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고마운 분이 한 두 분이 아니랴만 나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 가운데 한 분이 이해준 교수님이시다. 이 분은 고등학교와 대학 선배에다 대학 때 은사이나 배움이 큰 때문에 선배라기보다는 은사님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과 4년 선배로 이미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고도 나에게 부러 찾아와 고등학교 후배가 역사과에 들어와 반갑다 인사하여 첫 만남으로 뵈었다. 얼빵한 신입생의 눈에 비친 모습은 훤칠한 키에 활달하며 매사에 자신이 있었고 특히 배구를 잘 하여 약간의 짬이면 코트에서 후배들과 같이 운동을 하는 소탈한 성격이셨다. 후일 교사가 되어 학교 대표로 배구대회에서 뛸 수 있었고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같이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선생에게 배운 바였다. 사실 전에는 배구에 어줍었는데 이 선배에게 교사들이 직원체육시간에 배구를 많이 한다는 말을 듣고는 점심시간을 활용하여 체육과 동기들에게 배구를 배웠더랬다. 그 결과 이 친구들에게 배운 스파이크와 더불어 블로킹을 체육 전공자만큼 잘 하게 되었다. 초임지인 괴산중에서 괴산여중고와 괴산고 3개교가 친선 체육대회를 돌아가며 하는데, 젊고 빠른지라 수비 범위도 넓고 스파이크 포지션으로 괴산고 처녀 선생의 눈에 들어 총각 신세를 면하게 되었으니 대학 때 배운 배구가 인생의 소중한 보물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 3학년 때 이 선배님을 강의실에서 다시 뵈었다. 그 때 강좌가 실학이었는데 담헌 홍대용에 대하여 제출한 보고서에 붉은 글씨로 평을 달아 다시 받아본 충격! 이제껏 내 글을 이리 자세히 봐 준 분은 처음이었으며 인용 부분과 제출자의 생각 차이점의 명쾌한 지적에 혀를 내 두르게 되었다. '시대의 전환기에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처신했을까·' 하는 명제도 이때 생겼다. 그 공부 결과를 정리하여 조선 후기 마지막 실학자로 일컬어지는 최한기 관련의 박사논문 제목을 정하게 되었으니 기이하다. 운동을 즐기는 것 까지는 좋은데 휴일이면 어슴푸레한 새벽에 테니스 라켓을 메고 나가 어두운 밤에 들어오는 것이 비일비재하니 어느 마누라가 좋아하겠는가. 아내의 비방(祕方)은 잔소리 대신에 박사학위 응시원서를 슬쩍 던져놓고 하회를 기다리는 거다. 여기에 걸려들어 박사코스를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사회 사상사 분야로 졸업 심사에 부쳐질 수 있었다. 외부에서 심사위원 두 분을 모시는 김에 석사 지도교수이셨던 당시 충남대 정덕기 총장님과 학부 때 실학 강의를 해 주신 이해준 교수님께 부탁을 드렸다. 다섯 분이 한 챕터씩 맡아 심사를 하는데 이 교수님은 다른 분보다 한 두 시간 먼저 오셔서 차 안에서 당신의 몫 외의 다른 심사위원 분담의 논문까지 문제점을 꼼꼼히 지적하고는 예상 질문에 대한 답까지 마련해 주셨다. 속내를 알지 못하는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다대한 수정 지시를 기일 내에 완결해 오는 것이 신기할 밖에. 미둔한 내가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선생님의 따스한 지도 덕분이다. 이 뿐인가. 고교 국정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게 된 것도 당시 국사편찬위원회 편수부장으로 계시던 선생님 덕이라. 한강 이남의 유일한 집필자라는 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모든 역사 전공자의 로망이요 등용문인 국편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편을 2년 동안 드나들며 장득진 연구관도 사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선생님께 감사할 일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제자가 먼저 퇴임을 하고, 금년 2월에 선생님도 대학 강단에서 내려오시어 뜰에 핀 매화꽃 향기를 맡게 되셨다. 마침 올 4월 9일부터 21일까지 열리는 퇴계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가 열린다. 귀향길 한 구간인 충청권 지역이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걸으며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리라. 나에게 따스한 정으로 추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다. 다른 사람에게 나도 그렇게 기억된다면 더 좋겠다.
우리가 피리라고 잘못 말하는 대금은 신라 시대 이래 내려오는 악기로 '천년을 잇는 소리'로 만파식적이라 불린다. 대금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는데 내 능력으로 두 가지를 다하는 것은 무리거니와 조선 명신 맹사성을 닮고자 한 연유로 정악 대금만 제대로 잡고자 하였다. 정악 대금은 산조대금보다 길이가 더 길어 소리가 깊고 부드럽다. 대금을 잡은 것은 내 인생 아주 잘 한 일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으나 음악적 소양도 부족하고 재능까지 미천하여 도대체 소리에 진전이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숨도 딸리니 점점 대금을 잡는 것이 힘에 부침을 체감하게 된다. 그만큼 소리는 나빠지고 말이다.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후회를 느끼지 않는다면 나름 훌륭하게 산 증표라는데 기운 있을 때 대금도 열심히 할 것을..... 그럼에도 대금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허전하여 혹여 1박 2일의 출장에도 갖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마치 고불 어른이 주야장창 대금만 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조선 후기 대금 명인 정약대 선생은 매일 인왕산에 올라 수연장지곡을 불어 한곡에 모래 한 알을 짚신에 넣어 모래가 가득 찬 뒤에야 산을 내려왔다 한다. 이처럼 분신으로 대금을 대해야되거늘 이따금 생각날 때 대금을 잡으면서도 소리가 안 좋다고 성깔부리니 노력은 없이 요행히 일확천금을 노리는 속인의 자세와 진 배 없다. 요즈음은 대금 소리를 낸다기보다 조식의 방편으로 대금을 잡는다고나 할까. 숨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고 대금을 부는 것은 날숨이지만 들숨을 깊이 들이마시다 보면 운기행공까지는 안 되더라도 명상 비슷한 단계에는 가게 되므로 대금 소리는 하루 시작의 윤활제로 가름된다. 금년 1월에 터키를 가게 되었다. 패키지 여행의 특성 상 여분의 시간에는 대금에 숨을 넣고자 두 자루를 케이스에 고이 담았다. 그런데 세변의 합이 115cm를 초과하므로 기내 반입이 불가하단다. 정히 나 갖고 가려면 16만원의 별도 수하물료를 내야 한다는데 소중한 악기를 짐칸에 넣는다는 손상의 우려와 함께 32만원의 왕복 비용 부담도 솔치 않다. 주차장이 없이 빼곡한 장소에서 할 수만 있다면 주머니에 차를 구겨 넣고픈 심정으로 직원에게 처리 방안을 묻자 가까운 택배에 맡기란다. 하는 수 없이 일당 8천원의 보관료로 모 택배회사에 맡기고 오려니 어린 아이를 고아원에 두고 오는 심정이라. 여행 때 매양 어깨에 둘러메던 대금 가방이 없으니 무언가 빠진 듯 영 허전하다. 탑승 대기를 하면서 다른 항공사도 둘러보니 휴대 수화물 규정이 158cm이라 여기도 기내 반입은 어렵겠다. 9일간 곁에 있어야 할 놈이 없어 아쉽고, 이따금씩 조반 후 여분의 시간에는 없는 대금이 그립다. 모처럼 큰 마음먹고 장만하여 이제야 제법 손때가 묻기 시작한 대금이 추운 날씨에 터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불안한 마음도 든다. 한 겨울에 국악하는 지인들과 회식을 할 경우에 다른 사람들은 악기를 차에 두고 내려도 우리 대금 잡이들은 꼭 방에 안고 들어가서 밥을 먹었기로 말이다. 자! 대금이 없으면 허전하니 이참에 항공사 규정을 살펴 갖고 나갈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던 차 묘안이 생겼다. 대금을 나누어 짧게 하면 되지 않을까· 청주에서 대금을 만드는 범천공방에 들러 범천선생에게 말하자 이미 하나 만들어 불기도 한다며 즉각 청공과 지공의 중간 부분을 나누어 소금 길이로 만들어 주겠단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게 해 준다니 다행이다. 소리도 마음에 든다. 이렇게 하여 여행용 대금인 분절대금이 내게 다가왔다. 이제 여행 중에는 캐리어 안에 넣을 수 있으니 인도에서처럼 공항 직원에게 대금이 악기임을 증명하고자 불어 줄 일도 없겠다. 그런데 이 분절대금을 갖고 얼마나 그리고 언제까지 비행기 여행을 할 수 있으려나· 정조대왕이 규장각 주합루 앞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신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일모도원(日暮途遠-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구나)이라!
