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마당 전면으로 낙동강을 끼고 동그마니 솟은 시사단은 서원의 풍광 중에서도 아름다운 곳이라 사람들이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곳인데 '선비를 뽑는 곳'이라는 역사적 유래가 있다. 정조대왕은 제왕학을 구비한 군주로서 신하의 학식을 능가하는 분이셨다. 공부한 사람은 학자를 알아보는지라 퇴계선생을 앙모한 때문에 재위 16년째인 1792년 3월 24일 어제문으로 상덕사에 치제를 드리고 다음 날 서원 앞에서 별과를 시행하도록 각신 이만수에게 전교를 내렸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대략 탕평책을 실현할 참신한 인재 선발과 선생의 학덕으로 서학에 물들지 않은 영남 유림을 칭찬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과거 응시기회마저 박탈당했던 영남 유림이 '무신창의록' 상소로 청원한 결과 난 이후 65년 만에 복권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전교 내용과 도산별과를 치룬 내용은 서원 전교당에 편액으로 게시되어 있거니와 과거 시행 장소를 기념하여 설립한 것이 시사단이다. 당시 과거 응시자만 7천228명이었고 시권 제출자 3천632명 중에 강세백과 김희락의 답지가 압권으로 채택되었다. 과장에는 1만 여명이 넘는 대 인파가 운집하여 '영남 사대부가 만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니 분명 장관이었으리라. 높직이 솟아 오른 시사단은 영남 유림의 한껏 고무된 士氣를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기회가 되어 서원의 밤 풍광을 볼 수 있었다. 낮 경치가 멋진 이상으로 보름달이 떴을 때에 천연대에서 바라보는 시사단 경치란 자못 심신이 황홀할 지경이다. 한 여름 깊은 밤중에 세상은 휘휘적막하고 바람은 소슬한 가운데 낙강에 아롱져 부서지는 달빛만 찬연하다. 선생의 제자들도 달빛 어우러진 낙강의 경치를 관란헌에서 즐겼으리라. 아하! 천광운영에 어린 월야시사단이라! 마침 선생도 달밤의 멋진 경치에 뱃놀이 한 기록이 있다. 신유년(1561)년 4월 16일에 선생이 조카와 손자 안도 및 덕홍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반타석에 배를 정박했다가 역탄에 이르러 닻줄을 풀고 배에서 내렸다.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한참동안 가만히 계시더니 전적벽부를 읊으셨다.(간재집 중) 수행하였던 간재 이덕홍이 이 뱃놀이를 시로 그렸다. 사월 창랑한 밤에(四月滄浪夜) 푸른 하늘 넓고도 넓도다(蒼蒼以鴻00) 하늘빛은 물색과 어우러져(天光與水色) 밝은 달빛 가운데에 배회하네.(徘徊月明中) 유인은 어디에 계시는가.(幽人在何許) 외로운 배에 물만 조용히 흐르네.(孤舟水溶溶) 선생께서 적벽부를 읊조리시니(先生吟赤壁) 맑은 뜻 더욱 밝게 녹아든다.(淸意更昭融) 젊은 후배 속세의 무리가 아닌지라(少輩非塵類) 마음 맑아 흥이 끝없어라.(心淸興不窮)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雖居此天地) 바로 이것이 천상계의 풍류구나(却是上界風) 제자의 눈에 비친 선생의 밤경치 완상은 문자 그대로 시경 위풍 편명인 고반(考槃)의 모습-은거하여 산수를 즐김-이다. 유인의 향기를 풍기는 스승을 좇아 평생을 같이 하려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수백 년 후생인 나는 시만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또 절절해 온다. 선비의 기상을 추월한수(秋月寒水)로 가을 달이 찬 물에 비친 듯으로 묘사한다. 골지어 흐르는 물결에서도 온전한 가을 달을 보려면 나의 마음을 살펴 관조의 상태에 들어야 하겠지. 천년의 마음을 살필 공덕으로 나의 마음이 평정하여 맑지 못하면 아무리 보름달인들 조각나 흔들리는 달빛만 간신히 얻어 볼 뿐이다. 주자의 '관서유감'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떠돈다(天光雲影共徘徊)라는 말도 그런 의미일 게다. 하이얀 세모시 한복 두루마기로 달빛 어린 시사단에서 역사를 보고 달아나려는 마음을 찾는다.
요즘 나의 새로운 즐거움이 있다. 작년부터 도산서원을 드나들게 되었는데 금년 봄 이후 오는 길에 짬 내어 온천을 들르는 맛이 제법 은근하다. UN의 기준으로는 청년이고, 나 또한 노구로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장장 세 시간 남짓 운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운전하면서 라디오 음악이랑 강독유사 권 교수님이 주신 성독 파일도 듣고 녹성 김성진 선생과 그분의 제자이자 직접 가르침을 입었던 금정 김응서 선생의 대금곡도 듣지만 밀려오는 하품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오가는 길목에 있는 도산 온천, 학가산 온천, 예천 온천 그리고 문경 온천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산과 내로 둘러싸인 시골에서 자란 촌놈에게야 집 앞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집안 형들 따라 물 깊어 으스스한 방죽에서 개헤엄만 쳐도 만족했던 지라 온천은 언감생심의 사치로 여겨 꿈도 꾸지 못하던 처지였다. 그러다가 도시 출신인 집사람 따라 자연스레 온천을 접하게 되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라 그런지 집사람 없이도 쏠쏠하게 즐길 거리가 되었다. 혹 상황 될 때 목욕하려고 달랑 면도기와 칫솔이 들어 있는 목욕용 손가방을 차에 싣고 다닐 정도이다. 도산온천은 시설이 예스러워 촌로들이 찾는데 물은 정갈하다. 학가산 온천은 탕과 시설은 깔끔하나 물의 감이 얕고, 예천 온천은 수질이 부드럽기로 소문난 곳이라 안동 사람들이 주로 찾는다 한다. 문경 온천은 칼슘 중탄산천과 알칼리성 온천의 두 가지를 즐길 수 있는 보양천으로 설악의 오색 그린야드 온천처럼 4시간 정도 입욕에도 피곤하지 않을 성 싶다. 이러고 보니 요즘 일본 방송의 '고독한 미식가'처럼 나는 '고독한 목욕가' 수준인 셈이다.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는 온천이 제 격이다. 특히 문경 온천은 탄산 탕이 있어서 연일 35도를 훌쩍 넘는 바깥 온도는 강 건너 불로 저만큼 여겨진다. 시원한 물속에서 모공 속까지 탄산 기포가 파고드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고 있노라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외웠던 글이 떠오른다. '반소사음수하고 곡굉이침지라도 락역재기중의'(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신 뒤에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 가운데도 즐거움이 있도다.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부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으니라. 논어 위정편") 6천원 내고 염천지절에 물속에서 시원함을 누리고 있으니 만사가 흐뭇하고 넉넉하여 즐거움이 이 안에 다 있는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하는 마음인가 보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장시간 운전의 힘듦과 열대야로 설친 잠자리의 후덥지근한 뒷맛도 사라진다. 목까지 깊숙이 담그고 있는 주변의 모르는 사람들 표정이 모두 느긋하게 보이니 다들 그런 생각인가보다. 이따금 고양이 낮잠을 자다가 부지불식간에 물에다 고개를 쳐 박아도 창피할 것도 없다. 물속에서 생각이 만 리를 달린다. 단양에 교사로 있을 때 군 시절 고참이 찾아와 제대 소감을 나누었다. 제대하면 좋아하는 낚시를 실컷 하려던 결심으로 낚시를 주중에 하는데 사람들이 간첩으로 오인하여 주말에나 추를 드리우게 되더란다. 지금처럼 실업률이 하늘을 치솟을 때에야 주중에 노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놀거나 쉬는 것도 일이 있어야 재미가 있으니 오히려 망중한이라야 쉬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겠다. 옆 사람이 일으킨 물 파동에 상념이 흩어진다. 아쉬움도 많지만 그럼에도 보람이 적지 않은 인생이다. 흐뭇한 기분으로 온천에 몸을 담그려면 더 잘 살아야겠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아쉬움과 후회요,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근심과 걱정이 대부분이라는데 이리 생각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재유사로 선생께 알묘도 하고, 온천물로 정갈히 목욕을 했으니 김소운님의 말대로 왕후 부럽지 않은 심사인데 걸인의 찬인들 어떠랴 싶어 역시 6천원 짜리 해장국 한 그릇으로 마음에 점만 찍어도 마냥 넉넉하다. 6천원으로도 이리 행복하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공 단(周公 旦)은 나라를 움직임에 선결할 문제로 인재 영입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인재가 찾아왔다는 하인의 전갈을 들으면 비록 목욕 중이라도 젖은 머리를 부여안고 나오기를 세 차례나 했고, 혹 식사 중에 인재가 찾아오면 입안의 음식 토하기를 세 번이나 하며 그 사람을 맞이했다. '일목삼착 일반삼토(一沐三捉 一飯三吐).' 