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충주 모 골프장에서 만난 롯데 여행사 직원의 설명을 들으니 적립식이면 우리가 언감생심으로 여겼던 크루즈도 갈 수 있단다. 드디어 평생 잘 대해 준 곁지기 아내랑 동부 지중해 크루즈를 다녀왔다. 헌데 알고 보니 같이 여행하는 26명 거의가 골프장에서 엮였단다. 첫날 물의 도시 베니스 관광 후 승선을 하려는데 가장 나이 많으신 분 일행이 안 보인다. 나중에 들은 즉 신경외과 전문의로서 외국 유학의 회화 실력으로 크루즈 접수 직원에게 직접 짐을 부쳤는데 정작 다른 크루즈 선에 입선 수속을 한 거다. 가이드가 30여분 가량 동분서주하며 찾아다니는 동안 남은 일행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가 90세 어르신들이 오자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었다. 모두들 매너가 있어 보여 이번 여행이 저윽 안심된다. 크루즈 여행은 패키지와는 또 다르다. 여유로운 일정과 풍족한 식사는 기본이며 아웃도어를 입고 온 당구장 김 대표가 옷을 잘못 준비했다고 후회한 것처럼 의상도 여러 벌 필요하다. 배 안에서의 생활 자체가 여행인 크루즈는 나만의 스케줄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롯데 여행사 제공의 세 차례 유료 식사 서비스를 포함하여 저녁마다 레스토랑 정찬을 한 호사 때문에 우리 부부는 운동을 더 열심히 하였다. 바다를 누리며 선상 길도 많이 걷고 activity 이벤트에 적극 참여하여 46칸에 사인을 받은 뒤 최고 기념품도 받았다. 가이드는 이제껏 스무 칸짜리 한 장 채운 경우도 못 봤다며 놀라는데 우리는 의지의 한국인이 아닌가. 평소 하루에 한번 헬쓰하기도 어려웠는데 두 번도 했더니 어깨가 더 두터워진 듯 하여 빨리 드라이브를 잡아 다져진 근력을 시험해보고파 좀이 쑤신다. 이코노미 석은 장거리 비행의 족쇄라 공항에서 간신히 통로 쪽 좌석을 확보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독일 스튜어디스가 오더니 배를 남산처럼 표현하며 임산부를 위하여 창가의 빈자리로 옮겨주면 고맙겠단다. 왜 하필 우리람· 일단 다른 곳을 먼저 알아보라 했는데 마음이 영 불편하다. 내가 선비로 처신하려 마음을 정했거늘 구차한 행동을 보여 부끄럽고 그 스튜어디스가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정하는 모양에 더욱 좌불안석이다. 이번에는 젊은 동양인 여성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 묻더니 본인이 임신 중임을 헤아려 어렵게 얻은 나의 자리를 양보해 달란다. 여인이 울먹이며 말을 해서도 아니요 스튜어디스가 옆에서 안타깝게 바라본 때문도 아니라 이런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하여 반성을 하던 터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 편히 앉으라 하고 이내 자리를 비워줬다. 두 명의 금발 스튜어디스가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매 소소한 일 갖고 이러지 마시라고 손 사레를 치면서도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착륙 즈음에 여인이 감사의 선물로 초콜릿을 건넨다. 같은 나라 사람인 줄 몰라 미안했다고 하자 독일에 있던 중 임신 초기의 아이가 염려된다는 의사의 말에 한국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을 참이란다. 너무 염려하지 말라 위로하며 나중에 아이에게 휴대폰 던져 주고 밥 먹는 엄마는 되지 말고 명오가 깨인 아이랑 도산서원도 방문하라 하였다. 우리는 아이가 초등학교 때 도산서원에서 현장 발표를 시킨 때문인지 공부도 잘하여 지금은 의학박사라고 하는데 여인이 솔깃하다. 비결을 묻기에 부모가 공부에 모범을 보이고, 아이에게 좋은 경험과 추억을 마련해 주려 노력하면 된다고 하자 감사하다며 후일 도산서원을 꼭 찾겠단다. 선상 일출을 바라보면서 좋은 여행을 하게 해 주어 고맙다며 아내 어깨를 감싸주고, 비슷한 연배인 영주 부부랑 골프로 재회 약속도 하고, 별일도 아닌 자리 양보로 루프트한자의 스튜어디스에게 자그마한 감사 선물까지 받으니 쑥스럽지만 기분은 좋다. 바다를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형제들 내외랑 크루즈를 하면 더 좋겠다.
대문 바로 앞에 자그마한 텃밭이 있다. 문전옥답도 아니요 다산 선생이 말한 대로 유인(幽人)의 집 앞에 있는 10평도 안 되는 남포 밭이다. 이 밭을 평생 바람이었던 전원주택의 선물로 여겨 이사한 후 서너 해는 고추, 가지 그리고 파프리카에 호박이랑 오이까지 오밀조밀 심어 주경야독의 모양을 스스로 즐기고자 하였다. 그런데 집 앞을 왕래하는 교통량이 워낙 많다. 무농약 재배이건만 차량의 배기가스와 타이어 분진 등 미세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 자란 가지와 토마토 및 푸성귀를 그냥 먹기에는 영 찝찝하다. 궁리 끝에 환경에 덜 오염될 지중작물로서 고구마를 심으리라 마음먹고 마침 고구마 주산지인 안동을 오갈 참에 싹을 구하여 심었다. 고구마는 그래도 손이 덜 가고 심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크는 식물이라 신경도 덜 쓰여 좋다. 처음에는 풀과 그런대로 사이좋게 커 가더니 잡초의 생명력이 워낙 강해 장마철만 지나면 하루가 다르게 고구마 잎을 눌러 버린다. 살기 위하여 아스팔트로 가지를 뻗다가 차바퀴에 으스러져버리는 잎은 보기에 참 가여운 모양새라. 전한의 동중서는 삼년동안 휘장을 내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후원의 채마밭이 망가졌다던데(下帷三年의 고사) 이 몸은 학문 성취도 이룬 것 없이 밭에 풀만 무성하게 만들었다. 이 꼴을 본 집 근처 마트 주인은 컨테이너 놓을 자리로 빌려 달라 하지를 않나, 옆 밭의 할머니는 혀를 차며 이렇게 농사를 지으려면 차라리 자기가 짓겠다지를 않나.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이 염려를 하는 것은 고맙다. 분명히 밭 모양새인데도 잡초 우거진 쓰레기장으로 여기는지 음식물 쓰레기와 담배꽁초나 음료수 병들을 당연한 듯이 버리는 것은 볼수록 괘씸하다. 이거야말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아닌가. 헌데 게으른 풀밭 주인에게 고민이 생겼다. 때가 되었으니 수확을 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이목이 번다하여 도저히 백주에 캐러 나갈 염치가 없는 거다. 하는 수 없이 어스레한 저녁에 고구마를 캐려니 수확도 별반 없는데다가 흘린 것이 부지기수라 고구마를 담으려 준비한 빈 상자만 아깝다. 다행히 금년에는 고구마 싹을 말려 죽인 것도 별로 없고 처음에 풀도 뽑아준 때문인지 잎이 왕성하여 슬며시 땅 속이 궁금해진다. 얼마나 영글었는지 아내가 시험 삼아 한 줄기 캐보더니 고구마가 실하고 색이 엄청 곱다며 희색이 만면이다. 금년에도 수확 시기를 놓쳐 서리가 내리고도 며칠 지난 다음에야 늦고구마를 캐러 나갔다. 남의 눈치도 안 보고 새벽부터 출반주하여 풀도 치우고 잎을 거두고 캐는데 힘은 작년보다 더 들지만 수확하는 맛이 쏠쏠하다. 갓 캐어 발갛게 색 좋은 고구마를 밭에 주욱 늘어놓으니 마음이 풍요롭다. 그때 지나던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아줌마! 그 고구마 팔지 않을래요·'란다. 할마시에게 아줌마라 불렀겠다, 고구마를 팔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겠거니 여겨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이 고구마는 팔 것이 아니라고 대신 대답하고는 둘이서 배꼽을 쥐었다. 넘치게 수확하는 이 기쁨이여! 아내가 외출하며 서너 고랑 남은 것을 마저 캐라 하여 혼자 캐는데 지나는 노인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고 간다. 강아지를 끌고 가던 아저씨는 고구마 맛나게 생겼다고 칭찬을 하더니 막걸리 안주로 하나 달란다. 참!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생각하면서도 하나 건네고 다시 캐는데 골의 반이 텅 비었고 먹다 반쯤 남은 고구마만 듬성듬성 있다. 아마 들쥐나 두더지의 짓일 텐데 안동의 학봉선생 종갓집에서는 수확 시 작물을 약간 남겨놓아 어려운 사람들이 이삭으로 주울 수 있게 했다는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나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려에 참여하였고, 예상보다 많이 거두어 사람과 들쥐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 수확이 아닌가. 좋다!
