 이시발의 호에서 하나씩 취하여 '쌍오정'(雙梧亭
두타초 책 14에는 '題李一源所藏鄭선元伯輞川渚圖後'(제이일원소장정선원백망천저도후)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와 관련, 이하곤(李夏坤·1667-1724)과 친구 신정하(申靖夏·1681-1716)가 주고 받는 말로 먼저 이하곤의 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남의 집에 소장된 것도 반드시 내가 모아둔 후에야 그쳤소. 근래 그렇지 못하였으니 기호가 이미 쇠퇴했다고 생각했소.(…) 내 집의 완위각에 단지 수 십 폭의 옛그림이 있는데 근래 제인의 필적은 가지고 있는 것이 전혀 없으니….' 이에 대해 친구 신정하는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데 또 욕심을 내면 탐욕스러운 것'이라는 투로 답한다. '재대가 수장한 것이 어찌 많지 않겠습니까. 거두어 진천으로 돌아갈 때에는 수레에 실음 서화가 꼬리를 물고 길에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도 이제 이 화첩에 대해 틈새를 보며 갖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니 이것은 참으로 많이 있으면서도 더욱 욕심을 내는 자입니다.' 인용문 중에 '이 화첩'이라는 표현, 제목 중에는 '鄭선元伯輞川渚圖後'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이 대화는 겸재 정선(鄭··1676∼1759)의 '輞川渚圖'라는 그림을 둘러싸고 이하곤이
삼국시대 청주와 충주의 치소(治所)는 한 곳에 머무른 것이 아닌, 세 번의 변천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나아가 처음에는 지대가 높은 산성에 위치했으나 8세기 중반무렵에 평지인 지금의 두 지역 도심에 자리잡았다는 설도 함께 제기됐다. 치소(治所)는 고을을 다스리는 관청건물이 위치하는 곳으로, 행정·경제·사회적으로도 중심지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을 일컫는다. 충북대 사학과 노병식(51·충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 씨가 얼마전 '신라 국원소경과 서원소경의 방어시설 변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청주와 충주의 삼국시대 치소와 관련해서는 여러 번의 학술적인 논의가 있었으나 문헌사료의 빈약과 고고학적 물증 부족으로 정설화된 이론은 도출되지 않아왔다. 청주의 삼국시대 치소로는 상당산성, 우암산성, 구청주읍성(남문로 일대), 부모산성 등이, 충주의 치소로는 탑평리면 일대, 장미산성, 대림산성, 구충주읍성(성내동 일대) 등이 거론돼 왔다. 노씨는 이번 논문에서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치소가 일정한 공간에 지속적으로 고정돼 있던 것이 아닌, 정치·경제환경의 변화 등으로 몇번의 변천을 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가 이와 관련해 주목을 한 것은 종전까지는 별반 눈길을 주
루트를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청주지역 모 여행업체가 우리지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백제 금동제 신발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여행상품을 내놓아 일반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특히 이 여행상품은 고대미술사 전공자인 장준식 충청대 명예교수가 승선, 이동 중은 물론 현장에서 '해설 마이크'를 잡을 예정이어서 '깊이와 폭이 다른 답사여행'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청주에 본사를 둔 '범한항공여행'(대표 김범제)이 국내 여행업계로는 최초로 탐사와 여행을 겸한 '백제 금동제 신발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상품을 최근 출시했다. 이번 상품은 편의상 금동신발을 주제어로 뽑았으나 백제 금동제 관모도 같은 주목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번 상품은 말 그대로 '백제지역에서 출토됐던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왜 일본 남부에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여행은 해외여행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백제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출토, 이를 전시하고 있는 충남 공주와 전북 익산을 답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는 지난 1971년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모와 신발이 전시돼 있다. 또 전북 익산리 웅
이하곤의 낙향 의지 중심에는 역시 그의 진천 장서각인 '완위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완위각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장서돼 있었다. 아들 이석표(李錫杓·1704-?)가 아버지 이하곤을 추념하면 '담헌행장'을 지었다. 이렇게 적었다. "유독 서적을 무척 좋아하셨는데, 책을 파는 사람을 보면 심지어 옷을 벗어 책을 사니, 모아놓은 것이 거의 만권에 이르렀다. 위로는 경사자집에서 아래로는 패관소설, 의서, 점술서, 불가서, 도가서 등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장은 죽은 사람의 문생이나 친구, 옛날 동료, 아니면 그 아들이 죽은 사람의 성명, 관향(貫鄕)·관작(官爵)·생졸연월·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앞서 인용한 문장 중에 '만권'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와 관련 일각에는 증조부인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에게 고서 수 천권을 받았다'는 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서지 전문가들은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현재 종손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700여책을 조사한 결과, 증조부 이시발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힌 것은 단 1권이고, 나머지 모두는 이하곤의