이를 인재를 구하는 귀중한 고사로 삼고초려에 비견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 접빈객의 도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손님이 오면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도 맞이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손님을 가장 많이 맞는 곳이 문중의 종갓집이다. 종갓집의 주된 임무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봉제사 접빈객이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찬물 한 그릇이라도 반드시 먹여 보내야지 빈속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례한 짓으로 여겼다. 안동에 퇴계 종택의 추월한수정 문에는 '폐독서 개영철(閉讀書 開迎輟)'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 문을 닫으면 독서를 하고, 문을 열면 손님을 맞이한다는 말로 종손 어른의 생활 철학이 담긴 말씀이라 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퇴계 선생의 16세 종손이신 이근필 옹은 손님이 오면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무릎을 꿇고 대해 공경을 다한다. 독서를 생활화 해 새해 문안인사를 여쭈면 필독 도서를 추천해 주시고, 당신이 읽어 감명을 받은 책이 있으면 주위에 소개를 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용을 요약하여 말해 주신다. 모두 할아버지 퇴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예전 선비들은 어렸을 때 일신의 교양을 공부하고자 '소학'을 읽었는데 그 안에는 '소쇄응대(掃灑應對)'라는 단어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 쓸고 물을 뿌려 공손히 손님을 맞는다는 말이다. 역시 손님맞이하는 도리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만큼 손님은 우리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요, 만남은 자체로 소중하다는 이치다. 올해는 생각지도 않게 학교를 방문해 교사와 학부모 대상으로 강의할 일이 생겼다. 아직 기력이 있을 때 재능기부라도 하면 사회에 나의 존재 가치를 보이는 듯도 하고, 강의 준비로 책을 읽는 보람도 있어 기쁘게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학교를 방문하려니 소소한 것도 지나치지 않게 된다. 모 학교 교무실 문을 열며 오늘 있을 학부모 교육 강사라고 인사를 하는데 관리자가 컴퓨터에서 눈도 떼지 않는다. 그러면서 교감 앞자리의 응접세트도 아닌 교무실 구석 한편의 자리에 앉으란다. 옆에 있던 교무실무사가 오히려 어쩔 줄 모르고 미안해하면서 차를 권할 정도로 상황이 어색하다. 대개는 친절하게 맞아줬지만 감정 상하게 한 것이 강한 기억으로 남았는지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나 바쁘기에 그럴까. 바쁘면 마음의 여유도 사라져 참으로 곤핍한 인생이 되겠다는 우려와 함께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기본에 어긋나는 행동은 안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사에게 따스한 차를 대접하면서 바쁜데도 우리 학교에 와서 귀중한 강의를 해 주셔서 고맙다 하면서 강의와 적절하게 연관되는 학교의 당면 과제가 있을 시 나누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바빠서 한가할 겨를도 없겠지만 관리자는 그런 거 하라고 봉급 받는 거다. 학교에 온 민원인을 따스하게 대해 자칫 큰일이 될 뻔한 것도 오히려 쉽게 풀렸던 경우도 있다. 근무했던 사람으로 학교를 방문해 더 눈에 걸리는지도 모르고, 나이가 들어 섭섭한 것이 늘어나서 그런 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근무하는 곳을 집이라 여긴다면 모처럼 방문한 손님에게 아무리 바쁘다손 일반삼토는 못할지언정 최소한의 접빈객 도리로 예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극히 작은 일례로 살핀 주마가편의 토로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번에도 많은 사연과 함께 여러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고 게다가 여강 야소의 정국으로 끝났다. 선거의 여운으로 피선거권자였던 사람은 복잡다단한 심정으로 인생을 곱씹고 있을 테고, 투표권을 행사한 사람은 결과로 나타난 세상인심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선거 유세하는 사람들의 말과 반응을 보노라니 중국 송나라의 범중엄이 떠오른다. 북송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탁월한 문학가요 교육가였던 범중엄은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주희는 유사 이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범중엄을 칭송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범중엄이 1년 내 죽만 먹으며 공부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친구가 큰마음을 먹고 맛난 음식을 보냈다. 이 음식으로 기운을 차려 공부하라는 갸륵한 뜻이었는데 범중엄은 맛도 보지 않고 그대로 되돌려 줬다. 기름지고 맛난 이 음식을 먹으면 내 입이야 좋아하겠지만 나중에 악식을 견디지 못할까 염려해 그리 했다며 마음만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협박을 하고 모진 감방 생활에도 굴하지 않는 죄수에게 갑자기 목욕을 깔끔하게 하고 옷도 새로 주며 맛난 음식을 먹게 한 뒤에 회유가 안 되면 다시 돼지우리 같은 예전의 감방에 넝마 같은 죄수복을 입히면 견디지 못하고 실토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가 재상이 된 후 악양루 중수기를 쓸 기회에 선우후락이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나는 올해 1월쯤 답사 차 숭양서원을 둘러보다 뜰에 쓰인 글로 처음 접했다. 그 구절을 부분 인용해 보면 아아! 내가 일찍이 옛 성현의 마음가짐을 추구해 보니, 간혹 이 두 가지 경우의 행위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외물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슬퍼하지도 않아서 조정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 그 백성들을 걱정하였고 강호의 먼 곳에 머물면 그 임금을 근심하였으니 이는 나아가서도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걱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나 즐거워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천하 사람들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리라.(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아! 이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 선거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백성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하는 선우후락을 명심하고 실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정계에 입문하고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망신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역대 대통령이 줄지어 감방에 들어가는 우리나라 정치사의 질곡은 세계에 부끄러운 일이니 이제 그런 악순환은 끊어버려야 한다. 무릇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걱정하고 근심하고 또 근심해야 하는 것이다. 선정을 베풀면 백성들은 임금의 이름도 모르며 반대로 임금의 행적을 시시콜콜 알고 있으면 이미 그릇된 정치라는 거다. 대국민홍보를 위해 디지털 소통팀을 꾸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시급하다. 대통령은 러시아 하원에서 한반도에는 역사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외국 일부 언론에서는 선조들이 공들여 지킨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려 한다고 비아냥거리니 이 또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대통령은 그 자리에 맞게 처하고, 부처 각료들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서민들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 모두가 특권을 누릴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고 근심과 걱정으로 시방 암울한 우리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힘을 모으면 좋겠다. 그런 연후에 즐거워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선우후락이다.