우리 어머님은 바다를 보면 내장까지 뻥 뚫리는 것 같다며 좋아하신다. 게다가 예전에 해운대에서의 전복죽 맛을 이따금 회상하시기에 바다와 전복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완도를 구경시켜 드리려 마음먹은 것이 3년 전이었다. 마침 작은딸이 이번 휴가는 부모님과 여행을 하자기에 어머님도 모시고 싶은데 네가 엄마의 동의를 구해 보라하자 부부 문제는 부부가 알아서 하시란다. 미운 것! 다행히 아내도 어머님이 좋아하시면 그러지 뭐라고 선뜻 응낙한다. 참 고마운 사람! 이렇게 해서 어머님과 자식 내외 그리고 손녀딸까지 함께 하는 3대의 완도 유람이 2박3일의 여정으로 10월 12일에 시작되었다. 미루던 숙제를 하는 기분이다. 아내가 운전대를 잡은 덕에 나는 예상과 달리 어머님과 함께 뒷좌석에서 4시간 여를 편하게 간다. 딸과 이야기하느라 휴게소도 계속 패스하기에 피곤하지 않느냐 물으니 이상하게 힘들지 않단다. 막내딸이 저렇게 좋을까· 요즘 치료받는 어머님의 새 틀니가 편하여 단단한 음식도 씹을 수 있다 하신다니 전복 코스로 승격하여 저녁을 배불리 잡숫도록 해 드렸건만 여동생의 문안 전화를 받고는 오는 길에 잠시 들른 담양 죽녹원의 대나무 숲이 시원하더라는 말씀만 하시니 비싼 전복 코스 요리의 효과는 별로 없나보다.(그러고 보니 여행 동안 아들들은 모두 전화를 했건만 며느리는 전화를 안 했군) 완도는 30분 내외로 볼거리가 있어 정도리 구계등의 몽돌 해변, 땅 끝 마을, 미황사, 장보고 기념관과 청해진 유적지인 장도를 욕심껏 둘러봐도 시간이 여유롭다. 다만 어머님이 무릎때문에 걷기를 어려워하시니, 농암 이현보 선생이 愛日堂을 지어 부모님 살아계신 하루를 소중히 하셨던 마음이 이제 내 마음이다. 철 지난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인적이 드물어 피곤도 달랠 겸 3대가 모두 벤치에 벌러덩 드러누워 해송 사이의 뭉게구름을 눈 가득 담고 파도 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며 온 몸으로 산들거리는 가을바람을 맞는데 이러다 잘하면 우화등선(羽化登仙)하겠다. 오는 길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 사의재에 들렀다. 서학 쟁이에게 집을 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주모의 선심으로 간신히 방 한 칸을 얻어 사의재라는 당호를 걸을 수 있었다. 사의재(四宜齋)는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집'이라는 뜻이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 외모는 마땅히 단정하게, 말은 마땅히 적게, 행동은 마땅히 무겁게'하며 여기서 평생 제자인 황상에게 '삶을 바꾼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때 제자에게 준 삼근계와 다산 선생의 과골삼천 사례로 딸의 삶에 지남(指南)이 되기를 바랐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우울증이나 홧병으로 생을 마감했을 터이나 부단히 자신을 성찰한 덕분에 오히려 역작을 저술하였는데 금정찰방 재임 시에 퇴계를 사숙하여 『도산사숙록』을 지은 것이 도움 되었을 것이라는 부언도 함께. 당초 여행을 계획하면서 어머님께는 바다를 실컷 안겨드리고, 딸에게는 부단히 성찰하는 삶에 대하여 생각할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이라. 시간이 남기에 다산초당과 동암까지 둘러보며 『여유당전서』의 집필 장소이고, 여기서 자산도에 유배중인 둘째 약전 형을 몹시도 그리워했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며 형제간 우애를 바라는 속내를 풀었다. 청주에 다다르자 어렸을 때처럼 아빠의 역사 유적 설명을 들어 기뻤다며, 다음에는 섬진강 둘레 길을 다시 할머니와 같이 가 보잔다. 출가한 여식이 이렇게 부모와 여행하자니 얼마나 좋은고! 수목원 펜션의 복층 계단을 내려오는 손녀의 모습이 며칠간 아른아른하겠다는 어머님의 혼자 말씀과, 긴 여행을 한 것 같다며 행복해 하는 아내의 모습에서 숙제를 잘 마친 듯 여겨지는 3대의 완도 유람이었다. 여행 후 며칠 뒤에 '엄마 아빠 사랑해요!'란 말과 함께 작은 딸이 국화꽃 한 다발을 보내왔다. 그런데 아빠는 왜 항상 후순위인거지·
차곡차곡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을 가지런히 겹쳐 쌓거나 포개는 모양이다. 세간에서 차곡차곡은 차와 곡식을 잘 준비해 놓은 모습이거나 차와 곡차를 더불어 즐기는 정경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가을에 차곡차곡이 차와 곡식이 넉넉한 풍요롭고 여유 있는 정경으로 연상된다. 차 생활이 어느덧 20년을 넘어가면서 보이차는 물론 자사호 관련 서적도 읽어가며 차에 대한 상식이 깊어가는 만큼 방에는 마실 차가 쌓여갔다. 차 가격이 천차만별이요 좋은 차의 값은 천정부지이다. 지갑형편을 고려하여 보관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속내로 중저가의 차를 익어가는 순으로 마시고 차맛을 아는 우리 딸들에게도 농익은 차를 주겠다하니 따라다니며 물건 못 사게 잔소리하는 아내도 막을 핑계가 없다. 집안에 쌓여가는 차만큼 마음도 풍족해갔다. 차라는 것이 환경에 워낙 민감하므로 건창과 습창의 맛이 다를 뿐더러 같은 차일지라도 중국과 한국에서 보관한 차 맛이 확연히 다르다. 이토록 냄새에 민감하다. 그런데 금년 초 있었던 집안의 작은 화재로 연기와 그을음이 가구와 옷가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니 그동안 고이고이 모셔두었던 차도 그을음 폭탄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혹시 랩으로 잘 둘렀던 차는 어떨까 하여 조심스레 시음해 보니 이도 역시 혀를 톡 쏘는 맛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홍수 때문에 시뻘겋게 변해버린 물 천지 속에서 마실 물이 없어 애 타는 사람처럼 사방 물 천지인 바다 한 복판에서 마실 물이 없어 입술 타들어가는 사람처럼 나는 차 덩이 속에서도 마실 차가 없어 목이 마르다. 차가 없으니 마음에도 궁기가 도는지 매일 저녁에 일상처럼 감미롭게 듣던 세상의 모든 음악마저 싱거운 느낌이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에 평균 3번 이상 마시던 차를 못 대하니 허전하고 아쉬워 자꾸 주위를 서성이게 된다. 그런 중에 매년 「추석맞이 세일」하는 카페의 공지가 뜨기를 기다리는데 마치 설빔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아이의 마음이라. 드디어 구매한 차를 예상보다 일찍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고작 병차 몇 편인데도 찻자리 옆에 벌려두고 보니 이리 좋을 수가 없다. 왼쪽에는 마실 차가 있고, 오른 옆에는 먹을 곡식이 있으니 볼 때마다 흐뭇하고 넉넉한 느낌까지 차곡차곡 쌓이는 듯하다. 이렇게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생기고 아끼던 차를 덜어주어 갈증을 풀 수 있게 해 준 분에게 감사를 표할 생각도 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이런 심정일 텐데 주위의 형편을 잘 헤아려 준 사람이 경주 최부자이다. 흉년에는 굶주리는 이웃을 보살폈고, 임정을 위한 독립자금까지 지원한 행적을 보면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과는 전혀 다르다. 최부자 집안 철학인 육연(六然)은 자처초연(自處超然), 대인애연(對人靄然), 무사징연(無事澄然), 유사감연(有事敢然),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태연(失意泰然)이라. 부자가 3대를 못 간다는데 12대 300년간이나 만석꾼으로 부를 유지한 노하우가 이 같은 가내 철학 덕분이다. 어디 최부자댁 뿐이겠는가. 다른 부자들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곳간의 외부 문을 열어서 이들이 필요할 때 퍼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모두 차곡차곡의 여유를 가진 때문이라.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 거개가 결과에 집착한 나머지 과정을 무시하고 박기후인(薄己厚人-자기에게 엄하고 남에게 너그러움)의 정반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식 자랑은 하되 이를 지혜로 가꾸지 못하니 차곡차곡의 여유는 물론 철학마저 없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자기를 살피지 않으니 주위를 배려할 줄도 모르고 베풀 줄도 모를 뿐더러 배운 대로 행하지 않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우리의 옛 선비들이 알면 통탄할 일이다.
