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근동에서 보기 드문 기와집이라 길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느라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단다. 안방에는 벽장이 있어 이불과 대 고리짝 두어 개가 놓였는데 이따금 숨바꼭질 때 올라갔다가도 그 고리짝 속이 무서워 화들짝 내려오곤 했었다. 오른 켠 앞쪽으로는 어머님 화장 그릇이 있고, 뒤로는 조청이나 약식 같은 먹거리가 이따금 숨겨졌지만 귀신같은 동생에게 그 정도야 낭중지물에 진배없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는 주인공 왕룽(王龍)의 부인 아란(阿藍)이 어릴 때의 경험으로 부자의 숨겨진 벽장을 찾아내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어 큰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전개된다. 곡부의 孔家莊은 서책을 비밀 벽장에 숨겨 분서갱유를 피했다 하니 이렇듯 부자들의 벽장은 보물을 비밀스레 갈무리하는 금고이다. 우리 벽장 겸 다락은 이불 올리기에 편하도록 4쪽 미닫이문을 달았으니 비밀스러운 금고와는 거리가 먼데도 보물이 담긴 벽장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아줌마가 우리 부모님에게 병구(병규라는 발음이 어려워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불렀다)가 유별나다고 말했다. 다른 애들이 구들을 덮은 짚자리 위에서 뛰노느라 흙먼지 펑펑 날리는 북새통 속에서도 속표지가 너덜너덜한 『영문학 개론』을 붙들고 있더라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던 때였나 본데 아줌마 눈에는 그게 신기했나 보다. 그 후 벽장 속 내 손이 갈만한 곳에 『세종대왕』과 『을지문덕 장군』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만 나오신 아버님이 큰아들을 위해 장날 쌀과 바꿔 사 주신 선물이다. 당연히 금세 독파해 버렸고 이어서 아버님이 읽고 계시는 와룡생의 무협지랑 『삼국지』 등을 몰래 먼저 읽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남폿불에 비춰 읽느라 아침이면 그을음 때문에 세수하며 코를 풀면 새까만 코가 나왔었다. 중학교 가기 전에 삼국지의 등장인물을 다 외웠고 일리아드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었더니 2학년 사회 교재에 나오는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 이름 외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동서양 위인에 관한 관심과 더불어 책을 가까이하게 된 계기는 오로지 아버님의 고단수 마음 쓰심 덕분이다. 아무리 내가 책을 좋아한다손 '이 책 비싸게 사 왔으니 꼭 읽어 봐라!'라거나 '이 책 다 읽고 독후감을 말해 보라' 했으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런 말씀 없이 벽장 속에 책을 슬며시 넣어 지적 호기심을 유발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교육 방법이다. 요즘 학생들은 위인에 관한 관심이 시들하여 염려된다. 학생들에게 위인과 스타를 구분해 보라 하니 위인은 위대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고 스타는 유명하거나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명쾌하게 답한다. 그런데 위인은 몇 명이나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한다. 대개의 학생이 스타의 이름만큼 위인을 모르며 설령 위인을 알아도 피상적이요, 그분들의 행적을 살펴 따르려 하지도 않는다. 과거를 거울로 현재를 살피고 위인을 통해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거늘 대부분 이름값에 부족한 연예인에 견주니 못생긴 사람이요, 뚱뚱한 여자로만 자기를 비교하고 있다. 5천 년 역사를 이끌어 오는 동안에 인구 많은 중국에 필적할 만큼 현인들이 많음에도 이순신 장군과 직지처럼 오히려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를 다른 나라에서 배우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가을 들어 도산서원 前現 재유사 중 뜻있는 몇 간이 모여 조선 중묘조 충재 권벌 선생이 소매 속에 항상 넣어 다니셨던 『近思錄』을 공부하고 있다. 동학 서생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므로 zoom을 통해 공부하지만, 그 맛이 진하고 쏠쏠하긴 매한가지이다. 마음에 새길만 한 책을 가까이함 만도 좋은데 나이 들어도 책 읽는 즐거움이 진진하여 더 좋다. 이는 벽장 속에 보물을 넣어 인생의 즐거움을 베풀어 주신 先親의 은혜라 새삼 감사를 드리게 된다.
충남 예산의 ㅅ고교에서 선비교육을 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은 교육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는 입교 과정과 학교의 요청으로 지도위원들이 학교로 가는 '찾아가는 선비체험'을 한다. 외부 인사를 초청하는 교장은 담대하다고 하며, 학생들의 수강 자세 때문에 부르지 못한다는데 더욱 고등학생들이다. 그래서 아침 준비회의에서는 지도위원들이 단단한 각오로 최상의 교육 효과를 만들자고 다짐도 했다. 1교시 수업 시작 5분 전에 컴퓨터 준비를 하러 들어가는데 의외로 학생들이 밝게 맞이한다. 시작종이 울리자 반장의 구령에 맞춘 학생들의 인사말에 귀를 의심했다. '효도하겠습니다!' 21세기 교실에서 이런 인사말을 들을 줄은 몰라 잘못 들었나 했는데 맞다. 어떻게 이런 인사를 마련했는가 묻자 학급회의의 결정 사항이란다. 위국헌신으로 견위수명의 모범을 보인 매헌 윤봉길 의사의 고향이라서? 아님 인근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로 의좋은 형제가 있던 고장이라서?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칭찬을 먼저 해야 한다.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라는 인류 불후의 명저를 낸 영국의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박사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86세 때에 임덕규 씨의 방문을 받았다. 한국의 효와 경로사상 그리고 가족제도 등을 설명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의 효 사상은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사상이며, 만약 지구가 망해 인류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면 꼭 가지고 가야 할 문화가 한국의 효이다'라 했는데 여러분의 방금 인사말은 토인비 박사도 기뻐할 말이요, 우리 시대에 의미가 약해져가는 효사상과 문화를 지키려는 결심이 정말 대견하다 하니 학생들 표정이 환해진다. 일부 고등학생들이 배우려는 열의도 지적 호기심도 없어 일부러 엎드려 자거나 아예 대놓고 다른 짓도 하는데 이 학생들은 학급 전체가 바른 자세로 끝까지 경청한다. 50분을 황홀하게 교육했더니 마침 종소리가 순식간에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장이 학급 전체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더니 공수로 '잘 배웠습니다!'라 말해 또 놀랐다. 어디 그 뿐인가! 학생들 몇 간은 가까이 와서는 오늘 수업 정말 잘 들었다며 공손히 인사도 한다. 참으로 훌륭한 촌놈들이다. 점심 후 교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야 대충 분위기를 알겠다. 교무부장에서 교장으로 자체 승진한 교장 선생님은 고향인 청양에 계신 노모를 주말이면 찾아뵙는 효자다. 지리산 청학동에 보내어 학생들에게 예절 교육을 받게 할 정도로 관심이 있는데 교장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쳤단다.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검색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프로그램을 찾고는 3년 전에 입소교육을 했는데 학생들의 반응과 교육 효과가 좋아 흐뭇했다나. 코로나 때문에 대안으로 지도위원들을 모셨지만 시절 좋아지면 반드시 입소 체험 교육을 받을 계획이라 하니 더 훌륭해 보인다. 3년 전 1학년 학생들의 입소 교육 때 야간생활지도차 로비에 있다가 새벽까지 선생님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었던 기억이 찻잔에 아롱져 피어오른다. 