가깝게 지내는 건축학 전공 교수 두 분이 필자의 도산서원 출입을 궁금해 하더니 아예 도산서원 답사에 설명을 해 달란다. 평소 도산서원 관련 공부는 조금 했기에 역사적 사실이나 연유 설명이야 하겠으나 건축 관련으로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터였다. 기껏해야 도산서원의 전체 구성이 삼진식의 배치에 전학 후묘의 전형적인 형태요, 단층팔작지붕의 전교당에 광명실이 장서고라서 통풍을 유념하여 누각 식으로 건립되었다는 수준인데 이 정도로야 어디 전공자의 안목에 부응하겠는가. 궁즉통이라! 무심히 넘나들던 출입문 하단에 결구된 북 모양 나무 장식에 눈이 간다. 무슨 이유로 이 같이 구성했을까· 선생 사당에 후학들이 배알 방문하는 순서는 곡구암에서 현재 현판이 없는 외문을 지나 진도문을 통해 서원 경내로 들어와서 마음을 다시 가다듬은 뒤에 상덕사 내삼문으로 들어가 알묘를 하고는 전교당에 올라 원규 등을 살피고 나서 도산서당에 들러 선생의 체취를 그리워하는 순이다. 그러므로 각 문은 건축상 중요한 위치에 있으리라. 세 개의 문 하인방 밑에는 모두 북모양 장식이 전면으로 돌출되어 있다. 이를 심방목이라 하는데 기능과 그 뜻은 무엇일까. 건축 기법에서는 일각문 아래 흔히 주춧돌이라 불리는 심방석 위에 심방목을 두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다. 이때 기둥의 고정은 인방재가 하는데 일각문은 구조적으로 인방재가 부족하므로 혹여 기둥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둥 앞뒤로 날개처럼 보강하여 모판 또는 여모판이라는 부재를 댄다. 그런데 이로는 한계가 있어 여모판의 지지를 보강하여 대문을 지탱하는 것이 심방목이다. 일각문은 통상 두 개의 기둥이 지붕을 지지하는 형태라 건물이 전후 횡력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심방목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심방목이 기둥을 받치는 구조이므로 건물의 수명은 심방목이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좁은 처마의 낙숫물과 빗물에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심방목의 모양과 무늬는 어떤가. 불가에서는 축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북을 치며, 시방 세계를 깨우치게 한다는 추상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전장에서는 진격 시에 북을 치고 물릴 때는 금을 쳤으니 북은 전진의 의미이다. 조선 시대에는 성루에 북을 달아 아침과 저녁 시간을 알리기도 하고, 대중들에게 중요 사건을 알릴 때에도 사용되었다. 북을 칠 때에는 마음 심(心)자를 그리며 두드리는데 이는 북소리가 인간 심장의 고동 소리와 비슷한 때문일 것이다. 한편 사찰에서는 용을 설정하여 법을 전하고자 표현하며 첫째 기룡부터 초도까지 9마리의 용이 있다. 이 중 넷째용이 조풍(嘲風)인데 9마리의 용중에서 가장 힘이 세며 반야용선을 극락으로 이끌고자 애를 쓰며 주로 처마 밑이나 건물 밖으로 장식된 용들이나 절을 오르기 위한 계단 주위에 조각된다. 사찰의 계단 끝에 조각된 용과 마찬가지로 가람배치를 원용한 서원 건축에서는 대문에 심방목을 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모시고 있는 선생의 가르침이 북소리처럼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원의 문에는 삼태극이 그려져 있다. 삼태극은 천·지·인을 의미하며 왼쪽으로 회전하는 좌선(左旋)과 반대로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우선(右旋)으로 나뉜다. 내삼문의 우선 삼태극은 음의 시간이라 죽음의 세계로 결실을 나타내며 궁극적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뜻이다. 진도문에 그려진 삼태극은 좌선이며 진도문 심방목에도 같은 그림이 있다. 좌선은 양의 시간이라 생명의 세계로 소중한 생명을 기르고 결실을 맺는다는 뜻이니 서원에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 보리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퇴계 선생이 농암 이현보의 아들 문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당의 문창호지조차 하나도 허투루 만들지 않기를 바라셨듯이, 도산서원 역시 후학들이 선생의 학덕이 누리를 진작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문지방 하나에도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정도면 건축 전공자용 스토리텔링이 되려나.
지난 1월에 친구들과 하려 별렀던 골프 여행을 하필 엘보우 때문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위시한 터키 서부 지역 여행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가이드를 미팅하고 공항을 나와 버스로 한참을 걸어가던 중 아뿔사! 비로소 등이 허전한 것을 알았다. 패딩 점퍼가 길가 철조망에 걸려 찢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되돌아 달려 방금 나온 출구로 들어 가렸더니 떡대 좋은 군인 둘이 총대로 막는다. 내 평생 여행 중에 가방을 잃어버린 것도 처음이요, 민주화를 위한 자유 투사처럼 총대를 붙잡고 들여 달라 사정한 것도 처음이라. 하는 수 없이 저 멀리 떨어진 입구로 뛰어가서 정식 보안검색 절차를 거친 뒤에 간신히 가방 있던 자리로 헐떡이며 가보니 아주 잘 있다. 나의 실수보다도 터키의 안전한 치안과 높은 도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구려 계열인 돌궐과 투르크가 같은 조상이라 역시 형제의 나라이구나. 카파토키아에서는 열기구 타는 프로그램이 있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겁난다는 아내에게 이미 타 본 후배 장교장도 강추하며 전혀 무섭지 않다더라 달래고서야 드디어 일기가 편하기만을 기다렸다. 새벽에 출발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사뭇 기대에 부풀어 있다. 안개를 우려하는 가이드 찰리에게 장맛비도 내가 버스에서 내려 관광할 때는 멈추니 염려 놓으라 했는데 역쉬나, 무려 15일 만에 떠도 좋다는 녹색 사인은 우리의 행운이다. 허허벌판에서 발목까지 빠지는 눈과 새벽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난리이다. 우리 팀이 탈 열기구가 문제가 있어 다른 팀들이 모두 오르고도 30여분 뒤에야 풍선 가격만 4억이라는 열기구에 탈 수 있었다. 어느 덧 1,600여 미터 상공이라 다른 풍선들이 모두 눈 아래 보인다. 두둥실 오르는 것도 못 느끼겠고 풍선 내부 공기를 덥히는 가스 화력 탓인지 그다지 춥지도 않다. 사방을 조망하는데 널따란 설원 위를 형형색색의 열기구가 덮은 풍광은 황홀 그 자체이다. 이때 바로 옆에 서 있던 모녀의 말이 귀에 들어온다. 엄마가 대학생 딸에게 '우리 열심히 살자!'라 말하자 복스럽게 통통한 딸도 '응! 열심히 살게!'라고 즉시 응대한다. 통상 이런 상황이라면 '어머! 정말 예쁘다'라던가 사진 찍느라 바쁠 텐데 차분히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의 포스가 남다르더니 전혀 의외의 말이다. 이동 중 휴게소에서 호기심을 풀자 모녀가 선선히 답을 한다. 이 분은 풀무원에서 1,800여명을 관리하고 있는 박 씨 성의 관리자로 직원관리와 강의 담당이란다. 6살 차이의 남매와 남편의 외조로 바깥 일을 마음 편히 하고 있으며 '열심히 살자'는 평소에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한다. 스스로 일복도 많고 인복도 많은 사람이라 여기며 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베푼 대로 받는다는 신념으로 일을 하고 있단다. 아마 이런 긍정적 마인드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꺼라고 말하는 모습도 당차다. 달덩이 같은 얼굴에 코가 오뚝하고 눈은 크지만 이따금씩 가늘게 뜨는 것으로 보아 추진력과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날 듯 보였다. 참으로 앞날이 기대되니 이런 분들이 많으면 필경 더 좋은 사회가 되겠다. 버스 안에서 셀카도 찍고 서로 눈을 맞추며 소곤소곤 대화도 많이 하여 사이좋은 모녀로 보이더니 열기구에서 얻어들은 대화가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필시 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기에 그 말이 내 귀에 쏙 들어왔으리라. 그럼 나는· 오라버니 같은 시아주버니로서 집안 평화를 이루어야지. 70 되기 전에 언더파를 해 보고, 기왕이면 70 이후에 에이지 슈트(Age Shoot)를 달성해야지. 그러려면 경제력과 친구 그리고 실력과 건강에 운까지 따라야 하는 것이라 타이거 우즈도 아직 못 이룬 거라지만 아무튼 '우리 열심히 살자!'
