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일 치러진 지방선거로 지자체의 수장들이 많이 바뀌었다. 이렇게 기관장이 바뀐 뒤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이 생색내기이겠다. 생색이란 얼굴빛을 드러낸다는 속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별것도 아닌 일에 생색을 내다'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새로이 당선된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재감을 강하게 어필해야 하고, 캠프에서 활약한 사람에게 논공행상도 하려니 우선 인사권을 발휘하고 전임자의 공과를 살피기 이전에 먼저 바꾸려 마음을 먹는다. 후일 평가에서 개선이나 개악으로 보일지라도 우선 바꾸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낙선한 사람은 그동안의 功過에 대한 자성을 겸하여 응당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정치 기류 탓을 하거나, 심지어 당선자에 대한 겸손한 배려보다는 자칫 걸림돌이 될 언행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당선자는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낙선자는 벌어진 과오를 덮고자 모두 생색을 내는데 선거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캠프에 전면 나선 사람도 있고, 은인자중하면서 암약한 사람도 있는데 당선자에게는 모두가 최고의 수훈자로 둔갑하니 돌아보면 애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학교에서도 나타난다. 고3 수능이 끝나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과 무늬만 고3으로 공부에 태만하던 학생들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은 남은 대입을 위하여 수능 시험 이전이나 이후에도 태도의 변화가 없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한 학생들은 수능을 위해 공부를 아주 많이 한 것처럼 행세한단 말이다. 아마 이전의 미비했던 공부에 대한 보상 차원이겠으나 주변의 상술도 작용하여 단순히 경험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험표가 상행위에서 크게 작용한다. 수능 치른 학생들의 수험표처럼 당선자 선거캠프에서 발급한 위촉장도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선거 없이 교체된 기관장일지라도 생색내기는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전임자가 잘한 것이라도 아주 쉽게 없애거나 바꿔버리는데 이 와중에 이어져야 할 좋은 프로그램이나 방안도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왕왕 있다. 필자가 교육과정 담당 장학사 때 음성군 D 중학교가 전문직 출신인 교장 선생님의 지도와 담당 교사의 열의로 교육부 지정 연구학교답게 전국 수준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냈다. 연구학교 발표회에서 교육부의 많은 칭찬과 함께 타 시도 참관자들의 부러움을 샀건만 후임 교장이 오자 단칼에 교육과정을 원위치해 버렸다. 계획 과정에서 학교 담당자와 논의도 많이 했고 다른 시도의 사례와 연구 결과를 참고한 역작이건만 '이런 거 뭐 하려 하느냐?'는 교장의 생각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교육과정을 모르면 유지라도 하든지 완전히 폐지하고 이전으로 회귀해 버리니 수년간 들인 노력이 문제가 아니라 낭패만 초래하였다. 공립학교가 이럴진대 각종 선거로 지방 단체의 수장이 바뀌면 변화의 강도는 훨씬 더 크고 깊게 나타날 것이다. 진정 발전을 위한 마음은 무엇인가. 피아를 막론하고 훗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세인들의 존경받는 사람으로 자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 함부로 사용하였기 때문인지 물러난 뒤에 지역민들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주변에 피해 운운하는 모습도 볼썽사납다. 자리에 있을 때 삼가고 삼가 야인이 되어 존경받는 어르신으로 자리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당선에 직간접 도움을 준 사람들도 대가를 요구하여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야겠고,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서 업무 추진에 방해가 되는 것보다야 그저 묵묵한 후원자로 자리하면 보기 좋겠다. 논어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그 뜻을 관찰하고, 돌아가시고 안 계신 경우에는 그 행동을 살피는 것이니, 3년 동안 아버지가 하시던 방법에서 바뀌는 것이 없어야 가히 효라 할 수 있다. (子曰 父在觀其志 父沒觀其行 三年無改於不之道 可爲孝矣 -논어 학이편)는 말이 요즈음 자꾸 떠오른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침에 건강과 글감 정리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낙가산을 걸은지 어언 3년이 되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간 소득으로 몸무게 3㎏ 그리고 허리 사이즈 2인치 줄어든 외에 변화도 생각하게 된다. 여느 날처럼 걷고 있는데 길옆 나뭇등걸에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 온 후 물기 어린 내리막길이라 조심하느라 곁눈질도 결코 안 했는데 하필 아주머니들 앞을 지나면서 미끄러졌다. 아뿔싸 넘어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니 한 무릎은 구푸리고 다른 무릎은 땅에 닿을 듯 위태로워 모양새는 마치 옛날 성당에 들고 날 때 장궤 모습이요 武士의 인사 형태가 되었다. 나동그라져 옷도 후지르지 않았고 아낙네 앞에서 망신스러운 지경을 모면하여 다행인데 순간 운동 효과를 절감하였다. 하체 근력을 키우고자 90㎏ 역기를 어깨에 메고 120번 스쾃을 하여 단단해진 다리 근육이 위태로운 순간에 몸의 밸런스를 잡아 준 것이다. 사람은 몸과 정신으로 구성되었다던데 그러면 마음 즉 생각은 어떨까. 성호 이익 선생의 「도산서원 방문기」에 퇴계 선생이 서당 벼름밖에 백록동규, 명당실기, 경재잠 등을 적어 매일 기침하여 외우셨는데 선생 역책 후 오랜 뒤 생각 없는 모 상유사가 좀 슬고 헤진 벽을 새로 도배 했다가 유림 文籍에서 삭제당했다는 내용이 있다. 즉시 선생을 따라 서재에 선비들의 敬 실천 일과인 「숙흥야매잠」과 주자가 동편 방에 게시한 「경재잠」을 걸은 뒤 읽으며 하루를 열기로 하였다. 몸과 더불어 마음을 유지하는 것 역시 생각의 근육이라는 생각이다. 「숙흥야매잠」의 첫 구절도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여러 가지 생각이 점차로 치닫게 되어(鷄鳴而寤 思慮漸馳)라 하였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처럼 이에 따른 생각 역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진행되고 있다. 어릴 적엔 정답이 있는 줄 알다가 사회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뀜도 알게 되면서 정답 없는 세계로 바라보게 되는 것은 결국 내가 바르게 생각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방증이다. 옛 어른들의 공부 순서는 '爲學之序'에 단계별로 명시되어 있다.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의 5단계로 구분되는데 여기서 3단계가 신실하게 생각함(愼思之)이다. 널리 공부하고 골똘히 질문한 뒤에 잘 생각해야 지식을 지혜로 갈무리 할 수 있다. 이로써 자기의 실질적인 발전과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어찌할 것인가. 고전에서 찾는 것이 순서이고 역시 『근사록』에 방법이 있다. "생각하면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움은 聖人(聖明)을 만든다' 하였으니, 생각을 지극히 함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흐린 물이 나오다가 오랜 뒤에는 차츰 맑은 물이 이끌려 나오게 되니, 사람의 思慮도 처음에는 모두 혼란하다가 오래되면 저절로 明快해진다. 思慮하기를 泛泛하게 하고 멀리하여 순서를 따라 점점 나아가지 않으면 마음만 수고롭고 얻음이 없을 것이요, 자신이 아는 것에 나아가 類로써 미루어 나가면 마음의 길이 쉽게 통하여 생각함에 條理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近思라 이른다. 그래서 자신이 이미 이해한 곳으로부터 미루어 나가면 막히지 않을 것이요, 만일 멀리 가서 찾는다면 자기 몸에 간절하지 않다." ―伊川先生 '思曰睿요 睿作聖'이라 하여 생각을 해야 지혜로워진다는 말에 눈이 간다. 몸과 생각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도 지혜 얻기이리니 더욱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겠다. 몸의 근육처럼 볼 수는 없어도 마음의 눈으로 생각의 근육이 불어남을 살필 요량을 가지면 되리라. 헬스장에서는 몸 근육을 불리고, 서재에서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 세상의 소원대로 요양원에 늦게 가고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도 보람이 되겠다. 그러려면 호기심을 여전히 왕성히 가져야겠고, 생각의 근육을 키우려는 노력을 잊지말아야지. 낡은 생각을 씻어 버려야 참신한 아이디어가 온다(濯去舊見 以來新意)는 朱子의 말을 다시금 되뇐다.