가을이 깊어지고 들판의 벼가 누렇게 변해가니 바야흐로 그간의 결실을 수확할 때가 되었다. 교육계에 있다가 퇴임하고 과수원 농사를 짓는 남도의 친구를 만났다. 사과 농사를 짓다가 너무 힘이 들어 금년부터는 위탁 경영을 한다는데 이 교육학박사가 경험한 중에 들을 말이 자못 있다. 사과를 수확하면 크기별로 선별하여 박스에 담는다. 그런데 초짜 농부에게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미세하게 흠 난 것을 버리느냐 아니면 상품에 넣는가 하는 결정이란다. 숙련된 농부야 물론 완벽하리만큼 깔끔한 사과만을 엄선하여 박스에 넣는데 그걸 어려워 한 이 초짜 농부는 상품성 좋은 박스에 약간 아주 약간 흠이 있어 버리기 아까운 놈을 같이 넣었다. 그랬더니 그 약간 상태가 좋지 않은 사과 하나가 멀쩡한 다른 사과까지 쉽게 상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박스 전체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더란다. 이걸 보면서 이제껏 교육자로서 한 마리 잃은 양을 구하려 많은 노력을 들였고, 교장으로 훈화 때에도 강조를 한 경험을 반추하게 되어 그 결과로 다른 멀쩡한 학생들에게 미치는 반작용은 없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단다. 인간사회로 유추해 보자. 질 나쁜 사람 또는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노력이 전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할는지· 물론 사람인지라 사과의 예와는 다르겠지만. 사과 수확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 때에 전지를 해 주고 약도 잘 쳐야겠지만 버릴 줄을 알아야 수확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꽃이 피면 그 꽃을 그냥 두었다간 감당을 못 하므로 적당히 꽃을 솎아주어야 한다. 꽃이 진 후 사과가 열리는데 주렁주렁 열린 어린 사과를 그대로 두면 상품성 나쁜 조그마한 사과만 주저리주저리 열리므로 역시 과감하게 솎아내야 한다. 실할 것 같은 사과를 선별하여 잘 클 수 있도록 주변의 자질구레한 놈들을 치워줘야 하는데 그것도 사과의 성장을 살펴 여러 번 솎아주어야 한단다. 결국 좋은 사과를 얻는 과정을 축약하면 잘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련과 욕심이 있으면 버리지 못하므로 과욕을 버리고 잘 덜어낼 수 있어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화가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프랑스 초청 작가가 되어 해마다 국외 전시회를 여는 동양화가 김화백의 말이다. 초짜 화가들은 화폭 전체에 욕심을 내다보니 어디가 포인트인지 선명하게 드러내지를 못한다. 특히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농후한데 원숙한 화가가 되면서 화폭의 중심도 잡게 되고, 점차 기교가 사라져서 붓의 힘만 남길 수 있다. 결국 백교여졸(百巧如拙-백가지의 기교가 졸렬함만 같지 못하다)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그림을 언뜻 보면 유치해 보이나 보면 볼수록 깊이가 숨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도산서당에 걸려 있는 퇴계 선생의 친필 편액을 보면 나이 60의 원숙한 학문을 지닌 선생답지 않게 얼핏 치기 어린 글씨로 보인다. 그러나 서예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육조묘비명체의 글씨 한자 한자를 한식경 이상을 들여다보게 하는 대단한 필력이라 한다. 모두 기교를 제거한 심오한 내공이 깃든 때문이리라. 버린다는 것은 내게 그다지 소용되지 않거나 급하게 필요하지 않는 것을 멀리함과 더불어 과거 내게 필요했어도 앞으로 소용될 것들을 예측하여 치우는 일이다. 여기서 기준은 소용(所用)과 예단(豫斷)이다. 단순히 사과 같은 물건 외에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시로 둘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간다. 다만, 버리는 슬기를 지니지 못하면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며 오히려 부족함만 한탄할 것이고,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외롭다고 탄식할 것이다. 우리 인생도 버릴 줄 알아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조심스럽다. 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은 잘 솎아내고 버림이 있어야 가능하다니 다시금 내 주변을 살피게 된다.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인 수호지는 모택동도 즐겨 읽었던 박진감 있는 역사 소설이다. 다시 읽으니 소설 내용에서 각 두령들의 인품과 리더십으로 관점이 옮겨진다. 그런 면에서 눈에 드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옥기린 노준의는 송의 뛰어난 장군이었으나 집사의 모함으로 양산박에 들어와 총병도두령이 된 사람이다. 그가 처형당할 뻔한 것을 구해 준 사람은 고아로 시종이 된 낭자 연청이다. 연청이 근거지인 양산박을 나와 동경 나들이로 연등 구경을 하다가 잘못 관군과 싸움이 일어났다. 아무리 연청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중과부적이라 바야흐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 노준의가 일단의 호걸들을 이끌고 와서 연청 무리를 구해 낸다. 간신히 숨을 돌린 연청이 주인에게 하찮은 종의 목숨을 구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산채를 나오는 가고 감격에 겨워 인사를 하자 노준의는 가볍게 대꾸를 한다. '주인으로 종을 구하러 오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라고. 이 장면을 읽으며 떠오르는 회한은 키우던 개 두 마리를 보낸 일이었다. 강아지로 나를 따라와 주인으로 믿고 죽을 때까지 잘 데리고 살 줄 알았는데 비명에 보내게 되었다. 한여름 폭염에 이글거리는 옥상에서 고생을 하고, 한겨울 추위에 얼음을 핥으며 갈증을 참던 사정이 안타까워 단독 주택에서는 잘 키우리라 생각했는데 주변 원룸 주민들의 민원으로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아무튼 주인이라면서 두 마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으니 나는 주인도 아니다. 절절한 후회로 내 입에서 먼저 키우던 개에 대한 말을 못하고, 설혹 아내가 개 관련 추억을 말하면 참으로 무정한 사람이라 여기며 대꾸를 못하겠다. 모든 사물에 정령이 있다 하니 모쪼록 저 세상에서는 좋은 생을 누리기 바라며 아울러 윤회를 한다면 더 낳은 생으로 환생하기를 바랄 뿐이다. 미안하기 그지없다. 