교사 시절에 교장 교감이 부임 첫 인사로 천시는 인화만 못하다는 말을 하면 바야흐로 우리 학교의 분위기는 영 글렀다 여겼다. 대개 그런 말 하는 사람일수록 인간관계에 배치되는 언행으로 실망을 주었기 때문이며, 업무로 만났으되 남는 것은 관계라고 말했던 필자 역시 이러한 비평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물론이다. 제7차 교육과정이 고시되고 2001년에 전임자의 뒤를 이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파견된 선생님 두 분과 근무하면서 폭주하는 업무 때문에 좀 더 부드러운 사무실 분위기로 좋은 관계 형성에 미흡했고 파견 교사의 애로사항을 충분히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은 지금도 아쉬운 점이다. 그래도 모신 다섯 분 선생님 모두 전문직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파견자 본인이야 자기네 고생으로 합격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지인지감이 있다는 평도 듣게 되었다. 교무부장도 안 해본 사람이 교육과정을 담당하기에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주변의 우려로 걱정하는 교육감님께 2개월의 말미로 국내외 교육과정 관련 서적을 독파하고 타시도 교육과정을 분석하여 전국을 선도하는 충북을 만들 테니 염려 놓으시라 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한 장의 공문으로 학교가 바뀌는 교육과정 업무가 너무 부담스러워 전국단위 워크숍에서는 밤잠을 줄여가며 머리 맞대고 문제점과 해결책 추론에 고심을 거듭하였고, 교육부 관계자들은 곁에서 메모를 해 가며 추이를 정리하는 것이 우리 연찬회의 모습이었으며 그만큼 정도 깊어졌다. 그간 세월이 흘러 그때 연구사와 장학사였던 사람들은 서너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퇴임을 하였다. 작년 여름 무렵에 교육부에서 고위 관료로 퇴임한 분이 교육과정 장학사였던 분들의 근황이 궁금하다고 전화를 하였다. 다행히 연락처가 있어 안부를 전하자 모두들 반색으로 만남을 대 환영하여 역전의 교육과정 용사들이 다시 뭉치게 되었다. 퇴임 이후 오래간만에 만나도 어찌나 반갑던지 떨어졌던 가족을 만난 이상으로 할 말도 많다. 당초 하루 모임이 소회를 풀기에는 부족하다 하여 금년 겨울에는 목포에서 1박하는 모임으로 전개되었다. 이 모임의 좋은 점은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요, 모임 구성원들이 나름 알차고 보람되게 살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강사로, 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외국 교육서적 번역과 강의도 하고,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도 하고, 과수원을 차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다. 장학사 때는 교육과정 대비 교육부 평가로 머리를 경주하더니 나이 들어서도 들을 만한 말이 참 많다. 『7가지 교육 미신』의 번역본을 낸 김 소장은 교육의 이행과 수업 전개 중에 교사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과 인성교육 우선에서 주지주의 교육과 학력의 저하 문제와 현행 혁신학교의 공과를 설파한다. 초짜 농부 권 박사는 사과의 예로 인성교육의 문제점을 끄집어 내는데, 숙련된 농부는 썩거나 상한 사과를 절대 성한 사과와 같이 포장하지 않는단다. 그 이유는 썩은 사과 한 알이 전체 상자를 금방 상하게 하는 때문이며 이런 예로 보건대 한 마리의 어린 양이 나머지 양들에게 끼치는 폐해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일이라며 평준화와 차별화에 대한 비교 논리를 유추해 낸다. 선비는 괄목상대로 만나야 한다니 다음 분기에는 상호 얼마나 발전해 있을까 궁금해진다. 모임이 좋으면 가면서 기대되고 돌아오면서 흐뭇한 느낌이 드는 법이라, 우리가 분명 일로 만났으되 따스한 관계를 느끼니 기쁘다. 이제 인연이 되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퇴계 선생의 유훈을 공부하여 봉사하고 있다. 퇴계선생이 좋아 전국에서 모인 초중고 교장과 행정직 고위관료 출신의 지도위원이 150여명 되는데 이 분들의 경륜과 내공이 깊어 내력을 살필수록 배울 점이 참으로 많다. 퇴임하면 면식이 축소되는데 이런 만남으로 오히려 관계를 넓힐 좋은 기회이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내가 다급하게 부른다. 여간해서 급한 목소리가 없던 사람이라 즉시 나가보니 차 시동이 안 걸린다며 강의 시간에 늦겠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추운 날씨 때문에 배터리가 나갔음을 확인하고 내 차에 태워 대학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래도 당신이 집에 있어서 다행이네'라며 나직하게 고마워하는 소리를 듣는 내 모양새는 어떤가. 벽난로에 땔감 옮길 때 쓰는 귀덮개 모자에 운동용 검정 오리털 파카와 무릎 툭 불거진 회색 기모바지요 신발은 아내가 홈쇼핑에서 구매하여 선물한 방한화이군. 완전 집에서 일할 때의 차림새인데 야단났다! 강의 동안 나는 대학 어느 구석에다 이 복식을 숨기고 있는 담. 늦지 않게 아내를 강의실 입구에 내려주고 나니 내 처신이 난감하다. 기왕지사 요기나 하려 식당에 들어가려다 사람들이 가득하여 도저히 안으로는 못 들어가겠다. 마침 로비에 의자와 식탁이 있다. 오늘은 온전히 나를 위한 자리라 여기자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다. 로비에서 편히 먹기에는 중식이 좋을 듯하여 그 중 제일 값나가는 메뉴로 주문하였다. 외양이 이러니 보상차원에서라도 비싼 놈으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는 식사 후에 그릇을 셀프 반납하나본데 도대체 위치를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 퇴식구 위치를 물었는데 아뿔싸! 여기서 가장 먼 반대편 구석이란다. 이쪽과 저쪽은 끝에서 끝이요, 무려 100여 미터 되는 거리나 되는데 이 많은 식사 군중을 헤치고 가야 한다. 옆구리에 책 한권을 낀 채로 퇴식구로 걸어가노라니 하던 식사나 할 것이지 어이하여 나를 쳐다보는가· 구부정한 모습은 더 아닌 것 같아 목과 허리를 곧추세우고 발걸음을 크게 띄어 보무당당히 걸어가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자 과연 학생들이 볼만 하겠다 싶어 웃음이 나온다. 옆구리에 책을 낀 노숙자 모습과 다름없다. 학생들은 구내식당에 어떻게 노숙자가 들어왔는가 하겠군. 나름 의연하게 식기를 반납하고는 표정을 점잖게 갈무리하고 로비에 앉아서, 가지고 간 『공자와 순자』를 읽으며 시간을 죽이기로 하였다. 일어서면 또 남의 이목을 받을까봐 소변까지 참고 두어 시간 몰두하니 점점 책속에 빠져들어 세상이 멀어진다. 어이하여 생존 시에 실패한 공자는 후세 천년 스승이 되었는데, 현실에서 성공한 순자는 사후에 인정도 못 받으며 그나마 법가로 그의 사상을 이은 진나라는 고작 이십 년에 망했을까 하는 명제로 전개되는 책을 쏠쏠히 읽다보니 어느 덧 300여쪽 분량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드디어 강의가 끝날 시간이라 강의실 앞에서 대기하는데 도무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날은 추워져 다리부터 점차 시려온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오늘은 평소 차 안에 곧잘 두고 다니던 벤치코트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스펀지 목 베게로 무릎을 감싸 추위를 막고 있는데 삼십 여분 뒤에야 아내가 나온다. 사정 급한 줄도 모르고 질문하는 학생에게 답하느라 늦었다는 말을 들으며 시동을 켜자 마음까지 따스해 진다. 집으로 오면서 아내가 다시 고맙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안 그러더니 심리학을 공부하는 때문인지 나이와 더불어 지혜가 늘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고맙다는 말도 자주하여 대견하다. 오늘 주변 사람들에게 품위에 안 어울리는 눈총을 받았어도 아내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어 스스로 흐뭇하다. 앞으로는 기왕의 『도산서원 해설집』과 『시집』 외에 좀 더 두터운 책도 차에 싣고 다니리라. 예기치 않은 외출일지라도 의관을 정제하여 다른 사람의 이목 집중을 받지 않도록 유념하리라. 시일이 어느 정도 지났건만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