골프는 파 3홀 2개, 파 4홀 5개, 파 5홀 2개의 9홀로 전·후반부 총 18홀을 돈다. 티잉 그라운드에서 친 공이 한 번에 홀인 하면 파3는 홀인원이요, 파4는 알바트로스라. 파5에서 2번에 홀인 하거나, LPGA에서 장하나 선수처럼 파 4홀에서 티샷한 볼이 홀에 빨려 들어가 알바트로스를 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드문 예이고 파3에서 홀인원이 그나마 아마추어로 누릴 수 있는 '골퍼의 행운'이다. 파3에서 홀인원 확률은 투어 프로의 경우 1/3천이고, 싱글 골퍼는 1/5천이요, 초보자들에게는 1/1만2천이라고 한다. 골프가 생업인 투어 프로에게도 0.03% 확률이니 홀인원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맨발의 투혼으로 유명한 박세리도 평생 홀인원을 한번 못했을 정도로 홀인원은 실력과 더불어 운도 따라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기회이다. 지난 5월 2일 부부라운딩으로 친구들과 진천의 천룡 회원제 골프장에 나갔다. 계절의 여왕 5월답게 일기는 청명하고 미세먼지도 없어 운동하기 참 좋은 날씨이다. 접수처에서 받은 락카 키가 666번이라 왠지 오늘 스코어가 잘 나올 것 같은 예감이다. 고가사다리차 공장을 운영하던 전병철 사장, 이미 에이지 슈터에 언더파를 치는 박채서 친구 그리고 서울 조영철 교장이 오늘의 동반자이고 캐디는 박미선이다. 분위기와 집중을 돋구자며 5만 원씩 내어 가벼운 내기를 곁들였다. 평소와 달리 티샷 거리가 짧은 전 사장의 속셈 깊은 고집으로 오늘은 전 후반 모두 청년 중에서도 티샷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서는 블루티에서 치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흑룡 첫 홀에서 너무 힘이 든 나머지 왼쪽 오비 구역으로 4피스 볼을 가볍게 날렸다. 첫 홀부터 볼을 날리다니 이런 낭패가 없다. 처음이라고 멀리건으로 다시 출발했지만 오늘 조짐이 불길하다. 2, 3홀을 지나는데 블루티라 그런지 바람을 이기려 힘을 주어 그런지 샷이 흔들려 온그린 시키는 데 애를 먹느라 심해지는 바람과 함께 부담도 커진다. 예보에 7m/s 풍속이라더니 강한 바람 때문에 그린에서 퍼팅하는데 모자가 날아갈 듯 위태롭다. 다음은 요즘 점점 부담스러운 파 3홀이다. 다른 홀도 그렇지만 특히나 파 3홀은 티잉 그라운드에서 숏티를 꽂을 때부터 샷을 어떻게 하여 온 그린 시켜 홀에 근접시킬 것인가로 머리가 복잡한 곳이다. 무작정 공만 치던 초보 때에는 쉽던 홀이었는데 구력이 쌓일수록 난해해지고 길면 거리 때문에 짧으면 난이도 때문에 코스 설계자와 골퍼가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홀이다. 이번 홀은 핸디 8번이지만 길이가 125m인데 맞바람이 거세서 클럽 선택하기가 어렵다. 좌측으로 치면 절대 안 된다는 캐디의 조언과 바람 세기를 고려하여 10번 클럽으로 볼을 낮고 부드럽게 띄우리라 마음먹고 쳤는데 샷감이 좋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볼이 정확히 핀 하이로 날아가는 모양에 예감이 불길하다. 나는 '안 돼!'라 소리 지르는데 캐디는 '대박!'이라 하고 동반자는 '어어!' 하는 사이에 볼이 홀 속으로 쏙 숨어 버린다. 5천분의 1 확률이 100%로 바뀌는 순간이다. 중계방송에서 프로들이 펄쩍펄쩍 뛰던 홀인원을 내가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이럴 줄 알았다면 친구들의 말을 들어 홀인원 보험이라도 미리 들어 둘 것을 하는 후회가 찰나에 들었다. 이미 두 번이나 홀인원을 한 전 사장과 경험많은 박 프로에게 캐디 사례하는 법을 살짝 묻고는 은행에서 찾은 돈까지 탈탈 털렸다. 뒤늦게 저녁 자리에 합류한 정규호 교수가 고구마 케이크를 준비하여 8명이 축하 파티까지 해 주니 대단한 일을 하긴 했나 보다. 관례대로 동반자 8명에게 라운딩을 시켜 주려니 그 인원과 비용을 걱정하느라 평소보다 말수까지 적다고 전 사장이 지적하여 좌중이 웃었다. 홀인원의 기쁨은 잠시요 부담은 오래라 누구는 손재수(損財數)라 하지만 그래도 좋다. 평생 한번도 못해 본 골퍼가 대다수요 행운이 3년이나 간다는 홀인원을 처음 했으므로.
1569년 69세의 퇴계 선생이 선조 임금에게 물러남을 허락받아 고향으로 갔던 700리 귀향길 걷기 재현 행사가 올해로 세 번째 진행됐다. 충북 지경만큼은 함께 해 보고자 작년 4월 11일에는 충주 가흥창에서 관아까지의 바람 몰아치는 봄 길을 걸었다. 올해는 4월 12일 충주에서 제천 청풍길과 13일 제천에서 단양 향교까지 작년보다 하루를 더 걸었으니 내년에는 전 구간을 걸을 수 있으렷다. 일찍 더워진 날씨로 산수유와 개나리 그리고 벚꽃까지 동시 개화해 사방이 꽃 천지라 눈이 바쁘다. 여의도 윤중로보다 더 우거진 청주 무심천 변 벚꽃 길을 라이딩했기에 웬만한 꽃 거리는 눈에 안 차는데 제천 청풍의 벚꽃은 차원이 달랐다. 낮에는 흐드러진 벚꽃에 눈이 부셨거니와 밤 벚꽃 아래에서 경기 지부 위원들과 고혹적인 남방 조영님이랑 찻자리를 만들어 최 위원이 정가를 부르고 나는 대금과 단소를 잡은 것도 흐뭇한 기억이다. 낮에 본 미진함을 밤에 오로지 하여 채웠음에도 비 내리는 새벽 꽃길이 부르니 다시 나갈 수밖에 없다. 비를 담고 하염없이 떨어져 질펀한 꽃길을 홀로 누리며 걷는데 멀리 꽃그늘 아래로 연세대 명예교수이며 퇴계학 전문가이신 이광호 교수님이 내려오신다. 어제 점심 자리에서 여쭸던 엽등(렵等)에 관련한 윤집궐중(允執闕中)을 다시 질문했다. 엽등은 주자와 퇴계 선생도 제자들에게 학문에서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 사항이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중심을 잡아 기본을 다지지 않고 건너뛰기식으로 공부하면 대체를 알 수도 없거니와 자칫 운기 행공 잘못으로 주화입마에 드는 격이라 조심해야겠다. 이를 예방하는 것이 바로 윤집궐중이요, 격물치지의 공부인데 모름지기 四書를 차근차근 공부하는 것이 요령이라 하신다. 물은 웅덩이를 채운 후에야 앞으로 나가는데(영과이진-盈科而進) 눈으로만 좋은 글을 접하며 자기 발전에는 노력하지 않는 요즘 세태도 엽등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움과 행동이 밸런스를 갖추지 않으면 종당에 생각이 일보다 앞서면 창성하고, 일이 생각보다 앞서면 패망(謀先事則昌 事先謀則亡―'說苑')하는 모양으로 결론 나겠다. 한 식경 가량 청량한 새벽 공기를 머금은 빗물과 더불어 떨어지는 꽃잎이 어우러진 노교수의 학문 강의로 도처의 향기가 함께 스며들어오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숙흥야매잠의 단계별 해석과 선생의 완락재 시 해설에 눈이 시원해진 느낌은 꽃비 솔솔 내리는 길 때문일까? 노교수님의 향기 나는 설명 때문일까. 독서에 조심할 것이 ostrich reading(타조 식 읽기)이라면 배움에서 조심할 것은 엽등이니 정미극고의 자세로 절치부심해야 하는 것이 특히 공부이겠다. 청풍에서 장회나루까지 가는 배 안에서도 엽등과 윤집궐중을 복기하노라니 옥순봉의 빼어난 자태와 구담봉 은거인 성암 이지번도 크게 다가온다. 일행을 따라온 카메라 기사가 갓과 도포로 의관을 갖춘 우리에게 뱃머리에서 멀리 앞을 바라봐 달라 부탁한다. 갓양태를 뚫고 들어오는 빗물을 차갑게 맞으며 서 있는데 분위기에 취한 옆의 모 언론사 홍 국장이 퇴계의 시를 노래하려는데 대금으로 분위기를 맞춰 달라고 한다. 하필 청 나간 대금일지라도 비닐 테이프로 감고 뱃전에 서 있으니 멀리에서 보면 혜원의 '선유도' 모습과 흡사하겠다. 둘째 날 점심때 초등생 자매와 합석하며 이름을 물었는데 노정옥과 정아란다. 아까 벚꽃 휘날리는 정자 마루에 앉아 '大學'을 암송 노래해 기특했고, 성학십도를 외우고 있다는 말에 귀를 의심했던 터였다. 그런데 어른인 내가 먼저 수저를 들 때까지 예쁜 눈을 깜박이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언니가 먹은 뒤에야 수저를 잡는 동생도 놀라운데 엄마에게 '진지'라 하는 언어 구사에 다시 놀랐다. 학생들에게 선비 교육을 하는 나이 든 선생이 어린 것들에게 놀랐다. 아니 요즘 엄마 같지 않게 자식을 이리 잘 키우고 있는 효문화원 황상희 박사에게 화들짝 놀랐다. 올 귀향길은 여러모로 꽃길을 즈려 밟으며 걸은 느낌이었다.