종 관련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퇴계선생의 증손자 창양이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모유가 부족하게 되자 마침 아기가 있고 먹일 젖도 풍부한 여종 학덕을 유모로 보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선생은 자기 아이를 살리고자 남의 아이를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증손자를 살리기 위해 여종의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암죽으로 연명해 약해진 증손자는 홍역에 걸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가문의 대를 잊지 못하게 된 선생의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16세기의 신분제 사회에서 종의 목숨은 주인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퇴계 선생은 사람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가족이 신뢰도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주종관계이다. 서양은 종사제도 내지 봉건제도로 동양은 주군과 가신제도를 근간으로 봉건제도와 군국제도로 나라를 운영하는데 왕과 신하 모두 규모는 다를지언정 주종관계를 근간으로 주인은 종을 보호해 주고, 종은 주인에게 충성하며 세금을 내는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선거철이면 으레 등장하는 것이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 의식에서 비롯된 말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주인과 종에서 정치가와 국민으로 확장되었다. 비록 백성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없을지라도 의식만큼은 백성을 존중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러한지.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 했지만 요즘 정치가들의 일탈된 행태로 오히려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가 선거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당선하자 바로 태도가 돌변하거나 유권자를 위한다던 사람이 정치를 직업으로 여겨 종당에는 망신당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노준의처럼 주인이라면 아랫사람을 자기 몸처럼 보호해 줘야 한다. 대통령부터 각계각층의 정치가들은 말만 앞세우지 말고 실제 주인처럼 처신해야 한다. 그런 믿을만한 주인을 보고 싶다.
급하게 길을 나섰더니 그날따라 차가 밀려 자칫 약속 시간에 늦지나 않을까 애가 탄다. 우회전으로 나가야 하는 길은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 다만 앞차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고 나갈 때만 바라고 있다. 네거리에 다다라 바야흐로 우회전을 받을 순간인데 휑하고 차가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끼어든다. 얼마나 급하게 닥쳤는지 백미러에도 잡히지 않았다. 자칫 받힐까 놀라 화들짝 브레이크를 밟게 만드는 짓거리가 참 밉다. 급한 사람이 자기만 있을까만 고맙다는 사인도 없는 것을 보면 평소 새치기를 습관처럼 하나 보다. 이렇게 칼치기 하는 사람은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죽어도 양보를 안 하더라. 참으로 무례하고도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손녀를 위하여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기다리는데 아이 뒤에서 치마 바람을 일으키며 쏙 들어오는 여자를 보니 이도 고약하다. 당연한 듯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들어오는 모양새가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인의 말을 들으니 이 정도는 오히려 약과다.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여학생이 청량음료 병을 쏙 꺼내들더란다. 가히 뻔뻔함의 극치요, 참 얌체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얌체의 뜻은 무얼까. '성냥, 숭늉, 영계'이 '석류황(石硫黃), 숙냉(熟冷), 연계(軟鷄)'라는 한자어에서 변한 것처럼 염치(廉恥)에서 비롯된 국어화한 한자어이다. '염치'는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가 '얌치'로 어형이 변하고 다시 '얌체'로 변하며 염치가 없는 사람으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는 추상적 의미가 '그 마음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구상적 의미로 바뀐 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나, 원래 긍정적 의미였던 것이 점차 부정적 의미 즉, '염치 없는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얌체 없다'와 같이 '없다'가 지니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얌체'가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얌체'는 한자어 '염치(廉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얌치'로 변형되었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얌체'가 기실 '염치(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라는 단어에서 출발한 것을 안다면, '얌통머리(야마리)' 없는 '얌체'들도 '염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염치' 없거나 아예 모르는 '얌체'들이 너무 많다. 이런 얌체를 없애기 위하여 선비교육을 하는 당위성이 나타난다. 선비교육은 사람들에게 예의와 염치를 알게 해 주어 면목(面目)을 갖추게 해 준다. 면목이란 염치와 같은 뜻으로 체면을 말함인데 이것이 부족하면 우리는 면목 없다고 말한다. 면목 없는 사람, 얌체 같은 사람, 얌통머리 없는 사람. 몰염치한 사람, 파렴치한 사람, 후안무치한 사람, 무뢰한, 무뢰배 등 너무나도 많은 말들이 모두 비슷한 상황에서 사용되었던 것을 보면 과거 우리 사회에서 염치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중에서 특히 무뢰배라는 말에 눈이 간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요, 같이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이니 인간사에서 신의는 바로 예의와 염치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기왕에 천지지간 고귀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얌체 같다거니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말고 살아야 되겠다. 인생에서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목적 이룸만 신경 쓰다 보면 이렇게 얌체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사람으로 예의와 염치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거다. 얌체들은 박기후인(薄己厚人)은 못하고 대신에 후기박인(厚己薄人-자기에게는 후하고 남에게 야박함)으로 필경 사회에 폐를 끼친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이 판치고 있으니 그게 걱정이다.