오랜 만에 눈병이 났다. 80년대 부설중 재직 때에 눈병에 걸렸었으니 무려 30년 만이다. 그때 핏줄 어린 눈으로 학생을 대하기 미안하여 선글라스 대용으로 설산용 고글을 쓰고 교실에 들어갔더니 아이들이 평소처럼 질문에 대답도 안하고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한다. 너희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눈을 마주치지 못해 그런지 너무 어색하단다. 중간고사 감독에서는 학생들이 놀랍게도 커닝 시도조차 안하고 미동도 없이 시험을 보더니 고사 종료 후 답안지를 내려고 나온 학생이 '선생님! 너무 잔인해요'라 하여 실소를 머금었던 기억도 있다. 대화건 시험 감독이던 눈을 맞추는데서 관계가 성립되나보다. 이번에는 눈병이 제대로 걸렸다. 토요일 저녁 무렵에 눈에 이물질이 들어간 듯 불쾌하던 것이 잠결에 눈이 고통스럽더니 다음 날 아침에 거울 속에서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눈알이 새빨갛게 변한 위에 눈물까지 고였다 흐르는 흉측한 몰골의 인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화들짝 놀라 월요일 첫 손님으로 진찰을 받는데 의사 선생님은 내 눈을 위 아래로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별다른 치료도 없이 유행성 결막염이라고 진단한다. 향후 주의사항으로 절대 물로 씻지 말 것. 안약 이외에 다른 일체를 눈에 넣지도 말 것. 정히 눈이 붓고 아프면 냉찜질이나 하란다. 이런! 내가 한 것은 철저히 정반대로 한 거였다. 뻑뻑하여 불쾌한 눈을 물로 여러 번 씻었고, 그래도 효과가 없어서 9번 구은 자죽염을 물에 타서 눈을 씻는데 따끔거려도 참으며 소금물로 계속 눈을 닦아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차 마시며 데워진 찻잔으로 눈에 온열 찜질도 했다. 문향배로 차를 마실 적에 찻잔으로 눈가를 문질러 주면 눈의 피로가 풀린다는 말을 들은 바 있고, 읽어야 할 책과 강의도 금방 있기에 급한 마음에 눈병을 예방하고자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였던 것이 역으로 조치한 거다. 덧붙여 선생님은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20여일은 고생해야 된다며 가족에게 눈병 옮기지 않도록 조심하란다. 할 일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야단이라고 걱정하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지랖 넓게 가족까지 염려해 주니 기가 차다. 가족이라야 달랑 마누라 한명이 전부이지만 잘난 남편에게서 자칫 병이라도 옮으면 원망이 얼마나 자심하겠나 싶어 내가 먼저 수건을 비롯하여 생활공간을 따로 구분하고 쓰기로 조심을 시키려니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 창궐로 인한 시대 상황과 비견된다. 당시 죽음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신앙에 의지하려 성당에 모였는데 빽빽한 신도 속의 잠재적 병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병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고, 전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병든 부모나 자식을 산채로 내다 버리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현상으로 급기야 사회공동체가 해체되고 가족제도가 무너지는 상황까지 나타났었다. 이제 친구를 만나도 손을 잡지 못하고, 같이 밥을 먹기도 찜찜하여 바깥출입을 자제하려니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건 그렇다 손 '찾아가는 선비교육'과 여타 강의 일정을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다. 불가피 책을 보려니 눈에서 피눈물까지 뚝뚝 흐른다. 이러다 자칫 실명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두어 시간 독서 후 한 시간의 냉찜질로 달래는데 이리 고생하는 나를 위로한다는 친구들의 말이 놀랍다. 친한 사람은 '그렇게 빨빨거리고 전국을 쏘다니더니 잘 됐다'며 놀리고, 점잖고 학식이 있어 아직 대학 강단을 오가는 선배는 '거 남 몰래 못 볼 것을 보느라 그런 거 아녀·'라고 인품까지 흔드니 모두 욥의 친구들 심보에 다름없다. 20여 일을 빨간 눈으로 지낼 나의 입장을 살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처럼 나를 아껴 주는 사람도 없다. 건강할 때는 몸의 존재도 모르다가 아플 때야 비로소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가능한 한 몸을 느끼지 말고 살아야지. 그런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냔 말이다.
5월 스승의 날을 보내며 좋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은사님들을 떠 올리게 된다. 살면서 많은 분들에게 가르침을 얻었고, 그러다 스치듯 주신 한 마디에 나의 인생관이 달라졌으니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깨우침을 받았다. 지금과는 달리 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임용장을 받고 군대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에 나는 대학 졸업 후 곧 시작한 교육대학원 석사 코스를 마치면서 다시 제대로 공부하고자 본대학원 석사코스에 재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영 영장을 받았다. 이러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평균 7~8살 많은 중늙은이로 군대를 가게 됐다. 12월 8일 입영을 앞두고 대학에 가서 은사님들을 찾아뵈었다. 동양사를 강의해 주셨던 신 교수님은 개론서인 동양 문화사를 저술하고 동양사학회장도 역임했으니 학문과 경륜으로 사계를 압도하는 분이셨다. 당시 연수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신 교수님은 군대 간다는 인사를 받자마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군대 간다고? 그러면 앞에서 뛰게, 앞에서 뛰어야 하네'라 했다. 학부시절 교수님들의 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고 별반 두드러진 표양을 보이지 못한 터라 그런 말씀을 했는지도 모른다. 논산으로 입영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속으로 세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결혼한 것을 숨기자, 둘째 석사 학위자임을 표 내지 말자, 그리고 세 번째는 교수님의 가르침대로 앞에서 뛰자' 그래서 청소 집합할 때는 운반도구인 당가나 빗자루를 들고 맨 앞에서 기준을 잡았고, 새벽 점호에도 제일 앞에서 점검 번호를 부르고, 구보를 할 때에도 앞에서 뛰려 노력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구보 중에 상관이 '제자리에 서'라는 구령을 부르자 딱 중간을 기점으로 앞부분은 돌진하듯 그대로 달리는데 뒷부분은 그 말을 듣자 마자 서 버리니 소대가 정확히 2등분 된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드러난다. 더 신기한 일이 있다. 초·중학교 때 체육대회 시간은 정말 싫었다. 남들은 달리기 대회에서 상도 타서 부모님께 드리는데 나는 앞 보다 뒤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르니 운동회 날은 기죽어 도망 다니는 날이다. 그런데 훈련소의 사격 시간에 그 싫은 달리기가 250m 표적 선착순 돌아오기라는 단체 기합으로 주어졌다. M16소총을 들고 달려 돌아와 번호를 부르니 세 번째이다. 내가 글쎄 4번째 사람부터 전 소대원이 500M 거리를 다시 돌아오느라 숨을 헐떡이며 뛰는 모습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처지가 됐다. 휴식시간이 되자 옆 짝꿍이 '야, 너는 힘도 들이지 않고도 그토록 빨리 뛰는데 학교 때 육상선수였냐?'고 슬며시 물어 온다. 이런 신기한 일이 있냐 말이다. 고등학생 때까지 굼벵이인줄 알았던 내가 날랜 군인이라고 동료의 부러움을 받다니. 앞에서 뛰려 노력한 마음 자세가 이렇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거꾸로 매달려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며 훈병용 달력에서 하루하루 지워가는 병사들이 교육에서 고문관 노릇을 독판 하여 '내가 왜 이럴까? 군대 와서 또라이 되었나 봐'를 동료 앞에서 기합으로 복창한다. 이런 모습은 산행 중에도 나타난다. 같은 거리를 걷는데도 앞 사람이 충분히 휴식을 할 동안에 간신히 뒤 팀이 도착하는데 도착하자마자 뒤 팀이 쉴 사이도 없이 다시 걷기 시작한다. 똑같은 거리를 앞에서 걷는 사람은 충분히 휴식하며 유쾌하게 즐긴 산행을 뒷사람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질질 끌리며 걸어 더 힘들고 피곤한 산행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다. 나의 생활 태도를 변화시켜 주신 선생님께 참으로 감사드리며 가르침에 보태어 기왕지사 예까지 살아왔지만 여기에 좀 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를 보태야겠다. 그것이 앞에서 뛰는 것이라 여기며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리란 결심도 같은 마음이라 여기게 된다.