최근에 100세 넘은 어른의 정부 비판에 새파랗게 젊은 정모가 '이래서 오래 사는 게 위험'하다는 무례한 말을 해 지식만 배운 결과 경험으로 비롯되는 지혜가 부족하면 저런 말을 한다고 여기던 차였다. 교양 있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 나서면 연장자를 공경함을(入則孝 出則悌-논어 학이편) 행동으로 실천하던 사회 분위기요, 퇴계선생도 長幼禮節로 사회의 근간을 삼았거늘. 저리 인성을 지식으로만 배운 사람에, 어른 때리는 영상을 올린 후레자식에, 병든 아비를 생으로 굶겨 죽이는 패륜아도 있는데 ㅅ 고교 선비교육 덕분에 희망을 얻었다. 조상께 추원보본(追遠報本 : 조상의 덕을 추모해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아 은혜를 갚음)의 예를 드리는 한가위 명절을 지내며 이런 학생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유성종 전 교육감님은 30대 초반에 처음 뵈었다. 교사에게 교장은 저울 위의 대상이요, 교육감은 강 건너 사람인데 박약회 충북지회 모임으로 가까이 뵈면서 알면 알수록 존경심이 우러나는 어른이다. 교육감 퇴임 후 문교부 편수실장부터 꽃동네 총장 등을 역임하고는, 분에 넘치고 격에 부족하다 극구 고사했음에도 4년간 도산서원 상유사가 되셨다. 원장 재임 시 주위에 선비의 표양을 모범으로 보이며 향사의 초헌관은 유림의 선망이라 두루 기회를 주려 양보했지만 세배격인 정알은 꼭 모셨단다. 원장을 마치고도 매년 정알을 드렸는데 코로나와 9순이 훌쩍 넘어 신병으로 작년에 궐한 것을 심히 안타까워 하셨다. 금년 초에 강행하려다 드디어 8월 30일에 노선비님의 알묘를 이루게 되었다. 아침 9시에 가급적 교통편이 원활하고 노면 상태가 좋아 노인께 피로가 덜할 괴산 문경으로 차를 몰았다. 4년 전 수련원 제2원사 준공식에 모시고 갈 때와 비교하면 기억력은 여전한데 소변 때문에 두어 번 휴게소에 들러야 하는 것이 변함이다. 그래도 노구에 장시간 차량 이동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2시에 온혜리 화로 식당에 도착하니 원장 재직 시 같이 일했던 이동구 이태원 전·현 별유사와 이동신 별유사 및 안동문화원 이동수 원장 그리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자 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겸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선생의 16세 종손 이근필 옹이 평생 지인 중 진정한 선비라 평하는 두 분 전·현 원장님의 좌담은 곁에서 뵈어도 향기롭고 품격이 높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이 주위의 은혜 덕인데 요즘 정치인들은 자기가 잘 나서 그 자리에 있다고 여기므로 감사는 더더욱 모른다고 함께 탄식한다. 이어서 관리사무소에서 갓과 도포로 환복 후 알묘를 드렸다. 상덕사 선생 위패 전에 부복하여 여느 때보다 한참 머리를 조아리는 내심은 어떠하실꼬. 예전 별유사 두 분도 봉향 봉로로 모시는데 엄숙한 공경심이 묻어난다. 알묘를 마치고 종택에 도착하니 종손과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손이며 선비문화수련원 김종길 원장님이 뜰로 내려와 맞는 모습이 버선발로 달려 나오는 듯하다. 종손어른이 마당에서 교육감의 두 손을 꼬옥 잡으며 반가워하시는 눈매가 막내 따님 바라볼 때처럼 정 깊어 보인다. 마루에 올라 역시 큰절로 인사를 나누고 필담으로 그간 쌓인 정을 나누는데 두 분이 서로를 아끼며 대하시는 온기가 추월한수정 대청을 꽉 채운다. 오랜 시간 달려 이룬 만남이요, 차종손의 공주사대 교수 된 자랑도 들으며 자칫 길게 이어질 자리를 잦은 접빈객으로 기력 쇠하실까봐 20여분 남짓 머무르고는 홀연히 일어섰다. 돌아오며 뵈니 미루던 숙제를 마친 학생처럼 홀가분한 얼굴인데 종손께서 손주를 봤을 때 가히 손주바보였다며 오늘 뵈니 너무 마르셨다고 걱정이다. 특별히 도포에 다리미하고 정갈히 나온 별유사들의 따스한 마음도 다시 살핀다. 운전하는 사람 무료하지 않도록 과거 일과 요즘 생각을 말씀하시는데 연교육감 비서때의 일화와 육교육감 시절 장학사 눈으로 본 교육청 얘기도 듣노라니 어느 덧 청주이다. 도합 여섯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많은 말씀을 들었으되 깊은 삶의 경륜을 살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진작가 이동춘이 2010년 9월 추계 향사 후 선생 묘소에 예를 올리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훠이훠이 내려가는 유원장님 뒷모습을 사진기로 잡았다. 사람의 앞 표정에는 꾸밈이 있을 지언정 뒷모습은 정직하다는 캡션으로 작가가 제일 아껴서 유럽과 미국 전시회의 표지 사진으로 날렸는데, 후학인 나도 뒷모습이 아름답게 비쳐지면 좋겠다. 내년에도 건강만 되면 정알을 드리고 싶다 시매 연초에 다시 모시겠노라며 교육감님이 종손 어른께 인사한 옥체 보중하시란 말씀을 따라서 드렸다. 알묘 일정을 기록 차 사진에 담았으되 정작 의관 정제했을 때 서원에서 모시고 찍지 못한 것은 오늘의 종일 알자(謁者)에게 옥에 티!
논어 학이편의 學而時習之면 不亦悅乎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에서 습은 鳥數飛(배우기를 마치 새가 자주 나는 것과 같이 한다)라. 習을 破字해도 같은 의미이다. 깃털 羽의 아래에 흴 白은 원래 날 日자로 새가 매일 깃을 나부끼듯 공부를 매일같이 하라는 것이다. 교육에 종사하며 학습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 다음 단락인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不·이면 不亦君子乎)에 더 눈이 간다. 나이가 들수록 자리에 책임이 들수록 자존감은 높아지는 반면에 내가 아는 만큼 남들이 나를 몰라주는 경우가 허다해 그런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 정작 자리에 오른 뒤에 기대에 부응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주변의 친구를 보라 하는데 친구처럼 다양한 표현도 없다. 물과 고기의 관계 같은 수어지교(水魚之交)-군신간의 관계를 논할 때도 쓰인다. 서로 잘 통하는 막역지우(莫逆之友), 귀하고 향기로운 금란지교(金蘭之交)나 지란지교(芝蘭之交), 관중과 포숙아 같은 관포지교(管鮑之交)에 어릴 적부터 같이 논 죽마고우(竹馬故友)와 총각지교(總角之交)에 친구대신 목을 내 놓을 지경인 문경지교(刎頸之交)도 있다. 신분을 벗어난 우정이면 포의지교(布衣之交)요 나이를 초월하면 망년지교(忘年之交)다. 인간사가 복잡한 만큼이나 친구에 대한 표현도 많다. 碧梧 이문량(1498~1581)은 농암 이현보의 차남이며 퇴계선생의 자별한 친구로 회자된다. 선생이 서울로 벼슬하러 갈 때 미완성인 도산서당 건립을 부탁하고 갈 정도로 믿은 친구이며, 말년에 청량산 유람을 같이 하려다 늦어 '나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라는 절창을 남기게 한 분이다. 선생의 부음에 지은 벽오의 만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뭉클해진다. 사람들은 면식을 구하지만 (人皆求識面) 나는 다행히 지기가 되었네 (我幸爲知己) 사람들은 이웃에라도 살기를 원하는데 (人皆願卜隣) 나는 다행히 인리로 살고 있네 (我幸居仁里) 어릴 때부터 어울렸으니 (相隨自妙齡) 간담도 서로 환히 보네 (肝膽兩相視)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하였고 (良辰與美景) 숲속에서 즐거움을 다 하였네 (林園窮樂事) 내 생이 헛되지 않았음은 (此生不虛過) 그대를 만났음이라 (餘波之所被) 근래에는 서로 늙어 (近來各衰暮) 생각만 할 뿐 만나기는 어려웠네 (想思懶相値) 인생은 본디 풀잎 같지만 (人生本草草) 어찌 이리 갑자기 가는고 (豈意遽至此) 규벽이 홀연히 광채를 잃고 (圭璧忽淪精) 남천이 맑은 기운을 거두었네 (南天收淑氣) (중략) 저승과 이승이 하룻밤 격하였으니 (幽明隔一夜) 평생 약속을 저버렸구나 (孤負平生志) 양담의 무한히 흐르는 눈물을 (羊曇無限淚) 어찌 한두 줄 글로 나타내리오 (聊復寫一二) 이별의 시간이 길다 하지 마소 (莫謂別多時) 내 나이 일흔 넷이라오 (吾年七十四) 노래 참 잘 하는 이선희의 '그 중에 그대를 만나'라는 제목이 연상되는 만사이다. 비록 지금은 유와 명으로 갈라질지라도 금방 만나게 될 거라고, 친구의 靈前에 눈물을 삼키며 보내는 노선비의 이별사는 감동 그 자체이다. 어찌 이리 친할 수 있을까. 천만매린(千萬買隣)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하늘이 낸 지기지우(知己之友)다. 그러면 나의 지우(知友)는 누굴까 해 그동안 연을 잇고 살아온 사람들을 되짚어 본다. 인연과 관계에 복잡다단한 평가로 살피곤 슬며시 소심해 지는데 산길에서 뒤 따라오는 아내를 보니 지우가 파랑새처럼 가까이에 있구나. 40여 년 곁에서 살았으므로 버릇 등 숨기고 싶은 내면세계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친구다, 더불어 직간접적으로 지금까지 주변에 있는 친구가 모두 지우이렷다. 