그동안 글쓰기가 마음 수양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글쓰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생겼다. 먼저 집안 청소를 깔끔히 하고 나서 찻물을 끓여 우려낸 차를 한식경 마시며 글감 정리를 하고는 음악을 잔잔히 틀어놓고 글을 쓰고 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공부를 하라 하면 나는 뭉툭한 연필을 꺼내서 끝을 예리하게 깎아서 책상 옆에 가지런히 둔 뒤에야 공부를 시작했더랬다. 모두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으려는 비슷한 행동이겠다. 이런 것은 버릇일까 아니면 루틴일까. 루틴은 컴퓨터 용어로 특정한 작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명령으로 프로그램의 일부 혹은 전부를 이르는 경우에 쓰인다. 그런데 운동선수 중에서 루틴이 쉽게 나타나는데 특히 민감한 운동으로 치부되는 골프 경기 중에 확연히 드러난다. 골프는 조그만 볼에 집중을 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는 못 가지만 골프를 하면서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골프 선수들은 자기만의 일정한 버릇을 가지고 있으며 우승한 선수의 인터뷰에서도 긴장하지 않으려 자기의 루틴을 지키고자 의도적으로 노력 했다는 말도 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선수들은 샷을 하려다가 갤러리 중에 사진 찍는 소리나 전화 벨 소리가 나서 집중에 방해가 되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자기의 루틴을 진행한다. KPGA선수로 활동하던 프로가 골프를 잘하려면 두 가지를 신경 써야 한다고 내게 조언을 해 주었다. 하나는 골프장 주변 경관과 구성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하며, 다른 하나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매 샷마다 변함없이 잘 지켜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집중은 하되 주변 경치까지도 보고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단다. 그리고 하나가 프리 샷 루틴을 만들라니, 프로들이 시합에서 하는 행동을 두루 살피고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티 박스에 올라가 샷을 하기 전에 먼저 두 번의 연습 스윙으로 어떤 구질의 볼을 칠 것인가를 생각한 뒤에 볼 뒤에 서서는 볼의 에임을 정한다. 어드레스를 하고 다시 목표를 바라본 뒤에 샷을 하는거다. 이 정도면 폼이야 프로답겠지. 그런데 참 신기하다. 그날 운동을 복기해 보면 타수가 잘 나온 날은 루틴을 잘 지킨 날이었고, 동반자들과 대화 등으로 루틴을 소홀히 여긴 날은 희한하게 타수도 신통치 않았다. 루틴은 버릇이나 징크스가 아니라 긴장을 풀거나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라는 방증이다. 그래서 프로들이 필드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루틴을 무기로 시합을 전개하는 것이다. 테니스 선수도 마찬가지이다. 흙신으로 불리는 스페인의 나달은 서브를 하기 전에 코와 머리를 좌우로 매만지고 팬티를 만진 다음에 서브를 하고, 금년에 윔블던을 제패한 조코비치는 상대가 불편하게 여길 정도로 볼을 여러 차례 바운드 한 뒤에야 서브를 하는 버릇이 있는데 바운드를 심하게 하다가 심판에게 지적당한 뒤에는 급기야 더블폴트로 서브를 실수하기도 한다. 긴장을 풀고 일상을 평정심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펴보면 모두 자기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야 기왕이면 좋은 루틴을 가져 우리의 사회가 좀 더 안온하고 평화로워 지면 그것도 무방하겠지. 요즘 언론에 보복운전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면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살피게 된다. 퇴계 선생은 책을 읽으며 궁구하다가 집중이 안 되면 투호를 하거나 절우사에서 풍상계 맺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곡구암 아래로 내려가 흐르는 물을 보고 오셨는데 이도 루틴에 포함될는지 모르겠다. 다만, 평정심을 유지하고 집중하기 위한 나름 방편이니 각자가 루틴이라도 설정하여 마음에 여유를 가진다면 좋겠다.
손녀가 밥 먹는 것을 보면 거의 전쟁 수준에 버금가는 식사 장면이다. 아빠는 달래고 엄마는 아이 입에 밥을 퍼 주며 공갈 반 협박 반이고 아이는 눈물 반 콧물 반으로 안 먹으려 기를 쓴다. 이렇게 커서야 밥에 대한 고마움을 알까나. 흔하디흔한 먹거리 중의 하나이며 오히려 다이어트를 하도록 유도하는 적대적 대상으로 인식하게 될까 염려된다. 사실 요즘 어른들도 밥이 하느님이다 라던가 밥심으로 산다 내지 먹성 좋은 머슴이 일도 잘 한다는 옛 속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어렸을 적에는 쌀밥 한번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음력 6월이 생일인 동생이 부러웠던 것도 생일 맞은 동생만 하얀 쌀밥을 받기 때문이었다. 요즘 아주 어쩌다 보리밥 집에 갔을 때 '그래 이 맛이야'하며 어릴 적 보리밥 먹던 추억을 새기는 친구들은 딴 나라 사람이다. 허구한 날 주야장창 보리밥만 먹어보라. 지금도 보리밥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쳐지는데 추억 어린 음식 운운할 마음조차 생길리 만무하다. 대학시절 축제 때에는 같은 과 여학생들에게 얻은 구멍 난 스타킹으로 다리에 들러붙는 거머리를 막으며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김도 매고 피사리도 하며 논농사를 하였다.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했던가. 가을 녘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는 한 가족이요, 내 발길을 반기는 듯 보여 자식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니 탈곡할 때는 한 톨이라도 땅에 떨구지 않으려 애를 쓰게 되고, 어릴 때 아버님께서 밥톨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고 꾸짖으셨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요즘에는 온갖 먹방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개중에는 「누들로드」처럼 문화인류학적 견지에서 국수가 인간에게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있지만 거개가 시청률에 목숨 건 개그맨 등 출연진들을 먹이고 살찌우는 프로그램들이다. PD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절제하지 못하여 배가 동산만한 사람들을 불렀으며, 도대체 먹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저리 먹지 못해 안달일까. 쌀 한 톨 만들고자 흘린 농부의 땀에 대한 감사도 모르고 맛에 탐닉하여 와구 먹어대는 모양을 보면서 아귀가 저런 모습이겠거니 여긴다. 모 개그우먼에 의해 소떡이라는 메뉴까지 유행하는데, 자제심 없는 사람들은 이들 출연자의 먹는 모습으로 대리 만족을 하거나 주문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되겠거니. 먹방 프로그램은 절제를 기본으로 여겨야 하는 인간에게 참을성도 없고 아낄 줄은 더더욱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 식량이 천지간의 정령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자체가 감사함을 어찌 살필 수 있으랴.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지척의 시드볼트-씨앗저장고를 보면서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사물을 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장고에는 인류 최후의 위기가 닥칠 경우를 대비하여 종자를 장기 보존하여 보다 오랫동안 활성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요즘 일본과의 경제 전쟁에서 보듯 전쟁도 과거의 총칼로 싸우는 시대에서 경제적 보복으로 상대를 궤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식량을 무기로 한다면 더 참혹한 전쟁이 되리라 여겨 씨앗 저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하룻밤에 노예 한 가족의 1년 치 식량을 먹어 치우던 로마 말기의 파티 같은 퇴폐 문화는 나라 말기적 증상임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 먹는 데에 대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젊은 세대이기에 헬조선이란 말도 나오고, 먹방들은 음식이 내게 베풀어 주는 생존의 기회 부여임을 살피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먹거리로만 여기도록 만들고 있는 듯하여 소름 돋는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 끼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해야겠다. 모름지기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거니와 부족함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도 모른다.
