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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0.11.15 13:49:25
  • 최종수정2020.11.15 13:49:25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오랜만에 시간이 되어 그동안 못 갔던 산길을 걸어야겠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가려 마음먹었으니 오늘처럼 가을비 추적추적 내린다고 멈칫거릴 것도 없다. 우산과 스틱 그리고 방수모자와 바람막이로 차비하는데 어제 밤늦게까지 알타리 김치를 담그느라 잠이 부족한 아내는 머리가 무겁다며 오늘은 혼자 다녀오란다.

산록에 들어서니 그 새에 빨갛거나 노랗게 변한 잎사귀들이 산길을 가득 덮고 있어 익숙한 길인데도 오히려 생경스럽다. 산에서는 평지보다 시간이 더 빨리 흐르나보다. 여름철 울창하게 하늘을 가렸던 나무들이 하나 둘 씩 정들었던 이파리를 땅으로 내려 보내고 있다. 무서운 태풍을 견디려 몸을 털더니 이제 모진 겨울을 나려고 정들었던 이파리들을 몽땅 내려놓나보다. 산길은 푹신하여 밟으면 사그락 사그락 소리만 날 뿐 온통 낙엽으로 덮여 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며 칠갑산과 마곡사로 대학 동기들과 했던 졸업여행이 떠오른다. 해가 뉘엿 지자 볼이 시릴 정도로 바람이 차가워졌다. 마침 한길 가에 모인 낙엽이 무릎까지 덮을 정도라 버스 올 때까지 태워 추위를 면하고자 했다. 낙엽 타는 냄새가 휘도는데 모두들 대학을 졸업한다는 아쉬움으로 처연했더랬지. 벌써 하늘로 올라간 친구도 여럿 되고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리는 비의 양은 많지 않아도 가을비를 맞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낭패라 그런지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적다. 목소리 높여 일상을 이야기하는 아줌마도 휴대폰으로 음악을 자랑하는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아 산 바람소리에 젖어들 수 있으니 오히려 편하다. 이야말로 선생의 도산 소요 감회에 버금 아닌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한다.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 구경도 한다.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거나 낚시터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가까이 하면서 마음대로 이리저리 노닐다가 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 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퇴계선생 도산기 중)

자연과 합일된 선생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선생의 흔연망식(欣然忘食-깨달음에 흐뭇하여 밥 먹는 것도 잊는다)은 공자의 발분망식(發憤忘食-학문에 열중하면 끼니를 잊는다)보다 학문에의 몰입도가 더 깊어 보인다.

평소와 달리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내려오다 왕모래를 밟아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다행히 무릎이 땅에 닿기 전에 다리가 지탱해 주어 망정이지 다리 힘이 약했더라면 하필 아주머니들 앞에서 낭패를 볼 뻔 했다. 몸이란 것이 힘이 있거나 아픈 지경의 차이가 그야말로 백짓장 차이라 아내는 낙엽에 숙연해진다지만 나는 겸손을 배운다. 낙엽이 나뭇등걸과 솟아난 바위를 덮어주어 보기엔 좋으나 아래 위험까지 가려주니 선비들이 새겼던 擇地而蹈 折旋蟻峰(택지이도 절선의봉-길을 갈 때에는 땅을 가려 밟아 개미집도 다칠까 돌아서 가라-주희 경재잠 중)을 실감하라나보다.

잎사귀가 무성할 때는 빗줄기를 막아주었는데 지금은 하늘이 훤히 보여 내리는 비가 그대로 몸에 붙는다. 여름에는 지척에 있던 사람도 잘 안 보였는데 가지만 남은 지금은 산등성을 돌아 저 멀찍이서 오는 사람도 쉽게 분별된다. 내 마음도 채우면 어두워지고 비우면 밝아지겠다. 비움의 철학을 실천하려면 우선 소용 적어진 양복과 조끼부터 비워야겠군.

나무 터널에 들어서니 떨어진 노란 낙엽이 어두운데서 더 확연하다. 대학 시절 읽었던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무에서 떨어져서도 저리 샛노랗게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어 또 고맙다. 환히 쌓인 秋雨山葉으로 나는 짙어진 가을을 밟는다.

이제 겨울 자락에 들어섰으니 눈 내리면 목 긴 등산화에 아이젠으로, 북풍 찬바람이 몰아치면 방한모를 눌러쓰고 계속 걸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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