심성 부족하고 수양 깊지 못한 나를 확연히 알면서도 멀리하지 않으니 이 또한 지우가 아니겠는가. 공기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친구 덕에 살면서도 정작 친구의 필요성을 모르고 사는 요즈음 벽오 선생의 만사에 비춰 지기지우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공군사관학교 체력단련장에서 친구들과 체력 단련을 할 때였다. 로컬룰에 의거해 마지막 9번 홀을 드라이버 대신에 우드로 티샷을 하는데 스윙을 하는 순간 따악 하는 금속 마찰음이 심상치 않다. 매트 고정용 금속 테두리 부근에 티를 꽂은 때문인지 금속판을 두드려 볼은 발로 차면 나갈 거리에 쪼루로 떨어졌는데 손에 익은 4번 우드가 화들짝 염려된다. 급히 바닥면과 모서리를 살펴 깨지거나 흠집이 났는지를 살피려니 심사도 산란하다. 교분이 그다지 깊지 않은 사람은 채에 문제없는지 근심스레 물어오는데 정작 제일 친한 친구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 하더니…….'하며 낄낄거리고만 있다. 염려도 부족한데 좋은 말도 아닌 것을 두 번씩이나 낄낄대니 감춘 속마음이 보여 속이 뒤집힌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오래 사귀어야 인심이 보인다더니(路遠知馬力 日久見人心) 잘못 불렀다. 이참에 같이 함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골프에서 4명이 한 팀이 돼 같이 운동하는 사람을 동반자라고 한다. 동반은 문자 그대로 일을 하거나 길을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함께 짝하는 사람이다. 워낙 예민한 운동이라 동반자 변인이 그날 스코어에 가장 크게 작용하므로 매너를 최우선으로 요구하며 가급적 실력이 비슷하거나 더 좋고 품성도 좋은 사람을 원하게 된다. 같이 운동하는 사람을 존중하며 배려함은 물론이요, 혹 민폐를 끼치거나 심기를 거슬리게 되면 다음부터는 그 사람과 같이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만다. 기피 동반자의 유형으로는, 초대를 받을 줄만 알며 라운딩 동안 내내 툴툴거리거나 동반자의 문제점을 시시콜콜 거론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 동반자. 내내 힘든 기색으로 따라다녀 괜시리 불렀다고 후회하게 하는 나약한 동반자에, 내기 돈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고 가거나 매 샷마다 볼을 좋은 위치로 슬그머니 옮기는 비양심 동반자. 골프는 뒷전이요 대화에 올인 하는 것도 모자라 이런 데 와서 막걸리 한잔은 반드시 걸쳐야 한다 하고는 술 때문에 볼이 안 맞는다고 투덜대면 진상 동반자요, 실수하고 그린에 올라온 사람에게 '드라이버 잘 친 사람이나 못 친 사람이나 똑같이 보기네.' 라고 의뭉한 말을 하면 밉상 동반자다. 그래서 골프장에서는 컨시드 외에는 모두 구찌라. 뜻을 같이 하면 동지(同志)이고 일을 같이 하면 동무이다. 동무는 조선시대 보부상들이 사용했던 말인데 동무가 병들면 구해주고 죽으면 장사까지 치러준다. 산적들도 산채가 불타는 후환이 두려워 감히 보부상은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동지와 동무에 더한 것이 동반(同伴)으로 여기에는 뜻이 맞고 일이 맞아 함께 하는 친구만큼이나 엄격한 잣대가 있다. 친구는 어짐과 덕성을 보완해 줄 수 있어야 한다(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 그러므로 상대를 존중함이 우선이요 배려하는 태도는 응당 기본이다. 가급적 베푸는 마음으로 대하면 따스한 심성이 묻어나서 대하기 편하다.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며 식견과 교양이 풍부해 5시간 동안 대화 나눈 보람을 느끼면 더 좋다. 동반의 기준에 부응 못하면 배웠건 못 배웠건 운동 중 싸움까지 할 정도로 본질 대신 가식만 남으니 본말이 주도된 꼴이다. 같이 운동하는 사람의 멋진 샷에는 진심으로 굿 샷이라 칭찬을 하고 실수가 나오는 문제점을 매의 눈으로 살핀 뒤 원포인트로 콕 짚어 주며 여유 시간에 옆 사람 집 나간 볼도 잘 찾아주고, 훌륭한 스코어를 내면 성실한 연습 결과라고 축하해 주는 따스한 마음이 보기 좋다. 어디 골프뿐이겠나. 인생의 동반자는 반려요, 도를 함께 닦으면 도반이며 같이 동반하면 친구가 된다. 덕 깊은 사람은 외롭지 않듯 주변을 감화시키는 동반자라면 훌륭하겠다. 우선 초대를 많이 받도록 지력 체력 실력 등 다방면에서 수양과 단련이 필요하니 훌륭한 동반자 되기가 이리 어렵다.
집의 뜰에 잔디가 자라고 있다. 마당 바위에 앉아 고즈넉이 잔디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빗물을 타고 흘러들어 왔는지 바람결에 날려들었는지 다른 풀들이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마당을 점령해 들어간다. 처음에 잔디 사이에서 기미를 보일 때는 아내가 잠깐만 뽑아도 사그라졌는데 작년 장마 이후론 거개가 잡풀이라 이제는 오히려 잔디가 밀려나는 추세다. 보다 못해 금년 초 바람 부는 추운 날 육거리 약초 상에 가서 잔디에는 해를 주지 않고 잡초만 제거하는 효능 좋은 분말 제재를 사왔다. 유독성이라 약재상 주인이 시킨 대로 이른 봄날 바람 약한 날을 잡아 만에 하나 위험 없도록 바람을 등지고 마당에 고루 약을 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잡풀이 심한 곳에는 조금 더 많이 그리고 잔디 잘 있는 곳에는 아주 살짝 뿌리곤 날씨가 화창해지면 파랗게 일어날 잔디를 고대했다. 그런데 아뿔싸 기다리던 4월이 한참 지났는데 잡초는 물론이고 기다리는 잔디까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이윽고 올라온 잔디를 보니 어렸을 적 보았던 기계총 앓던 친구 머리처럼 듬성듬성하다. 약을 잘못 뿌렸나본데 천상 올해에는 제초기 한번 돌릴 기회도 없겠다. 자란 곳은 무성하고 잔디가 없는 곳은 맨 땅이라 마당을 보기만 해도 심란한데 여기에다 집 앞에 있는 10평 남짓한 밭까지 풀이 무성하다. 풀 나올까봐 비닐로 고랑까지 덮었거늘 놀라운 생명력으로 비닐 사이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풀의 집요함 때문이다. 내가 무슨 생태학자도 아니고 잡초까지 사랑하는 사해동포주의자도 아니라, 단지 어렸을 적 하교하자마자 밭으로 달려가야 했던 지겨운 기억 때문인지 도대체 밭에 눈이 안 간 덕분도 있다. 주말 농장을 하는 친구는 작물의 안부가 궁금해 거의 매일 신나는 기분으로 간다는데 오가며 눈 한번 주고 지났더니 이제 밭이 잡초를 내세워 그간 무심했던 태도에 저항하는 것 같다. 밭과 논의 이삭은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을 교육에 연관해 생각하고 살았으되 정작 내 밭에 실천 안했으니 면목이 있겠는가. 그래도 처음에는 밭에 이것저것 오밀조밀 심어보기도 했건만 작물이 익으면 지나는 할머니들이 망태기에 담아가기 일쑤요, 자동차 통행량이 워낙 많기에 중금속 오염을 염려해 고구마를 심었더니 고랑 덮은 비닐 사이를 비집고 나온 억센 풀이 고구마 잎을 덮고 있다. 대문 안을 봐도 잡초요 대문 밖을 보아도 잡초라 이야말로 草野가 되었다. 이리 빌어먹게 만들어 버렸으니 진정 愚生이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행동에 책임을 질 줄도 모르고 소위 값도 못하고 산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를 모르기(人不學이면 不知道) 때문이다. 공부를 한 사람이 겸사로 우생이라는 경우도 있고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 우생이 이렇다 엇더하리.'로 퇴계선생의 도산십이곡 중 첫 곡 가사도 있으나 나는 문자 그대로 우생이다. 요즘 낮에는 운동하고 밤에는 독서하는 생활습관이 들고 있으니 그래도 무늬는 서생에 들지 않을까. 그러면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草野書生은 되겠다. 초야에 묻혀 책을 가까이 함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우선 생활이 안락하여 근심거리가 없어야겠고, 급하거나 아쉬운 일도 없이 마음이 편해야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다. 여기에 건강은 물론 최우선이다. 건강해야 야간 늦게까지 책을 열 수 있으며 독서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어쨌거나 책은 가까이 하고 있으므로 이 정도면 書屋 지경에 버금하겠다 여겨, 뜰과 밭에 난 무성한 풀을 보면서 초야우생에서 초야서생을 스스로 바래본다. 선생처럼 더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하여 가슴에 시원함이 가득한 경지라면 초야현자(草野賢者)도 되겠지만, 본디 자질이 어리석은 나에게는 멀디 먼 이야기라 장마 그치면 우선 잔디를 비집고 나온 저 풀이나 뽑으리라. 그래도 초야서생이면 좋겠다.