바야흐로 무더운 여름이다. 이제 밤낮으로 모기가 극성일 테니 집집마다 방충망에 살충제등 여러 가지 도구를 가지고 모기와의 전쟁을 치를 것이다. 모기처럼 끈덕진 놈도 없다. 촘촘한 방충망도 어렵지 않게 뚫고 들어오며 요행히 집에 들어오면 별반 먹을 것도 없을 텐데도 며칠씩 버티며 기회를 노리다가 그예 목적한 바, 피를 빨아 먹는다. 예로부터 모기는 인간의 적 일뿐이라 한 마리라도 눈에 띄면 파리채나 에프 킬라 등으로 깔끔히 해 치워야 했다. 여름날에는 전기불이나 모기 포집기로 인간 주변에 모기를 얼씬하지 않게 한다. 전에는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과 모기들을 지지직 잔인하게 태워 죽이는 식당도 많았는데 요즘은 가정집에서 전기 파리채로 태우고 있으니 어디에도 모기가 편히 살 곳은 없다. 몇 해 전에 우연히 모기의 우화를 들었다. 해가 저물 무렵 시아버지 모기가 출근을 나서자 며느리 모기가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저녁 진지 드시고 나가세요', 시아버지 모기가 '얘야 오늘 저녁일랑 준비하지 말거라. 가다가 인심 좋은 놈을 만나면 포식을 할 것이고, 모진 놈 만나면 맞아 죽을 테니 저녁 준비는 하지 말거라.' 고 먼 산을 바라보며 힘없이 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여태 모기에 대하여 가졌던 잔인한 생각에 미안함이 들었다. 우화일지라도 비록 미물이 모두 소중한 생명을 갖고 태어났는데 그 생명에 대하여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했다는 반성이다. 내 생명이 소중하면 남의 생령도 소중히 여김은 당연한 것이리라. 이 세상에 무가치한 생물은 하나도 없을진대, 이제는 모기 한 마리일지라도 함부로 해치지를 못하겠다. 어디 그뿐인가. 그간 살아오면서 무심코 저지른 살생에 대하여도 회한이 든다. 어렸을 적에 장난삼아 라이터 가스에 불을 붙여 화염방사기처럼 개미집을 불태웠던 일과 냇가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거나 미역을 감을 때 버드나무 가지로 개구리를 쳐 죽인 것은 그중 너무 잔인했다. 나뭇가지에 뒷다리만 한 뀀 가지런히 꿰려면 얼마나 많은 개구리가 죽어야 했던가. 마른 나무를 모아 구어 먹는 개구리 뒷다리의 맛이야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돌긴 하지만 심심파적 놀이삼아 수많은 개구리의 생령을 사라지게 했다. 지리산 암자에 계신 스님에게서 벽안(碧岸)이라 호를 담은 봉투를 열 때에 어릴 적 집 앞의 봇도랑 언덕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의 평화로운 모습이 떠오르기에 흔연히 받아들였는데 그 언덕 주변 풀밭을 집 삼아 살던 개구리는 생각 없는 시골 녀석의 모진 손에 무참히 스러져 버렸다. 옛 선비들은 사물과 내가 하나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을 체득하였기에 모든 사람을 하늘마음으로 공경할뿐더러 집안에 들어온 파리 한 마리조차 죽이지 않고 방문을 열어 고스란히 내 보내주었고, 곤충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문 밖으로 내 보내주었다 한다. 주자의 경재잠에 택지이도 절선의봉- 땅을 가려 밟으며 개미집도 돌아서 가야 하느니라-로 가르친 것도 생명의 소중함을 전제로 한 가르침이리라. 이렇게 걸으려면 발걸음을 반드시 정중하고 무겁게 해서 걸어야 하는 것이다.(足容必重) 퇴계 선생이 공부에 전념하고자 세운 도산서당의 담 너머에는 절개 있는 벗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절우사가 있다. 대나무, 국화, 소나무 그리고 매화와 더불어 풍상계를 맺어 절개 맑은 향기를 나누고자 하여 날 좋은 때는 이들 계원과 대화도 나누었다 한다. 마치 중세의 성인 성 프란체스코가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농부의 가축을 해치는 늑대들을 훈계하였던 모습과 흡사하여 우주 만물에까지 사랑을 넓혀 대하는 성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연과 미물을 내 몸처럼 대하다 보면 공연한 살생을 뉘우치는 이 몸도 혹여 자연의 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겠거니.
크고 작은 모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건배사인데 그 종류가 많아 연말이면 작은 수첩이나 파일로 된 정리본이 나돌아 다닐 정도이다. 당일 모임의 구성을 감안하여 한 두개의 건배사를 미리 준비해 두어야 재치 있다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 건배사에 노래가 등장하기도 하고 儒者의 모임에서는 기소불욕에 물시어인으로 화답하는 등, 모임의 성격에 따라 건배사는 더욱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제 초기의 문장 식 건배사가 시일이 지나면서 머리 문자인 이니셜에 막대한 의미를 담거나 각종 사연을 축약하는 모양새로 유행하니 외우기도 어렵고 잔을 들어 배운 건배사의 의미를 새기기조차 쉽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자 필자는 잠깐 웃게 만들며 머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보다는 평범하더라도 서술형 건배사가 차라리 더 낳겠다는 생각이다. 대다수의 건배사는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이미 잊어버리는 것들이 태반이라 단지 스쳐 지나가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 더 많다. 그 와중에 머리를 강하게 때리는 건배사가 하나 들어왔다. '우리가 남이가!' 경상도 식이니 충청도 표현으로는 '우리가 남인가!'라는 말이다. 이거야 말로 매우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나와 너로 성립되는데 결국 너와 나는 하나라는 뜻이 아닌가. 속 뜻이 우리는 하나로 똘똘 뭉치자는 말이거나 군소리 말고 가족처럼 여기고 일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라는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흔한 단어는 없을 성 싶다. 서양 사람이라면 '나의'로 시작할 말을 우리는 모두 '우리'라 표현한다. 그들의 나가 곧 우리이다. 내 마누라가 결코 공동 소유물이 아님에도 우리 마누라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우리가 바로 나요 내가 곧 우리인 셈이다. 요즘은 혼 밥이니 혼 술이라 하여 혼자 술 먹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지만 한국 사람은 술을 먹으러 가도 친구가 있어야 하고 일본 사람은 혼자도 잘 간다. 왜냐하면 한국은 인자(仁者)의 나라요, 일본은 지자(知者)의 나라라 그렇다. 흔히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데, 한국 사람은 산으로 여행가기를 좋아하고 일본 사람은 물가로 가는 경향에서 잘 드러난다. 인자는 우리를 강조하고 지자는 나를 강조한다. 나와 너가 우리로 잘 지내면 군자이며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거고 관계가 좋지 못하면 소인이고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한다. 공자가 구이(九夷)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 한 것도 결국 우리를 강조하여 군자적 삶을 사는 동방 사회에 대한 기대이다. 우리나라는 태초부터 홍익인간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것처럼 인본주의적이며 우리를 강조하는 건국이념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의 장점이요, 우리라는 인식을 도탑게 하는 배경이 된다. 우리가 존중받는 사회는 유교의 이상인 대동사회이다. '큰 도가 행하여지면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되어, 덕있는 사람이나 재능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고, 신의와 화목을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모나 자식만을 친애하지 않는다. 노인은 안락하게 여생을 마치게 되며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환과고독(鰥寡孤獨) 및 폐질자도 모두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땅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줍지 않고 여력이 있어도 자기만은 위하지 않으므로 간사한 모의가 생겨나지 않으며 도둑질이나 혼란한 일도 생기지 않아 문을 닫지 않고도 안심하고 생활하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예기 예운편) 결국 '우리가 남이가!'는 나와 네가 모두 행복한 유교의 이상이자 대동사회의 구현을 바람과 동시에 단군의 가르침인 홍익인간 정신이 배어든 말이라 하겠다. 단군의 자손인 우리 한민족은 평생 인자와 군자를 갈망했던 공자가 들어도 미쁠 말을 술자리에서 건배사로도 하고 있다.
