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인근 대바위로 가을소풍을 갔던 거리를 카카오 맵으로 다시 확인하니 물경 14.3㎞이다. 어린 걸음에 편도 두어 시간 족히 걸렸어도 소풍이라 그런지 힘들다거나 멀게 여기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길에 물 졸졸 흐르는 도랑도 두어 개 건너고 황금빛 들녘 사이로 송사리가 투명하게 보이는 냇물도 지나며 화창한 가을 빛에 등도 따셨다. 오는 길에 점순이랑 물고기라도 잡았다면 '소나기'와 비슷한 정경이련만 그냥 걸었다. 요즘 초등생들은 엄두도 못 낼 거리를 인솔자도 없이 친구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돌아왔던 장면이 여름철 소낙비 맞으며 소를 뜯기던 때처럼 선명하다. 당시엔 자전거도 동네에 한 대 있을 지경이라 비교적 가까운 구말 장터가 오리 길이고 더 먼 시오리 길 진천 읍내 장도 걸어서 다녀왔다. 걷기는 생활의 한 부분이라 먼 길도 어렵지 않게 여겼나보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조선 시대에는 교통수단이라야 상류층이나 부유한 사람은 말이나 당나귀를 탔을 테고 대부분 걸어서 이동했다. 그 중 여력이 있는 양반가와 사대부집안 자제들은 거경궁리와 격물치지 공부의 성과를 이루려 산행과 명승지 탐방 등으로 심성을 도야했다. 특별히 사색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 홀로 걷는 것을 유상(遊賞)이라 한다. 유상의 어의적 의미는 명소 고적 따위를 노닐며 관상(觀賞)하는 것으로 마음에 드는 풍광을 호젓이 즐기는 모습이다. 경치를 완상하면 유상이요, 고적하게 산을 오르면 유산(遊山)이다. 마치면 선비들은 견문록으로 공부 기록을 남기는데 백운동서원을 창립한 신재 주세붕의 유청량산록은 그 중 백미로 가름된다. 퇴계선생도 많은 유산시를 지었는데 오죽 산을 좋아했으면 청량산을 吾家山(우리 집 산) 이라 이를 정도였다. 선생이 막역지우 벽오 이문량과 청량산으로 향하며 지은 시에 정경 묘사와 더불어 시냇가에서 기다리는 약속임에도 그림처럼 멋진 풍광을 보고픈 열망에 먼저 산에 들어가는 설렘이 잘 나타나있다. 유상과 유산의 진면목이겠다. 烟巒簇簇水溶溶 뾰족한 산봉우리에 물은 졸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 여명 걷히니 해가 솟아 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시냇가에서 그대를 기다리나 오지 않으니 擧鞭先入畵圖中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 가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걷기에 열심이다. 전국을 일주하려는 목표로 걷거나 근처 동산이나 농로 길을 작정하고 걷는 사람들로 길이 메인다. 공부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신체 건강을 위함이고 사람을 오히려 피하는 모습 외에 걸으며 블로그나 페이스 북 등에 자취를 남기는 것은 예나 진배없다. 휴대폰을 켜고 걷고 친구랑 이야기꽃으로 수를 놓으며 걷는다. 혼자 걷노라면 몰입할 수 있어 좋다. 생각을 정리하는 대신에 지워 머리를 비우게 되니 무심지경으로 빠지게 된다. 휘적휘적 걷다보면 내 걸음이 앞길로 나가는 것인지 산길이 내게 다가오는 건지 분별이 안 간다. 이리 걷다가 초정 구녀산까지 갈 뻔했으니 마음으로야 『수호지』의 신행태보 대종이 찼다는 갑마를 갖추면 하루에 기백 리도 너끈하겠다. 딱따구리가 나무 찍어대는 소리, 나뭇잎에 듣는 빗물 소리, 산허리를 감싸는 바람소리에 걸을수록 마음이 흥겹다. 침잠하여 걷노라면 살얼음을 비집고 돋아나는 새싹의 몸짓인 듯 햇볕에 얼음 녹는 소리도 들리니 신기하다. 대화하며 걷자는 친구의 제의보다 공부한 구절을 조용히 반추함이 좋으니 유상이요, 거의 매일 오전 그림자랑 산길을 걸으니 유산이요 홀로 걷는 즐거움이다. 독서를 사람들이 유산과 흡사하다 하는데 이제 보니 유산이 독서와 비슷하다(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는 선생의 말을 재음미한다. 우둔한 나는 차라리 유산 후 독서로 두 배 효과를 입고 싶다. 두발로 땅을 딛고 걸을 수 있어 좋다. 호젓하게 자연을 느끼고 생각을 비우며 걸으니 더 좋다.
요즘은 일상이 단순해졌다. 낮에는 운동을 하고 밤에는 독서를 하니 주동야독(晝動夜讀)이려나. 통상 오전 9시 경 산으로 출발하여 11시 반경 귀가한다. 기왕에 찻물로 쓰려 보살사 약수 4.8ℓ를 지고 돌아오면 제법 운동도 된다. 이제는 걷고자 산을 오르는지 물 길으러 걷는 지도 불분명해졌다. 약수를 받으려 줄지어 있다가 그윽한 쇳소리에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사찰에는 수행자의 방일과 나태함을 경계하여 잠을 줄이고 깨어있으라는 의도로 풍경(風磬)을 처마 끝에 단다. 풍령 또는 풍탁이라고도 하며 물고기 모양 얇은 풍판이 십자모양 쇠를 움직여 종의 내벽을 치는데, 이놈은 굵고 기다란 대롱 여섯 개의 가운데 작은 나무판이 바람 따라 대롱을 건드리고 있다. 극락보전 좌우 요사채 앞에 각각 하나씩 매달려 길고 굵은 대롱 모양답게 웅혼한 울림소리이다. 이름을 찾아보니 오로벨이다. 1500년 내력의 고색창연한 사찰과 어울리지 않을 듯한 현대식 풍경임에도 잔잔하고 명랑하여 듣기 좋다. 바람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잠시 듣노라면 법당에 들어가 합장을 하는 듯 마음도 맑아지니 지척의 해우소가 풍겨내는 찐 냄새도 개의치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듣게 한다. 인도 여행 3개월의 보람인지 명상에 관심을 보여 싱잉볼(singing bowl)도 선물했던 셔니에게 보살사의 소리를 들려주자 며칠 뒤 택배를 보내왔다. 사찰에서 본 것보다 작고 가정용인 듯 하며 이름이 '히말라야의 명상'이란다. 유럽의 명인이 디자인한 클래식 윈드 차임으로 도, 레, 미, 솔, 라, 도 음계의 자유로운 울림이 아름답다. 앞 뜰 소나무 가지에 매달았더니 대문 안에 가지런히 놓였던 택배 물품을 수상히 여기던 아내가 손 탄다며 높은 곳으로 옮기잔다. 결국 2층 침실 외벽에 걸었는데 풍경은 아니로되 바람에 울리는 소리가 근사하다. 잠자리에서 눈을 감자 더욱 영롱히 와 닿는 오로벨 소리에 바라는 명상은 물러가고 대신 히말라야 트레킹을 계획했던 일이 떠오른다. 30대 때에는 산에 빠진 나머지 산악회 멤버가 되어 전국 명산 여러 곳을 무박 산행하였다. 몇 주일 산에 오르지 못하면 배낭을 꾸리거나 아스라한 연봉(連峯) 모습이 꿈에 나타날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근무할 때 동료들과 적상산을 시작으로, 영남 알프스 산행 때엔 천황산 고사리 분교 주변의 무성한 억새밭에 누워 파란 가을 하늘도 보고 설악 공룡능선의 늦가을 풍경도 누렸다. 마등령에서의 설악 조망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산을 좋아하고 제법 잘 걷는 사람들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다음 여름 방학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자 했건만 아뿔싸 계획 입안자인 필자가 고3 담임이 되는 바람에 수포가 되었다. 그리고는 도저히 갈 형편이 안 되어 속절없던 차 이제 바람결에 히말라야의 소리를 들으며 설산을 상상하고 있다. 이제는 3시간 넘는 산행이면 무릎도 싫어하니 참 무상타. 바람이 약할 때는 오로벨 소리가 제목처럼 나직한 음계라 귀에 거슬리지 않아 숙면에도 도움이 되나 바람이 심하거나 태풍 몰아치는 밤에는 옆집에 미안할 정도로 밤새 시끄럽다. 더워서 창문을 닫지도 못할 상황이라 아무리 명상음악이 좋다손 쉬지 않고 이어지는 소리를 견디다 못한 아내가 아예 떼어 바닥에 내려놓고야 잠을 잘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난 뒤에 보니 보살사는 아예 끈으로 묶어 소리를 막아버렸다. 주승도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는가 아님 수행의 강도를 약하게 하려 했는가. 대문을 열면 오로벨이 소리로 주인을 반겨준다. 휘영청 들어오는 달빛에 울림소리를 들으며 제수염족(齊手斂足)하면 더 좋다. 이 소리가 명상 효과처럼 이웃 주민의 마음에도 알파파(alpha波)를 많이 생성케 하여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하고 더 너그럽게 행복한 일상이 되도록 해 주면 야. 덕분에 온 동네가 늘 화평한 가정이면 내다 건 보람이겠다.