청주권 내륙과 서해의 해산물 교역 역사와 관련,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조상기)은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 예정지인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일대에서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기원후 3~4세기 무렵의 원삼국기 무덤에서 백합조개, 피뿔고둥 등의 유물이 담긴 짧은목항아리를 발굴했다. 또 주변 같은 시기의 무덤에서는 도미로 추정되는 생선뼈와 꿩 등의 조류 뼈가 담겨진 단경호가 출토됐다. 백합조개는 암갈색에서 회백갈색까지 다양하고 피뿔고둥은 엷은 갈색을 나타내고 있다. 조사단은 이에 대해 "원삼국기 식생활은 물론 금강 수계를 이용해 이루어진 내륙지역(청주권)과 해안지역(서해안) 간 해산물 교역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라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 이후 내륙과 서해 사이에 어떤 형식이든 해산물 교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돼 왔으나 그 고고학적 유물이 원삼국기에서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충북대 성정용(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발굴된 조개류와 생선뼈는 육로가 아닌 금강수계를 통한 해산물 교역물로 보인다"며 "특히 생선의 경우 부패
이하곤의 진천 낙향은 스승 김창협에 대한 변무소(옹호하는 소) 사건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와 관련 실록에는 두 유형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전 부솔 이하곤은 명가의 자제로서 언론과 행동을 더욱 스스로 조심해야 할 것인데, 흉당(凶黨)과 일을 같이할 수 없음과 외척과 연명(聯名)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여 사론에 속아 따랐으니, 사부의 수치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 당시 정원 조지빈(趙趾彬)이 아뢰는 말이다. 인용문의 포인트는 '외척과 연명할 수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라는 문장에 있다. 당시 소론의 영수 최석정(崔錫鼎)은 이하곤과 가까운 촌수가 된다.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집권했다. 그러나 즉위 3년차의 경종은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상황이었고, 그런 까닭에 권력은 이미 노론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조지빈이 외척을 걸고 넘어진 것은 그 같은 권력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는 사관의 주관적인 의견인 사론(史論)도 등장한다. 이렇게 썼다. "일찍이 김창협(金昌協)을 사사하였기 때문에 그 소에 참여하였던 것이며, 처의하는 데는 실수함이 없었다. 당시 상황에 개탄하며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소장 김의환)는 충청북도의 위탁을 받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충청북도 문화관광해설사 167명을 대상으로 '2014년 충청북도 문화관광해설사 전문역량강화 교육'을 실시한다. 총 20시간으로 진행되는 교육 일정은 10시간의 강의와, 10시간의 현장 답사로 구성되었다. 1일차(16일)는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강의로 진행되며 강좌와 강사명은 와 같다. 교육후 현장 답사는 2일차부터 1박 2일로 진행된다. 금년의 경우 올해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임을 감안, 우리 고장의 대표적 동학 유적지인 보은동학혁명공원과 장내리 유적으로부터 출발하여 경상북도 안동 일원의 역사문화유적지를 답사할 예정다. 답사에는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가 동행하여 현장 강의를 진행하며, 유적지 현장에서는 경상북도 문화관광해설사들과 안내 해설 방법에 대한 의견 교류도 할 예정이다. 중원문화연구소 관계자는 "도내 문화관광해설사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들이 전문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현장에서 안내 해설을 담당하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적인 전문역량강화 교육을 위해 노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인물을 통해 조선 역사를 바라보다.' 충북대 박물관이 제 20기 2학기의 '박물관 대학'을 시작했다. 특히 이번 2학기 박물관 대학은 인물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는 일정으로 편성, 재미와 함께 조선시대 역사를 색다르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이미 이달 4일 건국대 신병주 교수가 '조선의 건국과 정도전' 제목으로 첫 강의를 시작했다. 신 교수는 KBS의 역사관련 인기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하는 등 역사 대중화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강단 사학자이다. 그는 이날 특강에서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건국하는 과정을 △문과 무의 환상적 결합 △왕권과 신권의 갈등 △혁명가이자 이론가 등으로 설명했다. 그는 전자에 대해 "정도전은 혁명을 위한 파트너를 찾으러 이성계가 머물고 있는 함주막사를 찾는다"며 "이는 이성계의 명망과 그의 휘하에 있는 군사력이라면 혁명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왕권과 신권의 갈등에 대해서는 "그러나 정도전의 머리 속에는 자신과 같은 재상의 권력이 언제든 왕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며 "그 결과 이방원(후에 태종)으로 상징되는 왕권과 출동, 결국 살해되고 만다"고 말했다.