전혀 예기치 않게 집에다가 내부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다. 계획하지 않던 일이니 준비가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전년부터 계획된 중국 곡부로의 유교문화 답사 일정과 새 단장에 따른 이사가 겹쳐서 짐 갈무리도 못하고 여행 가방만 간신히 싸서 다녀왔다. 여행 동안에 편안하지 못한 심사는 그렇다 치고 문제는 귀국 뒤의 생활이다. 집안의 짐이 모두 이삿짐센터에 가 있으니 신발은 외국 여행 때 신고 갔던 트레킹 화 한 벌이요, 옷도 여행 때 입을 요량으로 캐리어에 담아 두었던 것이 전부이다. 여행 복장이라 외출복은 고사하고 속옷까지 부족하다. 어디 그뿐인가. 공사하는 집에 들어서도 비누 한 개 수건 한 장이 없으니 손을 닦고 말리는 일까지 모든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평소 손 주변에 있기에 편하게 사용하던 물품이 이리 소중한지 몰랐다.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그 불편함이 자심하다. 리모델링할 동안에 공사하는 사람이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주인은 할 일이 없어도 그 사람들 일 마칠 때까지 주변에서 얼쩡거려야 한단다. 일의 진척과 성의를 체크하는 척 하라는 건데 문제는 내가 쉴 편한 장소가 없다는 거다. 내 집에 발 뻗을 곳이 없어 점심 후 피곤한 몸을 바로 집 앞에 주차된 차 안에 옹송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2월 말의 차가운 날씨도 문제려니와 바닥에 주욱 펴지 못하고 있어 그런지 피로가 가시지를 않는다. 이따금 따스한 목욕탕에 가서 다리를 쉬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궁여지책인데 작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라 절실한 목욕탕도 그림의 떡이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고대광실도 아니요 단사표음에 초가삼간일지라도 그저 편히 쉴 공간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내게 익숙했던 집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물에서 외연을 확대하자 내게 가장 익숙한 집사람이 보인다. 장학사 시절에 친구랑 거추장스러운 마누라를 서로 바꾸자는 농을 했더랬다. 그런데 잠시 후 이구동성으로 나온 말은 '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동안 교육 시킨 것이 너무 아까워!'였다. 그렇게 내 위주로 생각하던 사람인데 집안일을 상의하고 일의 두서를 정리하면서 정작 아내의 말에 들을 만한 말이 아주 많다. 우리 마누라가 이리 훌륭하던가· 가까이에 있어 진가를 모르고 지냈다. 이것도 익숙함의 병폐이리라. 어머님은 어떤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보내고 자식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느라 정작 본인의 행복을 모르고 평생을 지내오신 터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지금은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퇴계 선생의 존경을 받았던 농암 이현보 선생이 별당의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이라 지은 뜻이 노부의 늙어 감을 아쉬워하면서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이며,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돌아가실까 두려운 것을 희구지심(喜懼之心)이라 하는데 내 마음과 똑같다. 이제는 동생들도 자칫 나보다 먼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겨 슬며시 불안해 진다. 60년 넘게 가까이 지내왔는데 혹 먼저 가면 어쩐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한 줄을 이미 알았기에 옛 사람들은 걸을 때에도 개미집을 돌아가듯 발걸음을 조심하라 했나보다. (擇地而蹈 折旋蟻封) 미물까지 살펴주는 마음이 거경(居敬)의 단초가 아니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이리 고맙다. 내게 속한 것은 모두 연이 있어 있어주는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익숙함에 젖어 있어 고마운 줄도 몰랐다. 있어만 주면 고맙고 이에 더하여 무탈하게 있기만 해도 행복한 거다. 익숙한 것에 감사는 못할지언정 익숙하다고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사 시절에 중학교로 전근하고 관내 교육청 주관 모의고사를 본 결과 과목 성적이 하위로 나왔다. 직전 고등학교 때는 수능 모의고사에서 전국 3위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완전 망신이다. 상황을 분석해 보니 국, 영, 수 숙제가 워낙 많아 학생들이 국사를 집에서 복습할 시간이 전혀 없다. 하여 그 시간에 배운 것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도록 수업 내용을 요약한 아래에 단계별 문제를 제시하는 프린트 수업으로 전환하였다. 이 때문에 수업 준비물 만드느라 난로 주변 정담도 못 하게 되었다. 신학기 인사차 교무실에 들렀던 책방 사장에게 이 모습이 생경하였는지,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 무얼 그리 쓰고 계시나요·'라 묻기에 의도를 말하자 좋은 생각이라며 책으로 출판하잔다. 졸지에 지학사와 계약을 맺은 나의 교육 자료가 전국 서점에서 판매되었다. 이 결과 저자 직강을 들은 아이들 성적도 올라가고, 마니아용 고급 오디오가 재산목록 제1호로 거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그 오디오가 전체 수리를 받게 되었다. 수리를 하러 온 기사가 요즘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갑질을 당하는 세상이라며 탄식을 하는데 들을 만하다. 이 분은 나이 어려서 기술을 배웠고, 공부도 하여 공학박사 사장이라는데 지금은 교수가 학생 눈치 보느라 학점도 재량껏 못 준다며 말문을 연다. 군대에 음향 설비를 하러 갔는데 곁에서 부족한 일손을 거들어 주는 사람은 하사관이요,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이를 하는데 미안한 기색도 없더란다. 훈련소 내에 설치된 각개 전투장에는 높은 포복 훈련을 하는 병사들의 팔꿈치를 보호하고자 매트리스를 깔아 놓았고, 겨울 야외 훈련에는 귀하신 병사들이 추위를 타면 큰일 난다고 야외용 온풍기를 사방에 틀어놓아 따습게 훈련하도록 배려하고 있단다. 혹한기 훈련 때 덕지덕지 얼어붙은 황토 흙을 떼어냈던 기억을 가진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북한이 중이병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장하신 어머니 때문에 못 내려온다나. 바로 그 어머니들 입김 때문에 군인인지 체험 학습하는 학생인지 분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다. 6.25전쟁 때 서울 수복을 위한 시가전에서 미군들이 오물로 질퍽한 골목길에 엎드리지를 못하여 인명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있었다. 우리 대한민국 군인은 바위나 자갈이 뒤덮인 야지에서 어떻게 엎드리려나. 이러다 팔꿈치는 온전한데 머리가 날아가면 어쩐담. 일하다가 저녁이 되자 사장은 같이 온 기사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안절부절못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마자 기사는 한껏 벌려놓은 일을 마무리할 생각도 안 하고 즉시 연장을 챙겨 돌아가고 뒷마무리는 사장이 다 한다. 어리둥절하여 이유를 묻자 저 사람을 일 마칠 때까지 잡아두면 불평도 문제지만 초과근무 수당을 줘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이 없어 오히려 손해란다. '아랫사람은 결코 사장을 위하여 돈을 벌어주지 않습니다.'라 하니 사장님의 신세가 처량하다. 학생들은 교사의 지시를 들어주고 있고, 교장은 교사의 눈치 보느라 교육철학 펼칠 꿈도 못 꾸고, 기업가는 회사원 기세 키우다 기업 확장도 못하고 있단다. 대통령은 국민 눈치 보는 것도 벅찬데 이제는 북한의 기색까지 살피느라 바쁜데 과연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신뢰성 없는 지지율로 백성을 호도하면 누가 믿겠느냐며, 사고의 위험을 무시하고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에 섰다가 떨어진 사람에게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들이는 것도 요상 하단다. 오디오 고장 때문에 만난 서비스 센터 사장의 다양한 탄식을 듣다가 날이 저물었다. 초야의 백성이 나라 걱정을 하고 있으니 정말 큰일이다. 그런데 정치가라는 사람들은 이런 백성의 심정을 살피며 그래도 한치 앞은 내다보고 정쟁(政爭)을 하는 거겠지?