김수녕 양궁장 주차장에서 낙가산 7부 능선 길로 접어들면 이윽고 보살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정상 쪽으로 15미터 정도 더 가면 산기슭 위 아래로 돌탑이 여기저기 쌓여있다. 골짜기마다 이어져 다리로 연결된 골짜기 바로 앞에는 제법 묵직한 돌로 쌓은 것도 있는데 얼추 백여 기가 넘겠다. 45도 내외 비탈 경사를 감안하여 이만한 탑을 쌓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탑의 모양새가 가족을 연상케 하는데 돌 한 덩어리 한 개를 정성으로 올렸을 마음이 느껴져 그 곳을 지날 때면 숙연해 진다며 연유가 궁금하단다. 35년만의 혹한이라는 날씨에 산을 나섰는데 드디어 돌을 들어 올려 탑을 쌓고 있는 분을 만났다. 수고하신다는 말을 하고 한 시간 가량을 걷다가 되짚어 오는데 아까 그 장소에서 여전히 탑을 쌓고 있다. 옆에 벗어 놓은 초록색 다운 점퍼 위에 장갑을 놓고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맨 손으로 돌덩어리를 올리고 있다. 장갑이라도 끼라 했더니 손이 둔해져 그럴 수가 없다며 지금 돌에 손이 쩍쩍 눌어붙는단다. 언 손 잠시 녹이라며 무슨 사연인지 물어도 되겠는가 묻자 초면인데도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그는 68세로 삼영가스 인근에서 살고 있다. 연금 수급자로 그럭저럭 살만한데 부인이 8년 전 암으로 소천 하였다. 한 해를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이었으나 아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네 차례의 수술을 견디고 4년을 버텼다. 두 아들이 요즘 보기 드문 효자란다. 그동안 자신도 직장에서 성실히 근무하였고 부인에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어도 돌이킬수록 후회만 남는다. 부인 생전 병상에 누워 젊은 시절 찍었던 마이산 돌탑 사진을 보며 다시 여기를 볼 수 있을까 아쉬워하기에 회복되면 다시 가자했는데 슬픔은 시간과 함께 풍화된다지만 추억은 더욱 영롱해진다. 어느 날 낙가산을 혼자 오르는데 산기슭에 어지러이 널려진 돌덩이에 부인의 미련이 떠올랐다. 즉시 보살사 주지 스님을 뵙고 사연과 산기슭에 돌탑 쌓기를 말씀드리자 처사님의 염원을 이루시라며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돌탑을 쌓은 뒤 다음 날 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무너트린다. 1기는 영락없고 4기도 몽땅 쓰러지기에 8기를 쌓았더니 반이 남았다. 이렇게 4년 동안 108기를 쌓으려던 것이 어느 덧 250 기를 훌쩍 넘었다. 산 길 걷던 어떤 이는 김밥을 주며 격려도 하는데 젊은 여인이 탑 무너뜨리는 할머니를 목도했다고 지나며 이야기를 해 준다. 하여 겨울 새벽 5시 반부터 잠복한 끝에 이상한 신앙심인지 두건을 쓴 채 돌탑을 밀어 쓰러뜨리는 60대 할머니 두 명을 잡았다. 사연을 듣고는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겠다며 용서를 청한 뒤로 돌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70대의 어느 노인은 가슴을 찌르는 것 같다고 노기 어린 질책은 했어도 부러 쓰러트릴 힘은 없는 것 같고, 환경 보호를 앞세우며 날을 세우던 50대 남자는 혹시 몰라 조심스럽다. 모쪼록 이 탑을 쌓는 공덕으로 얼마 뒤 저 세상에서 만날 부인이 잘 있으면 하는 바람뿐이란다. 마이산 돌탑은 이갑용 처사가 불심과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쌓았으며, 전국 면면촌촌에 올려진 돌탑이 부지기수이다. 무심코 발에 차이는 돌덩이가 바람으로 포개지면 탑이 되어 간절한 발원을 형상화한다. 시린 가슴에 가슴 또 하나 포개어 안고 산기슭 찾고 크고 작은 돌멩이에 생전에 못다 한 정을 쏟아 조심조심 얹어 놓았다 기억의 편린 쌓이듯 그렇게 쌓았다 산자락에 눈물 한 방울 돌이키면 삶은 숨 가쁜 등행 산 새 한 마리 구슬피 우는데 돌멩이를 포개놓듯 그렇게 포개었다 산기슭에 그리움 한 줌 (망부석탑-望婦石塔) 차 마시며 사연을 들은 아내가 시로 맥을 짚었다. 공감은 상대의 기운을 잘 전달받아 그렇게 느끼는 것. 산기슭의 돌탑은 부인에 대한 그리움 한 덩이 후회 한 덩이로 올린 지아비의 순애보라!
작년 말 교수들이 선정한 4자성어로 1위가 아시타비(我是他非)요, 2위가 후안무치(厚顔無恥)라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말이니 많은 생각으로 정했을 터라 우리 사회 민낯에 대한 지식인들의 경종인데 대중들의 반응은 어떨까. 일단 작년 한해의 사회상이 결코 아름답지 못했던 방증이라 씁쓰레하다. 잘못을 살피고 반성을 하여 박기후인(薄己厚人)이나 관인엄기(寬仁嚴己)같은 말이 금년 연말 사자성어에 등장하면 좋으련만 과연 그리 되려나. 연말 사자성어에 안동 온혜리의 퇴계 선생 조부 노송정 이계양공이 지은 정자 기둥의 주련(柱聯)인 옥루무괴 (屋漏無愧)와 해동추노(海東鄒魯)가 연상된다. 옥루무괴는 의 '혼자 방 구석진 곳에 앉아 있어도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상재이실 상불괴우옥루(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늘 행동을 삼가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이다. 의롭지 못한 권력에 빌붙지 않으며 단종에 대한 노송정공의 우국충정을 표현한 것이라. 비슷한 의미로 선비들이 그토록 조심한 신독(愼獨)이 있다.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데서 삼간다(중용)는 내용이다. 퇴계선생 같은 분도 좌우명 중 하나로 신기독(愼其獨)을 삼을 정도로 신독은 수신의 요체요 시작이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남이 보지 않는 혼자 있을 때나 혼자 있는 곳에서도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조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고 행실이 말을 따르지 못한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근신하지 못하고 남 앞에서는 이를 숨기려 하니, 처음에는 자기를 속이고 필경 남까지 속이게 된다. 이는 악을 행하는 것은 진실하고 선을 행함은 거짓된 것과 같아 우리가 매우 두렵게 여기고 조심해야 한다. 작년에 사회를 들썩였던 조국 사건이나 장관 후보자들의 좋지 않은 과거 행적이 청문회에서 드러난 것도 못 쓸 일인데 어떤 사람은 이를 뉘우치긴 커녕 심지어 국민을 우롱하는 듯 안하무인의 행동까지 보였다. 청문회 통과와 임명장 수여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신독의 마음가짐이 없으니 부끄러움도 모른다. 공직자라면 중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철혈총리로 유명한 주룽지(朱鎔基)가 항시 외웠다는 明 곽윤례(郭允禮)의 관잠(官箴) 정도는 알아야 한다. '관리들은 나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청렴을 두려워한다. 백성들은 내 능력에 감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공정함에 감복한다. 내가 공정하면 백성들이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내가 청렴하면 관리들이 감히 속이지 못한다. 공정은 투명함을 낳고, 청렴은 위엄을 낳는다.(吏不畏吾嚴 吏畏吾廉 民不服吾能 而服吾公 公則民不敢慢 廉則吏不敢欺 公生明 廉生威)' 정치가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공정과 청렴인데 이는 옥루무괴의 마음가짐과 처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방구석에서 하늘 보기를 조심하며 행동 뿐 아니라 마음까지 살폈다면 자기에게 떳떳하고 소신이 있다. 대학 때 마이크 잡느라 공부를 게을리 했던 시방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다 하면서 이념 실현 정책을 펼치고 실책은 전 정부 탓으로 호도하는 것은 무책임함을 넘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치이다. 자기의 부끄러움을 살핀 연후에야 박기후인의 자세가 생기고 자신감이 배어 나온다. 필자도 학생 지도와 우리 아이들 양육에 열의를 앞세우다 시행착오만 저지른 것 같아 돌이켜 보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 과거 언행을 생각할수록 잘못이 많아 부끄럽다. 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도 "코로나 팬데믹을 부른 것이 이기적 생존 경제라면 이제 인류는 이타적 생명 경제로 나아가야한다"고 했다. 옥루무괴의 가짐과 태도가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년이다.