담헌 이하곤(李夏坤*1677-1724) 집안이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일대에 세거를 하기 시작한 것은 증조부 이시발(李時發·1569-1611)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발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두타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았다. 이시발은 지금의 청주 오근장 출신으로, 서계 이득윤 밑에서 수학했다. 조부 이경억(李慶億·1620-1673)과 부친 이인엽(李寅燁·1656-1710)도 잇달아 급제, 벼슬이 좌의정과 대제학에 이르는 등 명문가 명성을 이어갔다. 이하곤은 1677년(숙종 3) 서울에서 부친 이인엽과 모친 임천조씨와의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담헌은 문중 농장이 진천에 있는 까닭에 서울과 진천을 자주 오르내렸다. 두타초 등 그가 남기 문집을 보면, 담헌은 그의 나이 25살, 29살 때 진천을 일시적으로 찾았고, 35살 때는 가족을 거느리고 하향했다. 담헌은 이때부터 초평 일대를 거주지로 삼았고, 완위각도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그가 서울 생활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32세 되던 숙종 34년(1708)에 과거에 응시, 진사과에 장원 급제했다. 그러자 담헌에게는 '익위사세마', '세자익위사부솔' 등의
조선시대 예학사상은 추석 차례상 차림에 압축돼 있다. 먼저 지방(紙榜) 바로 앞에는 송편 등 음식을 놓고, 가장 먼 곳에는 과일을 놓는다.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한 이론이다. 고인의 생전 밥상을 그대로 재현에 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매일 밥상을 대할 때 내 앞에 바로 놓이는 것은 밥과 국이다. 그리고 과일은 이른바 '디저트' 즉 후식이라고 해서 가장 나중에 먹는다. 망자에게도 이 이론이 적용돼 과일은 지방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가장 멀리 위치한다. 후식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말 동학 교도들은 제사상을 그 반대로 차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향벽설위(向壁設位), 즉 지방이 있는 벽을 향해 차례상 차림을 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에서는 그 반대인 '향아설위'(向我設位), 즉 나를 중심으로 상차림을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조상의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 곧 후손들에게 살아 숨쉬는 것이니 벽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제사상 차림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차례상에는 생선을 얇게 저민 것인 포(脯)를 생략할수 없다. 특히 북어포가 대표적 이다. 역시 알고 보면 간단한 이론이다. 애주가 중에는 생맥주와 마른안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조선후기 문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이하곤(李夏坤·1677∼1724)은 우리고장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마을에 사설 도서관의 일종인 완위각(宛委閣)건립하고 엄청난 양의 책을 보관했다. 완위각은 달리 만권(萬券)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뜻에서 '만권루'라고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완위각에는 이하곤이 수집한 당시 고서화류도 많이 보관돼 있었다. 