선비 교육이 지난 6일에 전남 보성에 있는 용정중에 잡혔다. 남도 끝이라 한껏 흐드러진 봄꽃을 즐길 수 있을 테니 임도 보고 꽃도 따려는 욕심이 생긴다. 여기에 입까지 즐겁게 하면 일거양득을 넘어 1석 3조의 효과이겠으나 실은 자연에 몸을 맡겨 마음이 헤엄치듯 편안히 했던(間以遊泳) 옛 어른들의 공부 자세를 따르려 함이 우선이다. 첫날의 답사 순서는 보성 쌍봉사를 본 뒤에 쌍계사로 가면서 그 유명한 벚꽃길을 즐기기로 하였다. 쌍봉사 초입 길에도 벚꽃 터널과 바로 아래에 빨간 꽃이 어우러져 보기 좋고 여러 꽃이 지천이라 가히 꽃 대궐이다. 게다가 쌍봉사 경내에는 인기척조차 없어 산사의 고요한 정취를 누릴 기회가 되었으니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인적없는 산사의 그윽함이 더해지니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 형 대웅전의 자태가 더욱 고고하게 다가온다. 대학 때 문화재 도록으로 본 뒤에 무려 40여 년 만에 실물을 대하는 이 감개무량함이여. 석양에 빛을 발하는 철감선사의 부도는 비록 귀 꽃은 유실되었지만 신라 원성왕 대의 조각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석질도 단단하고 부조도 풍화되지 않아 원형에 가깝다. 쌍계사와 벚꽃 터널이 유혹하나 시간 때문에 대신 열화정을 택하여 민속 마을인 강골마을 끝자락에 도달했다. 역시 사람 한 명 없어 정자에 고즈넉이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고 차담을 나눴을 주인을 상상하고 내려오는데 길가 좁은 도랑에 미나리가 소담하다. 산속이라 무공해에다 워낙 무성하여 몇 줌을 뽑았는데 표시도 안 난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산속에서 또 받았다. 저녁 어스레할 때 대한 다원에 들렀더니 역시 인적이 전혀 없어 50만 평의 넓은 차밭을 오로지 하였다. 망중한까지는 안 가더라도 자연에서 노니는 기회가 정말 큰 선물이요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다. 이럴 때는 시간이 나를 위해 멈춰 준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혼자만의 생각이려나. 보성 유일의 소형 관광호텔에 들어 물고문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최 위원이 찻자리를 열었다. 갓 나온 찻잎으로 만든 '천상의 이슬'로 시작하여 각종 홍차류와 보이차 등 10여 가지의 차를 음미하려니 입은 황홀하고 코는 향기로운데 시곗바늘은 어느덧 자정을 지났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백련 홍차로 입을 정갈히 하고 자리에 누우니 예전 심복사에서 밤새워 차를 마셨을 때처럼 턱밑까지 차가 꽉 찬 느낌이 떠올라 행복하다. 팽주가 마시고 남은 차를 봉송으로 싸 주어 귀한 선물이 하나 더 생겼다. 이튿날 용정중 1학년 학생들 수업 태도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이다. 고등학교 특수반처럼 또렷하며 한 명 열외 없이 집중하여 경청하고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이라 선비 교육에 신이 난다. 점심시간에 대기 학생들 모두 한 권씩 책을 들고 서서 독서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놀랍다. 선비가 당대의 지도자요 엘리트라면 용정중 학생들은 모두 선비의 가능성이 충분하겠다. 방과 후 활동으로 국선도 하는 모습을 봐도 맨 뒤 학생까지 강사의 지도를 열심히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이 학생만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보성의 꽃 대궐을 본 선물보다 인향 높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들을 본 것은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명 지도위원 모두 풍광도 좋고 먹거리도 좋았지만, 용정중 학생들의 수업을 듣는 자세와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감동이 제일 크다고 입을 모은다. 마치 엔딩 사인이 올라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심금 울리는 영화를 관람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남도에서 시작되는 꽃바람이 이제 바야흐로 전국을 휘몰아갈 터이니 바야흐로 화란춘성(花爛春城)이리라. 보성군 시골구석에 있는 이 작은 학교의 공부하는 분위기가 우리나라 전체 학교로 퍼져나간다면 이 또한 만화방창(萬化方暢)이리니 굳이 비행기 타고 핀란드까지 가서 교육을 배워오지 않아도 되겠다.
일기예보대로 아침에 비가 내리고 봄날 같지 않게 추운데 먼 산에는 눈까지 내려 산자락이 하얗다. 3월에 春雪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우중 산책은 평소보다 인적이 드물어 산을 즐기기에 좋아 산행할 마음이 더 커진다. 비옷을 입고 방수 모자를 쓴 뒤에 우산도 갖추고 집을 나섰다. 산길에는 작년 낙엽이 비로 질척하고 솔잎 끝에 맺힌 빗방울이 영롱하여 들여다보면 물방울 하나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 점차 약해진 빗줄기에 아예 비를 맞고 걸으니 찬바람은 옷 속으로 스며들고 빗물은 겉으로 흘러 이 적막강산을 오로지 하는 느낌이다. 산행에서는 어젯밤에 읽은 책의 내용을 반추하는 것이 순서이다. 요즘은 고봉 선생의 경연집인 논사록과 근사록 그리고 퇴계언행록을 읽는데 내용이 깊어 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 단 몇 줄에도 묵이식지(·而識之)하고자 생각을 많이 해야 하며 그리해야만 심오한 내용이 이해된다. 언행록 중 퇴계 선생의 막역지우 벽오 이문량 선생이 노인이 되니 쉽게 잠을 못 이루게 되었다는 탄식에 퇴계 선생은 잠이 안 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성현의 말씀을 외워보라 답한 내용이 떠 오른다. 아직은 잠자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만약에 잠이 쉽게 안 들면 선생처럼 성현의 글을 외워볼 생각이다.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는 상념을 동무 삼아 발걸음에 집중하노라면 분명 어제 걸었던 길인데도 처음 온 곳인 양 새롭다. 어느덧 산 중턱 나의 쉼터에 다다라 평소 앉던 나뭇등걸을 보니 빗물이 흐른다. 천상 오늘은 선 채로 산의 소리를 들어야겠다. 땅에 널브러진 나뭇잎에 듣는 빗방울 소리와 가지를 간지럽히는 바람 소리가 한결 싱그러워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어느덧 산과 하나가 되는 듯 좋다. 어제 도산의 퇴계 명상길을 걸었던 감흥이 새롭다. 명상길은 예전에 선생의 나이 60이 되어 새로 마련한 도산서당을 계상에서 출퇴근하셨던 길이요, 제자들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이제는 도산서원 원장이자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김병일 이사장을 모시고 수련생 몇 분과 함께 새벽 5시 반부터 비 내리는 산길과 임도를 걷고 있다. 이사장님의 퇴계시 암송과 해설 그리고 박학한 퇴계 공부 내용을 듣는 것 자체가 후학들에게는 큰 공부 기회이다. 어스레한 새벽의 시사단은 또 새로운 풍경인데 마침 매화가 빗속에서 꽃잎을 열어 향기가 주위를 진동한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매화인데다 새벽에 빗방울을 달아 그런지 영롱하고 청초하기 그지없다. 도산서당 옆의 고목 매실나무 등걸에 핀 매화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더니 돌아오는 길에도 매화향이 온몸을 감도는 듯하여 더욱 행복했다. 좋은 생각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는 인생이라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계곡은 어제부터 내린 비에도 물 흐르지 않건만 치오르는 바람과 빗소리에 홀로 행복하다. 옛 선비들이 구방심(求放心-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다)을 노력했듯이 산중에서 가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요즘 마음 상태를 다시 살핀다. 골프 동반자가 OB(Out of Bound)를 내면 두 사람이 좋아한다고 하여 오비이락(OB2樂)이라나. 그런데 천지 사이와 만물 중에 오직 사람이 최고라는 동몽선습의 가르침인지 요즈음은 동반자가 잘 치면 진심으로 기쁘고, 못 치면 나의 실수처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야말로 見善如己出(선을 보면 자신이 주도하는 일처럼 열심히 하라)의 마음인지 모르나 이처럼 달라지는 마음가짐이 스스로 신기하다. 아마도 상대를 貴人으로 대하라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든 때문 아니겠나.