산으로 가는 한적한 길가에 식당이 있다. 빨간 간판에 나름 유명한 닭집이라 식사 시간대는 물론이고 한참 늦은 시간에도 주차장에는 차가 빼곡하고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손님으로 빈자리도 없다. 예약 없이는 언감생심 닭발 하나 잡기도 어려우니 식당에서는 문 앞 처마 밑에 대기의자를 14개 마련해서 대기표 순으로 식당에 손님을 들일 지경이었다. 지나다보면 삼삼오오 자리에 앉아 도합 십여 명 됨직한 손님들이 대기 번호가 불리 우기 바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기다리던 곳이다. 이것은 작년까지의 모습이다. 그 식당을 지나는데 얼핏 주인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가 길게 늘어서 있는 의자를 정성스럽게 닦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에 날려 온 낙엽이랑 손님이 앉지 않아 하얀 의자가 먼지로 퇴색되는 것이 안쓰럽던 차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십여 개가 넘는 의자가 손님도 없이 덩그러니 식당 입구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새가 오히려 휑했었다. 과객의 눈에도 자칫 개점휴업이나 모면할 수 있으려나 걱정될 정도인데 대기의자가 무슨 필요이랴. 그래도 의자를 치우기는커녕 정성스럽게 닦는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어 예전의 호황을 그리는 소망 때문이려니 주인의 마음이 절절하다. 소망은 모든 사람의 바람이요 희망으로 동력을 제공한다. 달성 가능하면 역동적이요, 이루기 어려우면 절망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인 사항으로 몸집을 불려 가면 원망으로 모양이 변하겠지. 이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다. 오히려 바라는 바, 너무 많아 탈인지라 각 종교에서도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한 매개자로 불교는 관세음보살이요 천주교는 성모마리아가 있다. 관음보살 중에 손이 몸 주위를 감쌀 정도로 많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과거세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천개의 손과 눈을 가지고 괴로움을 구제한다고 한다. 그 많은 대중들의 소원을 들어주려면 두 손으로는 태부족일거라 상상한 사람들의 조상(彫像)이리라. 정치가들의 속내가 궁금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겉으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부르짖을 것이고, 민초들은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클 것이고, 무주택자들은 내 집 마련에 영끌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모두들 나름대로의 바람이 있다. 요즘 시국에 화두는 당연히 건강이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우선이요 공통 소망이다. 금년 나의 소망은 건강여전(健康如前), 가정화목(家庭和睦) 그리고 어머님이 한 해를 건강히 보내시는 거였다. 한 해 동안 헬스장에 애인 숨겨두었냐는 소리 들어가며 근력운동을 했더니 티셔츠는 한 치수 늘고 바지의 허리 사이즈는 한 치수 줄어 옷을 새로 장만해야 할 판이다. 반대로 아내는 나를 따라 헉헉거리면서도 열심히 산길을 걸은 결과, 버리기 아까워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바지를 다시 꺼내 입더니 이제 못 입던 상의까지 입는다고 좋아한다. 며칠 전에는 급하게 화장실 다녀오느라 걷는 길을 달리했던 아내가 돌아와 한 마디 한다. 화장실 근처 길목에서 30여분 두리번거리며 오가는 사람을 살펴도 '번듯한 사람'이 보이지 않더란다. 고마운 아내에게서 존경할만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내년에는 심성 수양을 더해야 겠다. 금년 2언더파의 생애 베스트 스코어를 내년에도 경신할 수 있으려나. 60대가 가장 지혜로운 나이라 한 철학자도 계신데 더 잘 하고 욕심에 나이를 잊는다. 다만 쉽게 피로해지는 노안으로 독서량이 예전에 못 미친다. 욕심만큼 오랫동안 책을 볼 수 없으니 이제 조금 읽고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지식을 지혜로 갈무리하라는 의미인가. 금년은 우리 모두 고생스러운 한 해였다. 신년에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식당에 다시 가게 되어 대기의자까지 만석이 되고, 그간 못 가던 외국 여행도 다시 할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부부가 다시 하와이의 새파란 바다를 바라보며 티샷을 날릴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다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더 좋고.
거금 들인 첫 대금이 6년 장학사 시절 동안 숨을 받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악기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2005년 교감 발령을 받고서 동료들에게 내가 교육청에서 나가면 뭐하려는지 물어보라 했다. 첫째가 대금 레슨이요, 둘째가 테니스 레슨 그리고 세 번째가 한문 공부라는 각오를 내외로 다짐하려는 것이었다. 의욕적으로 대금을 다시 구입하여 한나절 줄창 대금 불려니 몸이 비비 꼬여 당최 허리가 아파 애를 먹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사부님이 '힘드시죠? 차 한 잔 하시지요' 하며 차를 따라주었다. 있는 숨 없는 숨 깡그리 짜 내느라 손등에 땀이 맺힐 정도로 고생한 때문인지 차 한 모금이 너무 달아 이게 무슨 차인지 궁금해졌다. 삶의 보람인 보이차를 이렇게 알게 되어 차 서적은 물론 다구 자사호 관련 책까지 독파하며 제대로 배우고자 하였다. 등산에 한창일 때는 각종 버너만 7개였고, 테니스에 몰두해 각종 대회에 따라 다닐 때는 라켓과 운동복으로 방안을 메웠었지. 이제 차를 익히려니 주머니에 고였던 돈이 나가고 대신 차와 각종 다구가 들어왔다. 진천 공예마을 도공도 찾아가고, 단양에 부임해서는 하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방곡 도예촌이라 종당에는 7분 도공 모두랑 차를 편히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아내의 감시를 피해 줄기차게 차와 다구를 사 들였는데 큰 딸이 다실 전경을 페이스 북에 올리며 쓴 글귀에 웃음이 나온다. 꿋꿋한 우리 아빠란다. 보이차와 무이 암차 그리고 호남 흑차 등 도합 1천500여 종의 차를 다 알아 맛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차 이력 20여 년 동안 여기저기 다회를 기웃거린 덕에 찻집에 가면 주인이 나보고 아무 차나 낼 수 없는 부담스러운 손님이란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 차를 마시다가 이따금 권하면 한두 잔은 마셔 주는데 세잔이면 더는 못 마신다고 방바닥에 벌렁 누워버린다. 웬만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아내가 한번은 찻집에 들러 진기 센 생차를 마시곤 '어머! 내가 왜 이래?'하며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도 가빠한다. 호되게 당한 뒤 프라이팬 설거지의 기름 제거로 찻잎의 위력을 알더니 가족 모임이 끝나면 우리 집에 가서 차 마시고 가라고 동생네를 잡을 정도는 되었다. 하루 중 우리 부부에게 가장 느긋하고 여유로운 때는 저녁 6시부터 8시까지이다. 라디오의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차를 마신다. 그날 있었던 이야기도 하고, 강의 때 느낀 이야기도 나누고, 대문 앞 텃밭에 몰래 쓰레기 버린 사람 흉도 보느라 오히려 시간이 짧다. 아내가 손주 보러 간 날은 조촐하게 차를 우린 뒤에 나를 위하여 차를 따라 차향을 음미하고 뜨거운 찻물이 목 넘어가는 느낌을 즐긴다. 아내가 있는 날은 주로 날이 갈수록 기특해가는 손주들 이야기를 들어주며 아내의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사이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말씀도 가끔 나오나 내가 누구인가. 40여년 눈칫밥 먹으면서 귀에 순한 소리와 역한 소리를 넘기는 법을 익혔는데 이 정도의 잔소리쯤이야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다. 잔소리 할 남편이 있어 자네는 좋겠다고 속으로 여기며 그래도 묵묵히 차를 따른다. 어여 차나 마시게나! 똥밭도 함께라면 구를만하다는데 내가 있어 아내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듯 하니 이 또한 존재의 보람 아니런가. 두 겹 창문만 닫으면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마저 안 들리는 적막강산에 바깥세상과 단절된 산속 절간이요 벽안유거(碧岸幽居)라. 라디오에서는 진행자 전기현이 나긋한 목소리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 adagio un poco mosso를 설명하고 있다. 선율은 잔잔히 흐르고 숙우에는 방금 우려낸 진기 20년 철관음 향이 거실을 휘돈다. 하루를 고단히 보낸 아내가 하품을 할 즈음 찻물은 식어가고 시간도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야 차를 따라주는 남자!