따라서 완위각은 서적을 단순히 수집하고 장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선비들의 문화적 공간이었다. 특히 강화학파로 불리는 소론계 인사들이 많이 찾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건물 이름을 짓는데 적지 않은 정성을 쏟았다. 자신의 철학, 아니면 중국 고사에 관련해 작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완위각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것도 bc 2천년 무렵의 중국 하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사는 아니지만 중국 사서 중의 하나로 '오월춘추'(吳越春秋)가 있다. 이 사서에 따르면 하우씨(우임금 지칭)는 자주 찾아오는 홍수를 어떻게 다스릴까 고민을 하다 황제중경이 지은 책을 보게 됐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구의산(九疑山) 동남에 하늘기둥처럼 완위산(宛委山)이 있는데 적제(赤帝)는 그 산 위의 궁궐에 살고
추석이 얼마남지 않았다. 우리 선조들은 망자의 죽음을 두 번 확인했다. 바로 '고복'(皐復) 또는 '초혼'(招魂)으로 불리는 부르는 의식이다. 전통시대에는 임종을 마치면 고인의 옷을 가지고 마당으로 나아가거나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고인의 성명을 왼 다음 복~ 복~ 복~ 자를 긴소리로 세번 불렀다. 고 노무현 대통령 전통장례식 때도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이 '해동조선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복~복~복~'이라고 외친 바 있다. 복!복!복 할 때의 복은 한자 '돌아올 復' 자 이다. 즉 육체를 떠나 북쪽으로 가고 있는 혼령에게 미안한 마음에, 죄스런 마음에 다시 돌아오라는 간절한 주문을 담고 있다. 제사나 차례에서는 '북쪽' 방향은 굉장히 중요하다. 바로 '북쪽'에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망산', '북망산천'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나왔다. 제사나 차례 지낼 때는 지방이나 신주가 모셔지는 방향이 '북쪽'이 된다. 차례도 제사의 일종이나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제사는 특정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것이고, 차례는 자신이 모시는 모든 조상을 명절날 한꺼번에 모신다는 점이 다르다. 또 제사는 돌아가신 날 자시(11시~
조선왕조 후기~대한제국기의 외척 세도가들은 충주지역에도 무척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들은 남한강수계와 영남대로 등을 중심으로 발달한 유통경제를 활용해 지주경영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남금자(사진·충북대 사학과·충주시청 학예사) 씨가 '19세기 충주지역 외척 세도가의 토지 소유와 지주경영'(지도교수 신영우) 논문으로 최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 학예사는 조선후기~대한제국기 외척 세도가들의 토지소유와 지주경영을 살펴보기 위해 '광무양안' 충주군 자료를 전수 조사했다. 광무양안은 고종정부가 근대적 의미의 자주적 토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902년 지계아문에서 작성한 일종의 측량 장부로, 여기에는 당시 토지 소유주, 위치, 면적, 지목, 임대차 관계 등 토지에 대한 정보가 망라적으로 기재돼 있다.김조순(순조의 장인)을 배출한 안동김문은 충주지역의 남한강 수계 주변,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민씨는 영남대로가 지나가는 음성 금왕읍 일대에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김씨 김갑규(金甲圭)는 당시 충주군의 9번째 지주로 40결에 상당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탄금대 일대의 요지를 많이 갖고 있다.