한해가 다 가는 마당에 '두루 다행이다'란 말이 뇌리를 자주 스친다. 살면서 그런 말 안 들어본 사람도 없을 터이고 나도 부지기수로 들으며 살아온 말인데 이 무슨 이유로 요즘 자꾸 떠오를까. 그다지 문재(文才)도 없으면서 언론에 글을 올린 지 어언 4년이 지나간다. 글 쓰는 사람은 특별한 재주가 있거나 다대한 학문적 집적이 있어야 가능한 줄 알았는데 천학비재인 내가 이리공 저리공 그 기나긴 시간을 이어왔으니 스스로도 놀랍다. 피치 못하게 펜을 잡았어도 그간 삶을 창조적 반추하고 순간을 주의 깊게 살피게 된 것은 좋은 점이요, 2주가 1주보다 더 짧고 가깝게 여겨지는 것은 비행기 안의 화장실에서 느끼는 초조한 압박감이었다. 덕분에 독서를 열심히 하게 됐고 마음에 드는 글은 별반 없어도 펑크 없도록 글감이 이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단양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차제에 국궁을 배우고자 했다. 활을 내며 지역 어르신과도 교류하고 더불어 선비의 육예(六藝) 중 습사를 배울 심산이었다. 매일 아침 천변을 자전거로 달려 한 시간여 습사의 즐거움을 체득하고 돌아오는 길은 즐겁고 싱그러웠다. 마침 지인에게 받은 진돗개 강아지가 어느 덧 성견이 돼 자전거 앞에서 잘 달려주니 더 좋다. 그런데 이른 봄날 달리던 중에 동네 강아지를 보자마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니 자전거 속도 때문에 포장도로 위에 그냥 나뒹굴어 왼 팔꿈치가 골절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한 번도 안 부러지는데 나는 이로써 4번이나 골절을 당하니 기가 막힌다. 문병 온 사람들이 위로해 준 말은 '그래도 자주 쓰는 오른팔이 아니라 다행이야'로 거의 비슷하다. 하기야 곤두박이는 찰나에 내 왼 다리가 아스팔트로 내리꽂히는 것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이기에 황망 중에도 다리를 구부려 다침을 면한 것은 나도 잘한 행동이라 여기는 일이다. 그런데 깁스를 풀고 나니 어깨랑 팔이 굳어 세수는커녕 머리도 못 감는 것이 문제다.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문지르고 뜨거운 물에 달포 가량 마사지 한 뒤에 간신히 목 뒤로 팔이 가는 이 감격. '내 팔아, 주인 잘못 만나 이 고생을 시키니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모양은 이상해졌다만 그래도 구실을 하고 국궁이랑 다른 운동을 다시 할 수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나이 들어 제일 오래 할 수 있는 운동이 골프란다. 함께 하는 취미가 없다며 같이 해보자는 아내의 권유로 마지못해 입문한 골프에 점차 재미가 들었다. 초보 때는 페어웨이와 러프의 차이도 모르고 샷을 하다가 보기플레이어가 되고 이따금씩 싱글도 하게 되면서 알수록 어려운 운동이 골프라는 생각이다. 아마 다른 운동을 골프처럼 시간 들여 열심히 연습했더라면 진작 프로선수가 되었으리라. 올해에는 언더파를 해 보자는 벽두 결심을 세웠다. 연습을 무리한 때문인지 멋진 몸을 만들어 보려고 근력 운동을 과도하게 한 탓인지 모르나 오른팔 엘보우가 자꾸 아프다. 참다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팔꿈치 인대에 부분 손상이 갔단다. 6개월 정도 운동을 쉬어야 한다는 말에 눈앞이 캄캄하지만 잘만 치료하면 3개월 후에 다시 골프를 할 수 있단다. 수술 없이 주사 치료로도 회복된다니 천만 다행이다.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고마운 생각이 먼저 든다. 젊었을 때는 내 팔베개를 그리 좋아하던 아내가 이제는 팔을 올리기만 해도 답답하다며 잠결에도 뿌리치지만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게다가 나이 든 사람들의 인사가 '잠을 잘 자는가?'일 정도로 불면 때문에 밤 오는 것이 두렵다던데, 아직 그런 걱정 없이 누우면 금방 꿈나라로 가는 것도 참 다행이다. 예전에는 이따금씩 '선물 같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은 '선물 받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과연 시간은 선물이다. 이렇게 좋은 선물도 받고 아주 다행이다. 두루 두루 다행이다.
교육청에서 근무할 때 정부 관료와 좌담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저녁 후 편하게 이어진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자기는 워크홀릭이라고 얼핏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좋아서인지 아니면 승진용 업무평정 때문에 벌려놓은 일의 마무리는 누가 하며 혹 수반될지 모르는 뒤 책임은 누가 지느냐는 질문에 '글쎄요. 누군가가 책임지지 않겠어요?'란다. 한강 발원지 탐사로 전국 학생 탐사단이 조직됐는데 충북 학생 인솔 차 도청 공무원과 함께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답사 후 며칠이 지나 어느 정도 친근해진 저녁 자리에서 타 시·도 공무원이 '우리 도청 공무원들이 죽어라 일하는 것이 도민들을 위해 일하는지 도지사를 위해 일하는지 헷갈린다'고 한마디 한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가 교육청에서 밤 12시 퇴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일하는 것이 과연 교사와 학생 등 학교 구성원을 위한 것인지 교육감과 교육부 평가 대비 때문이었던가?' 자문하게 됐다. 도민의 생활 향상을 위한 각종 정책이라면 일과 더불어 보람을 느낄 것이고, 도지사와 교육감의 재선을 위한 선심성 정책이라면 다만 비용과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후세에 부끄럽고 무책임한 짓이라는 말에 좌중이 고개를 끄떡였다. 정치가들은 입버릇처럼 내 놓는 명분으로 자기의 모든 일들은 오로지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며, 도지사는 도민을 위해, 지방자치 의원은 지방 시민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교육감은 학교 구성원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다가 잠꼬대 할 정도로 말을 한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의도에 정치는 없고 정쟁만 있다는 풍자가 귀에 익은지 이미 오래요, 토론보다 드잡이 질하며 난동이나 부리는 의사당 모습에도 식상한지라. 윗사람들이 이럴진대 우리 사회에 명분과 책임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수 있을지 염려된다. 책임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후하고 남에게 박하다. 일이 잘 되면 자기 덕분이요, 잘 안되면 당연히 남의 탓으로 치부한다. 집권 여당의 총수라는 사람이 현 정부의 경제가 잘못된 까닭은 전 정부가 잘못한 때문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똑똑한데. 이래서야 어떻게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책임은 의리와 통한다. 요즘 건달사회에서도 의리를 찾기 어려워 그런지 모 배우는 의리를 내세워 인기를 만회하고 있는데, 자기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기상이요 기운이며 자신을 향한 의리이다. 원래 선비들의 꿋꿋한 기개와 기상을 사기(士氣)라고 했다. 조선왕조가 500여 년이라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나라 역사를 이어간 이면에는 사기 충만한 선비들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사기라는 말이 단순히 군대 용어로나 지칭되고 있다. 선비는 위기지학으로 공부를 충실히 하며 박기후인의 정신으로 남을 대하며 나라와 임금을 위해 능력을 발휘했고, 청백리를 관리의 모범으로 삼았다. 이들이 절의를 숭상해 후세에 역사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염두에 둔 것은 모두 명분과 책임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한 노인이 만약에 우리나라가 다시 외국의 압제 하에 들게 됐다 가정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독립운동에 가담할는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다. 목전의 이익에 영합해 행동하는 현세 사람들의 행태 지적이라고 동감을 하면서도 씁쓰레하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기(士氣)이다.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후세의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정치인들까지 공공연히 들먹이는 '내로남불'이라는 희한한 말도 사라지지 않을까. 새해에는 책임지는 사람들이 많아져 명분과 사기 충만한 사회로 변모하면 좋겠다.