학부시절 답사로 도산서원을 처음 갔다. 서원 재유사의 안내와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는데 역사 전공학생들임에도 정치하게 살펴보지 못하고 선생이 빨간 세필로 주석을 붙인 책과 '성학십도'의 숙흥야매잠을 보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참 열심히 공부한 분이라는 정도만 살폈던 기억이었다. 이제 인연이 되어 도산서원을 출입하게 되고, 기라성 같은 선생 제자들이 묵었던 양재에서 목침을 베고 잘 기회도 생기니 참 좋다. 그런 중에 각 구조물의 편액에 자연스레 눈이 간다. 영남 유림 중에서도 당대 지식의 최고봉에 있는 후학들이 명명했을 테니 분명 심오한 지식을 바탕으로 큰 바람을 담고 있으리라.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 것'처럼 명명한다는 것은 관계와 더불어 큰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서원의 전체 구조는 전면에 강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강학 공간과 그 뒤로 사당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진도문(進道門)은 문자 그대로 도로 나아가는 문이니 현관과 마찬가지로 도와 덕을 배워 깨우치려는 결심의 문이며 원규에서는 입덕문(入德門)으로도 불린다. 진도문 옆의 도서관 현판은 광명실(光明室)이다. 시경 주송 경지(詩經 周頌 敬之)에 '날로 나아가며 달로 진전해 학문이 계속 밝아져서 빛나는 경지에 이르도다'(日就月將 學有緝熙于光明)과 주자의 회암집 장서각주자호명의 '만권의 서적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萬卷書籍 惠我光明)에서 취했다. 이 편액은 선생 친필이다. 여말 유학자인 역동 우탁 공을 기리고자 선생이 발의해 창건한 역동서원에 손수 글씨로 게판 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다시 도산서원으로 옮겨 왔으니 인연이 묘하다. 후학들이 선생을 모시는 서원에 선생의 생전 친필이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강당을 대해 양재가 마주보는 삼진식(參進式)의 배치로 동편에 박약재(博約齋) 서편에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박약은 논어 옹야 편에 있는 말로 안연이 인(仁)을 물어 공자가 답한 말이다. '군자는 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를 궁구하고 예의로 귀결시켜 실행에 옮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이다. 홍의는 논어 태백 편에서 취했다. 증자의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막중하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에서 따온 말이다. 다른 곳은 명륜당이라고도 하지만 도산서원의 강당은 전교당(典敎堂)이다. 한응참 문질론(文質論)에 전교를 전장교화(典章敎化)라 했는데 이는 제도와 법령을 의미한다. 특히 자연이 만든 법을 전(典)이라 하며 교육을 주관한다 하는데 이는 요순임금의 가르침이다. 옆의 한존재(閑存齋)는 주역 건괘의 문언에서 '사특함을 막아 그 진실 무망해 마음의 본연 상태인 성을 보존한다'(閑邪存其誠)는 공자의 뜻 새김이다. 선생과 월촌의 위패를 모신 사당 현판은 도덕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상덕사(尙德詞)이다. 논어 헌문 편에서 '저 같은 사람이 군자로다. 저와 같은 사람이 덕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君子哉若人 尙德哉若人)라 했다. 여기서는 선생과 따르는 제자들을 통칭해 유학에서 완성된 인격자인 군자로 지칭했으리라. 서원의 편액으로 보건대 지향 점을 인중 군자인 선생으로 공경하고 전교당에는 요순임금을, 한존재로 공자를 받들며, 안자는 박약재에서 증자는 홍의재에서 각기 모시고 광명실로 주자를 따름으로서 깨우침을 얻고자 한 것이다. 불국사가 신라 사람들의 이상향으로 피안 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와 내세 세계로 구분지어 형상화했다면 도산서원은 경내를 편액으로 상징화해 유국토, 유교 지상 세계를 지향한 것은 아니런가.
입간판을 들고 사거리에서 오가는 자동차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니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지만 여러 가지 명분으로 정계에 진출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심사가 복잡해진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당선 후 목에 기브스를 하는 사람에, 잘 하는 줄 알았더니 이름 석자 못 지키고 나오는 정치인도 있다. 저들은 어찌 다스리려고 입으로는 봉사한다며 저리 굽실거릴까. 모름지기 정치는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人治治人)것이며 인사가 만사라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을 쓰려나(用人). 집사람이 그간의 글을 책으로 내자는데 모시던 직원들이 표제와 표지용 사진은 물론 편집까지 해 주어 아담한 문집이 나왔다. 이 책을 가까운 사람에게만 보이렸더니 그 가까운 사람 분별하기가 청첩장 내기보다 더 어렵다. 친소도 문제려니와 나름 고심한 책을 보지도 않고 처박아두거나, 이딴 걸 글이라고 할까봐 조심스럽다. 친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아낀 만큼 글을 잘 대해줄까 염려하게 되니, 퇴계선생의 자명(自銘) 중 아패수완(我佩誰玩-내가 지니던 것을 누가 즐기려나)의 심정이다. 일개 야인의 마음이 이럴진대 권력자의 용인이야 오죽하겠는가. 박 정권의 요직에서 군림했던 인간들이 법정에 선 각하를 위하여 총대를 메긴 커녕 변명이나 심지어 윗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구차한 모습에서 저런 사람을 채용한 안목까지도 한심스럽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권력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자질로 지인지감(知人之鑑)을 꼽았던 것이다. 용인으로 우리는 인사권자의 마음까지 살피므로 긍긍업업의 심정으로 인사를 해야 한다. 무릇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한다는데 이 단순한 진리 위에 관계와 능력을 살폈더라면 박정권도 그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정은 바르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政者正也)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안영은 대단한 학식과 능력을 겸비하여 후세에 안자(晏子)라 불리며 존경받는 정치가였다. 그런 분도 사람 알아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한 일화가 있다. 제나라에 북곽소는 사냥 그물을 짜고 짚신을 삼아 모친을 봉양하다가 너무 고단한 나머지 인자하다고 소문난 안영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안영이 돈과 양곡을 주자 그 사람은 양곡만 받아갔다. 얼마 후 안영이 임금인 경공의 의심을 받아 피신하던 차 북곽소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북곽소에게 절박한 사정을 말하자 '알아서 잘 하시겠지요'라며 심드렁한 인사만 하였다. 실망한 안영이 '내가 이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르니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 당연하다.'고 탄식을 하였다. 그런데 안영이 떠나자마자 북곽소는 친구를 찾아가 '나는 일찍이 안영의 인자함과 의로움을 존경해서 어머님께 드릴 양식을 빌린 적이 있네. 나의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게 해준 사람을 위해 내 생명을 걸고 옹호해 드려야겠네' 그리고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친구에게 보검과 대나무 광주리를 들게 한 후 대궐로 갔다. 신하에게 안영의 억울함을 살펴달라며 이런 사람을 잃으면 제나라의 크나큰 손실이니 자기의 머리로 증명하겠다 하고는 친구에게 자기의 머리를 벤 뒤에 광주리에 담아 대왕에게 올려 달라 부탁하였다. 친구는 북곽소의 머리를 신하에게 주고는 '이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제는 제가 이 사람을 위해 죽고자 합니다.'라며 칼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이 뉘우치며 교외까지 쫓아가 안영에게 돌아오기를 간청했다. 사정을 들은 안영은 다시 탄식을 한다. '나 안영이 도망자가 된 건 당연하다. 나는 정말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사람 보기는 어렵고 사람 쓰기는 더 힘들다. 누가 내 사람일까· 나를 얼마만큼 신뢰할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인간관계는 어려운 거다. 이래서 용인이 어려운거다. 그래서 정치는 더 무겁고 역사는 더 무서운 거다.