몇 년 전에 가족 여행 차 하와이 빅 아일랜드 소재 펜션에 묵은 적이 있었다. 늦게 숙소에 도착한 때문에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마당 앞이 골프장이다. 테라스 밖의 골프 치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클럽 렌탈을 몰랐다. 새파란 하늘과 검은 현무암 지대에 꾸며진 멋진 페어웨이를 밟지 못하는 아쉬움만 남겼더랬다. 그런데 2년 후 오하우를 다시 가게 돼 이번에는 채비를 해 진주만 쪽으로 티샷도 해 보고 운동 중에 쌍무지개를 보는 호사도 누렸다. 그린피가 할인되는 트와일라잇 타임을 노리다가 가성비 좋은 곳을 찾았다. 알라와이(Ala wai golf course)는 숙소인 와이키키 호텔에서 5분 거리요 핸드 카트도 가능한 공립 골프장이다. 새벽 접수 후 팀이 구성됐는데 같이 도는 사람은 하와이 주민으로 30대 나이에 장신에다 근육질 몸매답게 드라이버 비거리가 300m를 넘나든다. 게다가 코스에 맞춰 중간에 샤프트도 교체하며 라운딩 하니 그야말로 완전 고수다. 이 친구가 휴식 시간에 내게 '혹시 군인 출신이신가요?'라 묻는다. 곁에 있던 아내가 웃으며 아니라고 teacher였다 하며 이유를 물으니 자세가 곧고 걸음걸이가 반듯하다나. 요즘 우리나라 군대를 당나라 군대라고 걱정하게 만드는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지만 모름지기 군인은 바르고 엄정한 것이 기본이요 상식이다. 군인들의 엄격한 군기와 전투 의욕을 사기라 하는데 본디 의미는 선비들의 치열한 자기 수양 태도와 꿋꿋한 기개를 의미했다. 선비(士)는 원래 중국 사서에 처음 등장하며 주나라에서는 군대 가고 싶은 소원을 못 이루자 목을 매 자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명예로운 신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비가 무리 지으면 사림(士林)이요 붕당이며, 사림의 공론이 곧 사론(士論)으로 지금의 당론이라기보다는 국가 원로들의 중론에 比等하겠다. 사론의 바탕은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면 정치에 나아가 군주를 돕고, 하늘을 거스르면 역성혁명을 일으키거나 아예 물러나 초야에 은거하는 것이다. 혹 사론이 군주의 견해와 정면 대치되면 많은 선비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데 기묘사화(士禍)부터 을사사화가 그 예이다. 선비는 처신을 바르게 하는 데 정성을 들인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처신을 똑 바로 하고자 전전긍긍했다. 「명당실기」에 의하면 주자는 자양서당 별실의 좌우 두 방을 각각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로 명명한 뒤에 경재잠과 의재잠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했는데 조선 선비들은 경재잠을 가까이 했다. 퇴계 선생도 도산서원 완락재 비름박에 숙흥야매잠과 경재잠을 붓으로 적고는 매일 외워 처신의 기본으로 삼았다 한다. 선생의 가르침대로 아침마다 두 편의 잠명을 수년간 외워서인가, 제자 월천과 나눈 편지묶음인 「사문수간」을 하와이에서 감동하며 읽은 탓인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자세가 바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세와 더불어 마음이 바라야 함은 물론이요, 내가 마음을 바르게 해야 남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요즘 내로남불이나 아시타비는 사람들이 자기를 먼저 바르게 하지 않고 남의 바름을 판단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 몸은 어떨까.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뼈로 신생아는 360여 개에서 성인의 경우 206개인데 이 뼈를 지탱해 주는 것은 근육이다. 근육은 나이 들수록 가늘어져 결국 근력이 약화되므로 노화와 더불어 자세가 구부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근력 운동을 하면 노화도 늦추고 자세도 바로잡을 수 있다 하니 아무래도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한 덕도 보는 듯하다. 마음과 자세는 상호 연계돼 있다.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를 취한 학생이 비뚤게 행동하는 경우를 못 봤다. 내가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세도 바르게 가지면 모두가 바른 세상이요, 고조선처럼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세상이 되겠지.