우리 집 컴퓨터는 신역이 고되다. 필자는 기고문과 강의안 작성으로, 아내는 온라인 수강생 평가와 시상을 수시 기록 정리하려 컴퓨터에 매달린다. 우리 부부의 출입이 제일 잦은 곳이라 가장 넓고 햇빛 잘 들어오는 방이 컴퓨터가 있는 서재 차지가 되었다. 나이 들어가며 변모해가는 아내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껏 기십년 동안 악기류, 도자 공예, 서예, 스포츠 등을 배우겠노라 의기양양하게 시작은 하건만 도시 작심 2개월을 못 넘기기 다반사였다. 시도하는 강좌만큼 집 안에는 악기며 도구만 즐비하니 종당에는 아이들까지 끈기 없는 엄마 때문에 쓸데없는 살림만 는다고 놀릴 정도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시인 교실을 나가면서는 생판 달라졌다. 우려하던 2개월이 훌쩍 지나 햇수까지 거듭하는데도 열정이 식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이곳저곳 시 창작 교실을 살펴, 일주일에 두 번 씩이나 시 창작공부에 전념하고 되도록 결석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시인교실에 나가려면 매주 2편 이상의 시를 써 합평도 받아야 하므로 이래저래 컴퓨터는 바쁘다. 아내가 시 공부를 하면서 그예 사단이 났다.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기에 깨워주겠거니 믿고 마음 편히 누워 있다가 아침도 거른 채 선비교육 나가게 만들고, 주방 옆 식탁에 앉아 지키고 있다가 떠 오른 시상에 몰두하다가 고구마랑 감자를 태우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옛날 허난설헌이 부엌에서 시어 찾기에 골몰하다 치마를 태웠다더니 그와 진배없는 사건이 우리 집에서도 왕왕 일어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아침나절 인근 보살사로 워킹을 한다. 출발부터 횡단보도를 건너고자 신호대기 할 때까지는 같이 간다. 그러나 산록에 들어서면 남편은 앞에서 휘적휘적 걷고 부인은 저만치 뒤에서 숙연히 따라오는 형국으로 변한다. 창의성을 높이려면 많이 걸으라고 하더니 글감 정리도 걸으면서 하면 더 낫다. 같은 산길에서 한 사람은 수필 글머리와 내용을 정리하고 또 한사람은 맞갖은 시어를 구상하느라 두 시간 여를 각자 묵언 산행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나란히 집을 나선 뒤 각자 따로 걷다가 집 가까이에 이르러서야 같이 대문을 들어서는 것이 우리의 산행 모습이다. 사색에 잠겨 걷고 있는 중에 왁자지껄 소란한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면 행복한 침묵을 깨뜨린다고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같다. 나는 찻물로 쓸 요량으로 보살사 약수도 짊어지고 오므로 서로의 목적은 더 달라졌지만 보살사 산행은 시제 작성에 중요한 빌미로 작용한다며 발걸음 가볍게 따라오더니 바지 치수가 줄어들었다네. 단양에서 근무할 때 수염 기르고 꽁지머리를 한 소위 시인묵객이 많기에 鍊丹調陽이라는 역사적 분위기 때문인가 하며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대부분 자유로운 도덕관과 독특한 사고를 갖고 있어 유별나게 여겼다. 그런데 아내가 작성한 시를 들여다보면 초기에는 작고하신 부모님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을 쓰더니, 요즘은 주로 손녀들과의 경험이 주요 소재이다. 아마 손주들이 글자를 해독할 즈음에 시집을 출간해 선물할 요량인가 본데 삶을 들여다보는 시가 쌓이는 만큼 심성도 순후해 지는 듯하다. 논어 옹야 편에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 君子(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 군자)" 본질 즉 바탕이 꾸밈을 누르면 거칠어지고, 꾸밈이 본질을 누르면 화려하게 겉치레에 흐르니, 본질과 형식이 어울린 이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했는데 아내도 시 공부로 인격 수양이 되어 문질빈빈하게 된다면야. 일단 아내의 시어가 정제되는 만큼 삶의 여유가 많아지고 더불어 남편을 대하는 아량도 넓어지니 시인에 다가가면서 성정(性情)도 깊어지는 듯 보여 오히려 좋다. 잔소리하는 특기 가진 부인들이 좋은 취미 덕에 남편을 너그러이 대하면 두루 좋겠다. 선비 공부에 빠진 필자를 보고 '선비입네'라 시를 지었음에 대하여 '시인입네'라 하는 촌평이다.