노사(老師)의 사전적 의미는 나이 많은 스승이라 내 스스로 노사라 칭하기는 멋쩍으나 중국에서는 선생을 노사라 쓰고, 퇴임한 노털이니 노사라 해도 되겠다. 지식교육만 했던 아쉬움과 인간 교육을 좀 더 터치하지 못한 미진함이 있던 차 마침 계제가 되어 선비교육으로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이 생기도록 하려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지도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다. 40여 년의 교육 경력이 있어도 신규 지도위원은 치열한 연찬회와 참관으로 인턴 6개월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철저한 수련원이다. 금년에 비로소 첫 진행을 맡게 된 곳이 상당고 학생들이다. 두 시간 반이 소요되는 충청도에서 입소한 것은 순전히 1학년 부장이었던 김 선생 덕분인데, 작년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뒤 이러쿵저러쿵 뒷말이 무성하자 아예 체험을 통하여 인간존중과 경(敬)에 대한 생각을 하길 바랐단다. 떠난 사람 험담만 안 해도 고맙거늘 같이 근무했던 교장의 내심을 살펴주니 살갑다. 덕분에 보고 싶었던 학생과 선생님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부임 때보다도 더 설레고 설렌다. 드디어 3월 28일에 수련입교식이 시작되었다. 원장님께서 환영사 후에 직전 교장이었던 나에게 인사를 하라신다. 창졸지간에 단상에 올라 집중하여 잘 보고 많이 느끼라고 당부하였다. 수련 시작 삼일 전부터 근신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1년 가까이 해설 자료를 읽고 또 읽어 준비한 수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요즘 학생들은 멀티풀하게 행동한다. 떠들면서도 듣고, 귀에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어려운 공부를 잘도 해낸다. 입소해서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상당한 사람이라 했건만 어떤 녀석들은 강의시간에 아예 자거나 옆 친구랑 속닥거려 동료 지도위원 보기도 민망하다. 퇴계 종손과의 대화시간에 평소 겸손을 실천하고 계시는 구순의 종손께서는 무릎을 꿇고 학생들을 대하시는데 십대 학생들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조느라 끄덕거리고 있으니 면구스럽다. 다행히 이런 학생만 있지는 않다. 이동 중에 다가와서 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이나 '경서통'의 용도를 묻기도 하고, 야간 자유 시간에 다른 방으로 숨어들지도 않고 룸메이트랑 책을 펴 놓고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다. 수련비를 내고 와서도 버릇처럼 잠들려 애쓰는 학생도 있고 지도위원 곁에 바짝 붙어서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눈을 빛내는 학생도 있는 것이다. 야간 불침번 때에는 몇몇 학생을 불러 고등학생 된 소감 등을 물으며 경험어린 말도 해 주니 선생으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흥겨웠다. 게다가 우리 2호차 기사인 S관광의 엄기사님 같으신 분은 처음 본다. 프로그램을 미리 챙겨 이동 중에 다음 갈 곳의 동영상 자료를 방영하기에 수련원 본부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여주는 줄 알았더니 기사님이 자발적으로 그리 해 주는 거란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거슬려도 인상을 구기거나 말을 거칠게 하는 여느 기사님과는 사뭇 다르다. 도산서원에 오더니 기사님까지도 배려를 베풀고 있다. 어느덧 학생들이 수료 소감문을 낭독하는데 가슴이 찡해온다. 2박3일 동안 웃고 떠들기만 한 줄 알았는데 나름 보고 느낀 점이 넓고 깊으며 앞으로 실천하리란 결심도 제법 구체적이다. 그래도 이 녀석들이 지식을 실천으로 보이신 퇴계선생의 향기를 잘 맡은 듯하여 흐뭇하고 대견하다. 떠나는 학생들을 배웅하며 하나하나 참으로 소중한 너희들이 아무쪼록 착하고 훌륭하게 자라서 명실상부하게 상당한 사람이 되기를 노사(老師)의 마음으로 빌었다. 우리 학생들이 잘 할까 조바심하는 나에게 상당고 학생들이 다른 학교 아이들보다 순하다고 위로해 주는 동료 지도위원들의 마음이 따습다. 그리고 봉직했던 학교 학생들과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도록 편성해 주신 본부 관계자의 배려는 더욱 고맙다.