교회 활동을 하며 친분을 쌓은 신부님 두 분을 모시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제는 통상 70세 이후에 체력을 고려하여 은퇴하는데 이 두 분도 이미 은퇴하여 취미 생활로 노후를 즐기고 계신다. 식사 중 두 분이 앞섶에 메로탕 국물을 똑같이 흘리셨다. 휴지를 건네자 국물 자국을 닦으며 노인의 '3고'가 있는데 '잘 삐지고, 잘 흘리고, 잘 잊어버리고'라고 우스개를 하신다. 달변의 유명 강사 신부님이 던진 적절하고 멋진 농담으로 모두 웃으며 저녁을 마쳤다. 기실 나이 들면 별것 아닌데도 삐진다. 설사 삐지기까지는 아니라도 귀에 거슬리는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며칠 전 아내랑 골프장에 도착하여 카트에 백을 싣고 있는데 바로 앞에 아는 사람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답인사가 '비싼 데로 다니는 줄 알았더니 이런 데도 오느냐?'란다. 그 사람과는 군부대 체력단련장과 캐디 없는 곳을 다닌 적도 있건만 해괴한 농담이다. 인사를 하고 지내는 연습장 지인이 '프로는 이제 연습을 안 해도 되잖아요'라 하는 것은 실없는 농이다. 평생 공직 생활로 집 한 채 간신히 장만하여 연금 덕에 빠듯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자라고 한다면 의중을 생각하게 되니 역시 귀에 걸리는 농담이다. 책을 읽다가 마침 말과 관련된 구절이 나와 환연빙석(渙然氷釋)의 감흥이다. 戱言은 出於思也요 戱動은 作於謀也라 發於聲하며 見乎四支어늘 謂非己心이면 不明也요 欲人無己疑면 不能也니라 橫渠先生이 또 '砭愚'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희롱하는 말(농담)은 생각에서 나오고 희롱하는 행동(장난)은 꾀함(계획)에서 나온다. 희롱하는 말은 소리에 나오고 희롱하는 행동은 四肢에 나타나는데, 자기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이요, 남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될 수 없는 것이다." *砭(돌침 폄) : 돌침을 놓아 병을 치료한다. 찌르다. 치유하다. ―'근사록' 중 가만히 생각해 보면 통상 분위기를 돋우려고 농담을 하지만 농 속에 진담이 있기도 하고 아예 진의를 농처럼 전달하는 예도 왕왕 있다. 농담이라 할지라도 일단 생각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요, 장난도 의도한 바가 있으므로 일어난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개의치 않을 땐 농담이겠지만 기분이 상하면 실수하는 말이니 이는 과언(過言)이겠다. 기탄없이 말하면 직언(直言)이요 에둘러 말하면 곡언(曲言)이고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은 췌언(贅言)이라. 말의 종류가 이리 많은 것처럼 말에 따른 설화(舌禍) 사례도 인간의 역사에서 부지기수로 보인다. 말에서 실수하고 행동에서 미혹되어 잘못하고도 스스로 허물을 돌리기는커녕 당연히 여긴다면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란다면 결국 남까지 속인다는 경계이다. 옛 어른들의 마음공부가 이 정도였다. 옥의 흠은 갈아서 지우련만 말의 흠은 그렇게 지울 수 없다는 옛말과 같이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말이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말로 표출되는 만큼 상대를 귀하게 여긴다면 과언은 물론 희언도 응당 조심할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는 희언도 과언도 아닌 파렴치한 말이 난무한 역대급 비호감 대선으로 식자들은 국격 손상까지 염려할 지경이었다. 상대가 상처받을 말을 찾아서 했고, 금방 드러날 거짓말도 천연덕스럽거니와 변명은 더 잘 만들어내는 모습이 놀랍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물론 이려니와 특히 정계에 투신하여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특별히 살펴볼 글이라 책 내용을 소개해 봤다.
한 가지 일에 작심 매진하는 모습으로 한나라 동중서의 下帷三年, 다산 정약용의 踝骨三穿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공자의 韋編三絶이 있는데 手掌三穿도 더해야겠다. 고교 동기들과의 골프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나 동반자로 운동을 하는데 이 친구 실력이 가히 골신 지경이다. 운동 후 생애 베스트 스코어를 물으니 에이지 슈터도 이미 이뤘고 일반 아마추어는 평생 한 손가락에 들 이글을 2001년도 한 해에 무려 34번이나 했다. 2008년에 중국 골프대회에 참가해서는 아마추어 시니어가 8언더를 몰아쳐서 4언더파로 대회 우승한 프로를 무색하게 하여 지역 언론에 난리를 내기도 했다. 골프라는 운동이 원래 한두 달 연습해서 될 일도 아니요 할수록 어려워 곳곳에 연습장이 즐비하고 티칭 프로들의 일거리가 되거늘 연습을 어떻게 했는지가 궁금했다. 다른 운동처럼 골프에서 하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여 매일 아침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로 하체 근력을 키웠고, 백스윙을 왼쪽 어깨가 아래턱에 닿도록 교본대로 열심히 했더니 턱 아래에 딱지가 생기더라나. 통상 골프 장갑은 왼손에 끼는데 어찌나 끈기 있게 클럽을 휘둘렀는지 사흘이면 장갑이 뚫어졌다. 오죽하면 지독한 연습 때문에 손바닥에 구멍까지 여러 번 났다고 하니 이른바 수장삼천이다. 골프 연습으로 손가락에 굳은살 박인 사람은 많이 봤지만, 손바닥까지 구멍을 낸 사람은 처음 봤다. 골프에 대해 가진 생각을 한 단어로 표현하랬더니 '골프는 나다'라고 명쾌한 답이 나오기에 연유를 물었다. 고등학교 때 연대장으로 교련 사열에서 두각을 나타낸 뒤에 3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동기생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모든 군인이 선망하는 국방대학원에 입학 통지를 받고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뛸 만큼 감격에 겨워했다고. 국방대학원의 과목으로 골프를 처음 접하여 배운지 며칠 만에 불려 나가는 통에 7번 아이언 하나로 필드를 걸었어도 해볼 만하더란다. 집념 어린 연습 결과 일취월장으로 실력이 늘어 하급 군인임에도 장군은 물론 정 재계 인사들과 동반할 기회가 생겨 앞날이 탄탄할 줄 알았단다. 보국할 목적으로 국정원의 '흑검성'이 되어 북한 주요 기밀을 수집하면서 김정일을 만날 정도로 김영삼, 노무현 정권에서는 뛰어난 정보요원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하루아침에 이중 스파이로 누명을 씌워 감옥에 집어넣더란다. 놀란 이 친구 부인은 지금도 길가 표지판에서 '흑'자만 보이면 가슴을 벌렁벌렁하며 살고 있다. 일반 재소자와 달리 공안 사범은 축구 배구 농구 등은 언감생심이요 건물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바람만 쐬게 했다. 생각다 못해 철봉을 걸어달라 하여 근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스쿼트 등 운동을 했는데도 형기 만료하고 나올 땐 아내의 어깨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다리 근육이 풀려 있더란다. 예전 실력의 70% 회복이 목표였는데 더 성실히 훈련하여 거의 회복했다니 집념이 놀랍다. 한정된 지면에 이 친구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모두 옮길 수는 없거니와 대신 그 삶의 편린이 '공작'이라는 영화로 상영되었고, 유튜브에 '국가에 버림받은 레전드 정보요원 박채서' 등 여러 편이 소개되고 있다. 정보기관의 사업은 국가 고위 관계자의 이익에 따라 달리 평가됨을 영화에서 봤거늘 실제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이 가까운 친구일 줄이야. 북한에 몰래 들어가는데 해외 출장 가는 줄 알고 손 흔들어 배웅하는 부인의 얼굴을 살아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절박감으로 봐야만 했단 말에, 독방 6년을 무던히 견뎌내서 그런지 이따금 면벽 수련 십 년 禪僧의 표정을 보여 아련하다. 결과보다 과정을 제일 중시해야 하는 골프장의 화장실에 '인생은 한방이다.'라는 말이 걸려있어 웃음이 나온다. 채서 친구의 치열한 삶을 보면서 '인생은 손바닥에 구멍이 날 정도의 피 나는 수련의 결과'라 해야 옳겠다는 생각이다.