환경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만큼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마셨던 물은 아스라한 기억 속에 있고, 명암지와 부강 등 과거 유명했던 약수터 대부분이 음용불가 판정을 받아 잡초만 무성해졌다. 이런 와중에도 어린이 대공원 부근, 장구봉 그리고 보살사는 청주 시민들이 여전히 안심하고 찾는 물터이다. 걷는 날이면 이따금 보살사에 들러 약수 한 모금을 마시는데 약수터 주변 담벼락 고사릿과 식물과 무성한 담쟁이 넝쿨로 고란사 비슷한 분위기로 아늑하다. 기왕 가는 김이라 배낭에 페트 병 3개로 5.8ℓ의 물을 지고 온다. 덕분에 집안 한구석에서 먼지만 쓰고 있던 방곡 묵전요 도자기 물통이 드디어 앞으로 나섰다. 보살사 물로 우린 차 맛이 정수기 물보다 훨씬 좋다는 아내의 평은 땀 흘려 등짐 져 온 보람이다. 차는 단물로 우려야 맛을 잘 낼 수 있다. 단양 있을 때 그 지역에서 물맛이 제일 좋다고 소문난 냉천 물을 특별히 준비하여 다회를 열었다. 마침 중국에서 놀러 온 북경도사가 팽주로 맛을 보고는 물이 세다고 한다. 석회암지대에서 용출되는 물 특성을 금방 살피니 역시 고수답다. 우리나라 물맛으로 최고는 충북 달천이요, 한강의 우통수가 두 번째 속리산 삼타수가 세 번째라나. 물이 달아 甘川(단 내)라고도 불렸거늘 '달래나 보지' 하는 설화로 達川이 되었단다. 경북 예천도 醴(단술 례)자에서 물이 달다는 뜻도 있는데 茶人의 지존인 다산 선생과 초의 선사가 우렸을 다산초당 물맛은 어떨까. 단물은 감로수로 관세음보살의 정병에도 담기거늘 아무튼 차 우리는 물은 부드러워야 제 격이다. 보살사 약수터에는 현수막이 여러 장 걸려 있다. 주지 스님이 무량 발복하라며 물을 제공하지만 생각 없는 사람은 데리고 온 개에게도 사람 떠 마시는 바가지로 물을 먹이고, 집에서 씻고 와야 할 물통과 꼭지까지 아까운 약수로 헹구지를 않나, 페트병 수십 개에 물을 받아가므로 정작 사찰의 용수마저 부족하게 되나보다. 작년까지는 물이 콸콸 나왔는데 요즘은 쫄쫄거려서 물 조금 받는데도 겨울에는 두어 시간이 훌쩍 넘고, 물 풍성한 여름에도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 걸음에 몰두하면 발이 앞으로 가는지 산길이 다가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해 걷다가도 목탁소리 들리며 절이 가까워지면 물가에 사람 없기를 바라며 부지불식간 걸음이 급해진다. 걸으려 산에 가는 건지 물 뜨려 가는 것인지도 헷갈리며 足前小貪하고 있다. 물 받는 사람들 모양도 가지가지이다. 어떤 아줌마는 휴대폰으로 허모의 강연을 크게 틀고는 이 사람 말이 맞지 않냐 며 생면부지 옆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고, 어떤 사람은 튼실한 딸까지 둘 데려와 욕심껏 물을 한 차 가득 싣다가 기다리다 못한 성질 급한 남자랑 다툼도 한다. 지난 크루즈 여행 때 팔순 할머니가 차 한 잔 놓고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더니 물터 사람들 구경도 심심치는 않다. 다만 기다림이 문제다. 비탈길은 맨몸에도 숨이 턱에 닿도록 하지만 저녁 찻자리에 쓸 요량이요 더불어 운동도 되므로 즐겁게 물짐을 지고 오른다. 줄 서서 1시간 여 기다려 물을 받고, 다시 한 시간 정도 걸어와서 물통에 담겨진 물은 8시간 숙성 후 저녁에야 포트에서 끓여진다. 하루 중 고즈넉하고 편한 두 시간 찻물의 여정조차 이처럼 기나긴 기다림의 연속이다. 흘러가는 물도 떠 줘야 공덕이 된다는데 지하수를 퍼 올리느라 보살사에서는 전기세가 부담스러울 만큼 모터를 돌리는 공덕을 대중들이 고맙게 여기려나. 절 안에서는 물 펑펑 쓰면서 외부용 수도꼭지는 묶었다고 불평하고, 주지가 법주사 스님으로 바뀌곤 사찰 인심도 변했다며 초파일 연등도 이제 끝이라고도 한다. 散花功德으로 淸水報施하는 보살사의 마음을 살핀다면 저렇게 여러 장 현수막으로 고충을 토로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을 절제하여 받으면 현수막도 줄어들 테고 물맛도 더 부드러워지겠거니.
부여에 사는 지인을 몇 달 만에 만났는데 피부가 윤택하고 자세도 건실해졌다. 그 친구는 몇 년 전에 말기 암 수술 후 항암치료 받느라 죽을 고생을 한 때문에 외관으로도 건강해 보이지 않았는데 그간에 몰라보게 변했다. 연유를 물은 즉, 충남도와 각 시군에서 주관하는 '걷쥬' 행복걷기 앱에 가입하여 시간만 있으면 부인과 걸었더니 이제는 본인도 건강이 좋아졌음을 느낀다고 한다. 걷쥬는 충남형 스포츠 복지정책의 하나로 행복한 도민 걷기 운동이다. 열심히 걸어 걸음수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시 군에서 김 세트, 쌀 한 자루 등 자그마한 선물도 준다. 가입자들은 하루 1만보는 기본이요, 욕심내는 사람은 70대의 나이임에도 3만보까지 목표를 잡기도 한다는데 65세 이상 참여자에게는 인센티브도 부여하고 있다. 5월 6일 현재 10만 여명이 가입하여 모두들 열심히 걷는데 도민들의 만족도가 높아 덩달아 도지사의 업무수행 만족도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꾸준히 걸으면 우울증 완화와 심장병도 예방하고, 다이어트 성인병과 골다공증도 예방한다. 게다가 걷기는 실내 운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코비드 시국에 딱 어울리는 운동이다. 별도의 거추장스러운 준비도 없고, 혼자도 좋고 둘이서도 괜찮다. 마음이 있고 길만 있으면 걷는 것이 사람들의 성향이니 걷도록 지원하는 것은 요즘 상황을 고려하여 도민의 건강 복지 향상에 효율적인 프로그램이다. 도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연말 평가를 통하여 실적 좋은 시도 교육청에는 성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주기 때문에 좋은 아이디어를 내 놔야 했고, 무리 없이 시행하려 머리를 싸맸었다. 전국 담당 장학사 모임에서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치열한 정보 전쟁도 했더랬다. 그런 상황은 도청 공무원도 매한가지였으므로 공무원들은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나름 경쟁을 하게 된다. 우리 충북 도청 문화체육관광국과 보건복지국 직원들이나 고위직에 있는 분들도 이미 충남 등 타도의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파악하여 분석도 마쳤을 것이다. 과문인지는 모르나 아직 충북 도민의 건강 증진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다. 소수의 동아리 회원을 위한 배드민턴, 테니스 또는 게이트볼 대회나 도민 체전 등은 예전부터 그들만의 잔치로 벌어질 뿐이다. 지원 프로그램이 없어도 걸을 사람은 걸으며 걷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야간이나 우중에도 걷는다. 그러나 기왕에 걷는 사람들에게 달성 목표를 부여하고, 도달 수준에 이르면 작으나마 선물을 주고 또 걷기로 모종의 기부도 할 수 있다면 본인의 건강 증진, 가족의 평화 도모 그리고 일상을 건전하게 운영할 수 있으므로 그 효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민선 후 지자체장들이 가시적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방부목 데크길이나 자전거 길 그리고 덩치 큰 축제에 올인하여 각종 문제점을 노출시켰었다. 여기에 각종 이름의 둘레길이 난무하더니 이제는 역사적 의미를 붙여 충무공 백의종군길, 다산의 유배길 등등도 나타난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신체가 건강하고 심사가 안정되어 있어야 걸을 수 있으며 심적으로 불안하거나 우울증이 있으면 걷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활기 있게 걷도록 유인책을 제공하는 것은 후일 의료비를 줄이는 예방 효과가 나옴과 동시에 보다 안전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므로 사회 유지비용도 절약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직원체육을 활성화 하면 직원들의 불평까지 줄어들며 오히려 화합된 분위기가 이루어진다. 이를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면 로마의 빵과 서커스의 역사가 되고 5공 때 프로 경기가 연상되나 문제는 우리의 건강 보존이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이 화목하고, 자식이 걱정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도민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도청의 몫이다. 