지난 해 큰 애가 생일선물로 보내 준 하와이에서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사람들이 두 부류로 확연히 구분되어 신기했다. 하나는 탄탄한 근육에 선탠까지 하여 모델 같은 몸매를 자랑하며 해변을 누비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걷기도 위태로울 정도로 뚱뚱하여 몸 추단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 금년 9월에 둘째 내외랑 다시 하와이를 가게 되어 나도 기왕이면 관리한 몸으로 해변을 나서리라 마음먹었다. 헬스는 예전 도교육청 장학사 시절에 체육과의 헬스 마니아 장학관을 만나 방법을 배웠더랬다. 덕분에 일에 치이고 상사에게 시달린 선배 장학사들이 출근길에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나서 입원하는 것이 더 낳겠다 푸념하던 중등교육과였지만 헬스하려고 남보다 30분 일찍 출근하는 마음은 늘 가볍고 산뜻했다. 그리곤 부임하는 학교마다 헬스장을 만들어 직원들과 같이 운동을 했던 터라 금년에는 근력도 키울 겸 아예 몸짱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집 인근에 있어 이용에 편리할 듯 여겨지는 헬스장을 얼마간 둘러보니 하루 종일 득시글득시글하다. 오전에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오는데 이미 개장 이삼십 분 전에 문밖에서 옹기종기 모여 기다릴 정도로 운동에 몰두해 있다. 이 분들은 운동 반 잡담 반이라 점심 무렵이면 실내가 온통 시끄럽다. 평창 올림픽이 아니라 평양 올림픽이라 분개하는 것도, 문재인이 문제 인이라며 이러다 멀쩡한 우리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넘겨주겠다는 등 목청 돋워 대통령을 성토하는 등 장안에 회자되는 가십 뉴스는 저절로 알게 된다. 이젠 집에서 별도로 뉴스 볼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왕왕 젊은 사람들이 오전에 리시버 쓰고 러닝머신을 달리는 것은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이 연배라면 이 시간에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도 부족할 판인데 하릴없이 헬스장에서 땀이나 빼고 있다니. 우리나라 경제가 빨리 좋아져서 젊은 사람들이 모두 직장에서 땀내 일해야 사회도 안정되고 연금소득자들의 미래가 평안할 텐데 정치하는 사람들의 눈과 머리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런 걱정스러운 현상을 못 보는지 원. 점심시간 대에는 하체가 발달한 소위 형이하학적인 사람들이 머신을 열심히 걷거나 심지어 비명까지 질러가며 땀을 내고 있다. 이들은 미스코리아처럼 날씬한 다리가 소망이거나 두툼하게 털렁거리는 뱃살과 허릿살 때문에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이겠다. 오후에는 말총머리로 가슴을 열어 제친 사람도 있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나 했음직한 휘황찬란한 목걸이랑 귀에도 서너 군데 피어싱을 한 남자가 걸어 다닌다. 헬스장에서 온갖 사람들을 다 보니 그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인 듯하여 은근히 재미있다. 헬스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운동으로 다진 몸매를 과시한다는 것이다. 가슴을 돋운 사람은 가슴을 한껏 내밀고 다니고, 기구 운동으로 활배근과 이두박근 삼두박근을 돋운 사람은 한 겨울에도 민소매 티셔츠로 등판근육과 장딴지 같은 팔뚝을 자랑한다. 물론 가슴도 볼품없고, 등판이나 팔뚝도 별반 내세울 수 없는 사람들은 다소 위축된 모습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기구에 매달려 있고 말이다. 저 사람들도 언젠가는 민소매로 주위를 휘젓고 다니겠지. 남녀를 막론하고 가슴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가보다. 저리 가슴을 내 밀다가 자칫 갈빗대가 밖으로 튀어 나오거나 아니면 뒤로 넘어갈까 보는 사람이 염려스러울 정도이니. 어쨌거나 여기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자기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설령 가슴을 내밀고 다녀도 더 낳은 자기를 만들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니 다 용서가 된다. 다만, 시방 대한민국이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돌아가는 듯하여 염려되는 시점에 몸매 관리와 더불어 내공도 함께 키우는 노력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주마가편 식으로 든다. 요즘 광고로 나오는 '독서는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도 그런 뜻이겠지. 아뿔싸! 이따금 부지불식간에 나도 가슴을 내밀고 있네. 근묵자흑이런가.
퇴계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의 부설 교육기관으로 '도산서원 선비문화 수련원'이 있다. 수련원 프로그램 진행을 담당하는 분들을 지도위원이라 하는데 초·중등교장으로 퇴직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수련원에서는 심도 있고 감동 주는 프로그램 운영을 위하여 지도위원 연찬회로 교육 역량을 돋우려 1일 또는 1박2일로 연중 서너 차례 진행된다. 전국에서 오느라 대부분 새벽 일찍 출발했음에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90분내지 120분 단위로 진행되는 연찬회에 시종일관 자세 흐트러짐 없이 참여하여 놀랍다. 이 분들을 보며 단재교육연수원 근무시절 교장선생님들이 시간 엄수와 강의 집중은 물론 수료식 후에 강의실 좌석까지 정돈해놓고 나갔던 기억이 났다. 전국에서 엄선된 위원들의 집중된 분위기는 이사장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로 더욱 빛을 더한다. 이사장님은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경제기획부 장관을 역임하셨는데, 기획부 고위직에 있을 때 부내 사람들이 김병일에게 브리핑을 하느니 차라리 감사원 감사를 받겠다 할 정도로 철저하고 예리하다. 사학 전공답게 퇴계선생 시를 수백수 암송함은 물론 관련 지식과 위엄이 지도위원들을 압도한다. 여기에 학봉 김성일의 주손인 김종길 원장이 후덕하게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10여 년 전 퇴계 종손 이근필 옹의 발의로 마련된 수련원에 날개가 돋친 셈이다. 매년 해외 유교문화 유적지 탐방으로 안목을 넓히는데 금년은 4번째 답사로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중국 낙양과 개봉 등지로 정호 정이 형제 묘를 참배하고 숭양서원과 백거이 묘소 그리고 범중엄 묘를 답사하고 겸하여 룽먼 석굴도 오른다. 이번에는 신참인 나도 선배들의 얼굴을 익힐 요량으로 참여하였다. 역사 전공자로 충분한 답사 경험이 있었기에 탐방을 심드렁하게 여겼던 마음은 준비 단계에서 무너졌다. 120쪽 분량의 안내 책자를 몇 주일 전에 나누어 사전 공부를 하도록 한 것은 그렇다 치자. 동반하신 곽위원님은 답사 첫날에 앞선 중국 답사에서 느낀 필요로 52쪽 분량의 간자체 공부책자를 표지에 지도위원 이름까지 적어서 나누어 준다. 그것도 사비로 말이다. 덕분에 길거리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고 더불어 중국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간 듯 하니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장시간 이동 중에는 고개를 떨구고 잠을 자는 것이 여행객들의 일상이건만 안내 책자랑 간자체 책자 공부하는 분들을 보니 버스 뒷좌석에서일지언정 어찌 눈을 붙일 수 있으랴. 이렇게 아카데믹한 코스에 이토록 점잖은 손님은 10여년 안내 생활에 처음 봤다고 가이드도 놀란다. 이런 코스는 교수들이 이따금씩 오는데 비석의 글자까지 세세히 확인하는 우리가 전공자보다 더 학구적이며, 게다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품위와 더불어 무언가 여느 관광객과는 아주 다르단다. 기가 질려 있는 가이드 덕분에 문화유적 안내 대신 가이드의 가정사 같은 소소한 이야기로 설명을 듣게 된 것은 원하지 않는 얻음이었다. 버스 안에서 여성 지도위원들이 번갈아가며 수시로 나누어주는 간식거리에 입은 즐거우나 내년 답사부터는 나도 이렇게 해야 하는 생각에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이렇게 시간을 아껴 공부한 열정 위에 이론과 실천을 습합한 수련이라면 그 교육적 성과는 가히 불문가지이다. 경륜과 교육적 경험이 돈후한 지도위원이 진행하는 선비문화수련원 프로그램을 그 누가 넘어서겠는가. 선배 지도위원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화려했던 이력을 갈무리하고 현직에 있을 때 여러 제약으로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던 인성교육관련 아쉬움을 이제 여유시간과 능력이 남아 있을 동안에 재능기부차원으로 풀어내고자 거경 정진하고 있구나! 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선생의 가르침(所願善人多)을 좇아 머리로 배우고 가슴으로 실천하려는 이분들이 바로 '작은 퇴계'가 아니런가.