친구들 몇 간과의 남도 유람 목적지가 강진으로 정해졌다. 강진은 풍광도 좋은데다가 다산 선생의 18년 유배지로 남도 유배길이 관광 상품화되어 지역 경제에 쏠쏠한 재미를 주는 곳이다. 가는 김에 다산 관련 공부로 친구들의 안목도 높이려 예전에 논문 준비차 읽었던 강진의 애제자 황상과의 만남과 인근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 당시 젊었던 초의선사 등 관련 자료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적소에서 처음 거처한 사의재와 부인 홍 씨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받아 만든 하피첩과 출가하는 두 딸에게 직접 축하해 주지 못하여 시린 마음으로 그려준 매화쌍조도와 매화독조도 및 서학 접근 내용까지 챙기려니 머리가 바쁘다. 마음 한켠에는 친구들에게 해박하다는 평을 듣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분주히 서가를 뒤지는 중에 요즘 지인들과 팀을 이뤄 공부 중인 근사록(近思錄)에서 눈이 번쩍 띄는 글귀가 나타났다. "謝先生(謝良佐)이 처음에 기억하고 묻는 것을 學問이라 여기고 該博함을 자부하였다. 明道先生에게 역사책을 들어 말하였는데, 全篇에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明道가 말씀하기를 '그대는 허다한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玩物喪志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謝先生은 이 말씀을 듣고 땀이 흘러 등이 젖고 얼굴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다가 明道가 역사책을 읽는 것을 보니, 도리어 줄마다 자세히 보고 한 글자도 지나쳐 버리지 않으므로 謝先生은 매우 不服하였다. 뒤에 다시 살펴 깨닫고는 이 일을 화두로 삼아 博學하는 선비들을 인도하곤 하였다." 謝良佐의 字는 顯道이니, 上蔡 사람으로 程子의 門人이다. 사람의 마음이 虛明하여 萬理를 갖추고 만 가지 일에 응하는 것이니, 매이고 막히는 바가 있으면 본래의 뜻이 어둡고 막힘을 면치 못한다. 독서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장차 마음을 보존(存心)하여 이치를 밝히려고(明理) 해서이니, 한갓 기억하고 외는 것을 힘써 博學으로 삼는다면 책이라는 것도 外物일 뿐이다. 그러므로 玩物喪志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대하여 朱子가 평을 내렸다. "上蔡의 記誦과 明道의 역사책을 보신 것이 바로 爲己와 爲人의 구분이다." 독서를 하는 것은 자기 발전을 위하여 책을 열어야 함에도 다만 박문강기(博聞强記)에 치중하는 것은 오히려 쓸데없는 데에 정신이 팔려 정작 소중한 자기의 의지를 잃을 뿐이란다. 교단에서 40여 년 가르치기 위하여 읽었던 내용도 이런 견지에서 보면 爲人讀書-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독서-였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면 독서를 어떤 목적으로 해야 하는가. 독서는 위의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름지기 存心과 明理를 위하여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공부와 수양을 위한 자세 가짐이 우선이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예전 학자들이 말년에 주로 심경 공부에 주안을 둔 것도 이 때문이겠다. 요즘은 휴대전화기만 열어도 행복, 노인 되기, 건강 정보 등 인생살이에 대한 좋은 글이 차고도 넘친다. 개중에는 전문가 이상의 깊이 있는 내용도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좋은 글들이 단순히 보는 데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내용이 있다손 자기가 깨달아 신실히 실천하지 않고 눈으로 읽어 넘어가며 실천이 생략되어 종당에 자신에게는 부드럽고 남에게 엄한 자세로 그릇되니 아쉽다. 정조대왕이 대간의 모골을 송연케 한 말은 '온고지신을 그동안 배운 것을 온축시켜 성찰함으로써 앎의 정도가 더욱 깊고 새로워진다'였다. 얼마나 많이 아는가는 오로지 남을 위한 것일 뿐, 나 자신을 위한 깨달음과 이행을 위한 깊이 있는 공부가 되어야 비로소 爲己 讀書라 할 수 있겠다. 지과필개(知過必改)라고 알면 바꿔야 하니 강진 여행 준비도 과거 읽었던 내용에서 깊은 맛을 느끼는 것이 순서이겠다. 친구의 평판보다도 지식을 깊이 있게 대하여 내가 새로워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간 코로나로 사람들이 검사를 받고 확진자가 나오는 뉴스에도 나름 위생 수칙을 잘 지켜서 폭 넓은 강 건너의 일로 생각했는데 전번 다녀온 화성에 있는 학교의 교육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첫 시간에 교육한 3학년 7반에서 무증상 확진 학생이 발생하여 밀접접촉자이니 즉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오전 9시경 마음 졸이며 상당 보건소의 선별 진료소로 갔다. 일이 생기면 날씨도 알아본다더니 왜 그리 춥고 찬 바람까지 윙윙 부는지 몸이 얼고 마음도 언다. 그런데 진료소의 검사대기 인원이 예상외로 길게 늘어서 있다. 훈련소의 한겨울 훈련 때 모두 상의를 벗고 구보를 하는 장정들만 있는 줄로 여기다가 배탈로 군대 병원에 가서 늘어선 환자 병사들을 봤을 때 같은 느낌이다. 건강하게 생활하는 사람 중에서도 코로나 때문에 검사를 받는 사람이 이리도 많다. 대기자들은 먼저 카메라로 QR 코드를 찍어 자가 문진표를 작성하고 나서 검사를 기다린다. 환기를 의식하고 밖에다 천막진료소를 설치하여 오는 바람은 그대로 받아야 한다. 2줄로 2m 간격으로 그어진 노란 선을 유지하라니 20여 명이 모여 있어도 펭귄처럼 허들링(Huddling)도 못하고 바람과 추위를 선 채로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 추위 때문인지 염려 때문인지 두툼한 파카와 목도리로 단도리를 잘했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린다. 옆줄의 초등생 손녀가 같이 온 할아버지에게 뭐라 계속 묻는 모습에 검사를 받는 연유도 궁금하거니와 어린 것에게 저리 큰 부담 주는 상황이 못내 안쓰럽다. 침울한 분위기에 더하여 검사 대기자들의 의상이 검정 일색이라 일본의 돌고래 사냥 뉴스가 떠 오른다. 막바지에 몰린 돌고래들이 그물 밖 탈출을 포기하고는 머리를 맞대고 모인 모습이 마치 죽음 의식을 치르는 것 같더라는 기사였다. 검정 옷으로 늘어선 검사자들의 모습이 이리 숙연하니 심사도 만단 감회 중에 있으렷다. 항상 그렇듯 검사받는 것은 잠깐인데 그 기다림이 길다. 48시간 이내에 결과를 알려 주는데 결과가 음성이면 문자로, 양성이면 새벽이라도 전화로 알려 주며 확진 경험담으로는 양성 판정 즉시 앰블런스가 태워 가서 격리한단다. 기다림도 힘든데다 하필 코로나 검사를 12월 31일에 받아 정작 기다리는 음성 판정 문자 대신의 신년 축하 문자도 평소처럼 반갑지 않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워도 평소처럼 쉽게 잠이 안 온다. 온종일 스팸 전화 외엔 찾는 전화가 없듯이 점차 세상에서 잊혀가는 처지인데도 주변을 생각해보니 왜 이리 걸리는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마스크를 잘 착용하고 있었고 교육 후 손도 잘 씻었지만, 만일 양성 판정이 나면 후속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방정맞은 상상을 하다가 얼핏 잠들었나 본데 새벽 3시경 문자가 오기에 비몽사몽간에도 안도를 했다. 다음 날 화성 보건소 직원이 전화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나의 검사 결과도 아는 듯하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나흘 뒤 해제 검사를 다시 받으란다. 코로나 검사를 다시 받으러 갔더니 역시나 20여 명이 열지어 서 있다. 달라진 것은 전보다 더 두꺼운 가죽점퍼와 더 따스한 목도리로 단단히 무장한 외양에 마음이 전보다 가벼워진 상태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매일 검사를 받으므로 하루 검사 의뢰 건수가 십만 건을 상회한다는데 놀랐고, 신속한 처리 기술과 후속 조치에 감탄했으며 코로나가 더 가까이에서 넘실거리는 듯하여 더 조심스럽다. 외신에 의하면 인류의 절반이 감염될 거라더니 코로나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겠다. 일상이 예전으로 회복되는 것은 오히려 피상적인 소망이요, 검사를 받고 난 후에는 그저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넘김이 관건이 되었다.