충주 호암동 택지개발사업부지 내에서 선사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대규모 복합유적과 함께 공예적 가치가 뛰어난 고려시대 인장과 청동거울 등이 발견됐다. 특히 이번 발굴은 유물이 매우 많을뿐만 아니라 다양, 2000년 이후 충주지역 최고의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원장 신용민)은 지난해 12월부터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 구석기 유적 △삼국 시대 고분 △고려~조선 시대 분묘 △ 고려 시대 토성 △조선 시대 기왓가마 등을 발굴했다고 28일 문화재청을 통해 밝혔다. 중기 구석기(약 7만 5천 년 전) 유적에서는 찍개, 몸돌, 격지 등이 출토됐고, 50여 기의 삼국 시대 고분은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축조된 앞트기식 돌방무덤 형식의 추가장(追加葬)이 확인되고 있다. 이는 진흥왕 시기 이후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면서 충주 지역이 신라에 복속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총 1천3백여기의 고려~조선 시대 분묘에서는 인장, 청동거울, 그릇, 숟가락, 젓가락, 도자기 등이 발견됐다. 특히, 인장 3점에 장식된 사자 등 동물 문양은 해학적이고 특이하고, 글자는 鳳(봉) 등으로 해석되나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
1895년(고종 32). 단반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백성들이 유생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그 유명한 을미의병으로, 우리고장 제천지역도 중심지의 하나였다. 제천출신 의병중에 정운호(鄭雲灝·1862~1930)라는 인물이 있다. 제천지역 명군가의 종손이었던 그는 34세 나이로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했다. 그는 문재가 뛰어나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 고향 제천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제천팔경'이라는 칠언율시를 지었다. 팔경시의 제목은 '의림지 낚시하는 늙은이'(林湖釣·), '백련사 돌아가는 중'(蓮寺歸僧), '대암의 노니는 물고기'(·巖遊魚), '관란정의 우는 여울'(瀾亭鳴灘), '한벽루 가을 달'(碧樓秋月) 등이다. 나머지 세 개의 시는 '능강의 봄 돛단배'(綾江春帆), '옥순봉 기암'(玉筍奇巖), '월악산 늦단풍'(月岳晩楓) 등이다. 이중 제 5경시인 '한벽루 가을달'은 다음과 같은 운율로 일대 풍광을 노래했다. '물 가까이 한벽루는 비취빛을 둘러 희미하게 보이고 / 맑은 하늘 밝은 달은 가을을 따라 돌아가네 / 가을바람 불어 명주(明酒)에 그림자를 만들고 / 옥로(玉露)는 빛을 더해 객의 옷을 씻누나 / 청초호(靑草湖) 밝아 물고기 헤아릴 만하고 / 금병
증평군 증평읍 '죽리'는 행정구역상 '죽1리'와 '죽2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금은 '죽1리는 '죽리', 죽2리는 '원평마을'로 부르고 있으나 법정지명은 여전히 '죽리'이다. 이곳 지명이 '대竹' 자의 '죽리'가 된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4년 일대를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죽리(竹里)로 작명했다. 이후 인구수가 늘면서 법정명은 '죽리' 그대로 유지됐으나 행정명은 '죽1리'와 '죽2리'로 분화됐다. '죽2리'. 문자로 표기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소리로 호칭하면 다소 심각한 현상이 발생한다. 문법상 '죽이다'에서 파생한 '죽이리'에는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의지(will)가 들어가 있다. 따라서 "어디 살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죽이리 삽니다"라고 답을 하면, 상대방은 난감해 할 것이 분명하다. 지난 2006년 죽리(竹里) 주민 중 죽2리 마을대표 임태정 씨가 증평군청을 방문해 "죽1리와 죽2리를 한자로 쓸 때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말로 말하면 '죽일리'와 '죽이리'가 돼 어감이 않 좋다"며 개명을 희망했다. 그 결과, 행정명은 앞서 언급한대로 '죽리'와 '원평마을'로 바뀌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일제가
영화 '명량'의 공전에 히트에 힘입어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이순신장군 신드롬이 일고 있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곁에서 함께 전사한 인물이 이영남(李英男·1563~1598)이고, 그가 충북 진천출신이라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그는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가 매우 소원할 때 양쪽을 오가며 중재자 역할을 수행, 경상우수영(원균)과 전라좌수영의 연합함대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이순신이 익히 봐온 이영남을 인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인으로서의 이영남의 일생, 특히 마지막 노량해전을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원균(元均·1540∼1597)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 4월 경상우수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왜수군의 전력이 너무 강해 보이자 수군은 해산시키고 배는 불태워 수장시킨 후 혼자 육지로 도망하려 했다.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대적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전함과 전구를 모두 물에 침몰시키고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키고 나서 혼자 (…) 육지를 찾아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이때 부하 이운룡이 원균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장수는 경내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사