충남처럼 우리도 건강한 충북을 만드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홀딱벗고새가 지저귀니 바야흐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보다. 짧은 봄을 다 누리지도 못했는데 성큼 성큼 뛰어 오는 계절처럼 골프장 잔디가 완연한 녹색으로 골퍼를 설레게 한다. 골퍼는 직업으로 골프에 올인 하는 프로와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로 구분되어, 전문기술과 직업의식 여부로 가름되지만 아마가 프로 경지를 위협하기도 하므로 프로와 아마는 나름 자기의 발전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본당 주임신부님의 권유와 아내의 성화 때문에 거의 타의로 골프에 입문하였는데 아는 만큼 생각이 많아지고 어려움도 커지는 운동임을 하면 할수록 깨닫는다. 라운딩 결과에 만족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운동이요, 변수가 너무나 많기에 골퍼의 핑계는 365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이 중에 동반자 변인이 제일 큰데 컨시드 외에는 모두 구찌라 할 정도로 동반자의 말이 운동에 영향을 끼친다. 여기에 캐디도 한 몫 한다.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캐디는 만나기도 어렵고 자칫 엉터리를 만나면 캐디 피가 문제 아니라 4시간 반 동안 캐디를 모시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도 있다. 카메라가 비춰도 흔들리지 않는 프로와 달리 요깟 이유로도 흔들리니 역시 아마추어라. 오비(Out of Bound)를 내면 같이 치는 사람이 속으로 즐거워하고 내기를 할 경우에는 드러내 놓고 좋아하는데 두 명은 반드시 좋아한단다(OB二樂). 멀리건을 요청하지 못하면 아쉬움은 속으로 갈무리하고 태연한 외양으로 오비 지역으로 가는 처량함이라니. 골프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운동이라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티샷한 볼이 자칫 러프로 들어가면 그저 볼이 깊이 묻히지나 않기를 바라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볼을 찾는다. 다음에는 더 잘 쳐야지 반성하며 걷다보면 걸음 하나에 탄식이 또 다른 걸음에 후회가 묻어난다. 마치 우리네 인생 같다. 연습장에서는 잘 되었는데 오늘 왜 이러지 하니 이러므로 아마추어라. 보통 때에는 어지간한 소리도 잘 거르던 귀가 어드레스 때엔 왜 그리 예민해지는지. 게다가 동반자가 뒤에서 옆 사람에게 '저 친구의 스윙 폼이 좋으니 잘 봐라'는 속삭임은 샷을 망치게 하는 최고의 훼방이다. 라운딩 중에 따라 다니며 레슨을 해 주는 입담 좋은 친구의 괘씸한 성의도 나머지 홀 망치게 하는 데는 그만이다. 골프 실력이 늘면 밥 먹고 골프만 쳤냐 하고, 미스 샷을 하면 그리 열심히 연습한 결과가 고작 그 정도냐 하니 어느 장단에 맞추나. 드라이버 비거리에 사활을 거는 것이 남자의 인지상정이라 거금 들여 골프채를 바꾸고 헬스장에서 근력을 키우는 것도 사실 비거리 욕심 때문이다. 모처럼 드라이버 잘 쳐 놓고 세컨드 샷 미스 때문에 보기로 홀 아웃한 것도 안타까운데, 옆에까지 다가와 은근하게 '드라이버 잘 친 사람이나 못 친 나나 도진개진이네' 하면 기분 팍 상하는 것도 아마추어 멘탈이겠다. 요즘 수요가 늘어난 틈을 탄 골프장의 갑질이 장난 아니다, 그린피를 수시로 올리더니 그동안 부채를 작년 한해 이익으로 다 갚았다는데 골퍼가 봉이요 을이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 이해를 한다만 장래를 살펴 골퍼를 배려하는 골프장이 그립다. 옥상옥으로 징수하는 카트 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다 치고 그럼에도 원하는 장소와 시각에 부킹이나 되면 좋겠다. 모처럼 배운 운동인데 연습장에서 칼만 갈고 있을 수도 없어 필드를 나가려니 경쟁이 치열하여 기회가 없다. 프로가 아닌 이상 마음에 맞는 동반자 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라운딩 일정을 잡아 놓은 뒤 초대하는 사람도 드물다. 관계를 중시하는 보노보 원숭이처럼 인간은 골프로 관계를 증진한다는데 실력과 매너를 두루 갖춘 친구가 골프하자는 연락 올 때만 기다리니 이 또한 아마추어의 비애다.
1569년 봄 퇴계선생은 선조의 허락을 간신히 얻어 고향 도산으로 물러나신다. 선생의 14일간 700리 귀향길이 고지리학자의 고증과 답사 후 2019년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 기념으로 후학들이 걸어 재현되었다. 이듬해 계속하려던 걷기가 코로나로 연기되었다가 금년에 철저한 방역 준칙 이행 하에 어렵사리 추진되었다. 이번 제2회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에는 구간별 4명으로 걷는데 전 구간 중 충북 내 3일간의 여정 가운데 가흥초부터 충주감영까지의 20km 오십 리 길 걷기에 참가했다. 斯界의 학자들과 종일 묵언수행으로 걸을 수는 없어 관련 서적도 다시 살피고 트레킹화랑 두터운 양말로 발바닥 부담을 대비하노라니 슬며시 설렌다. 걷는 동안 카메라에 담은 내용은 유튜브로도 방영된다니 의상도 갖추어야겠는데 오래 전 계룡산 합숙 출제 후 샀던 방립(方笠)이 책장 위 구석에서 눈을 맞춘다. 팀장은 한국학진흥원 이갑규 교수이며 안동대 안병걸 명예교수, 진현천(걷는 사람)으로 한 팀이요, 전일 걸었던 운광스님과 이원봉 전 도산서원 별유사님 두 분이 멀찍이 뒤를 따라 총 6명이 걷는다. 8시 경에 가흥초 잔디밭에서 갓과 하얀 도포로 의관을 갖추고 도산십이곡을 부른 뒤에 환복하고 길을 나섰다. 2년 전에는 길가에 벚꽃이 흐드러졌었는데 꽃은 이미 졌고 신록이 무성하다. 물소리 큰 저 강은 배가 여울에 쏜살같이 내려가다가 파손되기도 하여 여기서만 전문적으로 배를 대어주는 선사 사공이 있을 정도로 물살이 급하단다. 중원군에는 금가, 이류, 산척, 동량면 등 이상야릇한 이름이 유독 많은데 막흐르기 여울이라니 차라리 편하다. 한식경을 걸어 못 한가운데 남녀의 성기를 닮았다는 사랑바위를 보고는 일행 중 수행자인 스님이 궁금하다며 먼저 길을 벗어난다. 사진을 찍으려 뒤를 받쳐주는데 5대 독자 부부가 대를 잇지 못하여 연못에 동반 투신했다는 애달픈 사연은 바람에 날라 가고 급경사를 내려오려니 목전의 안위로 정작 바위 모양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자 소를 올린 것이 37회나 되는데 69세 되시던 해 드디어 마지막 귀향길에 올랐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선생께서 길을 걸을 때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선비는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면 나아가고 불연이면 물러난다 하는데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바치고 물러나시니 필시 평소 소망을 이루고자 함이겠지. 50대에 퇴계(退溪), 60대에 퇴도(退陶)로 자호하셨는데 그 많은 글자 중 왜 물러날 退로 잡았으며 계상으로 물러나려 하심은 무슨 의도가 계심인가 등등으로상념이 길을 잇는다. 선생의 일생 궁극적 지향점이 학문의 완성이요 학문에 매진하려 물러나고자 했으니 가히 退藏之貞(물러나 마무리함은 잘 하였네)이런가. 퇴계학 연구자 안 교수님의 해박한 설명을 들으며 걷다보니 어느덧 중앙탑을 지나 충주 시내로 접어든다. 강한 봄바람에 삿갓이 날아가지 않도록 한손으로 갓모퉁이를 잡고도 모자라 고개를 숙이고 걷는데 지나는 운전자들이 쳐다본다. 죽장을 아니 잡아 그런가· 젊은 저 사람들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라는 김삿갓 노래를 모를 텐데. 나아감이 있어야 물러남이 있고 길이 있어야 길을 걸을 수 있나니, 성현은 속이지 않는다고 굳게 믿은 선생처럼 선생의 길을 믿고 걷다보면 배움을 얻으려니 생각하는 중 목적지인 충주 감영이다. 오늘 걷기의 화두를 마음으로 잡았는데 持心, 存心은 아득하니 구방심(救放心-달아나려는 마음을 다잡는) 정도라도 좋으련만 어디 그리 되겠는가. 청령헌 옆 왕실 관련 인사가 머물던 제금당 마루에서 이교수님의 시 창수로 여정을 마무리 하면서 이 귀향길이 산티아고나 제주 올레보다 더 비중 있는 한국 정신문화의 길로 자리 잡아 많은 사람들이 채우면 좋겠다.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높은 산 우러르며 큰길을 따라 걸으면 저절로 길이 나온다.