작년 말에 선비 교육으로 하남의 모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촌사람에게 교통량 많고 길도 복잡해 가는 것 자체가 긴장되는 서울행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인 서울 자체도 부담스러운데다가 청주에서 하남까지 출근길의 혼잡은 상상도 안 된다. 밀릴 것까지 감안해 3시간 남짓 긴장된 운전으로 시달리게 생겼다. 서울 갈 일을 궁리하고 있는데 이번 교육을 주선한 남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 측에서 코로나 때문에 줌으로 선비 교육을 변경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 가서 줌으로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재택으로 진행하란다. 줌 수업을 안 해봤으니 촌놈 서울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이 나타났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데 관련 고수인 서울 이 위원이 줌 활용법을 가르쳐 준다기에 어차피 해 볼 일인데 이참에 배워보기로 했다. 줌 수업은 매주 월요일 저녁에 화상회의로 '近思錄' 공부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호스트가 돼 수업 자료인 파워포인트를 공유하고는 탑재된 음향이나 동영상이 제대로 구동돼야 한다. 남은 2주 동안에 수업을 담당한 서울 경기 충청 지도 위원들이 줌 수업 외에 파워포인트 작성법까지 더 배우자고 의견을 모았다. 매일 오후 8시부터 2시간을 줌으로 공부를 하는데 경기도 진 위원은 따님이 옆에서 컴퓨터 조작을 도와줘 온 가족이 나서는 모양새다. 파워포인트 작성법을 전수한 뒤에는 동영상 다운과 편집을 하는 방법까지 다루느라 1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이제 줌 활용 단계로 들어가는데 충청도 팀은 별도로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단양 채 위원은 딸이 없고 두 아들은 분가해 같이 늙어가는 부인이 대신 도와준다. 그래도 과학 교사 출신이라 근심 어린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는 한문학자 남편보다 컴퓨터 용어를 더 잘 이해한다. 수업 2일 전에는 수업 담당자 전체가 화상으로 모여 수업 실연 차원에서 자료 공유와 동영상 시연으로 이상 유무를 살핌으로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하필 내 컴퓨터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회의 예정 시각을 설정해 놓으면 오전 9시가 오전 2시로 잘못 매겨진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 표준 시각을 런던으로 잡아 간신히 해결했는데 수업 당일 아침에 똑같은 문제가 또 나타났다. 마침 컴퓨터에 밝은 충주 강 위원도 같은 문제가 생겼는데 런던에서 서울로 표준을 다시 설정해 고쳤다고 새벽에 전화를 해 주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수업 일이다. 긴장되어 잠까지 설쳤고 컴퓨터의 회의 예정 시간 설정 문제가 도질까 하는 것부터 학생들이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할는지도 두루 걱정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컴퓨터를 켜 놓고 기다리는데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전원 다 입장하고 담당 선생님이 학생들이 카메라 켠 것을 확인하며 인원 파악도 해 주니 고맙다. 대면 수업에서는 질문도 하고 학생들 반응도 살피느라 여유가 있는데 줌으로 질문을 하긴 한다만 아무래도 수업자 위주로 설명을 하게 되니 힘이 곱절은 들어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다. 학생들의 집중을 돕도록 도입부에 단소를 불고, 말미의 질문지 작성 시간에는 대금을 불었어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도 학생들이 밝은 표정으로 잘 들어주고 영상으로 리액션도 보여 주니 효과는 있나 본데 어디 대면 수업만 하겠는가. 촌사람이 서울 가기보다 훨씬 더 배우기 어렵고 고된 줌 수업을 이상 없이 마치고 나니 스스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팀장 주선으로 수업한 위원들이 화상 평가회를 하는데 모두 같은 심정이요, 컴퓨터에 어두워 가족의 도움으로 수업을 마친 분들은 후련한 성취감이 더 크리라. 줌 아이디도 제공 안 해 준 학교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아쉬움도 사라져 다들 화기애애한데 혹 카메라를 켜 놓고 게임 등 딴짓을 몰래 하는 학생은 어찌 지도하겠는가. 전국에서 시행 중인 줌 수업이 모양새만 갖춘 교육이 될까봐 마음이 무겁다.