정석종 교수의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서문에, 지인 명진 스님이 준 '이 무엇고?'란 화두를 작고한 은사 김철준 교수가 꿈에 나타나 '언어도단'이라 가르침을 줬다는 내용이 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논문 읽느라 두 시간 반 정도로 수면 시간을 줄인지 여러 해가 되니 종당에는 꿈속에서도 책장이 넘어가고, 이따금 책의 내용을 지도교수님이 설명을 해 주셔도 미둔한지라 잠에서 깨면 가르침을 베푼 꿈만 기억나고 정작 그 내용은 흐릿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생각나는 것을 메모했는데 '새벽에 일어나 구절을 얻는' 효기득구와 유사하다. 며칠 전의 차담을 효기득구로 정리해 봤다. 몇 년 전에 부강에 차를 아시는 스님이 있다기에 지인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었다. 처음 뵙는 자리임에도 스님이 쓰신 '향기로 장엄한 세계'를 받고, 답례를 미루던 차 이번에야 비로소 뵙고 해 지난 나의 문집을 드릴 수 있었다. 초겨울 기찻길 옆 오두막 산방에서 은제 주전자 안의 물은 끓어 백비탕으로 변해 가고 창 너머 산자락에 비치는 오후 볕은 따사롭다. 서쪽 창틀 너머로는 기와로 켜를 쌓은 담장 위에 자그마한 소나무 분재가 앙증맞게 들여다보고 있고, 스님 뒤편 남쪽 창으로는 소나무 가지 한 자락이 휘영청 늘어져 있다. 스님은 연신 찻물을 다관에 부으며 법문을 여는데 그 내용이 자못 심오하다. 이승이 무언가? 현 시간 바로 지금이 이승인데 지금이 지나면 저승이요, 앞으로 다가올 순간이 극락이라. 지금을 잘 살면 지금 여기가 바로 극락이 될 수도 있으니 마음을 잘 가져야 한단다. 그 마음을 수양하는 삼매에는 정중일여(靜中一如),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 생사일여(生死一如) 등의 단계를 거쳐서 다시 이 한 생각(一念子)을 확 터뜨려 버린 폭지일파(爆地一破)가 있다. 내가 불자도 아니요, 불교 이론도 몰라서 다시 뜻을 살펴보니 고요히 좌선하는 가운데 의심덩어리(疑團)가 드러나서(獨露) 하나가 된 뒤에(일여) 다시 활동하는 가운데서, 나아가서 꿈을 꾸는 가운데서 일여가 되고, 마지막으로 깊이 잠이 들었을 때에도 화두가 한가지로 된 뒤에 다시 큰 깨달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심리학을 전공한 집사람이 곁에서 스님의 말을 거들자 깊이가 더 해진다. 인간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감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의식이 주관해 육감이 된다. 의식은 취사선택을 정하며 여기서부터 업(業)의 단계로 7감이 돼 8감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데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인 말라야식(末那耶識)이다. 8감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도 불리며 함장식(含藏識), 잠재의식으로서 사람이 죽으면 8감 가운데 잠재의식만 남는 때문에 죽어서도 잠재의식이 좋게 남아 있으려면 평소에 의식 갈무리를 잘해 극락처럼 살아야 한다는 요지였다. 의식을 깨어 놓고 지금에 최선을 다해 의미 있게 순간을 유지하면 그것이 좋은 이승이요, 극락이라는 말뜻인 거 같은데 그렇다면 순간에 최선을 다 하라는 말이나 현재에 충실하라는 까르페 디엠(Carpe diem)과 다를 바 없겠다. 현재가 제일 중요하고 그러므로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 대해야 하고 지금 하는 것을 잘 하라는 뜻인가. 그러면서 이즉돈제를 덧붙이신다. 다시 물어보니 이즉돈오사비돈제(理卽頓悟事非頓除), 즉 이치로는 단박 깨달을 수 있어도 현실적으로 쉽게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란다. 어느덧 해는 뉘엿 넘어가는데 도도한 말씀은 그칠 줄 모른다. 인성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현세 개탄에서 시작한 말이 의식으로 진행됐다. 얼결에 들은 법문이나 문외한에게도 고개를 끄떡이게 하고, 여러 가지로 내 놓은 차와 다과가 보기에도 좋고 맛있어 입과 눈 그리고 마음과 귀가 호강한 따사로운 찻자리였다.