오랜만에 시간이 되어 그동안 못 갔던 산길을 걸어야겠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가려 마음먹었으니 오늘처럼 가을비 추적추적 내린다고 멈칫거릴 것도 없다. 우산과 스틱 그리고 방수모자와 바람막이로 차비하는데 어제 밤늦게까지 알타리 김치를 담그느라 잠이 부족한 아내는 머리가 무겁다며 오늘은 혼자 다녀오란다. 산록에 들어서니 그 새에 빨갛거나 노랗게 변한 잎사귀들이 산길을 가득 덮고 있어 익숙한 길인데도 오히려 생경스럽다. 산에서는 평지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르나보다. 여름철 울창하게 하늘을 가렸던 나무들이 하나 둘 씩 정들었던 이파리를 땅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 무서운 태풍을 견디려 몸을 털더니 이제 모진 겨울을 나려고 정들었던 이파리들을 몽땅 내려놓나보다. 산길은 푹신하여 밟으면 사그락 사그락 소리만 날 뿐 온통 낙엽으로 덮여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며 칠갑산과 마곡사로 대학 동기들과 했던 졸업여행이 떠오른다. 해가 뉘엿 지자 볼이 시릴 정도로 바람이 차가워졌다. 마침 한길 가에 모인 낙엽이 무릎까지 덮을 정도라 버스 올 때까지 태워 추위를 면하고자 했다. 낙엽 타는 냄새가 휘도는데 모두들 대학을 졸업한다는 아쉬움으로 처연했더랬지. 벌써 하늘로 올라간 친구도 여럿 되고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리는 비의 양은 많지 않아도 가을비를 맞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낭패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적다. 목소리 높여 일상을 이야기하는 아줌마도 휴대폰으로 음악을 자랑하는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아 산 바람소리에 젖어들 수 있으니 오히려 편하다. 이야말로 선생의 도산 소요 감회에 버금 아닌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한다.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낚시터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 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 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퇴계선생 도산기 중) 자연과 합일된 선생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선생의 흔연망식(欣然忘食-깨달음에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는다)은 공자의 발분망식(發憤忘食-학문에 열중하면 끼니를 잊는다)보다 학문에의 몰입도가 더 깊어 보인다. 평소와 달리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내려오다 왕모래를 밟아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무릎이 땅에 닿기 전에 다리가 지탱해 주어 망정이지 다리 힘이 약했더라면 하필 아주머니들 앞에서 낭패를 볼 뻔 했다. 몸이란 것이 힘이 있거나 아픈 지경의 차이가 그야말로 백짓장 차이라 아내는 낙엽에 숙연해진다지만 나는 겸손을 배운다. 낙엽이 나뭇등걸과 솟아난 바위를 덮어주어 보기엔 좋으나 아래 위험까지 가려주니 선비들이 새겼던 擇地而蹈 折旋蟻峰(택지이도 절선의봉-길을 갈 때에는 땅을 가려 밟아 개미집도 다칠까 돌아서 가라-주희 경재잠 중)을 실감하라나보다. 잎사귀가 무성할 때는 빗줄기를 막아주었는데 지금은 하늘이 훤히 보여 내리는 비가 그대로 몸에 붙는다. 여름에는 지척에 있던 사람도 잘 안 보였는데 가지만 남은 지금은 산등성을 돌아 저 멀찍이서 오는 사람도 쉽게 분별된다. 내 마음도 채우면 어두워지고 비우면 밝아지겠다.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려면 우선 소용 적어진 양복과 조끼부터 비워야겠군. 나무 터널에 들어서니 떨어진 노란 낙엽이 어두운데서 더 확연하다. 대학 시절 읽었던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무에서 떨어져서도 저리 샛노랗게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어 또 고맙다. 환히 쌓인 秋雨山葉으로 나는 짙어진 가을을 밟는다. 이제 겨울 자락에 들어섰으니 눈 내리면 목 긴 등산화에 아이젠으로, 북풍 찬바람이 몰아치면 방한모를 눌러쓰고 계속 걸으리.
참 신기하다. 여유가 있을 때는 신호등도 파란 불로 연동되는데 촉박할 때는 아무리 피하려 노력해도 신호등마다 있는 대로 다 걸린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그리 여긴다고 생각을 하려 해도 이상하다. 이럴 땐 교통을 원활히 하겠다는 신호등이 오히려 걸림돌이요 장애물일 뿐이다. 세상을 편리하게 하려다 장애로 여기는 것이 어디 신호등뿐일까 마는 교차로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상념이 치솟는다. 신호등은 여러 방향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물 흐르듯 원활하게 통과시키려 마련된 구조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선지로 가는 도중에 가급적 신호등 적은 길을 택하여 가는 것을 보면 신호등이 오히려 교통 정체의 주요인이라는 방증이다. 주민들의 편의상 횡단보도를 설치하다보니 몇 십 미터 상관에 신호등이 즐비한 도로가 부지기수라 가히 신호등 천국이 된 때문이다. 신호등의 종류와 만드는 방식 및 설치기준(제 7조제1항 관련)에 의거하여 시간당 양방향 합계 600대 이상 등 여러 조건에 부합하면 신호등을 설치한다. 신호등의 설치비와 유지비를 전국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닐 텐데 설치 관련으로는 좀 더 엄격히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앞 차의 유리에 붙인 글이 '성격 까칠한 아이가 타고 있어요' 란다. 까칠한 아이랑 운전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나 아이를 까칠하게 양육한 사람은 그 부모일 텐데 저리 성깔을 자랑하니 우습다. 그러고 보니 옆줄의 차는 '만약 위급할 경우 아이를 먼저 꺼내 달라'는 안내다. 아무리 자동차가 위험하다손 아이까지 태우고 있으면서 위험을 불러올 정도로 과격한 운전자인가. 앞 운전자가 잔 브레이크만 자주 밟아도 신경 쓰이던데 저리 위험하게 운전하는 차 뒤를 마음 편히 따라 갈 수는 없겠다. 그런데 제일 보기 싫은 것은 차창 밖으로 담배를 들고 있는 손이 삐죽 나온 모습이다. 자기 혼자 즐기려 공기오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필경 꽁초를 차도로 던져버릴 테니 사회 공익도 무시하는 지독히 몰염치한 손이다. 다행히 보기 좋은 모습도 보인다. 건너편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맨 앞 차가 나가지를 않는다. 살펴보니 거동 불편한 어르신이 30여초의 짧은 시간에 보도를 다 건너지 못하자 신호등이 빨란 불로 바뀌었음에도 경고등을 켜서 안전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따스한 분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거겠지. 몇 년 전 서울시에서 신호등 줄이기를 시도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최근 하동군에서는 회전교차로를 설치하여 신호등 없는 도시를 기획한다니 고무적이다. 또 휴대폰족의 안전상 신호등을 바닥에 설치한 곳도 있다고 한다. 차제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눈에 보이는 실적에 치중하여 공원이나 산책로 설비에 공을 들이기보다 장기적으로 지방 문화 건설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눈을 돌리는 단초가 되면 좋겠다. 신호등으로 말미암아 걷는 사람은 신호 때문에 오히려 걸음이 바빠지고 운전자는 신호 있을 때 통과하려 가속 페달을 더 밟거나 급브레이크를 밟는 등 운전을 더 조급하게 만든다. 노랑불로 바뀌기 전에 통과하는 모양은 미식축구 선수가 적진을 통과하려는 듯 필사적이고, 어렷을 적 마당에서 땅 따먹기 놀이를 했던 것처럼 집요하다. 공중에 걸린 시간 뺏기로 운전자를 자못 숨 가쁘게 만드는 것이 저 신호등이다. 사람들의 편의 우선과 교통에 대한 생각이 변화되어 신호등을 과감히 줄여나갈 방안을 지자체가 솔선 강구하면 좋겠다.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방법이 있으므로 교통 효율은 통계를 살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초 기다린 끝에 파란 불이 들어와서 드디어 출발이다. 신호등을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바뀔 거라는 확신 때문이라나. 아무튼 이제는 오롯이 내 시간이라 운전에 집중하고 다른 상념은 말아야겠다.