두 해 동안의 코로나로 일상이 변해 버렸다. 사적 만남을 자제하려니 혼자서도 즐거울 일을 만들어야겠다. 평소 혼자서도 잘 논다는 말을 듣던 터라 놀거리를 찾는 것쯤이야 여반장이다. 교육이 없으면 조반 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아내를 반강제로 산에 모셔 가며, 안되면 혼자라도 낙가산 산록에서 2시간가량 걷기 명상을 한다. 걷는 데 집중하노라면 발걸음이 앞으로 나가는지 산길이 내게로 다가오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걷다가 이따금 여기가 어딘가 하여 화들짝 주변을 살피거나 잘못 접어든 바람에 길을 되짚어 온다만 그래도 좋다. 바야흐로 무아지경 또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접어드는 것인가. 점심 후엔 골프 연습장에서 2시간 동안 샷 연습으로 스윙 동작을 몸에 익힌다. 마치고는 곧바로 헬스장으로 이동해 기구 운동을 1시간 반 또는 2시간 하고는 저녁 식사 전에 귀가하므로 하루에 6시간 정도를 운동에 투입하는 셈이다. 다른 것을 더하려 해도 시간이 부족하니 그나마 가끔 잡던 국궁은 천상 70세 이후로 미루고(그때 43파운드의 활을 당길 수 있으려는지 살아 있으려는지도 모르나), 이따금 한나절 동안 무심천 내음새를 맡던 자전거 라이딩도 큰맘 먹어야 한다. 어디 그뿐이랴! 전에는 곁에 없으면 허전하던 대금도 뒷전이라 숨 넣어줄 시간도 부족하니 미안할 판이다. 이제는 어디를 가기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거니와 설령 다른 일정을 만들고자 하면 하루에 반드시 해야 하는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그게 아깝다. 이렇게 되니 혼자 노는데 더 빠져들게 되는가. 그럼 안 되는데! 김훈 작가는 인간 세상에 없는 것으로 첫째가 정답이요, 둘째가 비밀이고 세 번째가 공짜라 했는데 이 세상에 쉬운 것은 없되, 마음먹으면 못 할 일도 없다지만 정말 인생에 공짜는 없는 것 같다. 산 걷기로 1년여 지나니 이제는 산이 부르는 통에 아침 산행은 하루를 여는 정례 일과로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시간여에 1만2천 보 걸음으로 100일 정도 지나자 허릿살이 줄기 시작한다. 인체에서 가장 늦게 빠진다는 허리가 연말에는 2인치나 줄어듦을 보면서 걷기의 효과를 느낀다. 헬스도 그렇다. 시작한 지 100일이 지나자 어깨가 조금씩 벌어지고 활배근도 넓어진다. 50㎏을 당기고 120㎏을 다리로 밀어 올리는 이 기쁨이란. 고작 석 달 열흘 만에 일어난 변화로 60을 넘긴 근육 감소기에 오히려 상의 사이즈가 한 치수 늘었다. 아! 이래서 백일잔치가 생겨났고,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에게 준 기한이 백일이구나. 백일치성이면 동물도 사람으로 변하는데 하물며 공부쯤이야. 그래서 학생들에게 효과를 보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100일 만 공부를 해 보라 한다. 우리 조상이 백일잔치를 벌이고 백일치성 운운한 것이 공짜에 대한 警句로 의미가 깊다. 공부하려 TV를 치웠다는 친구의 말에 한가한 날이면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던 것이 부끄러워 마침 고장난 TV를 아예 치웠더니 야간에 리모컨 대신 책이 손에 들어왔다. 독서 후 기억에 남는 한 줄은 다음 날 산행하며 반추를 하는데 그 맛이 새롭다. 덕분에 산등성이에 이는 바람은 쇄락하며, 새 소리가 정겹고 길바닥 나뭇잎에 부서지는 빛도 찬연하다. 참 좋다. 요즘 전국의 친구들과 합심해 Zoom으로 '近思錄'을 공부하는데 옛날에 한문 공부를 하던 때처럼 흔연하다. 생각해 보면 주간에 운동할 수 있는 체력에, 야간에 독서에 몰입할 수 있으니 이를 범상히 대할 수 없겠다. 가정이 편안해야 운동도 독서도 가능한 데 주변에 걱정거리가 없으니 아주 고마운 일이다. '小學'의 '낮에는 경작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며 손에서 책을 놓지 말아야 한다(晝耕夜讀 手不釋卷)'에 견주면 농사 대신 운동이므로 '晝練夜讀'이라 이름할 수 있겠다. 은사님께 드린 手不釋卷의 다짐도 지킬 겸 앞으로도 이 자세는 계속 견지하리라.
수련원 안 실장에게서 11월 22일과 23일에 다른 일정이 없는가를 묻는 급한 전화가 왔다. 짐작건대 애초 배정된 분에게 사정이 생긴 듯한데 잠시 후 협의자료를 열어 보니 포스코 임직원과 노동조합 간부 대상이다. 노조라 하면 빨간 조끼에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특이한 글체로 단체투쟁 또는 결사반대라는 문구를 뒤로 하고는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에 익숙한 터이다. 재직 시 교육청 문 앞에서 농성하던 거친 목소리와 '질긴 놈이 이긴다'라는 현수막 등 불편한 기억도 남아있다. 수련 참가 명단을 보니 포스코 전무부터 각 팀장 그리고 노조위원장 및 지역 지부장과 사무국장으로 포스코의 중심인물은 거의 다 모였다. 이거 제대로 임자 만났나 보다. 즉시 포스코 노조의 투쟁 이력을 인터넷으로 살폈는데 언론에 오르내린 단협 투쟁이나 물리적 충돌은 안 보인다. 지난 22일 새벽에 수련원으로 가면서 지도위원으로 어떻게 처신하며 프로그램 진행을 할 것인가에 집중하느라 3시간 거리가 오히려 짧다. 성실한 안내와 친절한 지도위원으로 처신하면 되겠지. 포스코 고위직과 노조 간부들이 같은 자리에 연수를 받으러 온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로되 기왕에 귀한 시간을 쪼개어 왔으니 감동과 보람을 갖고 흐뭇하게 돌아가도록 함에 주안을 두어 협의회를 진행했다. 모든 면에서 명쾌하신 이사장님의 예리한 분석과 지적 그리고 연수 방안 논의가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16세기의 퇴계 선생 가르침이 21세기에 어떻게 작용할지도 조심스럽거늘 어찌 보면 날카로운 칼을 갈무리하고 오는 태도 극명한 사람들에게 수련이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이번 수련은 퇴계 선생의 겸양과 배려하는 마음씨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시간이 돼 이사장님의 강의로 과정을 시작하는데 의외로 리액션이 좋다. 청중의 반응이 좋으면 강사는 흥이 나는 법이라 강의에 힘이 들어가고 수강자의 표정도 더불어 생기가 돋는다. 잠시 후 도산서원으로 퇴계 선생의 遺香을 느끼러 갔다. 농운정사와 도산서당 등지에서 설명하려면 금방 반원을 그려서 모이고는 한 사람도 딴청을 부리지 않고 경청한다. 이분들이 교육 시간을 어찌나 잘 지키고 열심히 듣는지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뒤바뀐 듯 여길 정도이다. 인솔 담당 심 대리에게 물으니 포스코 직원은 일을 주면 아주 잘 해낸단다. 강의실 뿐 아니라 야외에서도 듣는 태도가 좋아 안내하는 기쁨이 더한다. 물론 질문도 많이 나오고 곡구암 버드나무 모습에까지 염려도 보이고, 상덕사 알묘에서는 헌관과 봉향 봉로 하실 분을 묻자마자 다투어 나서므로 금방 역할이 배정된다. 다음날 서로 다른 성향의 수강자들이 연수 동안 충분히 의사소통하도록 특별히 마련한 토의와 발표에 강의와 유적 체험한 내용이 잘 스며있다. 어젯밤 로비에서 퇴계 선생이 하필 정신이 온전치 못한 권씨를 둘째 부인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갑론을박도 하더니만 핵심 내용이 발표에서 다 나온다. '기업이 있어야 노조가 있다'는 말도 새길만 하거니와 자체로 표어 경진대회를 열어 '오늘의 선비정신, 기업 시민으로 꽃 피우다'를 대상작으로 뽑는 등 새로이 배운 지식을 내면화하는 방법도 참신하다. 퇴계 선생의 겸손과 배려 그리고 존중 정신이 이렇게 빛을 발하니 신기하다. 우려와 달리 연수 말미 무렵에는 포스코 직원과 노조 임직원들 간에 건네는 농담으로 장내에 웃음이 파다해 포스코가 勞使相生으로 더 발전하리란 기대가 커진다. 게다가 노조 대의원들에게 연수를 확대하겠다니 더욱 반갑다. 선생의 가르침이 500년 뒤의 사람들에게도 강하게 영향 줌을 목도하며 위인은 시대를 초월해 빛이 남을 또 배운 기회였다.