온 천지에 꽃이 지천이니 정녕 화란춘성(花爛春盛)에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다. 매화꽃을 필두로 산수유와 개나리꽃, 목련과 벚꽃으로 세상이 환해지더니 살구꽃과 복숭아꽃 배꽃 등으로 온 산하가 덮였다. 어디 그뿐인가 하얀 조팝꽃에 라일락꽃 그리고 이제는 이팝나무까지 꽃망울과 함께 향기를 날려 발걸음이 즐겁다. 꽃이 없어도 걸었거늘 이렇게 진달래와 만첩홍도가 눈을 기쁘게 하는데 산으로 가는 길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산길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아웃도어로 잘 차려입고 걸어 더 이상 겨우 내처럼 호젓하지 않다. 사람들은 왜 산에 가는가. 건강을 위하여도 갈 테고 모임삼아 아니면 심심파적 이유로도 오르리라. 오가는 사람 대부분은 휴대폰으로 음악이나 뉴스를 듣거나 친구와 일상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좁은 산길까지 막는다. 우리 부부처럼 묵언수행으로 걷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산바람 소리와 피부에 와 닿는 미풍의 숨결도 느끼며 좋은 경치를 감상하는 이 즐거움을 옛 선인들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누렸을까?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에도 세인의 모범이 되신 분은 역시 퇴계 선생이다. 선생의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은 상적(賞適)이라 하여 유상(遊賞)과 유산(遊山)으로 쓰이며 賞適之道로도 표현된다. 선생의 경지에는 한참 못 미치므로 감히 道를 운위할 수는 없어 상적지락 수준에서 자연에 노니는 즐거움의 모범을 살펴보았다. 선생은 워낙 자연을 좋아하여 도산십이곡 제1곡에 천석고황을 고쳐 므슴하료(자연을 버리고는 살수 없는 마음을 고쳐 무엇 하랴)라는 가사를 넣을 정도이다. 좋은 경치를 감상하는 가운데 진리를 구하여 격물치지와 心定理明(마음이 안정되어 이치가 밝아질 곳)을 찾아 한밤중에도 묵좌 수행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제자 권호문의 요산요수(樂山樂水) 관련 질문의 답에 선생의 산수를 즐기는 마음이 보인다. 산수에 나아가 인과 지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두 가지 즐거운 뜻을 알고자 함이니, 마땅히 인자와 지자의 기상과 생각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인자와 지자의 기상을 구하고자 할진대 어찌 다른데서 구하겠는가. 내 마음에 돌이켜서 그 실질을 얻을 따름이다. 진실로 내 마음에 인과 지의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충만해서 겉으로 드러나게 되면,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는 것을 간절히 밖에 구할 것이 없이 저절로 그 즐거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내 마음 속에서 인자와 지자의 기상과 의지를 길러 그것이 내 안에 충실하여 밖으로 나타날 때 저절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퇴계선생의 상적지도는 첫째, 명승지를 유람하고 기록하여 전하는 것, 둘째, 養氣心定(몸과 마음의 원기를 기르고 마음을 안정시킴) 셋째, 아름다운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학문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권오봉 박사는 정리하였다. 자연을 즐기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학문의 완성이다. 상적지락은 요산의 자세로 자연에서 인자와 지자의 마음을 찾는 과정이다. 이따금 좁은 길에서 손을 모으고 길을 비켜주는 젊은이나 좋은 날 되시라는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기껍다. 길가에 핀 꽃을 지나고 골짜기의 물소리에 마음을 비우며 눈을 들어 연록으로 잎 틔우는 나무를 살피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 굳이 휴대폰을 틀어 자연의 소리를 거스르지 않아도 되고 동행자와 일상을 나누느라 주변 풍광의 변화에 소홀할 이유도 없다. 자연을 대함에 공부의 일환으로 할 것이며(遊賞), 산을 걸으매 독서와 마찬가지로 한다면(讀書卽遊山) 오묘한 즐거움과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이를 체득하는 걸음도 상적지락이 되리라. 자연에 노니는 즐거움의 모범을 좇노라면 예던 길에 더 가까워지겠지.
러시아 역사가 미하일 일린의 『인간의 역사』에는 문명 발달 측면에서 인간의 팔 길이가 길어지는 것이 기술된다. 맨손에서 창으로 화살로 팔의 길이가 늘어나게 되었다는 건데 관련하면 발도 인간의 의욕과 문명의 발달로 길어졌다. 마차에서 자동차로 그리고 배와 비행기로 길어졌으며 이중 가장 대중화된 발이 자동차이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우리 인간은 마음먹은 대로 도달할 수 있고 연육교를 밟아 종전에는 배로 건너던 섬도 드나들 수 있다. 운전대를 잡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초보 때야 온 몸에 들어간 힘을 운전대에 집중하곤 앞만 보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 오직 안전하게 차에서 내리기만 바라지만 운전에 경륜이 붙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빠진 힘 대신 여유가 생겨 전후좌우를 살피고 방어운전도 가능하다. 날이 청명하면 밝은 생각으로 비가 오면 차창 밖으로 흩어지는 빗방울에 붙어서 상념이 묻어나고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아름다운 음악에도 갖가지 추억을 회상한다. 특히 노을을 바라보며 운전하거나 이슬비 잔잔히 내리는 날이면 그간 잊고 있었던 일들이 뭉게뭉게 솟아나는데 先親이 제일 많이 떠오른다. 일찍 보내드린 한이 남아 40여년 지났음에도 눈물이 나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대화라도 많이 나누고 더 자주 찾아뵈올 것을. 이럴 줄 알았다면 맛있는 거라도 많이 사 드릴 것을 등으로 생각할수록 후회막급이다. 아무도 없어 생각이 치솟으면 눈물까지 훔치게 되니 나이가 들은 때문인가. 자식들은 애비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알까나. 길가의 개를 보면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하루와 타노가 떠올라 주인 잘못을 자책한다. 장거리 운전 시 인간문화재 금정 김응서 선생의 CD를 켜면 대금 사사받을 때 자세 바르게 한나절 대금 잡던 때와 함께 외길 인생 사신 분의 향기를 되새긴다. 운전대를 잡으면 과격해 진다. 모두가 급하게 운전을 하니 과속방지턱과 카메라가 숱하게 널려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닭머리가 만든 건지 횡단보도를 가는 방향에만 방지 턱을 만들어야지 양방향에 걸쳐 방지 턱을 만들면 어쩌자는 건가. 턱은 왜 그리 높아 차를 필요 이상으로 덜커덩거리게 하는지. 과속을 단속하려는 카메라와 각종 카메라가 그리 많은데 별도로 고정형 과속방지 시설은 무어고, 이따금 이동식 카메라를 노상에 몰래 설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통사고를 줄이려는 것인지 전 국민을 범법자로 만들기로 작정한 건지 아니면 누구 말대로 퍼주느라 궁색해진 나라 살림에 보태려는 심보인가. 하긴 이렇게 받아들인 범칙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도 궁금하다. 관계자 말로는 교통사고 위반 범칙금이 경찰의 복리후생비로 들어간다는데 과연 그럴까. 혹 그렇다면 법을 빌미로 한 호가호위(狐假虎威)요, 공익을 빙자한 사리추구이니 국민을 속이는 아주 괘씸한 짓이다. 설마 설마 가짜 뉴스겠지. 신호대기하면서 지나는 사람도 보고 딴 생각 하느라 파란 불 바뀐 것을 잠깐 놓쳤는데 그 사이에 뒤차가 클랙슨을 울린다. 연구에 의하면 신호 대기 중 늦게 출발하는 앞차에게 경적 누르는 속도로 전국 1위가 제주요 그 다음이 청주와 대전이라고 한다. 렌터카로 도배를 한 제주는 그렇다 쳐도 고작 1.7초 내외의 짧은 시간을 못 기다리는 사태가 종래 느리다던 충청도요 양반의 고장에서 작금 현실이다. 조선 시대 이후 예의 본향 사람들의 심적 여유 상태가 이렇게 변한 것은 우리가 신중히 살필 일이다. 운전대를 평상심으로 잡으면 남이 안 본다고 육두문자로 상대 운전자를 욕하거나 난폭운전을 당한 뒤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하려는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 나 위주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대처하여 옆에 앉은 아내도 불안하지 않으리라. 마음이 문제다.