첼리스트 HAUSER가 'Alone, Together' 주제로 장소를 바꿔가며 연주하는 모습이 유튜브에 연이어 올라온다. 악기를 들고 텅 빈 객석을 향한 정중한 인사로 연주를 시작하는데 처연하기가 마치 이 외로운 사회를 두드리는 듯하다. 청중이 모일 수 없는 사정에서 음악가는 혼자 연주를 하지만 언택트로 관중을 대하므로 함께로 여기고 있다. 비대면 사회가 장기화되면서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이 강요되니 마음 편히 지냈던 예전이 그야말로 옛날이다. 집콕 생활이 길어지자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부부조차 배우자랑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고 호소하는 지경이다. 평소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혼자 시간 보냄을 부끄럽게 여겼던 사람들은 더 힘들 것이다. 몇 해 전 서울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려 4인용 식탁에 앉았더니 혼자냐며 1인용 식탁으로 자리를 옮기란다. 아줌마의 말 품새도 공손하지 않아 기분은 상했지만 도리 없다. 계산할 때 주인아줌마가 양해해 달라기에 다음에 다시 올 일 없으니 괜찮다 했는데 이른 저녁부터 만석을 바라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서도 올 사람 때문에 온 손님이 배려 받지 못함에 대한 속 좁은 응대였다. 요즘이야 카페는 물론 음식점에 가도 혼자 오는 사람을 위하여 1인용 자리가 많고 식당 입구에 '혼자 식사할 분은 1시 이후에 오라'는 안내문을 걸어둔 곳도 있을 만큼 혼밥족에 대한 배려가 커졌다. 편의점에 가도 전에는 듯도 보도 못한 1인용 식재료가 정말 많이 구비되어 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여가 생활도 혼자 하는 것에 관심이 기울여진다. 악기, 수영, 탁구, 테니스랑 골프 등은 혼자 즐겨도 좋고, 더불어 즐기면 기쁨이 배가된다. 그 중 악기 연주는 혼자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연습을 해야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맞춘 합주로 빛을 발한다. 골프도 그렇다. 평소 혼자 기량을 올린 뒤에 동반자들과 어울리면 그동안 홀로 연습한 효과로 즐거움이 배가된다. 악기와 마찬가지로 골프도 쉽사리 실력이 향상되지 않으므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만큼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므로 심심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이 외에도 혼자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퇴계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의 주된 경구는 군자필신기독야(君子必愼其獨也-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간다)였다. 선생의 좌우명 중 愼其獨이 있고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집은 愼獨齋로 자호를 삼았다. 수행의 시작인 자기에서 수기(修己), 수신(修身)이 치인(治人)으로 발전되는데 방구석에 있더라도 네거리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처럼 여기며 조심하려는 자세이다. 수기가 된 뒤에는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학자가 모이듯 자신을 도야한 사람들이 동기상구(同氣相求)와 동성상응(同聲相應)으로 사회를 구성한다. 자신을 발전하려 결심한 사람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감미롭게 여기고 그렇지 못하면 외로움에 힘들어 한다. 어느 스님이 깊은 산속 암자에서 수행 칩거를 시작했는데 고작 1주일도 못 되어 혹시 찾아올 지도 모를 손님을 기다리며 고무신만 닦았단다. 수행의 진도는 안 나가는데 댓돌위에 동그마니 놓인 고무신 코만 하얗게 빛나 슬펐다는 내용이었다. 수행자도 이런데 아직 중심도 못 잡았으며 혼자 있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인간 사회의 예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란 나중 사회가 더 걱정됨은 물론이다. 혼자가 모여 함께하는 사회를 구성하며 이 사회의 이상적인 형태를 유학에서는 대동 사회라 한다. 禮記에 쓰여 있는데 도가 행해져 천하가 공평해지고 신의가 존중되며 화목한 사회로서 우리나라 실학자들도 염원한 모습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요즘 세태에 필요한, 잘 키워진 혼자가 함께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요즘은 산에서 숲 향을 즐기려 마스크를 벗었다가도 사람이 오면 마스크를 써야 하니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세상이다. 이러니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인성 교육을 하려 해도 수련생이 오지를 않는다. 작년까지만 해도 두 곳 수련원이 꽉 차 인근 국학진흥원 숙박 시설까지 빌렸었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수련원에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 온다. 학생들은 연수 프로그램으로 온 때문에 퇴계선생의 일화를 아무리 재미있게 스토리화 한들 대부분 심드렁하게 참여한다. 초등학생들은 재미없다면 서도 그래도 잘 듣는데 중학생들은 무표정으로 따라다니고, 고등학생들은 듣는 학생과 안 듣는 부류가 확연히 갈라진다. 한번은 군인들이 1일차 프로그램으로 입소하였는데 이 군인들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따라 다닌다. 인솔하는 대위는 수시로 군인들에게 "얘들아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고 애원조로 사정을 하는데 초등생도 충분히 감당할 프로그램이 뭐가 힘들다는 건지. 요즘 군인이 다 이렇다면 큰일이겠다.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즐기는 마음은 더 깊이 보고 느끼게 한다. 몇 년 전부터 도산서원에서는 귀한 시간을 내어 오시는 내방객들이 보다 잘 알고 갈 수 있도록 참 알기 안내를 하고 있다. 참 알기 봉사자들은 대부분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들과 퇴계 후손들로 휴일 방문객에게 서원 관련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드린다. 40여년 교단 생활한 경력자임에도 봉사자 연찬회에서 해설 시연까지 하여 부모 손을 잡고 오는 어린아이부터 80 어르신까지 다양한 방문객의 need를 대비한다. 그런데 전국의 수많은 관광지 중에 유독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학생 때 공부에 관심이 많았거나 자식 교육에 열성을 가진 부모들이 많다. 대학 전공 교수도 일반인으로 방문하는 경우도 있어 참 알기 해설의 눈높이 맞추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번은 전교당 현판을 설명하는데 내용을 잘 아는 듯 하여 살짝 물어보니 모 대학 한문과 교수란다. 게다가 여러 차례 서원을 들르고 있어 거의 전공자 수준이라 이제껏 설명을 하다가 듣는 자세로 몸을 낮춘 적도 있었다. 방문객들은 수련생과 달리 적극적인 태도에 지적 호기심이 많아 설명하는 즐거움이 있다. 나오는 질문도 다양하여 관련 공부를 충분히 해도 항상 조심스러운데 이따금 설명을 듣는 즉시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는 사람도 있어 하나라도 틀림이 없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자녀와 함께 온 팀에게는 퇴계선생의 공부하시는 모습과 제자들의 공부 태도에 주안을 두고, 부부 모임에게는 선생의 부인 공경하심과 제자 이함형에게 부부의 금슬을 강조하신 편지 내용을 곁들인다. 방문자가 도산서원의 건축 양식에 관심을 보이면 건축가로서의 퇴계 선생을 부각하고, 전교당의 편액까지 살피면 경재잠과 숙흥야매잠 내용으로 선비의 각근면려(恪勤勉勵)를 강조한다. 마칠 때에는 부디 재장정제(齋莊整齊-몸과 마음을 엄숙히 가다듬음)하여 이 사회에서 착한 사람으로 처신하기 바란다는 인사로 배웅해 드린다. 요즘은 관람객이 희망하면 상덕사에서 알묘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마련된 유건과 도포로 의관정제하고 알묘한 뒤 색다른 경험에 뿌듯한 표정으로 나오는 분들은 도포 옷고름을 매어 주며 안내한 보람이다. 도산서원 날씨가 한 여름에는 한복 안으로 땀이 줄줄 흐르고, 겨울에는 다운 조끼를 안에 받치고 두루마기를 둘러도 온 몸이 떨리는 맹추위이다. 그렇지만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오는 분들의 성의가 고마울 뿐이라 내방객 한분 한분이 관람 후 가르침을 느끼고 흐뭇하게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 분들이 좋은 설명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3시간 운전해 간 소득이라. 참 알기 봉사자들은 서원 관련 공부로 선비의 초심을 살피고, 내방객들이 도산서원 방문 후 선생의 가르침을 실천함에 목표를 두니 이 또한 敎學相長이다.