모임이 있어서 급히 길을 나섰다. 약속시간은 빠듯한데 그날따라 길이 막혀 다른 차가 죽 늘어서 앞을 가로거치고 하필 신호까지 있는 대로 다 걸려 속을 썩인다. 신호만 걸리면 그나마 괜찮겠다.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왜 이리 끼어드는 사람은 많은 건지 조그마한 틈에도 미꾸라지처럼 끼어들어오니 화가 끓어오른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욕도 못 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이는데 아는 신부님의 얘기가 떠오른다. 이 신부님이 운전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깜빡이도 안 넣고 밀고 들어와 놀란 때문에 욕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라. 성직자 체면에 함부로 욕도 못하겠기에 곰곰이 궁리한 끝에 차 유리창 앞에 신부님이 아는 욕들을 강도별로 10가지 정도 적어 뒀단다. 그러다가 욕 나올 운전자를 만나면 '얘, 너는 몇 번이다. 인마'라고 해 부화를 풀었다는데 그것도 수양이 된 사람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나 같은 범부에게는 요원한 일이고. 다른 날 이런 경험을 거울삼아 시간이 충분하게 길을 나섰다. 가속 페달을 밟지도 않고 천천히 경제속도로 가렸더니 이상하게도 길이 뻥 뚫려 운전하기가 무지 편하다. 평소라면 몇 번은 걸릴 신호도 마치 누가 중앙제어시스템에서 특별히 나를 위해 봐주는 것처럼 한 번도 안 걸리고 무사통과다. 평소처럼 끼어드는 얌체도 없어 기분도 상하지 않은 상태로 참으로 여유 만만한 가운데 약속 시간도 넉넉히 지킬 수 있었다. 참 이상하다. 똑같은 길을 비슷한 시간대에 나서도 이러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단다. 이유는 무얼까. 바로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조바심치느라 주변에 관대하지 못한 게고 여유가 있을 때는 끼어드는 사람에게 느긋하게 길을 내어줄 수도 있고 끼어드는 사람도 얌체가 아니라 얼마나 바쁜 사람일까 이해하는 입장으로 대하니 내 마음도 불편하지 않고, 어쩌다 신호등에 걸려도 정지선을 잘 지킴은 물론 급가속 출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조급함과 여유가 비롯된다. 마음에 대해 살피고 있을 때 마침 퇴계 선생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항상 오래된 병에 괴로워하며 비록 산에 거처한다 해도 책을 읽는데만 전적으로 뜻을 둘 수 없었다. 깊은 근심을 조식하고 나면 이따금 신체가 가뿐해지고 편안해진다. 심신이 깨끗하게 깨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감개가 그에 이어진다. 그러면 책을 물리치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헌함(軒檻)에 서서 연못을 완상한다. 더러 화단에 올라 마음 맞는 꽃을 찾기도 하고 채마밭을 돌며 약초를 옮겨 심고 숲을 뒤져 꽃을 따기도 한다. 어떤 때는 바위에 앉아 샘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한다. (중략) 마음 내키는 대로 가서 자유롭게 노닐다보면 눈 닿는 곳마다 흥이 인다.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이루어지는데 흥이 극에 달해 돌아온다. 그러면 온 집이 고요하고 도서는 벽에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조심스레 마음을 가다듬고 연구 사색하여 왕왕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 하면 다시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후략)' -퇴계선생 문집 중 이 정도면 가히 마음공부의 극강이라 하겠다. 공부가 깊으면 무구(無垢)해진다는데 내공이 얼마나 쌓였으면 자연과 노닐면서 은일유인(隱逸幽人)으로 고반(考槃)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마음이 여유로우면 실수도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너그러워 배려도 할 수 있는데 여유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를 입힌다. 요즘 난무하는 SNS글이 눈을 번거롭게 해도 정작 마음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선생의 정치한 공부 결과를 보면서 우둔한 나 임에도 전한의 동중서처럼 下帷三年으로 장막 내리고 '심경'을 공부하면 혹여 근사하려나 하는 마음이 든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어느 날 제천 모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대상 교육을 요청하기에 '자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법'을 주제로 길을 나섰다. 단풍은 초입이요 황금들판에 날씨까지 화창한데 강의 구상을 하다 보니 어느 덧 학교 앞이다. 농촌지역 학교답게 여남은 명의 학부모가 도서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데 그래도 강의에 대한 엄마들의 반응이 기대를 훨씬 넘어선다. 기분 좋고 활기 넘친 분위기로 2시간을 짧은 듯 마치자 곁에 앉아 있던 담당선생님이 먼 길 오셨는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가란다. 집 나오면 끼니 해결도 나름 신경 쓰이는 일이거니와 선생님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도 없어 식당으로 향했다. 유치원 학생들 앞자리에 앉아 바라보니 손녀 또래의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밥 먹으면서 주위에 관심을 주고 있어 유치원 선생님의 식사 도움 손길이 바쁘게 돌아간다. 이 모습에 나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점심도 맛나게 먹고 안동으로 향했다. 내비가 안내하는 대로 가는 길에 차가 죽령으로 접어든다. 이곳은 군대 말년에 연화봉 정상에서 근무했기에 많은 추억이 살아 있는 고개이다. 예전에 이 고개 마루에서 퇴계선생이 단양 관속들이 관례에 의거 바쳤던 삼을 되돌려 주셨던 일화도 생각하며 산을 거의 다 내려가는 길목에 풍기온천 팻말이 보인다. 시간도 넉넉한 참에 다시 고독한 온천가가 돼 심신을 쇄락하게 해 보리라 마음먹고 차를 돌렸다. 피부에 좋은 온천이라 소문난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의외로 많다. 탕 온도는 기분 좋게 따뜻하고 유황 온천수답게 물이 매우 부드럽다. 언뜻 노천탕 표시가 눈에 띄기에 나가는데 입구에 산소량이 많은 곳이라는 안내 글이 있다. 이번에는 산소 풍부한 산자락의 노천탕을 즐기려 마음먹고 둘러보니 넓은 욕조는 텅 비었고 두 명만 탕 가장자리에 대자로 누워있다. 대중탕 탈의실에서 상체가 실한 사람은 팬티를 먼저 입고, 하체가 자신 있는 사람은 런닝을 먼저 입는다 하던데 이 사람들은 민망한 곳도 안 가린 편안한 자세로 보아 온 몸에 자신이 있나 보다. 맞은편 소백산 자락에는 바람이 솔솔 불어 소나무가 산들거리고 산 고개 위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여간 한가로운 것이 아니다. 탕 안에서 바라보는 내가 홀로 흐뭇하고 여유로운데 이런 정경에 붙여 양나라 처사 도홍경의 시가 떠오른다.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산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에 시를 지어 답함) 산중에 무엇이 있나 (山中何所有) 언덕 위에 흰구름이 많다네(嶺上多白雲) 다만 스스로 유쾌하고 기뻐할 뿐이요(只可自怡悅) 그것을 가져다 임금에게 드릴 수는 없네(不堪持贈君) '산중의 생활이 뭐가 좋아 짐의 뜻도 몰라주고 도대체 나오지를 않는가?' 하는 양 무제의 힐문을 받고, 답을 하고자 입을 열면 헛소리가 되고 생각을 일으키면 어긋나는 법이라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데 문득 산꼭대기에 구름 한 덩어리가 걸려 있단다. 산 위 높다랗게 구름이 걸려있는 모습이 지금 탕안 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자락 위의 구름과 흡사하겠다. 다만 벼슬길과 무관하고 게다가 퇴임한 야인을 조정에서 부를 일도 없는 내야 산중재상으로 불린 도처사와는 한참 다르지만 보고 느끼는 감흥은 비슷하지 않을까나. 따끈한 노천탕에 홀로 앉아 이제는 코까지 골아대는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상큼한 산속 공기와 멀리 산마루를 휘도는 뭉게구름으로 오후가 흘러간다. 이렇게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스스로 유쾌한 가운데 즐거움이 깊어간다.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처녀 때 자주 갔던 창덕궁을 다시 보고 싶어 하시니 모시고 가잔다. 부대 지휘관인 집안 오빠의 눈에 들은 시골 총각을 소개받아 진천으로 시집 와서 어느덧 팔순 중반이라 다리 힘 더 빠지기 전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추억을 되짚고 싶으신 거였다. 후원 관람 예약이 11시 반이라 서둘러 출발했다. 가을 안개가 짙은 시골 길을 큰 아들인 내가 운전을 하고 둘째 아들, 딸 그리고 막내며느리가 같이 출발하는데 차안에서 먹을 요량으로 준비한 것을 보니 완전 소풍길이다.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어도 어머님이 기분 좋으실 때 내는 콧노래를 들으니 함께 하는 우리도 즐겁다. 오늘의 안전운전과 보람된 시간을 위해 다 같이 묵주기도를 올리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주차할 곳은 있으려나? 하는 옅은 불안감으로 창덕궁에 이르렀을 때 마침 딱 한자리가 있어 이동 거리가 짧아졌으니 역시 기도발 덕분인가. 돈화문으로 들어서서 궐내를 둘러본 뒤에 오늘의 목적지인 후원으로 접어들었다. 요행히 미세먼지도 없는 쾌청한 날에 많은 인파가 입구로 모여든다. 명색이 역사를 전공한 큰 아들이 있는데 가이드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가기도 어려워 우리는 자유 관람이다. 고개 넘어 춘당대와 규장각 주합루 및 어수문 등을 의미와 역사적인 일화를 곁들여 보는데 벌써 50명 무리 두 팀이나 우리를 앞지른다. 그러면 어떤가. 피곤하신 다리를 쉬고자 왕세자의 독서 공간인 폄우사 정자 마루에 오르니 우리가 왕세자다. 화창한 햇볕에 마루까지 따스해진 위에 다리를 쭈욱 뻗고 있는데 시간이 우리를 위해 멈춘 듯 하고 마치 기름 가득히 넣은 자동차 계기판을 보는 듯 마음도 넉넉하다. 앞에는 승재정이 높직하고, 아래 관람지에는 부채꼴 형상의 관람정이 아름다이 비치고 있다. 옛 선현들은 물과 정자를 갖춰 거경궁리와 격물치지로 우주의 본성을 논했다 하는데 우리 속인들은 드러난 풍광에만 눈을 두지만 그래도 좋다. 만약을 대비한 등산용 스틱을 어머님께 드리자 창피하게 무슨 지팡이냐고 펄쩍 뛰신다. 오늘 걸은 때문에 내일 다리가 아프지 말라는 예방책이라고 해 간신히 스틱을 손에 쥐어 드렸다. 민폐를 안 끼치려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는 말씀에 자리보전하고 누워계심이 민폐이니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는데 목이 멘다. 돌계단을 오르내릴 때 부축을 해 드리자 괜찮다 하지 않고 손을 꼭 잡아 의지를 하는 손끝이 아련하다. 우리 어머님이 그새에 이렇게 늙으셨구나. 가을 햇볕은 찬연히 빛나건만 속가슴은 시리고 눈물이 어릴 정도로 슬프다. 이윽고 바로 옆 창경궁으로 접어드니 창덕궁보다 훨씬 호젓하다. 높은 자리인 자경전 터에 앉아 건너편에 보이는 서울대 병원에서 17살 때에 근무를 했던 경험과 그곳에서 아버님을 처음 만났다는 말을 들었다. 오직 남편 하나 믿고 19살 앳된 나이에 허위단신 시골로 시집을 왔건만 46살 된 부인을 두고 먼저 가시다니 아버님도 참 야속타. 비록 자식들이 아무리 잘 하고, 손주들도 잘 모신들 어디 남편만 하겠는가. 따스한 햇살을 어깨에 받으며 걷는 사이사이 '참 좋다'고 가만히 되뇌심을 보고 이리 좋아하시는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모셨으니 그저 송구할 뿐이다. 가족 여행으로 11월에는 좋아하시는 바닷가 콘도를 가고, 내년에는 외국 리조트로 모셔 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오신 보답을 드리자고 동생들과 의견을 모았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등은 극벌이라는 퇴계선생 향약을 성독하면서 반성과 조심을 했지만 풍수지탄(風樹之嘆)은 없어야 되리라. 어머님을 진천에 모셔 드리고 늦게 집에 도착하자 전화가 왔다. 통상 잘 도착했는가 하는 안부 외에 한 말씀 더 하신다. '오늘 너무 고마워. 운전석 네 자리 옆에 기름 값을 넣어뒀다' 하이고 참.