'이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4시 반경 번뜻 눈을 떴다. 오늘은 두 시간 반 거리의 학교로 선비 교육하는 날이라 차가 밀릴 까봐 아직 사위 어둑한데 차의 시동을 켠다. 운전대를 잡고 점차 밝아지는 하늘을 보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제껏 제일 기뻤던 때는 학회 제출용 논문에 "끝"자를 쓸 때였고, 그 다음이 밤새워 공부하다가 책상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창문 여명이 어스레 밝아지면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듯 흐뭇한 느낌에 다시 정신이 맑아졌더랬는데 그 감흥이 다시 새롭다. 일본 동경대 명예교수 오가와 하루히사는 노인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개체적 자아에서 관계적 자아로 나가고, 일자리를 찾는 것에서 철학을 찾는 것이라 했는데 노인은 심심해서 죽는다는 말에 대한 해법도 되겠다. 신 노년에게는 봉사할 거리, 전원생활, 지갑에 용돈을 더할 일, 취향에 맞는 일, 공부할 기회 마련 등의 요건이 필요하다니 모름지기 보람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리라. 이에 비추어 보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의 재능 봉사는 퇴계선생 공부로 마음 수양을 먼저 한 뒤에 학생 및 일반인에게 배운 바를 전수하므로 공부와 보람의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선비교육에 참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 서의 입소교육인데 1일부터 2박3일의 프로그램으로 숙식비가 소요되며 교육 효과가 크다. 또 하나는 지도위원이 직접 학교로 가는 '찾아가는 선비교육'이다. 모두 국비 지원이라 강사비 부담이 없으며, 찾아가는 선비 교육의 교육 경비는 학생 1인당 2천원이다. 학교에 일체의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수련원 본부의 지침이며, 매 시간 지도위원의 수업을 참관하는 것도 담임의 재량이다. 요즘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둥, 패륜 범죄와 거칠어가는 사회 풍조로 노약자가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니기도 어렵다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려면 온고이지신으로 예전 선비의 사람되기를 살피는 인성 교육 방법도 좋겠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는 퇴계 선생의 소망인 「소원선인다(所願善人多)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에 붙여 평생 자신을 성찰하며 배움과 행동의 일치를 보이신 선생의 학덕과 삶을 바탕으로 도덕 입국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교육을 안내할 경우에 관심으로 반색하는 교장의 얼굴은 빛나고 커 보이는데 시정 상인 대하듯 하거나 예산 타령 등 다른 핑계로 에둘러 자리를 모면할 때는 교장실만 휑하다. 좋은 교육 기회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학생들에게 전개할 방법을 모색해도 모자랄 판에 구실만 찾으면 고 정주영 회장이 5공 청문회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기업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간다!' 그렇다면 교육자라면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위하는 마음으로 제반 교육방법을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패기 넘쳤던 선생이 교장 의자에서는 생기도 없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을 어쩌다 보게 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같이 근무했던 인연과 지연을 살펴 선비교육에 솔선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속마음이고, 전하는 안내로 교육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을 보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은 겉마음인데 이리 방문하는 것이 혹 구차하게 보이려나· 과거 교육부의 학업성취도 평가가 전국적으로 시행될 때, 왜 충북이 계속 전국 1위를 하는지 알겠다며 진단 업체에서 전화가 왔었다. 답안지에 공백도 별로 없고, 포장 실수율도 적을 뿐더러 새로운 평가 도구가 개발되면 교장이 먼저 전화를 하여 소속 학교에 시행 가능성을 타진해 온단다. 타 시도에서는 불똥처럼 피하는 일을 충북에서는 적극적으로 시행한다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교육의 관건은 적극성이다. 학생들의 심금을 울려 장래의 이정표가 되게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리라 다짐하며 지도위원복 옷깃을 여미고 교문을 들어선다. 수업으로 학생들의 눈이 더 빛나면 좋겠다.
금년으로부터 450년 전인 1569년 음력 3월 4일에 69세의 퇴계선생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왕 선조로부터 귀향 허가를 받아냈다. 도산서원에서는 겨레의 참 스승이신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이 땅에서 스러져 가는 정신문화를 다시 세우고자 귀향길 재현행사를 개최하였다. 예전 귀향과 똑같은 일정으로 음력 3월 4일부터 17일 즉, 양력으로는 2019년 4월 9일부터 21일까지 장장 11박 12일 간 800리 길을 걷는 여정이다.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장안의 명사들이 분분이 한강변에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선생을 전송했다. 작별의 마당에 시를 빼 놓을 수는 없는 법이라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등 기라성같이 운집한 선비들 모두 솜씨를 뽐내어 한 수씩 읊어 드렸다. 이 가운데 으뜸으로 뽑혔으며 선생도 당신의 소회를 잘 읽었다 여긴 작품은 고담(孤潭)의 시(詩)이다.漢江送退溪先生(한강송퇴계선생-한강에서 퇴계 선생을 전송하며) 고담 이순인(李純仁:1543~1592) 한강물 유유히 밤낮없이 흐르는데(江水悠悠日夜流)외로운 돛단배는 길손 위해 머물러 주지를 않누나(孤帆不爲客行留)고향 산 가까울수록 남산은 점차 멀어지는데(家山漸近終南遠)시름 하나 없어지다가 또 다시 생겨나시리(也是無愁還有愁) 16세기의 선비들의 로망이 서당이나 정사를 지어 공부에 침잠하는 것이라. 선생 개인적으로야 초야에서 학문하는 삶이 즐거울 것이나 나라의 부름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산적한 현안을 등지고 가신다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조정에 근무하는 시름 하나가 없어지는 대신에 고향에 가시면 또 다른 시름이 생겨나겠다는 속 깊은 헤아림은 북송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중에,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그 백성들을 걱정하였고, 강호의 먼 곳에 머물면 그 임금을 근심하였으니. 이는 나아가서도 걱정이요, 물러나서도 걱정한 것이다."라는 대목에서도 보인다. 선생의 유언격인 자명(自銘)에도 이러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벼슬길에 나가서는 잘못도 많았고, 물러나서 갈무리는 곧게 하였네' 그러면서도 넘치는 임금의 은혜와 나라 걱정은 멈출 수 없다(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慙國恩). 귀향 노정을 호젓이 지나셨으므로 이번 재현행사는 15인 한정인원으로 추진했지만 내년에는 일반인도 자유롭게 참가하도록 확대한다니 많은 분들이 함께 걸으면 좋겠다. 우리 충청 지경에서는 당시 충청감사 송당 유홍과 청풍 군수 이지번이 선생을 연도에서 영접한 기록이 있어 충주문화회관과 청풍 관아 그리고 선생이 군수로 봉직했던 단양에서 학술행사로 기념을 했다. 필자는 불가피 걷고자 하는 열망을 내년으로 미루었지만, 화란춘성 만화방창(花爛春盛 萬化方暢) 봄 길에 따스한 햇살은 어깨에 이고, 살랑거리는 미풍은 온 몸에 입고 걸으며 생각하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선생을 사숙할 좋은 기회가 되리라. 귀향길 행사가 우리들이 자칫 간과하기 쉬운 가치 있는 삶을 살피는 자아 성찰 기회가 되고, 걸음으로써 신체 건강 증진과 더불어 정작 선생의 예던 길을 과정이자 목적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면 보람일 것이다. 가신 길을 따라 걸으며 삶의 활력 도모와 더불어 그 숭고한 정신적 가치에 동참하는 기회가 되라는 것이니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행사를 재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년 행사 안내는 퇴계 16세 종손 이근필 옹이 할아버지의 염원인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며 설립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홈페이지 팝업창에 올라 있다. 평생 겸양 근신하며 배움과 행함을 같이하신(學行一如) 선생의 학덕을 생각하면서 길을 따라 걷는 후학들이 늘어선다면 장차 산티아고 순례 길에 비견되는 '길 위의 길'이 되지 않을까. 그리되면 아름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