퇴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무탈히 퇴임한 것만도 다행인데 그간 더 바쁘게 살았으니 고마운 일이다. 3년 전에 맏사위가 퇴임 기념 선물을 해드리겠단다. 골퍼들의 로망인 부쉬넬 거리측정기 신상이 좋으련만 그걸 어찌 말하누. 그래도 재차 묻는 폼이 딸애의 채근 때문인가 본데 정작 요긴한 물건이 없다. 가만히 살피니 퇴임 후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마음 공부와 시간 운영 두 가지이다. 우선 종횡으로 달리던 마음을 중용으로 견지해야겠고, 이제는 널널하게 다가올 시간을 잘 운용해야 하겠다. 시간 관리에도 필요하고 이따금 있는 강의 때 지금 가진 손목시계가 적어서 바늘이 잘 안 보이던 기억에 숫자판 큰 자동 손목시계면 좋겠다고 하였다. 결혼 선물로 받은 SEIKO 시계를 군대에서 잃어버렸던 아쉬움이 저간에 깔려 있었나. 그러면서 시계는 내가 잘 쓰다가 자네에게 돌려줄 거라는 단서를 달았다. 선물을 빌린 듯 잘 사용하다 되돌려 줄 생각이며 내가 이 시계를 과연 얼마 동안 차고 있을지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새 시계는 자동인데 숫자판도 클뿐더러 두께도 전 것보다 3배는 더 두툼하다. 그리 조심하는데도 어쩜 다른 물건에 잘 부딪히는지 마치 헬스로 상체를 키웠더니 모서리마다 어깨가 부딪치던 것 같이 어색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시계임에도 이따금씩 휴대폰을 참조해 분침을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는 거다. 이거야 나는 사위에게 시계를 빌리고, 시계는 휴대폰에게 시각을 빌린 모양새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시간을 최선으로 운용하려는 다짐과 함께 묵직한 시계를 찬다. 현직 때는 동료들이 감탄할 정도로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했는데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하는 대신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메인 시간을 잘 써야 한다. 그런데 40여 년을 자투리 시간만 확보한 버릇인지 정작 본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시계보다 더 무겁다. 퇴임하자마자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 지도위원으로 선비교육을 하며 겸하여 도산서원 재유사 望記를 받은 것은 그 중에 유의미한 일이다. 재유사는 서원의 행정을 담당하지만 요즘은 별유사가 주로 하므로 매월 초하루 보름에 서원에 入齋하여 밤늦도록 퇴계 관련 서적으로 그룹 공부를 하고 다음 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성독한 뒤에 상덕사에 들어가 알묘를 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6개월의 임기를 戊戌 秋享으로 마친 뒤에 기회 있을 때마다 입재해 선생의 향취를 느끼는 것은 학위논문 통과 후 심사위원에게 일생 선비로 처하겠다고 했던 다짐을 견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다. 예전에 선비들은 숙흥야매잠을 외우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닭이 울 때 일어나 생각을 정리하고 독서하며 허명정일(虛明靜一마음을 텅 비운 뒤에 밝고 고요히 하나로 함)로 배운 것을 체득하며 늦게 잠자리에 들어 원기를 보충하듯 나의 일상도 선비를 좇고자 노력한다. 퇴임 즈음에 뇌리를 눌렀던 마음가짐과 시간 운용에 대한 답이 퇴계 공부로 해결된 느낌이라 다행이다. 요즘은 일상이 단순해졌다. 아침에 東窓의 찬란한 햇살을 쐬며 차를 마시고, 오전은 독서와 대금 잡기, 그리고 골프 연습 등으로 운동을 하고는 보살사로 두어 시간 숲 명상 산행을 오전에 읽은 내용을 숲길에 풀고 오면 하루가 저문다. 저녁에는 음악과 함께 두어 시간 차를 마시며 오늘을 정리하는데 하루가 짧아 다시 잡으려던 국궁은 천상 70이후로 미뤄야겠다. 그때 43파운드 활을 당길 弓力은 될지 모르지만 시계와 함께 잘만 살면 집궁이 가능하렸다. 이런 생활이 퇴계 선생 시 중의 白首歸來試考槃(백수로 돌아와서 한가로이 지내리)에 부합하면 좋겠다. 아내랑 차를 마시며 우리도 85세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해 보리라 다짐을 하고는 걷기와 자전거 타기로 다리 근력을 돋우고 있다. 우리가 건강해야 자식들이 편하겠지. 소망이다.
동아시아 몬순 시스템의 영향으로 뿌리는 비를 장마라 한다. 요즘 이 장맛비와 태풍에 전국이 심한 상처를 입고 있다. 2013년 49일의 기록을 넘은 역대 신기록이 된다니 피해가 더 커지지나 않기를 바란다. 코로나에서 무난한 야외 운동 가운데 자전거는 구색 갖추기가 번거로워 아내랑 간편히 나갈 수 있는 걷기를 자주 하게 된다. 복장은 준비 없이 걷다가 비를 쫄딱 맞고는 채양 넓은 고어텍스 등산 모자에 반팔 반바지 그리고 등산용 3단 카본 스틱 한 자루와 K2 트레킹화에 보살사 약수를 담아 올 작은 배낭이다. 주변에서 걸으면 몇 백원 돈을 주거나 친구들과 걷기 경쟁을 시키는 앱도 있다고 알려주지만 모두 관심 없다. 경쟁은 전혀 의미 없으며 오직 산과 하나만 되면 그뿐이라 휴대폰을 크게 틀고 걷는 사람도 불편한 터이다. 산을 느끼려면 묵언수행도 부족한데 트로트를 틀고 오르는 사람은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내 귀를 보존한다. 휴대폰의 헬스 앱이 걷는 양을 자동 체크한다기에 살펴보니, 매일 걸음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최근에는 갤럭시 사용자 중 상위 3%대에 위치한 파워 워커란다. 이렇게 매일 보행량을 알게 된 이상 더욱 걷지 않을 수 없다. 걷기는 혼자서도 충분하며 부족함이 없다. 사람이 걸을 때 창의성이 최고에 오른다 하는데 글감 정리 또는 읽었던 내용을 반추하려면 조용한 순간이 절실하다. 여기에 더하여 호흡 연습을 하는데 처음에는 두 걸음 간에 호흡이 네댓 걸음으로 늘더니 요즘은 예닐곱 걸음으로 호흡 구간이 길어졌다. 호흡을 길게 갖고 가려면 들숨과 날숨을 가늘게 운행해야 한다. 깊은 들숨 후 잠깐 쉬면 날숨도 편안해지며 호흡도 가빠지지 않는다. 힘이 있어야 힘을 뺄 수 있고, 비워버려야 채울 여지가 있음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이제는 두 시간 정도의 걷기를 우선으로 하루 일과를 계획하게 됐고 매일 1만2천보 정도는 걸어야 후련하다. 매일 오후 비슷한 시간대에 나가면서 뒤에서 보면 50대인데 앞에서 보니 80대인 부부를 이따금 만난다. 과거 환경 운동도 하고 저술도 많다는데 하고 싶은 말씀도 많다. 조림 사업이라는 것을 보면 좋은 여건에서 잘 크는 나무는 베기 쉽다고 잘라버리고 오히려 비탈에 있는 진작 베었어야 할 나쁜 나무를 남겨 놓는다. 이는 산림 공무원이 바쁘단 핑계로 현장의 작업 상황을 확인 안한 결과란다. 등산객 때문에 땅에 드러난 나무뿌리가 발에 걸린다고 끊어서 결국 나무를 고사시키는 것은 편의주의 행정의 극치라고 혀를 찬다. 비 오는 산은 우산이 소용없다. 하늘의 장대비를 나뭇잎들이 걸러주어 이따금 물방울만 떨어질 뿐이라 모자로도 충분하고 바깥의 시원한 빗소리에 귀만 즐겁다. 건천에 새 물길이 흐르고 산길은 촉촉하며 공기는 다정하여 우중 산행이 이리 좋을 수 없다. 미국의 전설적인 골퍼로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Tom Watson은 비바람 몰아치는 날 오히려 백을 메고 골프장으로 나간 끝에 권위 있는 디 오픈에서 우승을 했다는데 비를 무릅쓰고 나서는 우중 산행으로 과연 어떤 결과를 얻을꼬. 등산 과정은 초입에서 숨 고르기가 적응되면 최근 언행을 살피는 성찰의 시간이다. 평탄한 산록 길로 접어들면 호흡 연습에 집중하며 산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물을 등에 지고 오면서 이렇게 좋은 산이 옆에 있으니 좋고,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이들이 열심히 살아주어 다행이며 특히 노모님께 효성 지극한 동생들이 대견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두루두루 고마움만 가득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을 향한다. 결국 산중 시간이 기도의 시간인 셈이다. 장마가 지나면 폭염이 온다는데 입추가 지난 지금 내 마음은 가을 산길을 기다린다. 그리고 겨울 눈길에서도 파워 워커로 계속 걷고 있으려나.