단양 잔도에 있다면서 보낸 지인의 사진에 습정투한이라는 단구와 '고요함을 익히고 한가로움을 찾는다'는 풀이가 있다. 직역으로는 '고요함을 익히고 한가로움을 훔친다'이나 훔친다는 말보다 찾는다는 말이 더 살갑겠다. 직장 다닐 때보다도 요즘 더 바쁘게 산다는 집사람의 핀잔을 듣던 차에 너무 바쁘게 살지 말라는 충고인 듯 하여 배려가 고맙다. 퇴임을 한 달 앞 둔 친구가 불안하다며 조언을 구하는 밥자리를 마련하겠단다. 호수가 바라보이는 식당에서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을 사이에 두고 6개월여 퇴임 경험의 변을 풀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고, 만나야 하는 사람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보게 되며, 메인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더라'는 요지였다. 그러면서 하고 싶은 일을 선택과 집중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동안 못한 아쉬움을 해소하려다 자칫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을 입증할 수도 있으리란 공갈도 덧붙였다. 아무리 친구지만 퇴임 선배인 나를 어찌 따라올 것인가. 그러니 내 말을 귀담아 들을 밖에. 40년만의 기록적인 한파가 맹위를 떨쳤던 겨우내 집안 온도가 한층 더 내려가는 1층 거실에서는 조반 후 차만 마시고 햇볕 담뿍 들어오는 2층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금을 잡기도 하고 중학교 2학년 때 나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최신 본으로 다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집안 할아버지가 6학년 때 빌려준 책이 『호머』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다. 그 덕에 세계사에 대한 흥미가 생겨 급기야 역사를 전공하게 되었음에 새삼 감사를 드렸다. 사람이 살면서 문사철(文史哲) 세 가지에 집중하면 아쉬움이 없다 했거늘 역사를 통해 접근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고맙다. 아울러 그동안 잡는 시늉만 했지 숨도 많이 넣어주지 못한 대금에게 깜량껏 김을 넣어주니 이제사 화답해 주는 듯 하여 사랑스럽다. 대금정악 인간문화재 금정 김응서 선생이 생전에 대금을 짚어주며 대나무 한 마디만큼 불면 한 마디의 내공이 쌓이니 소리를 좋게 하려면 부는 것 이외의 왕도는 없다고 누누이 하셨던 말씀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한파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한파관련 안전문자가 울려도 햇볕 밝은 방에서 대금과 독서에 정을 쏟는 나는 홀로 여유롭고 따스하다. 마침 선배가 요즘 어찌 지내는가 묻기에 습정투한을 원용하여 '고요함을 즐기고 한가로움을 익히고 있습니다.(요정습한-樂靜習閑)'로 답을 드리니 우습다. 고요함을 즐기고 한가롭게 된 형편을 몸에 익힌다는 말이 내 깐에는 참으로 재치 있는 답이다. 마음이 한가롭지 못하면 고요함을 괴로움으로 인식하게 되고 한가로움을 한껏 포장하여 심심하다고 말은 하지만 속내는 외롭고 쓸쓸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구망투한(求忙偸閑-바쁨을 구하며 한가로움을 훔친다)에 익숙해 있다. 내가 만약 술을 즐겼더라면 심신을 황폐하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우나 중요하니 이 마음 내려놓기를 어떻게 수련해야 할 것인가. 들뜬 상태로는 어드레스를 잘 했다 손 골프공도 못 띄우고, 대금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함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내려놓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짬을 내어 정심투호나 활 내기로 집중을 연습했던 것이니 이런 것이 경(敬)한 자세로 처하는 일환이요 자족하는 처세였다. 그런데 습정투한은 직에 있을 때의 망중한의 다른 의미라, 이를 요정습한으로 바꿔도 미진하니 차라리 완정서한(玩靜棲閑)이 낫겠다. 고요함을 차분히 즐기며 한가롭게 사는 것이 습정투한보다야 한결 더 편안하고 내 격에 맞지 않겠나. 이제 누가 어찌 사느냐 물으면 이태백처럼 웃으며 답하지 않아도 마음이 한가로우면 정말 좋겠다. 마음이 한가로우니 만사가 여유롭다고 말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영화 「킹스맨」에서 콜린 퍼스가 건달들을 혼내고자 술집 문을 잠그며 하여 귀에 익숙한데 요즘 세태에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여겨진다. 춥지 않던 어느 날 오후에 골프 연습장에 갔더니 30대 초 중반의 젊은이들 서넛이 남들은 열심히 일할 주중에 연습하러 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 타석 앞자리에서 연습하려 장비를 펼치는데 하라는 몸으로 하지는 않고 순전히 입으로만 연습을 하니 소리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인다. 골프처럼 이설이 분분한 운동도 없어서 백인백색의 이론이 난무하긴 하지만 시범하는 폼을 보아하니 그다지 잘 치지도 못하면서도 친구에게 잔소리를 해 댄다. 주위를 살핀 자그마한 소리도 아니요 목청 돋운 지적 질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골프는 멀리 있는 작은 볼에 집중을 해도 맞추기 어려운 운동이라 타석에서의 침묵은 매너요 에티켓이다. 그래서 통상 대화를 하려면 로비로 들어가는 것이 기본이다. 이 사람들은 주위에 자기보다 훨씬 연배 높은 어르신들이 연습중인데도 조심은커녕 연신 떠들어대고 심지어 큰 소리로 낄낄거리기까지 한다. 내심 '조용히 해 달라'는 말을 품위 있게 하고 싶어도 자칫 무례한 녀석들에게 봉변당하면 더 망신이라 꾹 참으려니 뭉게뭉게 분노감이 피어오른다. 소음을 무시하고 골프공에 더욱 집중을 하느라 한 시간여 마음 수양하느라 공을 치느라 힘든 연습을 하였다. 시끄럽게 굴던 사람들이 떠나자마자 연습 타석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탄식을 하니 나만 불편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꾸짖지 못하는 이 사회여! 킹스맨의 해리처럼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며 따끔히 혼내주고 싶었던 속마음이여! 도대체 우리나라가 어찌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얼마 전에 부모들이 아이가 식당 안을 휘젓고 다녀도 기죽이면 안 된다며 기를 살린 결과인가. 프랑스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엄하게 다스리기 때문에 공중도덕에 대한 개념이 철저함은 물론 슈퍼마켓에서 물건 사 달라 떼쓰는 자기 아이의 뺨을 철석 갈기는 부모도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너무 기를 살린 때문에 유아독존식의 매너 없는 성인으로 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다. 요즘은 식당에서 전처럼 종횡무진 뛰어 다니는 아이들이 별로 없는 대신 부모 따로 아이 따로의 식사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아이에게 휴대폰을 들려주어 폰 삼매경에 빠지게 만드니 같이 식사를 하러 왔는지 합석을 왜 하고 있는지도 의심가게 하는 한심스러운 풍경이 자주 보인다. 저러려면 돈 들이고 시간 내어 식사를 왜 하러 나왔는지 모르겠다. 어린아이의 뇌 두께가 어른보다 얇아 전자파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또 어떤 모습을 보일지 자못 염려가 된다. 이런 것도 방종하게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려니 매너가 사람 만들 기회를 주지는 못할 듯하다.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은 어땠을까. 반듯한 집안에는 가풍이 있어 아이들은 집안의 위신과 전통을 지키도록 교육을 받는다. 장성하며 아이의 뇌리에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안 문중이 함께 한다는 생각을 평생 하고 산다. 이렇기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있고, 집안이 있으며 조상과 후손이 나를 지켜볼 것이라 여기므로 나는 문중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사회와 역사의 평판을 받을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혹 잘못하는 아이를 보면 '너의 집안은 어떻게 되는가·'로 꾸짖었으며, 못된 녀석을 지칭하여 '애비도 없는 후레자식'이라 했던 거다. 자식 교육은 온전히 가정과 사회의 책임으로 예절 바른 사람 즉 매너 있는 모습을 키워갔더랬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예절바른 젊은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회가 될까. 어떻게 해야 매너를 최고로 여겼던 옛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되 살아날꼬.
