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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도산선비문화수련원과의 인연으로 도산서원을 드나든지 5년 동안 서원 방문객들이 가장 풍광 좋은 곳으로 여기며, 강 건너에 있는 저 섬은 어떤 곳인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하는 곳이 시사단이다. 얼핏 인공섬 모양이 동쪽은 뱃머리요 서쪽이 배꼬리라는데 반 십 년 동안 보통 기회로는 얻기 어려운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도 봤고, 꽃피는 춘삼월과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지나쳤건만 정작 단에 올라보지 못한 미진함이 있었다. 역사는 발로 기록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 보라며 손으로 가르치기만 하는 아쉬움을 누가 알랴.

폭우로 전국이 몸살을 앓을 때 즉석 공부차 서원에 들르게 되었다. 통상 방문객은 점심 이후에 시작하여 4시 넘어 많이 옴을 고려하여 자리를 지키는데 비 때문인지 방문객이 없어 점심시간 직전 30분 정도의 자투리 시간이 생겼다. 걸음만 빨리한다면 그동안 벼르기만 하던 시사단을 다녀올 듯하여 석간대 아래의 잠수교로 내닫듯 이동했다. 이 다리는 평시엔 물에 잠겨 있다가 농번기와 갈수기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빗줄기가 워낙 거세어 혹 잠길까 염려도 되지만 시사단을 보려는 열망이 더 크다. 긴 우산으로도 장대 같은 비를 막기 어려워 무릎 아랫도리는 이미 젖고 파란 두루마기도 빗물로 짙푸르게 변해버렸지만 어디 개의할 손가.

시사단의 돌계단은 아래 물에 잠기던 부분은 하얀데 물맛을 못 본 위 측 계단은 까맣게 변색하여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빗물 골지어 흐르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 드디어 시사단 비각을 마주 대하니 감개무량하다. 비각을 살펴본 뒤에 몸을 돌려 건너편을 바라보는데 빗줄기 속에 도산서원이 천연대와 천운대를 좌우로 하고 비구름을 어깨에 이고 아스라히 다가온다. 평상시 바라보던 정반대에서 대하려니 정녕 새롭다. 일찍이 계상정거도를 그렸던 겸재 정선과 스승 성호 이익의 분부를 받잡아 도산서원도를 그렸던 표암 강세황의 정경 살핌이 이랬겠다.

1792(정조 15년)에 도산 별과를 시행한 것을 기념하여 1796(정조 20년)에 시사단을 설단 하였는데 1801(순조 1년)에 남인의 영수였던 번암 채제공 추탈(죽은 사람의 관직을 빼앗음) 관련으로 시사단이 파훼 된다. 당시 예안 현감 김직행이 아전에게 시사단비를 파괴하도록 명했는데 처음에 도끼날로 비석을 절단하고 기둥은 베어 길가에 넘어뜨렸다는 보고를 받고 매질을 했단다. 다시 그 비석을 조각조각 부수고 도끼로 비각에 썼던 기와와 돌까지 남김없이 가루로 만들어 버림으로 파괴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예안 현감이야 음직 벼슬일 텐데 권력에 기댈 욕심으로 심사가 고단하여 이리 악랄했나 보다.

원래 비석의 형체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 보는 시사단비는 녹색 역암이거니와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지어 도산에서 별과가 시행된 연유와 과거를 시행하는 경과를 밝힌 위에 다음의 詩로써 마무리하였다.

陶水洋洋 其上也壇(도수양양 기상야단-도산의 물은 넘치고 넘치게 흐르고 그 위에 단이 있도다.)

壇有階級 水有淵源(단유계급 수유연원-단에는 계급이 있고 물에는 연원이 있나니)

登壇臨水 觸類而伸(등단임수 촉류이신-단에 올라 물에 나아가서 류를 따라 뜻을 펴노니)

先正之化 聖主之恩(선정지화 성주지은-선생의 덕화요 임금님의 은총이로세)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굵은 빗물과 함께 단 옆에 서 있으려니 생각이 줄을 잇는다. 영남 사대부가 萬人이라는 山南 선비들의 자부심도, 비가 그치면 해가 뜨듯 역사에는 흥망성쇠의 부침이 있고 새벽이 지나면 밤이 오는데 의롭지 못하게 부귀를 추구하고 한때의 영화를 갈구한 욕심 때문에 뒤가 아름답지 못함까지도 비각에서 본다.

비에 씻긴 시사단을 보는 감흥도 새기며 좀 더 있고 싶은 마음을 다리가 걱정된다는 이성이 억누르매 마지못해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도 다리가 더 잠겼으니 지체했더라면 낭패를 볼 뻔했다. 수년간 벼르기만 하던 것을 얼결에 이뤘더니만 마치 어려운 숙제를 해낸 학생 같은 후련한 마음으로 물 차오르는 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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