조선시대 충북지역 대부분의 지역에는 고을을 대표하는 누정(樓亭)이 존재했다. 청주에는 망선루, 충주 경영루, 단양 이요루, 황간 가학루, 청풍 한벽루, 음성 의송정, 옥천 적등루, 진천 연정(蓮亭), 보은 삼산루, 청산 백운정, 문의 사산루, 괴산 존빈루 등이 유명했다. 이들 누정에는 한시도 함께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아 인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괴산 존빈루(尊賓樓)에는 조선전기 서거정과 쌍벽을 이뤘던, 우리고장 충주출신의 이승소(李承召·1422 -1484)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제목은 '괴산의 존빈루에서 판상의 시에 차운하다'(槐山尊賓樓次板上韻)이다. 차운(次韻)은 타인의 시에 화답하면서 운자(韻字)를 그 차례대로 두며 시를 짓는 것을 말한다. '장정에다 단정까지 모두 거쳐 지나오니(過盡長亭與短亭) / 푸른 산속 깊은 곳에 외로운 성 하나 있네(翠微深處有孤城) / 높은 누각 뾰족하여 하늘 바람 내려오고(高樓矗矗天風下) / 가는 비는 자욱하여 작은 시내 생겨나네(細雨··澗水生).- 철언절구인 이 한시는 비교적 길어 뒷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한들대는 버들가지 묘한 춤춰 보여주고(柳拂腰肢呈巧舞) / 눈썹 같이 비낀 산은 한가한 정 자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 대부분의 고문헌은 증평 좌구산의 한자를 '거북이 앉아 있는 모습의 산'이라는 뜻으로 '坐龜山'이라고 기록했다. '좌구산은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坐龜山在縣南十里)- 이때의 고을은 지금은 증평읍에 밀려 면이 된 청안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좌구산의 한자를 '개 狗' 자를 쓰고 있다. 이와 관련해 증평군지는 '아버지 김치와 관련이 있다'고 그 유래를 적었다. '김치는 광해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칭병을 하고 좌구산 아래 밤티골(율리)로 낙향했다. 어느 날 김치에게 심기원(沈器遠)이라는 인물이 찾아와 능양군(후에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려는데 거사 일자를 점쳐달라고 물었다. 이에 김치가 목욕재개하고 점을 쳐보니 성공하는 괘가 나왔다.'- 이어지는 내용은 '김치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는데 동편 좌구산에서 개가 세번이나 크게 짖었다. 이에 일행은 누군가 염탐하런 온 것을 눈치채고 현장을 피했고, 그래서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후 김치는 이 산을 개가 짖음으로 큰 일이 성공했다는 뜻에서 개 狗 자의 좌구산으로 부르도록 했다'라고 적었다. 이 구전은 △김치가 점을 매우 잘 쳤고 △인조반정에 간접적
충주 순교 장소는 관아가 있는 성내동 일대로 4대 박해 동안 충주에서는 총 155명이 희생됐고 이중 충추 사람은 120명이었다. 충주지역 천주교와 관련, 당시 충주목사 이가환은 매우 기구한 역할을 한다. 그는 처음에는 반천주교주의자였으나 천주교인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도리어 설득당해 열렬한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 뒤 배교를 했고, 이후 1795년 충주목사로 오게 되면서 충주지역 천주교 신자를 심하게 탄압했다. 앞서 언급한 충주지역 첫 순교자 발생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직후 다시 심경 변화를 일으켜 천주교에 귀의했다가 1801년 이승훈 신부 등과 함께 순교하게 된다. 당시 조정이 배교를 한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임명한데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정조실록 19년 7월 25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목사에 보임하였다. (…) 이때 호서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에 물들어가고 있었는데 충주가 가장 심했으므로 특별히 가환을 그곳의 수령으로 삼아(…) 속죄하는 실효를 거두도록 한 것이었다." 즉 '이가환 당신이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고 하는데 그럼 천주교인 탄압으로 그것을 입증해 보라' 그런 의도였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일제 고문으로 악명높은 여순감옥박물관에 단재 신채호 관련 자료를 상설 전시하고 있으나 묘소가 '충북이 아닌 충남에 있다'고 기록해 놓는 등 오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지역 여행업계에 따르면 중국 육지교통 사정이 과거보다 나아지면서 백두산, 연변 등만을 주로 찾던 국내 관광객들이 랴오닝성 대련시의 여순감옥박물관도 많이 찾고 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제가 운영한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 단재 신채호 선생, 이회영 독립운동 지도자가 형장의 이슬, 또는 고문에 의해 옥사 하는 등 악명이 하늘을 찌르던 곳이었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을 설명하는 자료 안내문에서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 충북 인물임을 정확히 알리는 의미에서 시급한 정정이 요구되고 있다. 