우리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서 초등학교 6학년 때 12시까지 선생님과 함께 야간 학습을 한 세대이다. 대학도 예비고사로 본고사 응시 자격을 딴 뒤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렇게 공부하여 대입 본고사를 치르러 갔다. 시험 보기 바로 전날 저녁자리에서 고전 전공 교수가 출제 들어갔으니 내일 국어 시험에는 고전 문제가 많이 나올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뿔싸! 입시는 코앞에 닥쳤는데 이거 야단이다. 왜냐하면 이과를 선택했기에 당시 문과만 선택할 수 있는 국어 2 즉 고전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다 포기하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느냐, 아님 운에 맡기고 일단 시험을 치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잘못 받은 진학지도에의 후회는 이미 늦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다행히 가방에 넣어 온 하휘주의 『고등학교 국어 2 자습서』를 만지작거리며,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놀라게 해 드리는 것보다 혹 초치기라도 하여 소득을 얻고자 그 책에라도 매달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하숙집의 경주에서 시험 보러 올라온 학생들은 경상도 사람답게 시끌벅적하다. 저녁 후에 야식으로 엿에다 떡을 사서 같이 먹자는데 도시 같이 어울릴 내 처지가 아니다. 주인에게 밥상을 부탁하여 2인용 개다리소반을 하나 빌린 뒤에 갓 전등의 선을 최대한 늘여 상을 밝히고는 고전 공부를 시작하였다. 앞에서부터 읽고 다시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어 한권을 독파하자 어언 새벽이다. 공부에 몰입하니 왁자지껄하던 옆방 소리도 안 들리고 흐릿한 백열전등 아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있는 나만 땀나게 공부를 하는데 겨울 사방이 휘휘 적막하다. 다음 날 국어 시험 문제를 보니 소문대로 임모 교수님이 낸 고전 문제가 빼곡한데 신기하게도 어젯밤에 공부한 내용이 또렷하게 기억나서 시험을 무난히 치렀다. 게다가 후에 확인해 보니 90점 이상의 점수까지 받았네. 만약 지레 포기하고 집으로 갔더라면 근동에 대학 물 먹은 사람 없는 시골구석에서 큰 아들 공부시키려 고생한 부모님은 얼마나 낙담하셨으며 재수하느라 시간과 경비를 곱으로 들이느라 힘은 또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나. 내야 지극히 평범한 머리인지라 고3 1년 공부를 하룻밤에 해 치운 것은 똑똑한 두뇌가 아닌 절박한 사정에서 비롯된 궁즉통이라. 주역(周易)에서 이른 바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궁하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의 사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가업으로 청주 인근에서 두부공장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의 두부는 나름 네임밸류도 가진 견실한 지방 회사였는데 여기에 대기업이 눈독을 들이면서 사정이 악화되었다. 종업원 임금도 체불하는 것은 물론 이러다 노숙자로 거리에 나앉게 되겠다는 불안감에 식은땀을 흘리느라 잠도 못 이루었단다. 여러 가지로 걱정하던 차에 중소 두부업체가 연합을 하여 대기업에 죽기 살기로 대항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추진하니 청주에 또라이같은 두부사장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정이 좋아졌단다. 결국 그토록 바라던 종업원 임금도 제 때에 줄 수 있음은 물론 여유가 생겨 지금은 공장 인근에 푸드 랜드를 조성할 웅대한 계획까지 품고 있다. 확 죽어 버릴까 도망을 칠까 여러 가지 생각이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한 덕분이라 하니 역시 궁즉통의 경우이다. 우리 베이비 붐 세대들이야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살펴 자란 덕에 어려운 환경을 배겨낼 수 있건만 부모님의 헌신으로 온실 속에서 자란 우리 아이들이 문제이다. 힘든 일에 감당할 능력이 있을지, 이따금 나오는 연예인 자살 소식같은 것도 역시 심약한 소치가 아닐는지. 모두들 막중한 인생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나 '이 세상에 쉬운 일이나 거저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못 이룰 일도 없다'는 인생 선배들의 지혜로운 말이 그냥 생겨났으랴. 궁하면 통한다!
지인이 다문화가정 웅변대회 시상식에 와서 시상을 해 달라기에 마지못해 참석하게 되었다. 이런 자리가 불편하므로 안 가려 했건만 주최하는 분의 협박어린 참석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가서 보니 도지사배 웅변대회 시상식이었으며, 축하차 모인 사람들이 식당을 꽉 채워 나름 풍성한 분위기였다. 시상식 축하인사로 전에 청주시정 책임을 지냈던 분이 나섰다. 그 분이 진천군의 수장이던 때에 특화사업으로 비단 잉어를 길러 적지 않은 량을 일본에 수출했다. 그런데 일본의 잉어 양식업자가 진천의 싱싱한 잉어를 사려고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왔단다. 일본에도 잉어가 있고, 우리가 수출하는 잉어도 있는데 무엇 하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에도 물론 잉어가 있지만 여러 해를 일본 내에서 근접 교배하다 보니 종자가 나빠져서 더 좋은 품종을 만들고자 한국 잉어에 눈을 들였다는 말이다. 축사한 분은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다문화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하니 한편 일리가 있다. 수백 번 외적의 침입을 받은 우리나라가 문자 그대로 단일민족인지도 불분명하거니와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인 기여를 하면 좋은 일이겠다. 역사를 통해 보면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정치의 중흥을 살필 수 있다. 당 태종은 자기를 죽이라고 건의했던 큰형 건성의 측근 위징을 간의대부에 이어 재상으로 중용하며 직간을 참고 받아들인 때문에 성군이 되었고, 조선 태종도 관원들의 쓴 소리를 거부하지 않고 조심하여 조선 5백년의 틀을 마련했다. 요즘 사회 분위기가 자기와 다른 견해에 대하여 너무 매몰차게 대하고 있어 염려된다. 나와 다른 의견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 그 저간에는 상대의 존재와 인격을 존중하는 조심스런 살핌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다르다고 하여 나쁘거나 제거해 버릴 생각을 한다면 조선 후기 당파싸움과 다를 바 없으며, 이는 사회 발전에 역행되는 폐단을 초래했던 것을 우리는 교훈으로 배운 바 있다. 정가와 사회 일각에서 나와 다른 견해를 인정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배척만 한다면 역시 지나친 경직이다. 다양성을 수긍하는 것도 다문화일진대 말이다. 시상식 뒤풀이로 열린 노래 마당에서 입상자 중 한 여성이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이래저래 정이 들면 호박꽃도 꽃이 랑께"라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하는 분위기가 진지하여 가사를 살펴보니 왕년의 가수 김세레나가 불렀던 '짚세기 신고 왔네'의 노랫말인데 다문화교육 관련 관계자가 모인 식장 분위기와 잘 맞는다. 머나먼 이국에서 한국 남자를 바라고 시집을 와 보니 부푼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컸으리라. 그럼에도 기왕지사 이렇게 만났으니 잘 살아 보겠다는 다짐이요, 맹세의 분위기로 부르는 태도와 가사 내용이 매우 절절하다. 약속의 땅으로 여기고 들어온 약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주변의 우리가 좀 더 살갑게 대해주고 배려해준다면 이것도 민간외교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들어온 사람들의 친지들도 주변에 한국인의 따스한 마음을 알릴 터이고 이는 즐거운 방문으로 지속되리라. 그래서는 안 되지만 설혹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시집 사람 또는 이웃의 냉대 등 호되고 나쁜 기억이 있다면 어찌 한국을 좋아하랴. 결혼을 통해 특별한 인연을 맺으러 온 사람들이 남편의 나라를 좀 더 잘 알고 배우려 하는 태도가 고맙다. 그리고 데리고 온 아이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는 것도 아름답다. 내가 먼저 상대를 위하여 변화하며 작심하고 좋은 가정을 일군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라는 말의 결실이리라. 우리의 인생도 별거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