난리도 아니다. 요소수 부족이 차량 문제와 물류 대란에 이어 물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정부 고위층까지 몰랐다니 그게 더 난리다. 주유소에 가서 10ℓ에 1만2천 원이면 마음 편하게 넣었고, 단골 화물차 기사에게는 선물로 넣어 주던 요소수였다. 2015년 이후 디젤차는 환경 오염 방지를 위해 요소수를 넣어야 하므로 모든 디젤차의 필수품이다. 필자의 디젤 승용차가 요소수 주입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쯤이면 부족하다는 경고가 뜨던 경험으로 보건대 바야흐로 넣을 때인데 하필 요소수 부족 사태가 터졌다. 도산서원 해설 봉사차 안동 가는 길의 시골 주유소는 그래도 요소수가 남아 있는 곳이 있겠지 하는 기대로 주유소를 들러보았다. 그러나 3시간 동안 지나며 들른 주유소마다 '요소수 없음', '요소수 품절', '요소수 없어 미안합니다' 등의 안내문이 걸려 있다. 아주 시골길인 도산면 소재 농협 주유소마저 '요소수 바닥남'이라 하니 야단은 야단이다. 요소수는 오일 게이지조차 없어 어느 날 갑자기 '요소수 레벨 낮음'으로 황색 경고가 뜨며 이윽고 '요소수 레벨 위험'의 적색 경고등이 켜지면 자동차 시동에도 문제가 되는 위험한 단계가 되는 것이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운전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터라 이러면 운전대를 잡기조차 겁이 나게 된다. 마음이 불안해지자 당국의 무책임한 태도와 무능에서 비롯된 대란이요 人災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중국과 호주의 석탄 문제가 발생한 것이 이미 오래전이라 소관 업무만 숙지하고 있었어도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요소수 문제를 보고 받은 청와대조차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해 종당에 이 지경을 만들었다는 것이 설상가상이다. 하급 기관에서도 사태 보고 문서에는 대책을 적어도 3가지 이상 적시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보고를 했기에 농업용 요소 비료 문제 정도로 인식하게 했는가. 게다가 보고 후 21일간 청와대는 미동조차 안 하다가 산자부 등 관계 기관이 TF 가동으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면 초기 대응이 안일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뒤늦게 국가 위급 시 사용할 공군 수송기로 무려 1억 원의 항공유를 소비하며 공중 수송한 것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예의 좋은 보기라. 정부가 사전에 대처하지 못한 대가로 비싼 세금을 공중에 날려 버렸다. 나랏돈을 자기 돈처럼 아끼지 않으면 청백리는 요원하고 공직에서 물러난 뒤 뒷모습도 불편해진다. 디젤차를 타는 시민의 생활이 염려될진대 화물차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체감도는 거의 생존에 위협 수준이라는 것이나 살필 일이다. 모름지기 정치를 하려면 예후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송나라 범중엄이 설파한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자세로 '세상 사람들이 근심할 일은 다른 사람보다 먼저 걱정하고, 즐거워할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 한다(先天下之憂 而後天下之樂)'는 마음가짐이다. 특정 나라에 수입의존도가 높아 문제가 된 경우를 이미 불화수소를 통해 겪었으면서 같은 일을 되풀이 하니 중국 언론조차 조롱하지 않는가. 이런 일을 초래한 공무원의 복지부동에 대한 경고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여태껏 위아래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어물쩍 현상 회피만 하려는 버릇 때문에 사태가 이렇게 된다. 책임을 안 지니 문제를 임기응변식으로 대하고, 부족한 면을 감추고자 생색내기로 옹색한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번에도 요소수 해갈에 실질 도움을 준 기업가와 달리 모 당 대표는 개인적 해결 노력을 언론에 흘린다. 마스크 대란과 한국적 코로나 대응을 자화자찬하다가 백신 수급 곤란을 겪은 터이다. 요소수 사태가 진정되자마자 또 예의 인도적 운운하며 북녘 동포에게 요소수를 보내자는 말이나 안 나올지 모르겠다. 마스크에 백신으로 나라를 흔들더니 이번에는 요소수가 풍선효과를 더해 국민을 힘들게 한다. 당국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서민들의 속만 타들어 간다.
3년 전에 고교 동문회 총무 정민영 서원대 교수가 동아리를 구성하면 현금 지원을 하겠다기에 과거 동기 테니스 모임을 창단했던 경험으로 골프 치는 친구들을 모았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모두 반가워하여 월례 모임에 비가 올까 걱정할 정도로 발전했다. 첫해를 創業 단계로 즐기다가 정규호 청주대 교수가 회장을 이었는데 진중하고 치밀한 성격답게 守成을 잘한다. 여기에 서울 박채서 동기가 호랑이 등의 날개가 되었다. 이 친구는 6년의 억울한 囹圄 동안 '꿈꾸는 다락방'의 제임스 네스멧 소령처럼 생생한 골프 상상으로 수감의 고통을 견뎌냈다. 타이거 우즈도 못 한 age shooter요, 프로 이기는 아마로 대회 경험을 더하니 모임의 격까지 달라진다. 작년 아트밸리에서 풍성했던 첫 대회에 이어 올해는 낭성의 골드나인에서 대회가 열렸다. 지역 원로와 언론인 체육인 그리고 서울 동문과 연예인까지 총 70여 명이 참가하니 매머드급이다. 그렇지 않아도 라운딩 전날엔 잠을 설치는데, 스윙 교정 후 참가하는 대회라 더욱 설렌다. 기다리던 10월 29일에 아내의 백을 싣고 늘 하던 대로 여유 있게 출발했다. 단풍으로 물든 산성 가을 길은 아름답고 카 스테레오에서 나오는 김미숙의 나긋한 목소리에 아내의 콧소리로 차 안 분위기도 따습다. 넉넉한 시간이라 새 퍼터가 익도록 연습하고 몸도 풀라고 조언하며 트렁크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차 뒤에서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여보 내 골프백 어디 있어?' 뒤를 보니 백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다. 아뿔싸! 대문 앞에 놓고 그냥 왔나 보다. 황급히 집으로 내달리는데 아내의 입은 급하고 톤도 더 높아진다. 도착해 보니 필경 고작 40분 사이에 지나치던 어떤 놈이 집어 갔다. 차 뒤에 둔 백을 놓고 출발해 백을 잃어버렸다던 남의 이야기가 이제는 나의 일이다. 골프 못 친다고 펄펄 뛰는 아내를 고생한 진행팀 때문에 가야 한다며 궁즉통의 방법을 냈다. 마침 딸애가 두고 간 백을 쓰는 건데 드라이버가 없어 자동차 경주하듯 다시 프로샵으로 내달렸다. 급박한 티업 시간이라 에누리 운운은 꺼내지도 못한 채 비싼 드라이버를 낚아채곤 골프장으로 날았다. 아내에 대한 평소 내 마음의 반증이라고, 백에 넣은 새 바람막이가 아깝다고, 안에 챙겨 둔 캐디피는 어쩌냐며 날벼락 맞았다고 쏴대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전 서운했던 일까지 속사포로 쏟아낸다. 성질난 여인은 왜 이리 머리가 좋은 건가. 화창한 가을은 밖의 풍경일 뿐 차 안에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쓴 남편이 고개 떨군 채 운전하고 옆에서 포악질해 대는 아내는 영락없이 Xanthippe다. 억울하지만 내 잘못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나마 차 안에 물동이가 없는 게 다행으로 묵언 수행 뿐이다. 아내를 내려 주고 라커룸에서 진정하고 있는데 전화다. 이 기분으로는 라운딩 못 하겠다는 짐작 대신 '여보! 백이 카트에 실려 있어. 꼭 뭐에 홀린 것 같아'라니. 경황을 살핀즉슨 아내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미 백을 옮긴 캐디의 날랜 손에서 비롯된 촌극이다. 그 때문에 나는 왕복 1시간여 식은땀만 흘렸고, 아내는 소크라테스의 부인역을 완벽하고도 넘치도록 해냈다. 모임 마치고 오며 아내가 운을 뗀다. 그 정황에도 공에 집중함이 신기하다며 애먼 남편에게 악다구니만 했다고. 아침이면 선비처럼 숙흥야매잠과 경재잠을 외우고 퇴계 선생 공부를 해서 그런지 전처럼 물어 먹는 대꾸나 불같은 성질 안 냈으니 이제는 무던해지지 않았냐며 빙그레 웃었다. 후한 동반자 덕에 1오버의 스코어라 골프 백 사건만 없었다면 자칫 언더파를 쳤을 날인데 과속으로 딱지가 날라오면 어쩐담. 그래도 하나! 아내가 미안했던지 뭐 필요한 거 없냐며 큰애가 준 백화점 티켓이 있단다. 꿍쳐둔 거라도 勿失好機 아닌가. 덕분에 아빠는 세일 안 한 골프 티를 입고, 둘째는 값비싼 새 드라이버를 잡는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역시 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