여순감옥박물관(공식명칭 여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측은 사진과 함께 단재의 묘소에 대해 '한국 충청남도에 위치한 신채호 묘소'라는 설명문구를 달았으나, 그의 묘는 현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구 청원군)에 위치하고 있다. 또 여순박물관 측은 오래 된 사진과 함께 '한국 충청남도에 위치한 신채호 사당'이라는 설명구를 표기했으나 단재사당 역시 충북 낭성면의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충북일보] 충북도가 청주시를 대상으로 진행중인 종합감사에서 도청 감사관실 일부 직원들이 시 소속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도 감사관실은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17일까지 청원구청에 감사장을 차려놓고 시 산하 전 부서를 상대로 종합감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갑질을 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제보자들은 "행정적 미비사항이나 지적사항에 대해서는 충분히 용인할 수 있지만, 일부 사안에 대해 대답을 요구해놓고 막상 대답을 하니 말투와 태도 등에 대해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 취급을 받았다"며 "게다가 행정적 미비사항도 아닌 부분에 대해서까지 억지로 지적사항에 끼워 넣으려는 태도에 기가 찼다"고 토로했다. 해당 제보자들이 당했다는 언어적 갑질폭력을 구체적으로 기사에 서술할 경우 제보자가 특정될 수 있어 밝힐 순 없지만, 이들은 대체로 "인격적인 모욕감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직원은 제보를 하면서 "안그래도 업무에 회의를 느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기가 힘들고 사표를 내고 싶다"고까지 말하고 울먹였다. 또 다른 제보자는 감사에 임하는 직원들의 업무이해도를 문제 삼기도 했다. 한 제보자는 "감사를 보는 직원이 업무를 너무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충북도가 청주 오송에 들어서는 철도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의 성공적 조성을 위해 예비타당성조사 신청 준비에 공을 들이고 있다. 내년 상반기 내 예타가 마무리돼야 오는 2029년까지 사업을 완료한다는 도의 구상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16일 도에 따르면 오송 철도클러스터 국가산단의 공동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충북개발공사는 오는 9월 기획재정부에 공기업 예타를 신청할 계획이다. 공공기관이 진행하는 사업 중 총사업비가 1천억원 이상이면 공기업·준정부기관 사업 예타를 받아야 한다. 오송 국가산단 조성에는 5천500억원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는 이때 예타가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쏟고 있다. 공기업 관련 예타 신청은 1월과 5월, 9월 등 연 3회로 제한돼 예타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면 사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신속 예타'로 신청할 계획인데 대상에 반드시 반영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 제도는 예타 기간이 기존보다 3개월 정도 단축돼 6개월 정도면 결과가 나온다. 그런 만큼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게 된다. 도는 예타 통과를 위한 준비도 철저히 하고 있다. 이 사업이 예타를 통과하려면 경제성이 중요한 만큼 기업의
◇22대 총선 당선인 인터뷰 - 증평·진천·음성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번 중임을 맡겨주신 군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총선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약속드린 미래 비전을 군민들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선에 성공한 임호선(61)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증평·진천·음성)은 겸손한 자세로 소통하며 어려운 민생부터 확실히 챙겨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서민경제를 살피지 못하고 국정운영을 독단적으로 하며 과거로 퇴행하려는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민심이다. 제1야당으로서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을 적극 따르며 민생해결과 지역발전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겠다"고 앞으로의 의정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22대 국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 임 당선인은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현재도 농촌에 살고 있다"며 "지역적으로도 증평·진천·음성군이 농촌이기에 누구보다 농업농촌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임 당선인은 "농촌이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