요즘 집 근처에 마음에 드는 산책길을 발견하여 득템한 듯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운천변 길은 인파가 많아 비교적 한적한 저녁 8시에 나서는데 무심천까지 왕복 5㎞로 약간 미진하다. 양궁장 길을 걸으면 건강해 지는 느낌이 든다는 아내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 나서지만 그 우레탄 길도 냄새만 없을 뿐 북적거리긴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S컨벤션 옆의 산길로 양궁장 고개로 용박골 저수지를 지나 보살사로 가는 포장도로를 걸어보았다. 한적한 길에 2시간 소요되어 그나마 걷는 길로 무난한데 오가는 중에 햇볕이 따갑다. 그러던 차 보살사에서 낙가산을 올랐던 기억을 더듬어 양궁장에서 보살사 가는 길을 살폈다. 찾았다! 초반 계단 길을 지나서 호젓한 샛길이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보살사 가는 길이 내게 다가왔다. 보살사행 산자락 길은 인적이 드물고 나무가 우거져 속세를 금방 잊게 하며 여름의 작렬하는 햇볕도 문제없다. 나뭇잎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소리에 공기는 신선하고, 간간이 노래하는 꾀꼬리 소리는 행복한 보너스이다. 가랑비 정도야 나뭇잎이 걸러서 간간이 굵은 물방울로 모자에 떨어지는데 오히려 시원한 선물이다. 장맛비를 잔뜩 머금은 오솔길 산행에서는 보너스가 또 하나! 산이 녹색댐 되어 내려주는 물이 들으면 시원하고 보면 아름답다. 걷다보면 발자국 소리만 조용조용 주변으로 울려 퍼져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된 듯 가히 무아지경이요 물아일체가 된다.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님은 걷는 중에 안구 회전 운동을 상하 좌우로 하시는데, 대금을 잡으면 숨이 줄었음을 확연히 느끼는지라 산행 중 심호흡을 연습하기로 하였다. 숨을 크고 길게 들이마시고 내 뱉으니 점차 너댓 걸음 간에 호흡이 이루어진다. 걷는 시간이 지남에 깊이 쉬는 들숨이 대장까지 도달하는 듯도 하다. 이러다 임독맥이 뚫려 태양혈이 도드라지는 것은 아닐까? 비 내린 질척한 길에는 두꺼비가 많이 나타나는데 양궁장 입구에 걸린 '두꺼비를 밟는 것은 양심을 밟는 것'이라는 현수막에 실소가 나오지만 아무튼 생명은 존중해야지. 두어 시간 가량의 산행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한 두 명뿐이라 오롯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다행이요, 보살사의 약수를 받아다 찻물로 쓰니 일석이조를 넘어선다. 걷기에 집중하다보면 생각도 어느덧 저 멀리 사라져 무념무상으로 걸음만 나아간다. 옛 선비들이 그리도 산을 바라며 사람의 욕심을 막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자(遏人欲 存天理)애썼으니 나도 산행으로 무언가를 얻는다면 좋겠다. 보살사의 가람배치는 맞배식 극락보전 좌우에 요사채가 있고 전면에 5층 석탑이 배치되어 있다. 석탑 1층 면석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졌고 탑 앞에 장방형 민무늬 배례석이 불심을 돋운다. 나무에 걸린 파이프 풍경이 그윽한 음색으로 바람에 흔들리는데 오묘하고 편안한 소리를 내는 요놈은 얼마짜리일까. 한번은 소나기 예보를 무시하고 나섰다가 짙어지는 비구름에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였건만 숲을 벗어나자마자 쏟아지는 비에 속옷까지 흠씬 젖어버렸다. 그나마 등산모자로 머리 부분은 가렸는데 사위가 사준 퇴임 기념 시계보다 손에 든 은악양선(隱惡揚善) 글씨의 부채가 젖을까 조심하니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온다.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장대비 시냇물 되어 흐르는 횡단보도에서 26초 동안 신호 대기 중인 운전자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을 판국에 소중한 것은 무엇이뇨. 산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둘이 걸어도 좋은데 아내가 다른 때처럼 구구한 핑계 없이 따라 나서주니 열 친구 안 부럽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면 두 시간여 말없이 같이 걷기만 해도 편하다. 이제는 하루 중 기다려지는 시간이 걷는 때가 되었다.
요즘 국회의원들이 시작한 팔뚝을 부딪치며 반갑다 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인사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 본디 인사는 사람 사이의 소원·단절을 막으며 우호감 증진으로 성원 간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뜻이다. 민족·시대 등 사회 문화에 따라 행동양식이 달라져 코를 비비거나 이마를 맞대는 곳도 있다. 우리나라는 예를 중시하였기에 인사법이 다양하고 어려우며 〈상례-常禮〉에 기록된 내용을 잠깐 살펴보았다. 대표적 인사인 절만 봐도 연소자·하위자가 연장자·존장자·상위자에게 경건한 태도로서 인사할 때 절을 먼저 올리며 입례(立禮)·반절 또는 읍(揖)·큰절을 한다. 입례는 옥외나 노상에서 서서 양손을 배 윗부분에 쥐고 허리를 약간 구부려 존장자께 드리는 인사다. 개화기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인사는 읍(揖)이었다. 허리를 굽혀 두 손을 맞잡아(揖手) 올린 다음 상하로 조절하는데 통상 이마 높이(天揖-상읍)· 입 높이(時揖-중읍)· 가슴 높이(土揖-하읍)의 3단계로 공경도에 따라 멎는 부위가 내려간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공수례에 대한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읍례는 매우 오래된 예절이다. 필자는 도산서원의 향사와 선생 위패에 인사드리는 알묘례 등 행사에서 지금도 시행되는 읍례를 따라 배웠다. 굳이 신체를 접촉하지 않아도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경이 충분히 묻어나는 인사가 공수요 읍례라. 고개를 약간 수그리는 반절이나 읍은 대체로 큰절을 한 후 일어서서 하는 절이다. 특히, 읍은 흔히 제사 때나 특수한 절을 할 때 올린다. 귀한 손님이나 존장자의 방문 시에 바깥에서 입례를 드리고 손님이 좌정하면 큰절을 다시 드리는 것이 올바른 인사예절이었다. 우리 아버님도 어린 나에게 그 예법으로 가르치셨다. 19세기 말 개화기 이후, 전통 인사의 까다로운 격식과 치레가 간소화되면서 새로운 인사법이 등장하였다. 남자들이 단발을 하고 모자 쓰는 유행으로 입례 부터 읍과 큰절을 할 때에 모자를 쓴 채로 절을 하는 것이 실례로 여겨졌다. 외투 등 겉옷을 입었을 때에도 실내에서 절을 할 경우에는 겉옷을 벗고 절하는 것이 바른 예절이 되고, 겉옷을 걸친 채 절하는 것도 역시 결례이다. 예전에는 두루마기 위에 갓 쓰고 도포를 갖추는 소위 의관정제 없이 절하면 큰 무례라 여겼는데 신식이라는 서구 문화가 들어오면서 오히려 탈모를 한 뒤에 절을 하니 참으로 큰 변화이다. 20세기 초 기독교 선교 이후, 서구식 인사인 악수가 처음에는 도시에서부터 유행되었으나 광복 후에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제 악수인사는 남자뿐 아니라 남녀 간, 노소간의 악수도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제는 세계 공통의 인사가 된 악수의 유래를 살펴보면 재미있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신성한 힘이 인간의 손에 전해지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통치자가 성상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중세 때에는 기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다가 적을 만나면 오른손으로 칼을 빼 들어 싸울 결의를 표했다. 상대방과 싸울 의사가 없을 때에는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오른손을 내밀어 잡았는데 이것이 악수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왼손으로 잡다가 오른 손으로 자연스레 변하였으며 만나서 반갑다는 뜻도 있지만 기실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는 의미가 더 큰 셈이었다. 검도 시합에서는 경기 전에 검을 부딪치고 격투기 시합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싸워보자는 의사로 주먹을 상대와 부딪친다. 이제 정황상 악수를 못 하니 주먹을 맞대거나 팔꿈치를 맞부딪쳐 한판 해 보겠다는 제스처가 인사란다. 정치인들이 잘못 선도한 까닭에 볼썽사나운 싸움판의 저급문화가 판치고 있다. 이는 전통 예법으로 공수례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모름지기 정치가는 시대의 변화에 있어 고례와 전거를 살펴 실수를 줄여야 하는데 그럴 줄도 모르니 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