도산서원에 비가 내리니 그동안의 감개가 가만히 듣는 처마 빗물에 절로 묻어난다. 무술 추향 재유사 망기를 받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이 지났다. 2월에 중국 공항에서 이사장님과 원장님께 재유사 관련 언질을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으로 받고, 3월 초순 망보는 목욕재계하고 도산서원을 향해 사은숙배를 올린 뒤에 개봉을 했다. 예전 같으면 문중의 영예로 여길 '망보 아뢰오' 라는 외침이 동네를 들썩였겠지만 우편으로 조용히 받을망정 의미는 매한가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인사드리는 알묘는 선생 사후 한 번도 거르지 않아 양란과 6·25동란 때도 지켰다 하니 후학들의 성의가 놀랍다. 서원에 들어가는 입재 날에 주차장에서 민자건과 도포로 의관정제는 했는데 마주치는 관광객들 보기가 어색해 고개 숙이고 걸었던 기억도 새롭다. 첫날밤은 11시까지 강독유사 권 교수의 강의 하에 선생 문집과 시를 공부하는데 이따금씩 상유사이신 원장님이 참석해 해박한 역사 지식을 풀어내시니 좌중이 후련하다. 다음 날 새벽 4시 반에 기상해 유건까지 쓰고 정좌해 목소리 낭랑하게 백록동규를 성독함에 옆 사람 목청에 더 신경이 가서 우습지만 본격적으로 유생의 모습으로 접어드는 듯 흐뭇했다. 성독 후에는 상덕사에 들어가 노련한 별유사님께 봉향 절차를 배우는데 어쭙잖은 태도가 그야말로 절에 간 색시와 진배없다. 어디 그뿐이랴. 3월의 도산 밤이 어찌나 춥던지 동기 재유사 한분은 공부가 끝난 뒤 취침 전 양치질을 하는데 머리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와 주위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새 계절이 두 번 바뀌어 한 여름 땀으로 소매를 적셨던 모시 한복에 스며드는 서늘한 가을 기운은 도포가 막아주고 있다. 박약재 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이제껏 선생의 유풍을 온 몸으로 쐬며 6개월 동안을 그 향기에 빠져 살다가 아직 준비도 안 된 학생임에도 하산을 명받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본디 재유사는 서원의 행·재정을 담당하는 소임이지만 내게는 사숙에서 사사의 단계로 선생을 모시는 것이요, 물론 이루진 못했지만 이참에 선생의 글도 읽으며 더불어 시구도 많이 외우려는 의중이었다. 추향은 특별히 2박 3일의 입재로 제사 준비를 하며 둘째 날 진도문에서 의관을 갖추고 들어서는 유생들을 읍례로 맞이했다. 나도 6개월 지난 이제야 맵씨나게 옷고름과 댓님을 매는데 후일 저렇게 단정한 외양에 감회어린 표정이겠다. 선배 재유사들이 한걸음 뗄 때마다 예전 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니다. 열댓 명을 수용하는 서원 양재로는 부족해 유생 일부는 농운정사에 가서 자야 한단다. 서애 유성룡이 오래 묵었다는 농운정사에는 농암 자제와 선생의 고제 월천과 학봉선생도 주무셨던 곳이라. 여기서 다른 유생들과 침상을 맞대고 밤새도록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본다면 이것도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겠다. 다음 향사 때에는 농운정사에서 잘 기회도 만들어 봐야겠다. 자면서 선생 제자의 숨결을 느껴본다면 그도 참 좋은 일이리라.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우산을 쓰고 서원 그윽한 곳까지 걸어 보았다. 비로 질척한 섬돌에 도포 자락이 끌리지 않도록 여미고 걷는데 뜰 위에 구르는 낙엽에서 가을이 묻어난다. 매화원을 지나 서당 마루에서 유정문 넘어 시사단 쪽을 바라보았다. 낙강에 물이 가득해 반타석은 깊이 잠겨있고 낚시용 뗏목배가 여러 척 단 주변을 두둥실 지키고 있다. 마치는 마당에 반드시 보름달 어린 정경을 가슴에 새기렸더니 우중이라 이미 글렀네. 휘영청 밝은 밤에 탁영담과 주변 풍광을 볼 기회는 또 언제런가. 아쉽지만 가을 하늘 밝은 달은 청주 집 주변의 영운천에 반영된 것으로 대신할 밖에. 내 일생에 기억될 아름다운 추억에 감사하며 바야흐로 선생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앞으로 가르침은 어찌 얻을까 궁리가 된다. 기왕이면 선생이 말년에 손 가까이에 두셨던 '심경(心經)'으로 마음공부를 따라 해봐야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니 좋은 계절은 사탕수수와 같아서 오랜 뒤에야 멋진 경지를 알게 된다는 선생의 말씀을 뇌이며 해질녘 소슬해진 도산서당의 암서헌 마루에 앉았다. 산속에 거하여 은미한 효험을 바라시던 선생의 향기가 그윽한 곳이라 상기도 완락재에 거하시는 듯 여겨져 공근한 자세로 다만 귀를 열었다. 사위 적막해 풀벌레 소리만 낭자한 지금인데 마루에는 제자들이 단정히 꿇어앉아 낭랑히 책을 읽고, 선생은 방에서 성독 소리를 흐뭇한 마음으로 듣고 계시는 듯하다. 서당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며 유생들의 공부 장소인 마루는 원목의 수축과 변형에 견딜 수 있도록 격자문의 우물마루로 구성됐다. 그런데 나의 눈은 본 마루 옆에 덧붙여 지은 1칸 크기의 살평상에 쏠린다. 이 평상은 선생의 제자 한강 정구(1543~1620)가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선생 소천 후 37년경에 안동부사로 부임한 한강은 도산서당에서 공부한 인연에 감사하고자 서당을 증축하려 했다. 3품의 고관이라 마음만 먹으면 완전 개축도 가능했겠으나 살평상과 눈썹처마로 실제 4칸이나 3칸의 원래 구조를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선생이 지인 이문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당의 작은 부분 하나 하나 모두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창호지 하나 허투루 만들지 않도록 당부하셨던 말씀에서였다. 살평상은 줄마루의 형태이다. 마루 사이가 숭숭 뚫려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얼기설기 짜여 있으므로 얼핏 조악해 보인다. 나무도 그리 좋은 재질로 보이지 않고 특별히 마루에 공들인 흔적도 없다. 이유가 무언가. 하나는 평소 청빈을 강조하신 선생의 의향을 살핌이요, 또 하나는 공부해 본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다. 아무리 여름이라 할지라도 오랜 동안 마루에 앉아 공부하다 보면 땀띠도 나고 심한 경우 엉덩이가 터지고 짓물러 피까지 날 지경이 된다. 궁여지책으로 엉덩이를 살짝 들어 통풍을 시도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그예 터진 피가 바지 옷자락에 배어나오게 마련이다. 