금년 어머님 연세가 88세(미수)이시다. 서울에서 시골 김 씨 집성촌에 시집와서 52세 남편을 46세 때 놀람 중에 한 됫박 눈물로 보내곤, 남편 따라갈 모진 맘도 자식 때문에 버리고 살아 온지 어언 42년이다. 이번 생신은 어머님 좋아하시는 바닷가에서 1박하며 축하해 드리자는 아내의 제의로 형제들이 뭉쳤다. 여러 해 전 부산 출장 중에 택시를 탔더니 기사가 거제 몽돌해수욕장을 가 봤는가 묻는다. 부산 기사가 거제를 안내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재미있다. 십년 동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인도 이곳이면 넘어오고, 이혼하려던 부부도 손잡고 나온다나. 이렇게 해서 거제도로 결정하였다. 그간 어머님 모시는 여행에는 시간되는 형제들만 모였지만 이번에는 4남매가 모두 부부동반으로 참석하니 더 뜻깊다. 시골에서 돼지를 키우는 막내 동생은 어린 돼지 8천500마리를 농장 장에게 맡겼고, 사위는 개업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았으니 가상타. 온 가족이 길을 나서며 제일 먼저 주모경 합송으로 안전운행과 이번 여행이 즐거운 시간되기를 기도하였다. 차내 방역 수칙 준수와 여행 간 조심은 물론이다. 효심 깊은 둘째가 꽃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구례에 들러 산수유 핀 모습을 보잔다. 노랗게 채색된 산수유 마을을 보고 화엄사도 들렀다가 섬진강변 길을 드라이브하는데 화개장터 건너편에 하얗게 핀 매화 마을을 본 사위가 먼저 설렌다. 흐드러진 꽃그늘 아래를 걷는 사이 매화향이 온 몸을 휘감아 돈다. 연례 섬진강 탐매도 어언 옛날이라 벼르기만 하던 매화 보기를 이렇게 온 가족과 함께 하니 더 좋다. 꽃 사이에서 서로 사진도 찍어 주며 웃는 사이 해가 뉘엿 기운다. 내비를 잘못 살펴 몽돌해수욕장 길을 지나치고 다시 되짚어 오느라 한 쪽은 파란 바다요, 다른 한 쪽은 활짝 핀 동백 가로수와 이따금 노란 수선화 무리가 길을 연함을 여러 번 본다. 야! 바다다, 동백꽃 참 멋지구나 하며 처녀처럼 연실 감탄하며 같은 길 4번 가도 물리는 기색 없이 저리 좋아하시는 어머님으로 길을 헷갈려도 나름 보람 있다. 인근 횟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전국에서 제일 청결한 농장으로 선정되어 상패를 받는 막내가 저녁을 사니 박수로 저녁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어둔 밤길 해변을 운동 삼아 걸어 돌아오는 제수씨들이 이 시간에 식구들과 거제 해변의 파도소리 어우러진 밤바다를 본다고 들뜬 표정이다. 삼형제와 외동 사위가 한 방에 누우니 어렸을 적 이불 하나로 온 식구가 겨울을 나던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난다. 걸레가 꽝꽝 얼어버리는 방에서도 달랑 솜이불 한 채로 우리 가족은 겨울을 났더랬지. 오션 뷰 되는 객실에서 일출을 맞이하고는 조반으로 도다리 쑥국을 먹었다. 쑥향이 올라오고 도다리 살 질척한 국물이 건강식이다. 무엇보다 어머님이 맛있다 하시니 기쁘고, 아들들이 생선뼈를 발라내어 잡숫기 편하게 해 드려 훈훈하다. 간밤에 안 골던 코를 골아 동서들을 괴롭게 한 아내 때문에 아침은 맏아들이 냈다. 오라버니 같은 아주버니로 처하려 하는데 밥값이 문제랴. 두 끼 절약된 식사비를 나누어주고 통영 중앙시장에서 각자 소용되는 해산물을 사도록 하자 제수씨들이 좋아한다. 작년 여행 때는 그래도 잘 걸으셨는데 이제는 걷는 것을 겁내시어 차 안에서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데 무릎에 보호대를 두텁게 대고 오셨구나. 내년에도 부디 건강하신 몸으로 가족 여행에 모시기를 바라며 할머니 좋아하시는 냉면 사 드리라 손주가 보낸 돈으로 저녁 자리가 열리니 기껍다. 여행 후 소감으로 기왕이면 손주 및 증손주들까지 다 함께 버스로 여행하자는 제안이 나온다. 나 죽은 뒤에도 이렇게 우애 있고 화목하게 살라 하시는 어머님! 어머님이 계심에 화목하므로 백수를 축원 드리며 米壽 여행을 마무리 하였다. ※가족들에게 윤독을 하려 상세히 적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운동 중에 골프처럼 배우기 어렵고 즐기기 힘든 것도 없는 듯하다. 주변에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중론도 이와 비슷하다. 손이나 발로 직접 볼을 접촉하는 배구, 축구 또는 농구가 그중 쉽고, 다음은 탁구와 배드민턴 그리고 테니스 순이다. 그러고 보니 몸에서 볼의 위치가 멀어질수록 운동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듯하다. 결국 가장 기다란 도구를 사용하는 야구와 골프가 수월치 않고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라 특별히 팀을 짜서 움직이지만 골프는 본인의 기본기를 갖춘 뒤에 동반자와 더불어 네 명이 한 조로 운동을 한다. 유명한 재계 회장이 자식과 골프는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한탄한 것처럼 세상 누구도 골프채를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다고 자신할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골퍼로 자기 플레이에 만족하는 사람 또한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백돌이는 90대로 진입하기를 바라며 프로처럼 잘 치기를 바라고, 골프를 직업으로 밥 먹고 골프 연습만 하는 프로들은 언더파로 60대의 타수를 유지하면서도 마의 50대를 넘보니 아마추어든 프로든 만족할 수가 없다. 어려운 만큼 그나마 필드에서 안정적으로 즐기려면 연습장에서 땀을 흘리는 시간도 그만큼 많아야 한다. 연습장에 등록을 하려면 시간제와 박스제 중 결정을 한다. 1시간 동안 볼을 치거나 볼 100개 단위의 박스로 연습을 한다. 접수처 직원이 작년 연습 비를 확인해 보더니 금년에는 시간제로 1년 치를 등록하는 것이 저렴하겠단다. 하기야 외부 강의와 교육 일정 모두가 취소되어 여유시간도 많아진 터, 예년보다 자주 연습장에 나와 골프 연습에 매진하긴 했다. 예매 분량을 예상보다 일찍 소진하여 생각이 많던 참이라 조언을 참조하여 연회원으로 등록을 하였다. 연회원은 박스 시간제 보다는 비싸지만 1년 동안 매일 1시간을 연습할 수 있으니 연습량으로 보면 훨씬 저렴하다는 이점이 있다. 이리하여 고려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산행하고 오는 끝에 물을 지는 것은 오전의 일상이니, 오후에는 반드시 연습장에 가야 한다. 다른 곳으로 볼일을 다녀와서도, 새벽부터 골프라운딩을 하고 나서도 연습장에는 들러야 한다. 프로 선수처럼 시합에서 만족하지 못 했거나 실수한 샷을 보완하려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하루 사용분을 채우려는 경제성 때문이요 미리 할당된 한 시간을 소진해야 한다는 숙제 해결 때문이라니……. 라운딩 후 돌아올 때면 항상 밀물 같이 몰려오는 피로감으로 운전조차 괴로운데, 연습장에 출첵하고 한 시간 동안 볼을 때리려니 허리도 아프고 눈까지 쏠리는 듯 몸이 지겨워한다. 이런 상황이니 예전같이 장거리 라운딩도 내키지 않고 하루의 시간도 더 효율적으로 써야한다. 산으로 헬스장으로 골프 연습장으로 종횡무진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목표를 세우고 거의 끌려 다니듯이 연습을 하면서 퇴계선생의 人十己千(다른 사람이 열을 하면 나는 천 번을 하리라) 공부 결심을 떠 올린다. 선생이 어렸을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는데 울타리 밖에서 전일 배운 내용을 가만히 암송해 본 뒤에 사립문을 들어갔다고 하는데 모든 일에 정성으로 최선을 이루고자 노력한 모습이 위의 표어로 가름된다. 이리 열심하고도 성실히 공부하여 만국의 스승이 되었는데 골퍼로서 성실하게 시간을 투자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특히 남들 잘 붙이는 어프러치 등 숏 게임 능력을 보며 족탈불급으로 여기는 아픔만 가신다면야. 작년 연습으로 각 아이언의 비거리가 10M 늘었는데 금년 1년을 줄기차게 연습하면 과연 얼마나 발전을 하려는지. 안정적인 80대 중반 이하 타수 유지도 연습 없이 불가능하다는데, 이러다 평균 언더파를 넘나들어 혹 프로 시험을 보라고 주위에서 권하면 어쩌지? 현대 사회는 자신을 착취하면서 욕망에 집착한다고 한다. 과잉욕망이요, 이루기 전에 벌써 눈이 너무 앞으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