중종 때 설옹 양연의 조갑천장(爪甲穿掌)이나 다산 정약용의 과골삼천이 이 같은 공부모습의 실례인데 '다른 사람이 열을 하면 나는 천을 하리라(人十己千)'는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제자들의 엉덩이에 바람들 날은 거의 없었으리라. 생전 손에서 심경(心經)을 떼지 않을 정도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한강도 서당 마루에서 피 터지게 공부한 경험이 있기에 평상을 덧대어 만들 때 특별히 통풍에 주안을 두었던 게다. 그러므로 살평상은 선비들의 치열한 공부모습의 증빙이요, 공부는 엉덩이와 무릎으로 하는 것이며, 아이디어와 창의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 싸움이라는 요즘 교육 이론의 방증이겠다. 도산서당 살평상을 보면 숙흥야매로 발분망식하는 선비들의 공부 정경이 확연히 다가온다. 대금정악 무형문화재이셨던 김응서 선생에게 대금 연습을 줄곧 하다보면 땀띠가 터져 바지 뒷부분에 피가 배어 나온 적도 있었다는 말씀을 들었기에 그런가. 당시까지 도산서당에서도 예와 같이 공부하는 학동들이 넘쳐난 때문에 증축을 했을 테니 선생 사후에도 도산서당의 교육 기능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나 보다. 문득 요즘 읽는 사문수간(師門手簡)의 내용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제자 월천에게 보낸 편지 모음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선생의 근황과 소소한 일상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책으로 최근 해외여행에도 지니고 다녔다. '고요한 가운데 날마다 노력하여 쉬지 않으니 그 재미가 무궁합니다'는 말씀에서는 도산에 터를 잡고 단표누항의 생활임에도 공부로 맛을 더하고 계신 정경이 생생하다. 또한 '농가에 비가 내리니 기쁨이 들판에 솟구치고, 산을 마주하여 샘물 소리를 들으니 경치와 정취가 부합합니다. 뜰의 풀도 그러하여 만물이 스스로 만족해 하니, 소당(小堂)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즐거움이 또한 끝이 없습니다.'라는 글에서는 그저 감흥만 막막히 솟구친다. 여름 해가 뉘엿뉘엿 지는 도산서당 마루에서 나는 책 읽는 재미와 겸손을 배운다.
올해 여름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비즈니스 석에 앉는 호사를 누렸다. 두 살배기 손녀가 말은 기가 막히게 따라 하면서도 엄마 품을 죽어라 안 떨어지려 한다.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우려해 이코노미 석을 벗어나니 고육지책일지라도 감개는 무량하다. 어렸을 때는 띄엄띄엄 있는 완행버스도 사치였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덕산의 구말 장은 물론이고 훨씬 더 먼 진천 장도 당연히 걸어가는 줄 알았으므로 중학교 통학 때 까지도 버스는 언감생심이었다. 폭설로 길이 묻히거나 봄날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자전거 운행이 불가능할 땐 걸으면 걸었지 버스는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보였다. 어쩌다 버스비로 충분한 10원짜리 동전이 주머니에서 딸랑거려도, 책가방 메고 폭설을 헤치며 걷는 모습이 안쓰러워 버스 기사가 일부러 서서 기다려 주어도 그냥 가라고 손사래 치던 터였다. 그동안 비행기에서 내리며 피곤에 절은 눈에 보이는 비즈니스 석은 넉넉함과 안락함 자체이다. 숫하게 지나치며 선망하던 자리를 앉게 되자 목적지보다 좌석과 그에 상응할 서비스가 더 궁금하다. 여승무원이 경륜도 더 있어 보이고 손님을 훨씬 품위 있는 사람으로 대해 준다. 유례없는 폭염 때문에 반바지 차림으로 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정장을 갖추고 탈걸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사람이 아닌 자리 때문에 품위가 더하더라도 설사 가면에 불과할 손 차림새를 자리에 맞게 꾸며야 되지 않을까나. 비행기 문에서 마주치는 비즈니스 석 손님의 여유로운 표정을 복합된 심정으로 보던 기억까지 더블 클로즈업되면서 든 생각이다. 드디어 식사 시간이다. 언론에서는 비용절감 차원으로 1등석 손님이 선택하고 남은 음식을 승무원이 먹도록 한 항공사도 있다는데 얼마나 푸짐할까. 30분 전에 저녁과 음료의 선택 기회를 줘 차별된 음식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다. 스튜어디스가 하얀 천으로 덮어준 테이블 위에 특별히 고른 아이스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하니 기내식 대란 때 협력업체 사장이 목숨을 끊었던 안타까운 뉴스 기억도 저 멀리 날아간다. 안심스테이크를 익힌 정도와 비주얼이 섣부른 레스토랑 보다 더 낫다. 언론처럼 푸짐한 식사는 아닐지라도 이런 음식으로 대접받으니 완전 향응 수준이다. 이코노미 석의 괴로움은 적은 화장실과 좁은 좌석이다. 눈치껏 화장실 사용 안내 등을 살펴야 하고, 요령껏 잠을 자야 그나마 피곤함을 덜 수 있다. 아무리 가슴이 뛰고 다리가 굳건해도 장거리 비행이 여행의 크나큰 걸림돌이다. 오직 비행기 타는 괴로움 때문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먼 곳을 여행하다가 점차 동남아나 일본과 중국으로 여행지를 돌린다 하지 않던가. 깔끔한 화장실에는 머리빗과 칫솔과 가글도 있다. 헤드셋도 편하고 모니터도 큰데 좌석 단추를 조절하자 집의 침대 비슷하게 160도로 쫙 펴지니 황홀하게도 다리를 쭉 뻗고 잠잘 수 있다. 게다가 안마 기능도 있어 등판을 지긋이 주물러 주기까지 한다. 히야, 푸켓이 아니라 미국을 이렇게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다리를 편다면야 6시간 비행에도 발이 안 부어 신발을 편히 신겠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은 무슨 복일까 싶어 주변 면면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다지 볼품없는 할머니도 있고, 수염 제멋대로 자란 배 나온 남편과 두둥실 퍼진 아줌마 그리고 젊은 아가씨도 몇 있는데 그래도 형편은 넉넉한가보다. 상당고에 매년 기천만원의 장학금을 쾌척해 주시는 유 여사님의 실버타운을 감사 인사차 방문했더랬다. 구내식당에서 점심 먹으며 보니 마치 외출하러 나온 듯 잘 차려 입고 자시던데 여기 사람들은 그에 비하면 초라한 외양일지라도 말이다. 내 촌놈으로 태어나 검약하게 살고자 했으되 자식 덕에 비즈니스 석 한번 탔기로서니 그새 한껏 기고만장해 졌나보다. 퇴계 선생은 높다란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샘을 치면서도 퇴계라 작명한 계류를 대하면서도 날로 자신을 성찰하셨거늘 역시 학문과 생각이 미천한 탓이다. 이따가 공항에 도착하면 절대 목에 힘주지 말고 겸손한 모습으로 비즈니스 칸을 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